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염병
당연히 파울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3루수, 이성훈 선배는 잠시 멍때리다가 루심의 콜이 나오고 나서야 곧장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타구는 저 멀리까지 굴러간 이후.
라인을 타고 나가 담장 근처까지 흘러간 공은 좌익수 훈이가 잡아 유격수 명진이에게, 그리고 명진이가 2루수 성문이에게.
“아니, 이게 왜 페어예요?!”
“라인 탔으니까 페어지.”
“라인을 안 탔잖아요!”
“라인 닿았어.”
뭔 동태눈깔을 가지셨나.
방금 투구에 대한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성훈이 형이 루심에게 다가가 어필을 해보았지만 루심의 의견은 변함이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들이대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성훈이 형은 우리 덕아웃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9회 말에 점수 차도 꽤 있으니 그냥 진행하기로 판단한 모양이다.
뭔 말 같지도 않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다시 마운드에 섰다. 9번 타자다. 멘탈 관리를 위해 숨을 고르고 규학이의 사인을 기다렸다.
바깥쪽 직구.
“볼!”
바깥쪽 슬라이더.
“볼.”
바깥쪽 직구 하나 더.
“볼.”
아니…….
탁!
규학이가 돌려준 공을 공중에서 글러브로 잡아채듯 받아내곤 마운드에 오르는 동안 속에서 욕이 나왔다.
편파?
아니, 정확하게는…….
“보상 판정 지리네.”
사람이 하는 스포츠니까 모든 것에 정확할 수 없다는 건 당연히 이해한다. 선수와 심판은 서로 신뢰로 묶여있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밀어주는 게 티가 날 정도로 들이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뉴스 댓글에 어떻게 대응하시려고.
4회 초 공격에만 우리 팀 공격에 유리한 오심이 연달아 2개가 나왔다. 그에 따른 보상 판정이라고 본다, 나는. 근데 그게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인 건지.
확실하게 존이 너무 좁아졌다. 공 반 개에서 한 개가 조금 안 되는 정도.
존의 구석구석을 노리고, 또 그 공간을 위한 일련의 동작들이 숨 쉬듯이 당연한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디버프다.
“볼!”
애꿎게 공 반 개 정도를 더 욱여넣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큰 부담감은 공이 멀리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에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이 주자가 걸어 나갔다.
무사 1루, 2루 상황에서 맞이한 1번 타자는 헛스윙 삼진, 그다음 2번 타자는 3루수 쪽 인필드 플라이로 잡아내며 2사 1루, 2루가 되었다. 그리고…….
- 3번 타자, 홍! 석! 진!
장내 아나운서도 지금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커다란 목소리로 3번 타자의 등장을 알렸다. 뒤이어 따라오는 홈 팬들의 화끈한 응원.
X됐네…….
2사 1루와 2루. 리그 대마왕 박해진조차 두세 수 정도 접어준다는 선구안을 가진 홍석진. 여기서 막으면 이대로 게임 끝. 못 막고 나가면 2사 만루에서 박해진과 승부.
9회 말 2아웃 만루, 1점 차에서 박해진이랑 승부하는 거요.
“나는 왜 그딴 소릴 먼저 꺼내서 플래그를 세워버리나. 이런 똥멍청이를 보았나.”
찬찬히 타석으로 들어가는 홍석진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끼는 건 상대 팀, 상대 팬들만이 아니었다. 우리 팀 또한 여기서 삐끗하면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펀치력이 그다지 좋다고 평가받는 타자는 아니기에 우익수는 조금 당기고, 다만 이상하게 밀어쳤을 때의 비거리가 의외로 나와주기에, 좌익수는 그 자리에서 살짝만 뒤로.
분위기상 깔끔하게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관적인 게 아니다. 수십 년간 야구만을 해왔던 내가 느끼는 ‘촉’이다.
규학이도 같은 생각인지 타자로부터 아웃을 뺏어내는 욕심보다는 안전하게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막말로 여기서 안타 맞고 또 박해진한테 홈런 맞아도 1점 차.
이기고는 있으니까.
“후…….”
작정하고 당겨치게 할 요량인지 몸쪽 깊이 박히는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다.
“스트라이크!”
왜 안 쳤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매한 공을 지켜보며 초구를 잡아냈다. 다음 공은 몸쪽 꽉 차는 직구. 볼이 돼도 좋다.
따악―!
제대로 정타가 된 타구는 1루수, 기성이가 어찌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파울 라인의 살짝 옆을 맞고 굴러갔다.
