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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8화 (18/190)

18화. 저를요?

리그 중반을 지난 현재, 리그 4위 비스코 러너즈와 리그 5위인 우리 원하 챌린저스의 게임 차는 2경기. 그리고 이번 3연전의 상대는 바로 비스코 러너즈.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높았던 정규 시즌 순위가 5위였고, 최소 4위로 마감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던 게 2011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팬들의 마음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약 7년 만에 포스트 시즌, 가을 야구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네 글자, 가을 야구.

팬들은 이번 비스코와의 3연전을 아예 싹쓸이해 버려 순위를 역전시키길 바라고 있었다. 물론 팬들보다 더 목이 탄 건 선수단들이고.

비스코가 리그에서 엄청난 강팀은 아니지만 나름의 중위권 수문장이다.

리그 초반에서부터 우다다다 쏘아나가다 체력 안배를 못 해 리그 중반부터 설설 힘 달리는 전형적인 뒷심 부족한 팀. 그러나 이기는 방법을 충분히 아는 팀이다.

하지만 원하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최근 10경기에서 8승 2패!

그 중심엔 나올 때마다 승을 챙기는 1선발 황혁준의 기세, 최근 10경기 타율 5할을 넘기는 성현이의 패기, 게다가 허리를 단단히 받치는 ‘나’란 존재. 아아…….

따라서 팀원 전체적으로는 물론이고 팬들의 기대감 또한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리즈 첫 경기는 무려 1선발 황혁준의 등판일!

13 대 0.

선발 등판한 혁준이는 완봉으로 게임을 끝장냈다. 찢었다. 형님 쉬게 해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지킬 줄이야. 멋진 새끼.

1게임 차!

더 이상 올라갈 곳 없을 줄 알았던 기대가 하늘을 뚫기 시작했다. 이대로 남은 두 경기 모두 이기면 1경기 차로 오히려 역전!

0 대 9.

2 대 7.

하지만 어림도 없지.

뒤이은 두 경기를 모두 내리 꼬라박으며 게임 차는 3경기로 벌어졌다. 오히려 우리 하나 아래였던 가야 퍼펙터스가 주말 3연전에서 3연승을 거두며 우리와 1게임 차까지 바짝 따라온 형국이 되었다.

3연전 내내 난 등판할 기회가 없었다. 첫 경기는 혁준이의 완봉이었고 두 번째, 세 번째 경기는 처참한 경기라 내가 나갈 상황조차 안 되었고.

그렇게 몸 쌩쌩한 상황에서 다가온 월요일 휴식.

“와…….”

“와…….”

나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여성과 비슷한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지, 진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죄송한데 사인 먼저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얀색 바탕의 불투명한 젤리 케이스. 남색으로 외곽선이 그려져 있고 빨간색으로 포인트가 있는, 우리 팀 유니폼을 본떠서 만든 휴대폰 케이스.

위에 카메라가 있을 법한 구멍 옆엔 원하의 마크가 멋들어지게 찍혀있고 그 아래엔 선명하게 프린팅되어 있는 숫자 4, 내 등 번호. 그 위에 겹쳐지는 매직펜.

“넵.”

휴대폰과 매직펜을 받아들고 케이스에 내 사인을 해주었다. 어지간히 감격스러운지 곧 눈물까지 글썽거릴 모양새다.

“김한울 선수 진짜 팬이었거든요…….”

“저를요?”

“네! 진짜, 진짜 팬이에요.”

“…특이하시네요.”

왜 나를.

“특이한 건가요?”

“왜 뭐… 원하 좋아하시는 거야 그렇다 치고… 우리 팀에 저보다 야구 잘하거나 잘생긴 애들 많잖아요. 혁준이도 그렇고, 성훈이 형도 그렇고, 아니면 뭐 성현이도 그렇고.”

“그렇긴 하죠.”

“하하…….”

부정해 주셔도 되는데.

