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 나는 잘했는데 팀이……
문제는 6회에 터졌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0 대 0의 상황. 이전 공격 역시 무사 1, 2루의 정말 좋은 찬스를 병살과 땅볼로 말아드셨다.
곧장 이어진 수비의 첫 상대는 상대 팀의 4번 타자 배덕현.
원래대로라면 1루수로 출장했을 테지만 햄스트링 쪽에 통증이 있지만 그 정도는 본인도 괜찮다고 하고, 구단 트레이너들 쪽에서도 괜찮다고 하여 현재 지명 타자로 출장 중이다.
뭐, 대부분의 거포들이 그러하듯 안 그래도 발이 느린데, 주력과 직결되는 햄스트링에까지 미세하다고는 하나 부상까지 입었으면 얼마나 느리겠는가.
나와 통산 상대 타율은 거의 6할에 다다르니, 원래대로라면 그냥 휴식을 줘도 괜찮겠지만 그냥 큰 거 한 방 정도 생각하고 보낸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의 배덕현은 오늘의 나에게 매 타석 번번이 얌전하게 물러났고, 이번 타석도 그럴 줄 알았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커브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 결과가 3루 쪽에 떼굴떼굴 굴러가는 땅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방심의 결과인가, 3루수 성훈이 형이 쉽게 잡아 쉽게 던진 공은 1루수 기성이가 잡기엔 살짝 짧았다.
숏 바운드.
평균 정도의 수비력을 가진 1루수만 되어도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걷어낼 수 있는 공이지만 우리의 리그 최하의 수비력인 기성이는…….
틱!
이라는 짧은 소리와 함께 놓쳤다. 그렇게 1루 주자 세이프. 그래, 그럴 수 있어.
애초에 평균 이하의 수비력인 기성이이기에 오히려 박수를 치며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모두가 격려했다.
하지만 배덕현이 그대로 대주자로 교체되며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벌써 뺀다고? 주포를?
배덕현이 빠지고 주력으로는 항상 리그 최상위권인 이정은이 들어왔다. 타석에서 상대한다면 쉽게 넘길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어느 순간보다 성가신 주자.
배덕현이 덕아웃으로 들어간 뒤 구심의 플레이 콜이 떨어졌다.
바깥쪽 커브 다시 한번. 배덕현과 비슷한 유형의 5번 타자 최주영이다. 서드를 한 발만 앞으로 당겨서 삼유 간 쪽에 땅볼로 병살을 유도할 생각인 것 같다.
사인 접수했으니 스트레치 들어가야지.
고개를 끄덕인 뒤 왼발이 오른발보다 조금 나와 있는 상태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이걸로 스트레치 끝.
그렇게 가만히 있기를 약 3초. 하지만 가만히 있는 나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겐 그 3초가 영겁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히, 1루에 있는 이정은도……!
팍!
“세잎!”
쯧.
좋은 견제였지만 주자는 빠르게 손부터 베이스를 짚으며 세이프가 선언됐다. 기성이 또한 1루 미트로 박수를 몇 번 쳐준 뒤 공을 다시 던져준다.
공을 받고 다시 사인을 확인. 이번엔 포수로부터의 견제 사인. 고개를 끄덕인 뒤 세트 포지션을 위해 손을 모으는 동작이 완료되기 직전에 1루로 한 번 더, 빠르게!
촤악―!
“세이프!”
견제는 견제다.
견제의 목적을 잊으면 안 된다. 견제는 견제에서 끝내야 한다. 거기서 무언가를 투수가 만들려고 하는 순간 꼬인다. 그럼에도 1루로 몸을 트는 순간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잡았다!
지금이 그랬다. 기성이를 슬쩍 보니 세이프가 맞다고 눈치를 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공을 받았다.
다시 사인. 바깥쪽 직구. 오케이. 이번엔 셋 모션을 완성하자마자 바로 포수에게 공을 던졌다. 바깥쪽에 걸쳤다는 판정과 함께 올라가는 구심의 손. 카운트 0-1.
공을 받고 다시 이어서 사인. 더 빠지는 직구. 셋업 피치인 것 같다. 볼이기에 쳐서 내야로 가면 좋고, 봐도 상관없고. 뛰는데 보고 있으면 규학이도 던지기 쉬우니 좋고.
이번엔 세트 포지션에 들어가고 5초 대기. 그러고 나서 왼발을 떼자 곧장 등 뒤에서 기성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뛴다악!!”
