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1화 (11/190)

11화. MVP 투표권

지금의 나, 라고 하니 괜히 뭔가 있어 보이고 좋기는 하지만 사실 별거 없다. 통산의 기록은 제쳐두고 당장 올 시즌만 보면 그냥 뭐… 리그 B+급의 스윙맨 정도?

나름 시즌이 진행되며 가끔 얻어터지는 날도 몇 번 있어서 자책점이 조금 올랐다. 리그가 개막된 지 벌써 만 두 달째에 다다른 5월 말에 진입한 현재, 내 리그 성적은 다음과 같다.

18등판 2선발 평균 자책점 2.88 25이닝 2승 1패 6홀드 1세이브. 25이닝 동안 볼넷은 단 9개만 내줬고 삼진은 이닝당 하나가 조금 안 되는 23개를 잡았다. WHIP도 1.16.

아이쥬 안정감 있는 피칭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상 기후로 인해 연이은 강우 취소로 나름의 피로도 풀었겠다, 내일도 비가 길게 올 예정이라 쉴 것 같아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 온라인 야구 게임 풀카운트에 오랜만에 접속했다. 그리고 보이는 공지.

- 6월 6일 업데이트

“오…….”

자연스러운 클릭.

- 월간 MVP샵 선수 목록이 갱신됩니다.

- 상수 타이거즈 ― 홍석진

- 비스코 러너즈 ― 김도훈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

- 원하 챌린저스 ― 김한울

어… 나?

일단 홈페이지에서 게임 내로 얼른 접속. 하여 MVP샵에 들어가 보았다.

이 게임의 월간 MVP는 게임사 내부에서 판단하여 월별로 구단 MVP를 선정, 해당 선수를 MVP 등급의 선수로 내놓는다.

능력치는 사기 그 자체. A급, S급 투수의 경우 직구 능력치가 아아아주 최상위권일 때 50 정도라면 MVP 등급은 60 후반, 심지어는 70 초반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사기지. 사기.

다만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이런 선수를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단 100장의 랜덤한 아이템 상자가 있다 치고, MVP 투표권이라는 특별한 가상의 아이템으로 상자를 열 수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이 투표권 하나를 쓰면 아이템 상자 내부의 숫자는 100/100에서 99/100이 된다. 운이 좋으면 첫 장에 원하는 선수가 나올 수도 있고, 운이 안 좋으면 100장 만에 뽑을 수도 있는 것이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카운트는 모든 유저에게 공유된다. 즉, 내가 99장을 써서 1/100까지 만들어도 다른 한 사람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투표권 한 장만 써서 선수를 홀랑 가져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MVP 투표권의 가격이 캐시로 한 장당 2,500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10장을 사면 1장 증정! 10+1!

염병.

한마디로 11장에 2만5천 원 정도라는 소리고, 99장에 22만5천 원이라는 소리. 하지만 99장은커녕 100장을 꼴아박아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실상은 그의 몇 배가 투자된다 봐도 된다.

“에휴…….”

그리 쪼들려 산다고 보긴 어렵지만 나름 아껴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그래, 포기하자 같은 마음으로… 아니, 그래도 내 능력치만 한번 확인해 보자. 확인 정도는 괜찮잖아.

띠링―!

이름 ― 김한울

소속 구단 ― 원하 챌린저스

제구 ― 최상

포심 ― 63

슬라이더 ― 42

커브 ― 48

포크 ― 38

싱커 ― 46

“…대박.”

이게 뭐야. 이게… 나?

아무리 못 해도 보통 직구의 능력치는 60대 후반 정도는 맞춰주는데 워낙에 내 직구가 형편없는 직구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60대 중반도 되지 않는 63밖에 받지 못했다.

그래도 보라, 저 변화구들의 수치를.

다른 투수들의 경우는 말도 안 되게 높은 직구 능력치의 반대 작용인지 기타 변화구들의 능력치가 아주 형편없다.

보통 높으면 30대 후반이고 낮은 녀석들은 20대 초반까지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제일 높은 커브가 48.

게다가 국퐄, 국싱, 국투 등의 비교적 보기 쉬운 국구 조합도 아닌 싱퐄 조합! 다른 투수들의 상태를 보았다. 국퐄, 국싱, 국투의 향연. 창 오른쪽에 있는 인기도를 보았다.

압도적 1위!

선수 덱 효과에 비교적 크게 구애받지 않는 선수 카드이고, 폼 하나만큼은 멋지기로 소문이 나 있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쓰지 않는 투수다 보니 희귀성도 있고, 심지어 구질까지 싱퐄 조합이고!

헤에…….

이 정도면 지를 만하지 않나.

남아 있는 캐쉬를 확인해 보았다. 2,800원. MVP 투표권 한 장 값.

“…….”

잠시 고민. 지를까? 어차피 연봉도 올려줄 거라면서?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껴 써야지. 아마 올해 연봉 인상은 FA 미신청에 대한 용돈 개념이 더 크다.

올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난 아마 방출될 거야. 지금까지 리그 B+급 성적을 내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리그 절반도 안 돌았다. 후반에 어떻게 될 줄 알고.

