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9화 (19/190)

19화. 한규진

8월을 마무리하고 9월에 들어서는 시점에서부터 어느 정도 팀 순위에 대한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작년 2016시즌, 상수-동성-KP-비스코-가야-원하-성운-한성의 순으로 시즌이 끝났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던 상위 네 팀은 순위의 역순으로 포스트 시즌을 진행했다.

먼저 KP와 비스코가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거기서 이긴 비스코는 동성과 플레이오프를, 거기서 이긴 동성은 상수와 한국 시리즈를. 그리고 어차피 우승은 상수.

현재 2017시즌의 순위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위 네 팀은 작년과 같았고 하위 네 팀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생한 정도.

가을 야구에 그나마 가까웠던 가야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우리 원하와 성운이 한 단계씩 올라서 있다. 꼴찌는 여전히 한성.

작년의 가을 야구 진출팀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정해졌었다. 시즌 마무리를 한 달 반이나 앞둔 상황에서 4위와 5위의 게임 차가 10경기나 났으니까.

통상적으로 3게임을 따라잡는 데에 약 한 달이 걸린다고들 한다. 경우의 수를 따질 때 흔히들 등장하는 매직 넘버니, 트래직 넘버니 이런 수치에선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곤 하지만 그저 가능성일 뿐, 별 이변은 없었다.

그러나 올해,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즌 한 달 반 정도를 남겨둔 상황에서 1, 2, 3위까지는 윤곽이 잡혀있지만 4, 5, 6위가 애매하다.

비스코와 우리가 두 게임 차, 우리와 성운이 두 게임 차. 우리는 당연히 총력전을 펼치면 한 다리 걸칠 수도 있고, 성운도 어렵긴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정도.

그런 입장에서 이번 3연전에서 한성 위너스는 참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리그 최약체. 그냥 아무것도 안 되는 팀. 공격도, 수비도, 주루도, 심지어 운도 안 따라준다. 이번 시즌은 유독 이 네 번째 요소가 극심하게 삐걱거린다.

반면 우리와 경쟁하는 4위 비스코는 절대 강자 상수와의 3연전, 6위 한성은 2위 동성과의 3연전이 예정되어 있다.

이후 주말 3연전에서 우리는 7위 가야와, 비스코와 성운은 각각 상대를 바꿔 동성과 상수와의 대결. 여러모로 우리가 이득을 봐야만 하는 시기인 것이다.

“오늘 등판하겠지?”

“누구? 나?”

“어.”

“그럴걸. 4일 됐나.”

“좀 안심이네.”

게임 전, 규진이 형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 투수가 이리 맘 편히 있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고 루틴이라는 게 있으니까. 게다가 나름 짬까지 갖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 썰 들었냐.”

“어떤 거?”

“오늘 이용호 선발이라는데.”

“그 인간이 왜?”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이용호. 내 최대의 악적. 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2년 위의 선배로 희대의 쓰레기 짓만 하다가 결국 프로 와서는 쩌리 중의 쩌리로 전락한, 그래도 싼 새끼.

“…직구로 대가리 맞추면 퇴장당하겠지?”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내 옆에 있는 이 사람도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심하게 당했지. 고등학교 엘리트 시절, 1학년임에도 레귤러 선발을 맡았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나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키도 작고 구속도 130km 초반에다 성적도 애매한 규진이 형은 꽤나 만만했던 것 같다. 내가 그놈한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수준이라면 형은 그놈을 아주 죽여버리고 싶을 거다.

“체인지업은 어때?”

“아, 체인지업은 제구 어려워서 정확하게 대가리로 안 가.”

“까비. 아니면 커브는?”

“느려서 맞아도 별 타격 없어.”

“까비.”

매우매우 작은 키를 가진 투수라면, 밑에서 쭈욱 끌어올리는 극한의 언더핸드 컨버전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원하는 로또픽 느낌으로 규진이 형을 지명했다. 지명 순위는 거의 맨 뒤. 입단하자마자 들은 소리는 유격수 할래, 아니면 언더 할래.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일명 지곤조기를 시전한 규진이 형은 이내 브레이크, 반등에 성공하여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160cm 중반 따리의 아주 작은 키에서 구위 좋은 140km 후반대의 무거운 직구를 내리꽂는 암 액션은 타자들 입장에서 꽤나 껄끄러운 타점이었다.

미묘함? 생소함? 어색함?

오버핸드인데 언더핸드 같다.

실제로 상수의 홍석진은 규진이 형의 공을 그렇게 평가했다.

거기에 큰 낙차로 떨어지는 커브와 제대로 타이밍 뺏는 체인지업까지. 나나 이용호와는 다르게 쩌리로부터 시작해 국가 대표 경험까지 장착한 대기만성형의 투수인 것이다.

“그냥 시원하게 직구 맞추고 내려가는 건 어때.”

“미친놈인가.”

“까비.”

적당히 담소를 나누다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한 무리를 보고 동시에 입을 닫았다. 가벼운 담소라기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들이니까.

“잘 준비하고. 오늘 이기면 10승이지?”

“엉.”

“힘내쇼.”

“엉야.”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불펜으로 향했다.

* * *

게임 트랙은 호불호가 꽤나 갈릴 법한 내용이었다.

투수전.

