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9화 (9/190)

9화. 선발

익숙한 야구 방송의 BGM이 흘러나오며 비스코 러너즈, 그리고 원하 챌린저스의 팀 로고가 화면에 띄워진다.

CG가 페이드 아웃되고 보이는 정장을 차려입은 세 남자.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가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프로 야구 팬 여러분, 이곳은 서울 잠실 야구장입니다. 오늘 원하 챌린저스와 비스코 러너즈의 시즌 5차전을 여러분께 중계해 드릴 캐스터 권명훈, 오늘 해설로는 이영진 해설 위원과 김수찬 해설 위원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오늘 원하 챌린저스에서는 김한울 선수를 선발 카드로 내세웠습니다. 김수찬 위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먼저 투수 출신인 김수찬 해설 위원을 향해 몸을 살짝 돌렸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김수찬 위원은 자연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등판 카드라고 생각해요. 급작스럽긴 하지만 한규진 선수가 가벼운 부상 때문에 한 차례 등판을 거르기에 대체 선발 카드가 필요한 것은 이해가 되나, 그게 꼭 김한울 투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습니다.”

“어떤 의문일까요.”

“두 가지 의문이 있는데요, 올 시즌 김한울 선수는 작년까지와는 다르게 특급 불펜 투수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에홈! 하고 헛기침을 한 번.

“잘 던지고 있다는 건 정확한 사실이지만, 오늘 선발로 쓰게 되면 며칠은 불펜에서 모습을 볼 수는 없겠죠. 이후 몇 게임에서의 불펜 운용에 대한 생각을 잘해야 할 거구요, 또 통산 선발 등판이 단 한 번도 없는 김한울 선수를 굳이 올려야 했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체력과 관련된 문제인가요?”

“그게 가장 크죠. 앞서 며칠을 쉬었다고는 하지만 통산 선발 등판이 단 한 번도 없던 선수가 갑작스레 선발로 등판하게 되면 갖는 부담감, 또 막상 등판했을 때의 다른 느낌들은 분명한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혹 김한울 선수가 선발 등판함으로써 갖는 이점이 있을까요?”

너무 부정적인 면만 나오면 편파 중계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에 구색 맞추기로 삽입된 대본 내용이었다.

“김한울 선수에 대해 아시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사실 불펜 체질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직구를 포함해 대여섯 가지 구종을 언제나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넣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요. 구속이 대단히 느린 편이기는 하다만, 또 올 시즌 완급 조절로 재미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을 조금 더 크게 가져갈 수 있다면 김한울 선수를 내세운 원하의 의미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비스코는 이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권명훈 캐스터는 이번엔 제 왼편에 있는 이영진 해설 위원을 향해 질문했다.

“김수찬 해설 위원이 말씀하신 대로, 다양한 변화구와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제구를 가지고 있는 선수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분명히 상대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리그에서 최하위권에 속하는 구속이기 때문에 차분하게 어…대응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경기는 올 시즌 들어 특급 불펜으로 성장하고 있는 김한울 투수의 선발 등판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경기인데요, 저희는 잠시 후 중계 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실입니다.”

전설적인 홈런왕 출신인 이영진 해설 위원의 이야기를 더 끌어내 보려 했던 권명훈 캐스터.

20년 차에 가까워지는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지만 그 또한 시간 관계에 의한 자르기는 어쩔 수가 없이 광고에 바통을 넘겨야만 했다.

* * *

“1회 초, 잠실 구장의 비스코 러너즈와 원하 챌린저스의 경기는 비스코 러너즈의 선공으로 시작됩니다. 1번 타자 3루수 이영호, 2번 타자 중견수 김욱, 3번 타자 유격수 방은민, 4번 타자 1루수 배덕현, 5번 타자 지명 타자 최주영, 6번 타자 우익수 한창민, 7번 타자 좌익수 윤현정, 8번 타자 2루수 김영철, 9번 타자 포수 강용의 타순입니다.”

CG가 비스코 러너즈의 배팅 오더에서 원하 챌린저스의 수비 위치로 오버랩되었다.

“이어 원하 챌린저스의 수비 위치입니다. 김한울 투수와 문규학 포수의 배터리를 비롯해 내야는 이성훈, 이명진, 전성문, 남기성, 그리고 유훈, 박진형, 강성현의 외야입니다.”

비스코 러너즈의 타순과 간단한 타격 기록, 이어서 원하 챌린저스의 수비 위치를 나타내던 CG가 사라졌다.