“에휴…….”

한심함에 피식 한번 웃으면서 MVP 투표권 한 장을 구매했다. 한 장이라도 난 질렀다! 라는 마음으로 자기만족이라도 하는 거지.

띠링―!

- ***211 님이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선수를 영입하였습니다.

마침 뜨는 누군가가 나를 영입해 갔다는 소리. 괜히 기분이 좋구만.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내 페이지를 클릭하니 보이는 내 능력치. 옆에서 공을 던지고 있는 내 캐릭터. 그 옆에 떠 있는 100/100.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 100/100에선 뽑을 확률이 1%밖에 되지 않지만 99/100이라도 되면 확률이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오르거든.

숫자가 30, 20 정도로 떨어지면 1초 만에 슥삭 하는 기적을 볼 수가 있다. 애먼 데 돈 쓰기 싫다는 거지.

“흠…….”

100/100인 채로 3분.

어차피 안 될 거. 내가 스타트 끊어주자. 나 데려가려는 사람들 전부, 나한테 고마운 사람들이잖아.

하는 마음으로 투표 버튼을 눌렀다.

띠링―!

- ***021 님이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선수를 영입하였습니다.

“…엉?”

* * *

“안녕하심끄아아아.”

“늘어지는 인사하지 마라.”

“이예에에에에에.”

“미친 새끼가.”

간만에 좋은 캐릭터 하나 뽑았다고 재밌게 노느라 살짝 늦잠 잔 덕에 맹한 정신을 이끌고 구장으로 출근했다.

하품이 미어터지려는 걸 억지로 막다 보니 끝말이 조금 늘어진 모양이다. 투수 코치님이 괜히 한마디 하시지만 절대 지지 않고 더더욱 끝을 늘여 인사했다.

오늘은 한성 위너스와의 홈 시리즈 첫날이자 이번 주 첫 시합. 첫날부터의 컨디션을 잘 잡아놔야 일주일이 편하다. 당연하지, 이번 주 내에 등판 일이 며칠이 될 줄 내가 어떻게 알고.

그러나 그런 자체적인 불문율을 자체적으로 깨버린 뒤 하는 출근은 나름 새로운 느낌이었다. 엄청 피곤하고 졸리기는 한데, 오히려 그래서인지 집중력 자체는 상대적으로 더 잘되는 느낌.

평소보다 처맞는 우리 선발 투수의 공도, 평소처럼 허공을 가르는 우리 팀 타자들의 배트도, 평소보다 더 잘 보인다.

명확하게. 어지간하게도 못 하는 우리 팀이지만… 상대 팀은 무려 3년 연속 8위, 리그 꼴찌를 하고 계신 한성 위너스. 막하막하, 누가누가 더 못하나를 겨루듯이 정말 서로 무난하게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7회 말, 성문이의 얻어걸린 투런 포로 점수는 2 대 0이 되었다.

배트에 맞는 순간 8회 초에 올라가겠구나, 싶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글러브를 집어 들고 불펜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신영준 투수 코치님이 불펜 대기하라고 말씀을 하실 때 글러브를 들어 보이니 멋쩍게 웃으셨다.

불펜으로 가서 불펜 포수 건영이의 인사를 대충 받아주고, 팀 후배 녀석들의 인사도 대충 받아주고 글러브를 손에 꼈다. 불펜 오는 길에 어깨는 잘 풀어줬다.

다리랑 골반을 쫙쫙 늘려가며 풀어주기를 잠시, 글러브를 끼고 투수 코치님이 툭, 토스해 준 공을 받았다.

공에 이상한 부분은 없는지 간단하게 체크. 이상한 점 없는 거 확인하고, 건영이를 세워두고 슥슥 공을 던졌다.

“오.”

“왜?”

“오늘 뭔가 좀 좋은데요.”

아직 본격적인 피칭은 시작도 안 했다. 단순 캐치볼인데도 오늘따라 뭔가 감이 좋다. 살살 던졌는데도 공이 뻗는다고 해야 하나. 힘 안 들였는데도 구속이 나오는 것 같다.

“건영아, 앉아봐.”

“아, 네.”

내 공 따위, 마스크 없이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건영이는 이제 알아서 마스크도 착착 잘 쓴다. 이런 데서부터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 내가 참 슬프긴 하지만…….

퍽―!

“나이스 볼!”

건영이의 미트에 공이 박히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한울아.”

“예.”

“컨디션 좋다고 무리는 하지 말고.”

“저 힘 전혀 안 쓰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해. 그러다가 훅 가고.”

아니, 진짠데.

“저 지금 70%인데요?”

“뭔…….”

“직구!”

“직구우우!”

글러브로 사인을 내며 직구라고 알려주자 건영이가 패기롭게 복명복창하고는 미트를 댄다. 평소보다, 정말로 약한 힘으로 던졌음에도 구속이 꽤 나온다. 오, 오늘 잘하면 140km 찍는 거 아냐?

퍽―!

“굿, 굿!”

“커브!”

“카브!”