“근데… 이상하게 김한울 선수가 정이 많이 가더라구요.”

“음.”

뭔지는 알겠다. 있지, 그런 사람. 잘난 거 없는데 이상하게 정이 가고 뭔가 해주고 싶은 사람. 반대로 못난 거 없는데 괜히 싫은 사람도 있고.

“항상 팀에서 좋은 대우 못 받으시는 거에 제가 더 슬펐어요. 항상 저평가 받아오셨잖아요.”

“저평가가 아니라 고평가 받았죠. 지금까지 성적으로 팀에 계속 남아 있던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그래도 이젠 팀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잖아요?”

“허허…….”

아, 좋다.

활짝 웃으며 격려해 주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니, 웃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날 격려해 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분이셨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름다우셨다.

야. 나 아는 누나가 너 진짜 팬인데,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되냐?

얼마 전 걸려온 친구의 전화. 오랜만인 연락에서 흔히 오가는 인사치레가 거둬지고 드러난 본론을 정리하면 대충 그러했다.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야구 선수와 팬이라는 사람이 단체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1 대 1로 만나는 게 선수 입장에선 여러모로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니까. 게다가 여자.

여러 가지 이성 문제를 비롯해 불법 브로커로 연결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는. 물론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시즌마다 있는 팀 인성 교육에서 1차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니까.

겁나 예뻐.

하지만 내 마음은 그 네 글자에 우르르 무너졌다.

“저 같은 경우는 선택지 같은 거 없이 원하 팬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랑 어머니가 두 분 다, 저 태어나기도 전부터 원하 팬이셨거든요. 어릴 때부터 야구장 가는 게 일상이었어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버지 손잡고 갔던 데가 잠실이었으니까요.”

그녀는 어지간히 신났는지, 휴대폰 사진첩에 있는 가족사진이나 본인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떠들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원하의 유니폼을 입고 만세를 부르는 그녀도 아름다웠지만, 햇빛을 받고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가 더 아름다웠다.

긴 생머리에 오뚝하게 떨어지는 코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자가 날카로웠다. 큰 입이 길게 호선을 그릴 때마다 내 맘도 따라 둥글게 변해 갔다.

“아, 너무 저만 떠들었죠?”

“아뇨, 아뇨. 저도 좋네요. 저 좋아한다는 분 계신데 그냥 듣고만 있어도 기분 좋네요.”

“진짜, 대환이가 한울 씨랑 친구라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한울 씨랑 만나보려고 걔한테 치킨 몇 마리를 쐈는지…….”

“민영 씨는 대환이랑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예요?”

김민영. 나이는 30살. 나보다 한 살 많다. 직업이 뭐랬더라, 무슨 어디 대기업이랬나, 증권사랬나 다닌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살짝 푼수기가 있어 보여도 이런저런 추가 인센티브나 부업 등으로 억대 연봉을 넘는다고 들었다. 예, 나보다 돈 잘 버는 분입니다.

절로 비벼지려는 손바닥을 힘겹게 참아내는 게 꽤나 힘들었다.

“지금 있는 회사에서 같은 팀 후배였어요. 그러다가 무슨 일 있어서 대환이가 나갔고… 얼마 전에 예전 팀원들끼리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할 때가 있었거든요. 거기 팀에 가야 팬인 선배 한 분이 계셔가지고… 그분이랑 야구로 토론을 좀 하고 있었어요! 아, 무슨 토론이었냐면…….”

중략.

“…하는데 대환이가 갑자기 저 원하 팬이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맞다고 했죠, 자랑스러운 원하 팬이니까요. 사리 분별 시작할 때부터 원하 팬이었으니까 대충 25년이나 원하 팬이었던 거잖아요? 어디 한 팀만 25년 동안 응원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럴진 모르겠지만…….”

한 번 더 중략.