화면은 글러브와 공을 쥔 손으로 이런저런 사인들을 내며 연습 투구를 진행 중인 김한울을 소개했다.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를 잡는 것으로 유명한 MBS 중계 카메라답게, 마운드 바로 가까이에서 김한울이 투구하는 모습이 중계되었다.

“원하 챌린저스의 선발 투수 김한울입니다. 시즌 14경기 모두 불펜으로 등판해 13이닝 평균자책점 2.08, 2승 무패 4홀드 1세이브, 삼진과 볼넷은 각각 7개로 몸에 맞는 공 없이 WHIP 1.2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맞춰 잡는 투수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구위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기에 출루를 생각보다 많이 허용하지만 어떻게든 막아내는 유형의 투수입니다. 이번 시즌의 성적을 조금 자세히 보자면 올 시즌의 명성에 비해 삼진은 비교적 적고 볼넷은 생각보다 많아 보이지만 방어율은 낮은 게 그렇죠. 이닝 당 출루 허용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와는 또 다른 의미로 보는 재미가 있는 투수죠. 이번엔 어떻게 막아낼까, 뭘 던질까, 하는 걸 기대하며 보는 재미가 있어요.”

권명훈 캐스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투수 출신인 김수찬 해설 위원이 해석을 거들고 홈런왕 출신인 이영진 해설 위원이 개인적인 소감을 곁들였다.

그새 연습 투구가 끝나고 비스코 러너즈의 1번 타자 이영호가 타석에 들어서고 심판이 투수를 가리키며 플레이 볼을 외쳤다.

포수 문규학이 손가락으로 사인을 내자 김한울은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왼 다리를 뒤로 뺐다.

그렇게 던진 공은 몸쪽 싱커. 존을 통과했다는 판정과 함께 올라가는 구심의 손.

“초구는 몸쪽 투심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초구부터 과감하면서도 영리하게 던지네요.”

“그렇죠. 초구에 스트라이크는 잡아야겠고, 올 시즌 주무기인 직구를 처음부터 보여주자니 부담스럽고. 혹시라도 초구부터 나오게 되면 땅볼을 유도하겠다는 의도가 보여요.”

“2구째는 몸쪽 커브인데요, 살짝 빠졌다는 판정입니다.”

“올 시즌 김한울 선수의 구종 선호도를 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부분일까요?”

김수찬 해설의 뜬금없는 소리에 권명훈 캐스터는 익숙하게 받았다. 역시 대본의 힘이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는지 잠시 CG 화면으로 올 시즌 김한울이 구종 분포도가 나오고 있었다.

“딱 맞아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체 투구의 딱 절반을 직구로 던지고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싱커, 스플리터로 각각 비율을 맞춰서 나눠 던지고 있죠.”

“말씀드리자마자 직구에 헛스윙, 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가 됩니다. 김수찬 해설 위원께서 말씀하신 재미있다는 부분이라고 하는 게 단순히 투구의 비율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쵸. 아시다시피 김한울 선수의 직구는 느립니다. 정말 느려요. 근데 자신 있게 직구를 저렇게 던진다는 거죠. 보세요.”

“4구째, 높은 직구로 헛스윙을 뺏어내며 오늘 경기의 첫 번째 아웃 카운트가 나왔습니다.”

몸쪽 높은 곳으로 향하는 볼에 이영호는 어설픈 스윙으로 삼진을 헌납하고 돌아갔다.

다음 타자가 들어오는 사이 문규학은 공을 1루수에게 던졌고 화면은 투구를 마치고 마운드를 괜히 한 바퀴 도는 김한울을 비추고 있었다.

“저도 선수 시절에 공이 그렇게 빠른 선수는 아니었거든요. 물론 투수의 공이라는 게 단순 구속만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합니다만 대단한 거죠. 일단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요. 빠르니까 어떻게 해야겠다, 느리니까 만만하다, 이런 거죠. 그렇잖아요, 이영진 위원?”

“아무래도 그런 게 있는 게 사실이죠. 타자 입장에서 보면 느린 공은 아무래도 대응하기 쉬운 게 사실이니까요. 변화구가 아무리 예리하고 가짓수가 많아도 일단 느리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약점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사이, 2번 타자 김욱이 타석에 들어와 준비를 마칠 무렵에 내야수들이 돌리던 공이 투수에게 돌아왔다. 공에 이상이 없는지 슥슥 확인하고선 다시 플레이트를 밟고 포수를 보기 시작했다.