땅!
“파울!”
하지만 바깥쪽 볼로 먼 직구에 배트 끝이 걸리며 파울. 카운트는 0-2. 투수 대 타자로 보아도 내가 아주 유리하고 투수 대 주자로 봐도 내가 아주 유리하다.
발이 암만 빨라도, 작정하고 빼는 피치 아웃으로 2루에서 못 잡을 포수가 아니니까, 우리 규학이는.
오늘 최주영의 컨디션이 생각보다 좋아 보이지 않으니 클래식하게 하나, 혹은 두 개 정도 빼서 주자를 잡으려 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빼나?
라고 생각했지만 규학이는 공격적으로 승부를 요구했다.
몸쪽에서 살짝 빠지는 싱커. 우타자 몸쪽으로 붙는 공이기에 2루로 던지긴 어려울 수 있으나 규학이의 수비력이라면 충분히 스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다시 1초 대기 후 몸쪽 꽉 찬 존으로 공을 던졌다. 바로 승부하러 들어올 줄 몰랐던 최주영은 급하게 배트를 냈다.
다급함이 무색하게도, 공은 급격하게 몸쪽으로 말려들어 가며 배트 안쪽에 맞는 3루 땅볼이 나왔고, 이전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건지 3루수 성훈이 형은 멋지게 대시하여 2루로 보지도 않고 공을 던졌다.
멋진 수비!
하지만 오늘 뭐가 낀 날인 건지, 받기 편하게 온 공을 떨궈버렸다. 1루에 던질 생각만 가득한 2루수의 흔한 말로였다.
주자 올 세이프.
허허.
특성 해탈. 좋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사과하는 성문이에게 괜찮다고 웃으며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비자책일 테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규학이 머리가 좀 아파지겠는데.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6번 타자 한창민. 무난무난한 컨택에 의외의 펀치력이 있어 6번 타순에서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다.
0 대 0으로 투수전인 상황에서 무사 1, 2루. 그런 상황에서 의외로 타격 툴이 쏠쏠한 한창민은 시작부터 번트 모션을 보였다.
슬래시? 100%?
잠시 생각에 잠긴 규학이가 생각을 끝냈는지 잠시 홈플레이트 앞으로 나와 사인을 내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는 사인이 아닌 야수들, 특히 내야수들에게 전달하는 사인.
오른손으로 미트, 마스크, 가슴, 마스크, 오른쪽 어깨, 미트, 벨트, 오른쪽 어깨, 왼쪽 어깨까지 터치하고선 박수 치듯 미트를 툭 치곤 다시 자리로 들어간다.
100%.
규학이는 이 상황을 100% 번트라 판단하고 내야수들에게 번트 대비 수비를 지시한 것이다. 상황 판단이 아주 뛰어난 규학이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난 뭘 해야 되지?
번트 대기 어려운 공을 던져야지.
어떤 공이 번트 대기 어렵지?
당연히 높은 공. 그것도 몸쪽으로 붙이는 높은 공.
아싸리 바운드로 떨궈버리는 공은 오히려 더 번트 성공의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 수 있는 공이라 볼 수도 있지만 카운트를 잡아야 하고 혹시나 빠질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몸쪽 높은 공이 맞다.
나 또한 생각을 마치고 사인을 보냈다. 몸쪽 높은 쪽으로 빠르게 가는 직구. 아니… 최대한 빠른 직구. 그에 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 포지션으로 들어간 뒤 2루에 있는 이정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뻔뻔하게도,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있음에도 조금도 리드를 줄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내가 틈을 보이면 뛰겠다는 눈빛.
재밌네.
던지는 척하기 위해 홈을 보는 척, 하다가 다시 2루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또 곧장 홈을 바라보며 왼발을 짧게 들며 투구했다. 번트 때문에 숙여진 자세를 감안해도 충분히 스트라이크로 판정받을 수 있는 위치.
애초에 번트를 자주 대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어설픈 동작은 규학이 뒤로 넘어가는 파울이 되었다.
좋아.
