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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6화 (16/190)

16화. 그냥, 우리끼리

라떼를 한 잔 끓여보자면, 삼진은 정신력이 부족한 거라느니, 곤조가 부족한 거라느니.

그딴 세뇌 교육으로 인해 삼진 먹고 참지 못한 분함을 애먼 곳에 튀겨 구설수를 만든 애들이 몇 명이던가.

하지만 현대 야구에 있어서 삼진은 더 이상 타자들이 부담을 가지는 목록이 아니었다.

세금. 딱 그 정도.

합법적인 경로로 안 내면 좋긴 좋은데, 전혀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딱 그런 인식.

덕분에 투수들 또한 비교적 편해졌다. 옛날엔 삼진 안 먹으려고 별 지랄을 다 했지만, 딱히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 요즘 풍토 덕을 많이 본다.

투수 입장에선 인플레이를 만들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아웃 하나를 만드는 통로가 넓어진 셈이니까.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올스타전이라는, 야구팬이라면 모두가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무대 안에서 1이닝 9구 3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약 35년 정도가 된 KBO 역사 속에서도 약 6명 정도만 기록했다는, 사이클링 히트나 노히트 노런 같은 기록보다도 희귀한 기록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됐다. 이 내가.

하지만 그 환호는 생각보다 짧았다. 4연타석 홈런을 친 박해진 때문에.

1회, 4회, 7회에 솔로 홈런 세 방도 모자랐는지 9회 무사 만루 타석에선 아예 구장 자체를 넘겨버리는 장외 홈런을 쳐버렸다. 4타석 4타수 4안타 4홈런 7타점.

두말할 것 없이 올스타전 MVP.

MVP 판넬을 머리 위로 들고 사진이 찍히는 녀석의 얼굴은 중형 세단을 한 대 꽁으로 받는 얼굴치곤 꽤나 무덤덤했다.

하긴 버는 돈이 얼만데. 꼬우면 그 차 나 좀 주지. 나 아직도 뚜벅이인데.

“어? 김한울 선수죠?”

“네? 아, 네.”

“와, 올스타전 잘 봤어요!”

뭐… 덕분에, 이렇게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덕분에 이런 상황도 생긴다.

구장으로 출근하는 전철 안, 옆자리에 앉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가방과 노트를 꺼낸다. 사인해 달라는 거겠지.

“그…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장우택이요!”

“넵.”

장…우…택…….

“여기요.”

“와, 감사합니다. 와…….”

“원하 팬이세요?”

“네. 한 10년째예요.”

오메…….

“저 입단했던 것도 보셨겠네요.”

“그쵸. 근데 입단하시고 계속…….”

“그만. 거기까지.”

심각한 분위기로 입을 닫으라는 표현을 하자 팬분은 꺄르륵 하며 웃었다.

이후 뭐 이번 시즌도 잘 부탁한다, 이대로만 해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잠실 야구장역에서 내렸다.

긁적긁적. 훌쩍.

더운 8월. 에어컨 덕에 시원했던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삐질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흐를 리가 없는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이런 기분인가. 팬이라는 게. 다시 구장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왔냐.”

“예이.”

구장에 출근했을 때 가장 먼저 날 반겨준 건 고등학교 때부터 1년 선배인 한규진 선배였다. 같이 알아 온 지가 어언 15년 가까이. 실제로 구단 내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기도 하고.

나이는 올해로 30살. 12시에 가까운 팔 각도를 가진 140km대 후반의 묵직한 공과 낙차 큰 커브, 좌타자들에게 악몽인 체인지업.

구위는 아주 좋지만 160cm 중반의 작은 키가 아주 큰 핸디캡이다. 때문에 입단 초 몇 년을 2군에서 묵혀있다가 3년 차인가 4년 차부터 빛을 본 케이스.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 내 자리에 가방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구장으로 나섰다. 조금 전에 인사를 나눴던 규진이 형은 오늘 선발이라 그런지 포수인 규학이와 합을 맞추러 간 모양.

사람은 많은데 어딘가 휑해 보이는 구장을 멍청히 보고 있자니 기분이 숭하다.

“뭐 하고 계세요?”

“그냥 뭐… 멍때리죠.”

“담배나 한 대 피러 가실?”

“음…….”

나쁘지 않지.