“두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올 시즌의 김한울 선수가 조금 더 대단하게 보이는데요.”

“직구 구속이 빨라진 건 분명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타자 입장에선 130km나 135km나 사실 정말 대단하고 엄청난 차이는 없습니다. 올 시즌 김한울 선수의 성적에는 단순한 직구 구속 이외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진 해설 위원 말씀에 김수찬 해설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영진 해설의 말이 김수찬 해설로 옮겨가는 사이 김욱은 초구 직구를 쳐서 3루수 플라이로 물러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음 타자가 들어올 때까지 내야수들은 다시 공을 돌리고 있었다.

“사실 올 시즌 김한울 선수의 투구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저도 이번 경기가 처음이거든요. 이전까지는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이영진 해설 위원 말씀대로 무언가가 있겠죠.”

본인의 견해를 주욱 나열하는 동안에도 김한울은 착실하게 본인의 카운트를 적립해 나가고 있었다.

“공의 회전 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익스텐션이 상당히 당겨졌을 수도 있구요. 팔 스윙이 빨라지거나 미세하게 폼이 바뀌면서 디셉션 부분에서 상당한 이득을 가져갔을 수도 있구요.”

“딱 한 가지만 집어서 이것이 이렇게 변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라고 보긴 어렵다는 거군요.”

“그렇죠. 투수라는 게… 하하, 이게 제 자랑 같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워낙에 민감하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한 포지션이니까요. 전날 밤도 아니고 3일 전에 목에 모기 물렸던 곳이 신경 쓰여 경기를 망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요.”

“하하하, 혹시 김수찬 위원 일화인가요?”

“아, 이걸 또 어떻게 아셨는지요.”

“하하하하!”

“하하하!”

선출답지 않게 달변가로 유명한 김수찬 해설답게 본인의 썰을 풀어가며 중계의 분위기는 편안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깥쪽, 지켜보며 루킹 삼진! 김한울의 통산 첫 번째 선발 등판, 그 시작은 너무나도 깔끔했습니다.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잠실입니다.”

마치, 지금 김한울의 선발 등판처럼.

* * *

3이닝째,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온 덕아웃. 볼넷으로 한 명을 내보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유격수 앞 땅볼 병살타로 깔끔하게 막아냈다.

왜지.

던지면서도 느껴진다.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느끼는 부분들이. 자신만만하게 타석에 들어왔던 예전과는 다르게,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는지 석연찮은 표정들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래 봐야 김한울이지!

하며 자신만만하게 들어오는 녀석들 또한 막상 타석에 들어와 초구를 지켜보고는 앞선 타자들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고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올 시즌 투구들의 평균 구속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오늘 경기의 구속 자체는 사실 작년까지의 등판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평균을 대충 내보자면 130km 정도.

1이닝, 기껏해 봐야 2이닝 정도 던졌던 이전과 최소 5이닝, 가능하다면 더 길게까지도 바라봐야 하는 지금은 다르다.

만약 예전의 내가 선발 등판을 했다면 120km도 간당간당한 구속들로 뻥뻥 처맞다가 내려갔겠지. 저런 ‘거’ 왜 올렸냐고 감독님 욕하는 댓글은 덤으로.

3회 말에 돌입한 현재, 점수는 0 대 0. 이번 공격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어찌어찌 막고 있는 비스코보다는 어찌어찌 공격의 활로는 개척해 나가고는 있지만 그것뿐. 활로는 만들었지만 그 길을 가지는 못하고 있다.

2아웃이었지만 주자를 1루와 3루까지 내보내 놓고 투수 땅볼로 공격 끝.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 해탈의 효과가 우리 팀 공격의 타구에까지 미치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러려니 하며 글러브를 다시 집어 들었다.

띠링―!

[선발 투수의 첫걸음]

- 선발 투수로 승리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2

마운드에 올라와 플레이트를 밟기 전 로진을 만지작거리며 홈 쪽을 노려봤다. 쪼그려 앉아 있는 규학이의 왼쪽 언저리에 보이는 퀘스트 창. 플레이트를 밟고 싱커를 던지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팡!

“굿볼, 굿볼!”

작살 내자. 비록 온전하게 모든 것이 내 덕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때.

팡!

“형 오늘 직구 좋다!”

퀘스트를 완료하고 스탯을 키우고 성장을 하자. 성장해서,

뻥!

“나이수우!”

이기자. 이긴다. 이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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