좋은 상황으로 유도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다. 운이 좋으면 무실점으로 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상대방 벤치에서 나온 사인이 상대방 3루 주루 코치에게 전달된다. 이 사인은 다시 복잡한 사인으로 바뀌어 타석의 한창민에게 전달되었고, 타자는 다시 시작부터 번트 모션.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규학이가 다시 홈플레이트 뒤에 앉은 채로 사인을 냈다. 이번엔 미트, 왼쪽 어깨, 왼쪽 팔꿈치, 왼쪽 어깨, 마스크, 미트, 마스크, 왼쪽 어깨.
반반, 50%.
애매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페이크 모션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에 이번에는 아예 바운드가 되어버리는 포크볼. 오케이.
왼 다리가 살짝 떨어짐과 동시에 투구 동작이 시작되었고, 규학이의 예상처럼 한창민은 배트를 다시 빼곤 타격 자세로 돌아갔다.
틱!
예상보다 훅 낮게 떨어지는 공을 어설프게 건드려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공은 유격수 명진이의 다리 사이로 통과되며 외야로 흘러나갔다.
응?
“…….”
정적에 휩싸인 잠실 구장.
“…첫 선발이었는데, 고생 많았다.”
“아… 네.”
멍때리다가 투수 코치님이 마운드까지 올라와 목소리를 낼 때까지,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덕아웃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내 시선은 홈플레이트 쪽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띠링―!
[선발 투수의 첫걸음]
- 선발 투수로 승리하세요. (0/1)
- 실패한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좋지. 암, 좋지.
하지만 퀘스트에 실패했다 어쨌다 보다 게임 내 첫 점수로 인해 분위기가 저쪽으로 넘어갔다는 점. 그게 더 답답했다.
* * *
오늘만큼은 남 탓, 팀 탓, 한숨충, 뭐 그런 모든 게 가능한 날이 아닐까.
아니, 안 된다 해도 할 거야. 말리지 마.
“하아…….”
딱히 그런 게 되겠다고 의식을 한 건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무의식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이 탄식을 어쩌란 말인가.
입단 초기에는 그냥 수비만 보고 픽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을 정도로 수비‘만’ 잘하던 명진이는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라고 해야 하나, 입단 2년 차부터 주전 유격수로 중용되기 시작했고, 로또 1등 픽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는지 3년 차부터 타격이 브레이크, 현재는 공수겸장의 리그 탑 유격수로 유명하다.
근데 그런 명진이가… 아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알까기라니요. 거 너무하지 않소.
소소한 실책으로부터 시작된 대환장 파티는 꽤나 길었다. 내가 내려오고 바뀐 ‘투수들’의 성적표는 이렇다. 볼넷, 안타, 병살, 볼넷, 볼넷, 홈런, 삼진. 그렇게 6 대 0.
하지만 그 후 차근차근 점수를 쌓아나가다가 맞이한 9회 말, 7 대 7 동점에 주자는 2루와 3루. 아웃 카운트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며 타석에는 오늘 지옥과 천당 중 어디 갈까 간 보는 듯한 명진이.
상대 팀도 이런 모양새는 생각 못 했겠지. 6회에 6 대 0으로 이끌어놓고 7, 8, 9회에 각각 2, 2, 3점씩 주고 이 모양까지 올 줄이야. 나라고 알았나. 허허.
딱―!
“파울!”
애매하게 휘두른 공은 파울이 되었다. 이후 세 개의 투구가 볼 두 개와 스트라이크 하나.
투수와 타자의 대결이라면 아무래도 투수가 조금 더 유리하지만 투수와 팀의 대결이라면 그래도 아직은 팀이 훨씬 유리하다.
동점 상황에서 무사에 주자가 3루에 있다. 카운트가 어찌 되었건, 타격 상황이 어찌 되든 주자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경기는 끝난다.
굳이 안타가 아니어도 된다. 느린 내야 땅볼, 깊은 내야 땅볼, 외야수 정위치 쪽으로 날아가는 플라이.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
더구나 꼭 공이 배트에 맞아서 경기가 끝나리란 보장도 없다. 어쩌다 볼넷이 나와 만루가 채워진 후 밀어내기가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부담감에 상대 실책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그도 아니면,
팟―!
“뛰어, 뛰어!”
“홈! 호오오옴!!”
와아아아―!!
“끝나쒀어어!!”
이렇게 어설프게 떨어지는 변화구 던져서 공이 빠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애매한 표정을 짓곤 뛰쳐나가는 팀 동료들의 뒤를 따라 어기적거리며 명진이에게 다가갔다. 물론 양손에 뚜껑을 딴 음료수 병을 각 하나씩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