“…그래서 자기가 한울 씨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고 자랑을 막 하더라구요. 증거 있냐고 물어보니까, 지금 전화 연결 가능하대요? 원하 경기 끝났나 확인하더니 바로 전화하는데 진짜로 받으시는 거예요, 한울 씨가!”

아, 기억난다. 상수한테, 정확하게는 박해진한테 또 홈런 처맞고 팀 전체로 시원하게 말아먹어서 기분 꿍했던 날이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뭔 일인가 싶다가 갑자기 셀카 찍어 보내 달라는 놈의 미친 발언에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찍어 보내줬지.

“네네, 기억나요. 그때가 마침 퇴근하던 때였어요.”

“네네, 맞아요! 마침 딱 집에 가시는 중이라고 하셨었죠! 그리고 진짜로 인증 샷까지 오더라구요. 아… 진짜 그때 기분은… 그 느낌 아세요? 진짜 너무 감격스러워서 말 한마디 안 나오고, 몸이 막 안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제가 그때…….”

또 중략.

“…해서 대환이한테 진짜 빌었어요. 한울 씨랑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되냐고……. 아, 진짜 치킨 기프티콘을 몇 개를 갖다 바쳤는지…….”

민영 씨에 대한 정보가 새로이 갱신되었다. 차가운 도시의 여인 같던 인상은 그냥 겉껍데기에 불과했고 실상은 귀여운 푼수 같은 아가씨였다.

“그래서 치킨집인가 보네요.”

“네. 갖다 바치기만 한 게 억울해서 제가 좀 뜯으려구요. 아, 혹시 치킨 드셔…도 되죠?”

“네네. 저도 좋아해요, 치킨.”

없어서 못 먹지.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양념치킨 한 마리. 이건 국룰이다. 막상 본인이 주문해 놓고 다 못 먹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모습에 내가 속으로 반색하며 말했다.

내가 많이 먹는 편이니 오히려 민영 씨 먹을 게 부족할 수도 있다, 하고. 그러니 무어가 그리 기쁜지 박수까지 짝짝 치며 밝아진다.

프라이드치킨이 먼저 상에 나오자마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황금빛 자태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가슴살로 추정되는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까슬까슬하게 손에 닿는 감촉이 광명과도 같았다.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갔다. 한 입 먹으니 와삭, 하고 껍질이 부서진다. 아, 맛있다. 살짝 느끼하려 할 때 무 하나 집에서 아삭아삭.

그래서요…….

그랬어요?

하하하!

어머!

저두요!

진짜요?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다 프라이드가 반절 정도 남았을 무렵, 양념치킨이 가세했다.

이번엔 넋을 놓지 않고 고혹적인 빨간색을 한 조각 집었다. 달달함과 매콤함이 공존하며 입 안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할렐루야.

“근데 올해는 진짜 어떤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러다 날아온 질문.

“올해요?”

“네. 그 왜 작년까지는 한울 씨가 그… 성적이…….”

“대놓고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많이… 안 좋으셨잖아요.”

“네네.”

“죄송해요…….”

“아뇨, 사실인걸요.”

무슨 죄악을 짓는 것마냥, 민영 씨는 지금까지 잘만 맞춰오던 눈을 피했다.

“그, 그래도! 올해는 완전 달라지셨잖아요. 물론 언제까지고 그… 안 좋은 성적을 내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단계라는 게 있는데 한울 씨는 너무 갑작스럽게 무슨, 게임에서 점핑 캐릭터마냥 레벨 업하신 것 같아 신기해서요.”

“아.”

이게 참, 시스템이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원래는 제가 작년까지 하고 FA였잖아요?”

“네네, 맞아요.”

“뭐… 뉴스 같은 데선 팀을 위한 헌신이라거나 애정이니 뭐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팩트를 봤죠. 제가 자랑할 만한 건 제구 좋은 거랑 9년 동안 다치고 수술해도 금방 회복된 거밖에 없는데. 이거 믿고 절 비싼 돈 주고 데려가서, 또 자기네 팀 선수 한 명까지 내줄 팀은 없겠더라구요.”