어느새 나타났는지, 구단 프론트 직원 영진 씨가 나타났다. 아직 집합 시간까지는 꽤 남아 있었기에 부담 없이 흡연실로 향했다.

아, 저 담배 가방에 있는데.

저 있어요. 괜찮.

맨날 얻어 피는 거 같은데…….

제가 더 많이 얻어 피웠을걸요.

하긴…….

나중에 한 보루 사다 드릴게요.

콜.

칙― 치익―

“올스타전 잘 봤어요. 9구 3삼진이라니, 쩌는데요?”

“뽀록이죠. 솔직히.”

“겸손하시긴.”

“겸손이 아니라 지 주제 제대로 아는 놈이라고 해주십쇼.”

“하하핫.”

아무도 없어 텅 비어 있던 흡연실이 담배 연기 두 사람분으로 인해 자욱해지기 시작한다.

“호크스의 최우석 선수랑은 친하시죠?”

“그쵸.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팀이었으니까.”

“호오.”

“모르는 척은.”

“화제인 건 아시죠? 그 장면.”

“직구 그거요?”

“네.”

올스타전 MVP가 박해진이었다 뿐이었지, 올스타전 내부에선 내 활약도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우석이와의 마지막 타석. 직구 선언 후 3구 삼진을 잡아내는 그 장면은 올스타전 끝나고도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언급되고 있을 정도니까.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제발 말씀의 앞이랑 뒤를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직구 구위가 엄청나게 좋아졌는데, 코치로 꼭 뺏기면 안 될 것 같더라구요.”

“네?”

“앞이랑 뒤를 말씀해 달라 하셔서요.”

“앞이랑 뒤만 말고 중간도 같이 붙여서 말씀해 주시죠.”

“앞이랑 뒤에다 중간도 붙여서요?”

“네.”

“직구 구위가 엄청나게 좋아졌는데, 코치로 꼭 뺏기면 안 될 것 같더라구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앞이랑 뒤에 중간을 붙여주신 건 감사한데, 순서라는 것도 있지 않나요?”

“직구 구위가 엄청나게 좋아졌는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이 뭔.

“노력이요.”

“앞에 티키타카 분량 생각하면 너무 심플한데요.”

“근데 뭐 어떡해요. 그것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데.”

“뭐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다든가, 그런 건요?”

“음…….”

알아들으려나.

“릴리스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어보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부가적으로 다른 것도 좋아진 것 같더라구요.”

“오… 어쩐지. 익스텐션의 전진으로 전반적인 파워가 늘어났나 보네요. 거기다가 투구 거리가 짧아져서 터널 효과도 증대됐을 거구요.”

뭐야. 뭔데 전문가야. 무섭게 왜 이래.

“글쎄요, 익스텐션 전진으로 파워 증가는 있겠는데, 익스텐션만 가지고 터널 효과 보긴 힘들지 않나요.”

“그런 전문적인 용어를 쓰지 않아도… 올해의 한울 씨는 좀 그게 있어요.”

“그거요?”

“뭐랄까… 포스라고 해야 되나, 아우라라고 해야 되나.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건 없었어요. 진짜 의무감에 돈 벌러 나가는 모양새였는데, 올해는 투수다운 기분이 나요.”

“그전에도 투수였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뭔 말을.

“올 시즌 목표가 뭐예요?”

치익―

필터에 닿기 전의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물었다.

“…음. 그냥 지금 유지하는 거요.”

“오. 그렇기만 해도 대박이죠.”

“영진 씨는요?”

“전… 한국 시리즈 우승 좀 해봤으면 좋겠네요.”

“그건 어려울 텐데…….”

“왜요? 한울 씨가 이렇게 해주면 못 할 거 없죠.”

“상수가 있잖아요.”

“에이.”

끼익―

열린 흡연실 문으로 남자 둘이 나왔다. 담배 냄새 폴폴 풍기며.

“전 가능할 거라고 보는데요? 늦어도 내후년 안에? 되지 않을까요?”

“그때는 그때고, 일단 당장에는 FA로 비싼 선수나 좀 사주십쇼.”

“만약 아무나 살 수 있다면 누구요?”

“어…….”

막상 이런 질문을 들으니 말문이 막힌다. 리그 S급 선수들의 명단이 스쳐 지나갔다.

박해진, 최우석, 이현진, 김기윤 등등.