후…….
설마 저것까지 페어 줬으면 내 멘탈은 에멘탈 치즈처럼 살살 녹았겠지.
이어지는 사인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싱커. 원래 잘 밀어치는 타자가 작정하고 당겨치는 모습을 보곤 촉이 온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립을 고쳐 쥐었다. 마음에 드는 실밥에 손가락이 걸쳐지자 다리를 들었다.
틱!
아무리 좋게 포장해 줘도 빗맞은 타구가 천천히 기성이 앞으로 굴러갔다. 수십 년간 야구해 왔던 몸은 마치 본능과도 같이, 타구가 내 왼쪽으로 굴러가는 순간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하게 만들었다.
공을 여유롭게 잡은 기성이가 1루 베이스를 순간적으로 응시했다. 본인이 밟기엔 늦지만 걱정 마, 내가 있다구!
1루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사이드암 형식으로 내게 약하게 던져준 공. 이걸 밟고 그대로 베이스만 밟으면 이닝 그대로 끝, 시합도 그대로 끝나는데.
턱!
야구의 신은 이 게임을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가 보다.
수비가 그리 좋지 않은 기성이가 모처럼 깔끔하게 잡아, 본인 피셜 제일 어렵다는 1루 커버 투수한테 하는 송구도 모처럼 완벽하게 왔는데.
“아악!”
이걸 놓친다. 내가. 내 손으로.
E1.
에러, 포지션 넘버 1. 투수의 에러라는 기록원의 판단.
내 무덤은 내 손으로 파야 제맛이지!
다행히 타격과 동시에 백업을 왔던 2루수 성문이가 공을 얼른 잡음으로 2루 주자가 홈까지 달려드는 것은 막았다.
“형, 왜 이리 급해.”
“몰라, X벌…….”
어이가 없어 무릎을 잡고 허허실실 웃고 있자니 기성이가 다가와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맞아도 돼요. 어차피 실책이라 자책도 안 들어가네.”
“지 일 아니라고.”
- 4번 타자!! 박!! 해!! 진!!
진짜 지 일 아니니까 저딴 소릴 지껄이지.
어이가 없네 어쩌네, 멘탈 재정비를 위한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판의 속행하자는 손짓에 나는 터덜터덜 마운드로 걸어갔다. 착잡함에 1루, 2루, 3루, 모든 주자들을 한번 흘겨봤다. 거지 같은.
“허. X벌.”
욕이 절로 나온다. 어쩌다 이래 됐나.
“괜찮죠?”
“안 괜찮으면 뭐 어쩌려고.”
잠시 타이밍 끊으려고 올라온 규학이에게 괜히 퉁명스레 대했다.
“며칠 전에. 규진이 형이랑 한 얘기가 있거든.”
“네?”
“9회 말 2아웃 만루에, 1점 차인데 타자는 박해진이야. 너라면 어떡할래?”
“어…….”
“난 승부한다고 했거든. 근데 규진이 형이 개소리 말라더라. 근데 개소리 맞는 거 같다.”
“거르게요? 지금 만루인데요?”
“그래도 점수 차는 있으니까. 거를 듯이 가보자.”
“네.”
어렵게 간다라는 아주 어려운 행동을 어렵지 않게 얘기하니 어려운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초구, 바깥쪽 직구. 공 하나 정도, 아주 대놓고 빠지게.
“스트라이크!”
응?
아니, 오늘 심판들 단체로 뭐 잘못 먹었나?
이번 판정에는 그 표정 변화 없는 박해진도 조금 당황했는지 구심을 슬쩍 쳐다보곤 갸우뚱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타자의 동요가 보인다.
잡아야 돼.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을 왼쪽 어깨에 보였다.
“볼!”
걍 때려라, 싶은 마음으로 던진 느린 커브는 볼이 됐고,
“스트라잌, 투!”
바깥쪽에 걸치게 던진 슬라이더는 다행히 콜을 받아내었다.
카운트 1-2. 굳이 좋은 공 줄 필요 없다. 볼넷 줘도 되니까. 근데 뭘 던지지?
몸쪽 낮은 직구, 몸쪽 높은 직구, 떨어지는 슬라이더, 빠지는 싱커.
모두 고개를 젓고 플레이트에서 발을 뺐다. 타자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까 거기.
그 표정 변화 없는 박해진이 불편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던 거기. 바깥쪽에 직구.