“아…….”

“그래서 그냥 포기했어요. 게다가 저번 시즌 마무리 무렵엔 방출도 각오했었죠. 야구 그만두면 뭐 레슨장이나 차려야 되나, 코치 제의 오기엔 너무 어리고……. 근데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프론트에서 1년 더 해보자더라구요? 이거 진짜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에 별의별 거 다 해봤어요.”

과거의 삽질들은 하얀색 무를 찌르는 포크처럼, 내 맘을 아프게 만드는 요소였다.

“폼도 바꿔보고 루틴도 바꿔보고 몸 관리하는 것도 바꿔보고, 게임 내적으론 볼 배합도 바꿔보고. 마지막이니까. 근데 그중 하나가 얻어걸렸나 봐요. 정확하게 뭐가 바뀌어서 뭐가 좋아졌다고 형용하기는 어렵네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는데, 민영 씨의 표정은 내 얘기에 집중하다 못해 아주 빠지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나 말하는 거에 소질 있나.

민영 씨는 말하는 사람 본인이 좋은 웅변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리스너였다.

“그럼 그, 올 시즌 끝나면 다시 FA 되는 거 아니세요?”

“아마… 그럴걸요?”

“…신청하실 거예요?”

“음…….”

딱히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빈말로라도 원하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런 소리할 타이밍인 건 아는데, 사람 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잖아요. 제가 남고 싶다 해도 트레이드 같은 게 될 수도 있는 거구요.”

하하.

멋쩍게 웃으며 치킨을 한입 물었다.

“전… 한울 씨가 원하에 쭉 계셨으면 좋겠어요. 원하 돈 많잖아요. 그래도 10년 동안 개근한 불펜 투수인데 좀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후 왔다 갔다 한 이야기들 또한 야구, 혹은 원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정말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나도 몰랐던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경험은 꽤나 신선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팀, 우리 리그, 해외 리그 등등, 그냥 야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지식이 꽤 늘어난 대화였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솔직히 대환이한테 연락 왔을 땐 갑작스럽긴 했는데… 나오길 잘했네요.”

“진짜 영광이었어요! 저 직관도 자주 가는데 갈 때마다 연락드릴게요.”

“넵넵, 다음에 오셔서 연락주시면 제가 후배 놈들 글러브나 유니폼이나 뭐, 아대나 장갑이라도 뺏어다가 선물로 드릴게요.”

“에에, 전 한울 씨 꺼가 더 좋은데.”

“…드릴까요?”

그에 민영 씨는 꺄르륵 웃곤,

“에이, 농담이죠. 마음만이라도 너무 감사해요!”

그러곤 또 혼자서 꺄르륵.

“그… 또 연락 드려도 될까요?”

“네?”

“부,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두 되구요.”

“…….”

세상에.

“느, 네! 그럼요. 얼마든지요.”

“앗,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릴게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꾸벅 숙여지는 허리의 관성으로 기다란 머리카락이 잠시 휘날렸다. 거기에 첨가된 샴푸 향에 취해 몸을 돌려 돌아가는 민영 씨의 뒷모습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아!”

…가, 다시 돌아온다.

“그, 악수, 한 번만 부탁드려도 돼요?”

“넵. 물론이죠.”

수줍게 손을 잡고 가볍게 위아래로 두어 번.

“그럼 진짜 가볼게요. 또 연락드릴게요!”

세상에.

해맑게 웃고선 뒤로 도는 그녀의 모습은 무슨, TV 광고에 나오는 연예인들마냥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온 세상에 그녀만 보였습니다, 그딴 소리가 실재했구나. 민영 씨와 악수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집에 도착하고서 이 손을 씻어야 할까 말까, 세면대 앞에 서서 10분 정도 고민하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씻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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