그와 동시에 시야에 집합 장소로 뛰어가는 팀원들이 보였다.

규학이, 태웅이, 혁준이, 주호, 성훈 선배, 승주 등등…….

“…그냥.”

“네.”

“그냥 우리끼리 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갑자기요?”

“네. 그냥 우리끼리 하고 싶어졌어요.”

동문서답임에도, 영진 씨는 밝게 웃었다.

“화이팅.”

“예. 뭐, 화이팅.”

툭 찔린 옆구리가 간지럽지 않다.

“슨배!”

“어, 간다.”

명진이가 부른다. 집합에 내가 제일 늦을 것 같다.

* * *

이겼다. 스윕.

동성 호넷츠와의 3연전을 스윕으로 이겼다. 시리즈 기간 3번 모두 등판해 4.1이닝 자책점 0으로 홀드 세 개를 챙겼다. 특히 세 경기 등판 상황 모두 한 점 차 상황이었기에 그 특별함을 더욱 배가된다고 볼 수 있지.

적진인 고척 돔구장에서 세 경기를 마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같은 서울 안이라 그런지 우리 원하 팬들도 꽤나 많이 와주어서 더 많이 기쁨을 나눌 수가 있었다.

“바로 가세요? 식사 안 하시고?”

“전철 끊겨. 피곤해. 집에 갈 거야.”

“아 왜요오.”

“시껏.”

명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짐이 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섰다. 확실히 원정 경기라 그런지 우리를 기다려주는 팬은 별로 없었다. 몇 명 정도. 그래도 이 몇 명이 어디야.

“사, 사인이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여기, 펜이요!”

네네, 얼마든지요.

평소에도 팬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다…라기보다는, 쩌리에 불과했던 ‘내 팬’은 사실상 없었고 원하 팀의 팬인데 원하 선수니까 사진 찍고 사인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요즘은…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어찌 기분이 안 좋으랴.

들이밀어지는 야구공이나 공책, 혹은 기타 물품에 사인을 해주었다. 사진 요청도 기꺼이.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녀석들 또한 어쩔 수 없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분위기에 팬 서비스에 동참.

내 덕이라고 해야 할지, 원하 팀에 대해서 다른 건 몰라도 팬 서비스 논란은 딱히 생기지 않는 편이다. 프론트도 일 잘하기로 소문난 구단이기도 하고.

“예예, 감사합니다.”

약 15분 정도 걸렸던 자그마한 팬 사인회가 끝나고, 감사함에 고개까지 숙여 가며 퇴근하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스윕을 확정짓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들뜬 마음을 가득 안고 걷게 된다. 그래도, 등판하지 않은 날이라면 모를까 3연투까지 한 날의 퇴근길이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

퇴근하는 길에 노래나 들을까 싶어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뭐 딱히 특별할 거 없는, 핸드폰 사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이어폰.

핸드폰에 잭 꽂고, 왼쪽에 꽂고, 오른쪽에 꽂으려고 할 때,

“선배님.”

“어?”

손짓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현진이구나. 깜짝이야.”

이현진. 방금 시리즈까지 맞붙었던 동성 호넷츠의 1선발 투수로 흔히들 말하는 국대급 투수다.

185cm, 94kg의 건장한 체격. 쓰리쿼터에 가까운 팔각도에서 나오는 춤추는 포심과 각종 변형 패스트볼은 상대 타자의 배트를 심심하면 부러뜨려 먹기 일쑤였고 각 크게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날카로운 슬라이더는 부러지기 싫은 배트를 공중에서 춤추게 만들었다.

150km 초반대의 패스트볼들을 던져대면서 거의 매 시즌 최다 이닝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체력까지 좋은 완투형 에이스. 아직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올해보다 내년이 더 기대되는 투수.

게다가 샤프하게 생긴 얼굴은 무슨 순정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이 생겼지. 학생 시절, 성적 자체는 비교적 평범했지만 그 까까머리로도 이런저런 여성 팬들이 있을 정도로 잘생긴 녀석이었기에 프로 들어와서도 잊을 수가 없던 녀석이다.

다만 한 가지… 이놈아의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해야 할지, 불편한 점이라고 해야 할지 할 게 있는데…….

“어… 그래.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뭔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왜 불렀는지를 묻자, 녀석은 거의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뵙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

심각할 정도로 내 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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