새끼손가락 하나를 어깨에 대 보였다. 규학이가 다시 이리저리 사인을 내고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 만루, 어차피 도루는 없기에 왼발을 살짝 빼고 있는 힘껏 던졌다. 이 제구 실력은 어딜 가지 않는 건지, 밸런스 다 작살 나도록 우악스럽게 던졌음에도 공을 내가 제일 원하는 곳으로 향해 갔다.
바깥쪽 낮은 직구. 옆으로 공 하나 정도 빠지는 볼로.
지금 이 카운트에, 아까 구심이 잡아줬던 위치라면 어쩔 수 없이 배트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볼이라는 구역은 애초에 타자가 칠 수 없으니까 볼 판정을 받는다. 근데 잡아줬으니까 또 던졌고, 그렇게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으니,
따아아악―!
타자는 박해진이었다.
와아아아아!!
“…허미.”
그나마, 이런 상황 속에서도 들어오는 4점 중에 내 자책점은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내가 참 나답다고 생각해야 되나.
아니면 바깥쪽 ‘볼’이 명백한데 그걸 어거지로 당겨서 폴대를 맞추는 저 힘에 질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폴대를 맞고 힘없이 떨어지는 공을 보고 있자니, 기어코 월 20호 홈런을 때려내고 3루 베이스를 향하는 박해진이 시야에 오버랩된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너무나도 잘나고 대단한 상대라서 질투심조차도 들지 않는 사람. 시기, 질투 그런 걸 넘어서 멋있다는 경외심마저 들게 하는 사람.
언제나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3루 베이스를 밟다가 뭐에 꽂혔는지, 살짝 고개를 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약간의 정신이 차려졌다.
“…….”
“…….”
이내 녀석은 평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뛰기 시작했고, 나 또한 마운드로 돌아갔다. 괜찮다는 듯, 구심을 향해 글러브를 보였다.
됐으니까 빨리 공이나 내놔, 라는 눈빛으로.
관중석은 아주 미쳐 날뛰고 있다. 안 그래도 잠실 라이벌로 후끈후끈한 와중에 우리가 위닝 시리즈를 못 가져간 게 연 단위다.
이게 하필 자기네들 직관 왔을 때 깨진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각에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나 재차 확인해 본다. 만족스러운 실밥을 찾아내곤 심호흡 한 번. 플레이트를 밟고 규학이의 사인을 확인.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스트라이크!”
아직 시합 끝난 거 아니고, 심지어 아직 동점도 아니야.
“스트라이크!”
그리고 원하가 상수한테 위닝이 어쩌고, 그것 또한 내 알 바가 아니야.
“스트라잌, 아우웃!!”
와아아…….
“후우.”
팀도 팀인데, 나도 나니까.
짝짝짝짝―!
살짝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그래도 우리를 응원하러 와 준 응원단에 인사를 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하, 하하하…….”
“형?”
“아핫, 아하하하, 하하하핫하!!”
드디어 미쳤나.
네. 그런 것 같죠?
뒤에서 규진이 형과 규학이의 대화를 애써 무시하고 글러브를 장비 가방에 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딱히 웃음기가 가시지는 않았다.
미친 게 맞는 거 같은데…….
박해진한테 처맞은 게 몇 갠데, 이제 슬슬 맛이 갈 때도 됐지.
감독님한테 말씀드릴까요?
냅둬.
그 둘의 대화를 무시하곤 상대 덕아웃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표정 변화가 딱히 없는 박해진은 찬찬히 장비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띠링―
[때로는 맞는 것도 공부다!]
등판 중 피홈런 1회 허용 (1/1)
보상 ― 포심+3
제구 ― 최상
구위 ― 중+???=최상
체력 ― 하
포심 ― 43(+3)+17=66
커브 ― 39+9=48
슬라 ― 26+16=42
스플 ― 31+7=36
체인 ― 36
싱커 ― 34+12=46
특성
해탈 ― 어떤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특급(임시) ―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 등판 시 모든 능력치 +2/구원으로 등판 시 투구 수 20구까지 포심+3, 변화구 +1
이겼어, 이겼으면 됐다고. 야구는 팀 게임이야. 내가 박해진이 있는 상수를 무자책으로 막았다고 하하.
약 3분 전에 원하가 어쩌고 상수가 어쩌고 했던 게 문득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며 지워내곤 웃음기가 여전하게 남아 있는 표정으로 규진의 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형,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게.”
“김치찌개 콜?”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