커브도 던져보고, 싱커도 점검하고, 스플리터와 슬라이더도 확인. 모두 양호. 대충 15개쯤 던졌을 무렵 우리 팀 공격이 모두 끝났고 불펜 문이 열렸다.

-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어느새 내 등장 곡까지 생겼다. 노래가 꽤 좋아 찾아보니 노래 제목은 ‘와일드카드’. 우리 팀의 새로운 와일드카드라나 뭐라나. 가사를 흥얼거리며 마운드로 향했다.

전광판을 보니 시즌 초에 찍었던 오글거리는 투구 폼 옆으로 내 배번, 이름이 지나가고 화면이 전환되고 내 사진, 그리고 옆에 간단한 내 이력이 소개된다. 올 시즌 성적 또한.

덤으로 내 등장과 함께 울리는 우리 팀 팬들의 환호 소리. 작년, 혹은 올 시즌 초반까지 내 등장으로 인한 팬들의 반응은… 아, 쟤 또 나왔네, 가 80% 정도. 고생한다, 가 10%. 그리고 나머지는 쟤는 누구?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90% 정도가 5252!! 제엔장, 믿고 있었다구우!!! 이거고 나머지는 글쎄… 아직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믿어야지 정도?

어느 쪽이건 예전과는 180도 달라진 위상임에는 분명하다.

마운드에 올라서 연습 투구를 끝내고, 규학이의 2루 롱팩 후 내야를 돌고 온 공. 공의 상태를 확인하고 플레이트를 밟으니 구심의 콜이 울린다. 타순은 조금 힘들다. 3번부터 시작하는 클린업.

초구는 가운데 낮게 걸치는 커브. 순간 불펜에서 건영이가 복명복창했던, 카브! 가 생각나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힘겹게 참아내고 그립을 고쳐 쥐었다. 평소처럼 던진 카브… 아니, 커브는 낮은 볼…….

“스트라잌!”

이 되나 싶었지만 규학이의 환상적인 프레이밍으로 카운트 하나. 타자는 불만인 듯한 표정을 구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계속 나를 보지만,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판정이 맘에 안 든다는 걸.

얘는 오늘 저기다. 내 제구와 규학이의 프레이밍이면 쉽게 잡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구장창 저기만 노렸다. 똑같은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낮게 떨어지는 커브로 파울 하나 만들어낸 뒤 아까 그곳으로 똑같이 가다 떨어지는 포크볼로 헛스윙 삼진.

바운드가 되긴 했지만 규학이는 수비형 포수답게 간단하게 바로 블로킹해서 잡고 바로 태그해서 원 아웃.

4번은 더 간단했다. 뭔 소릴 들었는지, 몸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초구 싱커에 3루 땅볼로 쉽게 나가리.

5번은 조금 애먹었지. 6구까지 가서 바깥쪽 도망가는 슬라이더에 우익수 뜬공.

쉽게 이닝을 끝내고 불펜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쉽게 공 10개로 이닝을 끝냈다.

덕분인지 투수 코치님이 오셔서 한 이닝 더 가도 괜찮냐고 여쭤보시길래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치킨 드립을 치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어디 보자…….”

새로운 이닝, 다시 연습 투구를 끝내고 전광판을 보았다. 이번 이닝은 6번 타자부터 시작이니…….

“…만나겠구만.”

개새끼.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표정을 풀고 홈을 보자 울리는 플레이 콜. 뭔가, 동기 부여로 인한 각성이라고 해야 할까. 6번 타자와 7번 타자를 각각 삼구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 8번 타자, 좌익수 이용호.

개새끼.

티를 내려고 하지는 않지만 공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직구를 하나도 안 던졌네.

변화구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게 좋다. 그날 게임 플랜이 참 많아지거든.

포크볼만 예를 들어도 포크로 카운트를 잡자, 결정구로 떨구자, 오늘 안 떨어지니까 던지지 말자, 포크는 보여만 주자 등등.

딱히 노린 건 아닌데, 2이닝 마지막 타자째에 들어서도 직구를 하나도 안 던졌다.

잠시 생각을 마치고 타자를 짧게 스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왼쪽 어깨에 보였다. 규학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랑이 사이로 사인을 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그립을 잡았다.

퍽―!

“스트라이크!”

초구는 과감한 몸쪽 높은 쪽의 직구!

이용호는 중계 화면으로도 티가 날 만큼 깜짝 놀란 듯 두 걸음 정도 물러났다. 이내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악물고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곤 중지, 약지, 소지를 규학이에게 보였다. 이전과 같은 프로세스 후 던진 공은,

퐁!

“스트라잌, 투!”

100km는 나왔나, 싶을 정도로 느리게 포물선을 그린 뒤 떨어지는 슬로우 커브.

이용호는 좀 낮지 않냐고 어필 아닌 어필을 하는 것 같지만, 거기는 아까 6번 타자한테서 확인받은 오늘 구심 고유의 존이다.

의미 없는 어필 뒤 다시 다섯 손가락 모두 펴서 어깨에 보였다. 마찬가지의 절차가 진행된 후 던져진 공은,

퍼억―!

부웅―!

“스윙! 아웃!”

“X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높은 하이패스트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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