오늘 선발인 규진이 형은 5이닝 노 히트를 포함해 6이닝 동안 안타 하나만 맞고 무실점으로 잘 막고 있고, 상대 선발은 한 이닝에 주자를 최소 한 명씩 내보내고는 있지만 진짜 꾸역꾸역 막고만 있는 상황.

“…안 좋은데.”

촉이라는 게 있다. 감. 필. 뭐 그런 것들. 야구만 20년 가까이 하다 보면 오는 그런 촉. 5점 차로 지고 있는데 이길 것 같다라는 때가 있고, 10점 차로 이기고 있는데 쎄― 할 때가 있다.

스르락, 아우우!!

무사 2루에서 시작해 1사 2루, 2사 3루에서 나온 루킹 삼진에 슬쩍 시선이 덕아웃으로 향했다. 7회 초 공격은 그리 허무하게 끝났다.

그러나 규진이 형은 별 표정 변화 없이 글러브를 집어 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6개 정도의 연습 투구가 끝나고 시작된 플레이 콜.

선두 타자는 1루수 땅볼로 잘 막았지만 이어진 5번 타자에게 볼넷, 6번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1사 1, 3루가 되었다. 7번 타자를 내야 플라이로 막아낸 뒤 맞이한 8번 타자, 이용호.

대타, 대수비, 대주자 그 어느 쪽으로도 쓰기가 애매한 녀석이 웬일로 선발 출전했다. 이유는 아마 주전 좌익수 최형선의 부상 때문이겠지.

며칠 전 주루 플레이 중 발생한 햄스트링 부상으로 최형선은 팀 명단에서 잠시 빠지고 그 자리를 이용호가 대체하고 있었다.

타자가 들어와 잠시 루틴을 가지는 사이 투수와 포수 간의 사인 교환이 시작되었다. 지금 타석에 있는 타자의 컨택은 썩 좋지 않다. 선구안이 좋은 것도 아니며 파워 툴 또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

초구.

“스트라잌!”

몸쪽 직구로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를 하나 잡자 포수 규학이가 홈 플레이트 앞에 잠깐 나서서 내야수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내야는 공 잡으면 볼 퍼스트. 더미 사인이나 다름없이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1루, 3루 상황이다 보니 어떤 작전이 나올지 몰라 분위기나 좀 잡아보려는 생각 같았다.

“스윙.”

몸쪽 낮은 곳으로 꽂히는 직구에 어설픈 스윙으로 스트라이크 하나 헌납. 카운트 0-2. 투수의 유리한 상황.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 딱히 생각할 게 없다.

투수의 높은 타점은 분명 장점이 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다. 키가 크고 팔이 긴, 정통적인 오버핸드 투수가 던지는 공은 마치 2층에서 던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니까.

근데 그 논리대로라면 160cm 중반 따리인 규진이 형 공은 매번 통타당해야 마땅하지만, 타자들 말에 따르면 규진이 형 공이 의외로 치기 어렵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투수들보다 오히려 훨씬 작은 키를 가지고 극단적인 오버핸드를 가지는 이색적인 조합은 영 익숙해지지를 않는다고 한다.

힘으로 눌러도 될 법한 카운트.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규학이는 망설임 없이 사인을 냈고, 규진이 형도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스트레치에 들어가고 타자만 신경 쓰면 되는 카운트, 주자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왼발을 들었다.

그렇게 날아간 151km짜리 직구는,

틱―

와아아아아―!!

어설픈 스윙과 맞물려 3루수의 글러브를 스치고 페어존에 떨어졌다.

X발.

홈팬들의 성화 때문에 제대로 들릴 리가 없지만 멀리서도 규진이 형의 입 모양을 유추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고, 올라가지 말아야 할 점수가 올라갔다.

3루수의 글러브를 스치며 자체적으로 감속이 돼버린 타구가 다시 3루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타트가 빨랐던 1루 주자의 발이 베이스에 닿은 뒤였다. 점수 0 대 1, 다시 주자 1루, 3루가 된 것이다.

꼬이네.

당연히 잡을 거라고 했던 타석을 놓치면 당연히 잡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임을 놓치게 된다.

멘탈적인 부분에서 꽤나 타격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투수 교체를 위해 마운드로 올라간 투수 코치님과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규진이 형은 마운드에 남아 있었다. 결연해 보이는 표정.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9번 타자를 초구에 2루수 땅볼로 막아내고 이닝 종료. 투구 수는 107개.

7이닝 동안 볼넷 하나와 안타 두 개로 한 점을 주기는 했지만 누가 뭐래도 호투였음에는 부정할 수 없는 투구 내용이었다.

“애썼어.”

“까비, 까비!!”

“괜찮아, 괜찮아!”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야수들이 규진이 형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본인도 본인의 마지막 이닝이었음을 예감했는지 들어오자마자 모자로 눈가를 가린 채 입을 열었다…….

“야.”

“엉.”

“우리 역전하면 그 새끼 또 나오겠지.”

“음…….”

잠시 계산. 9번 타자에서 이닝이 끝났으니 다음 수비는 1번 타자부터. 우리가 역전하게 되면 9회 말 수비가 진행되니 중간에 주자 두 명 정도 내보내면 9회 말 2아웃에서 녀석의 타석이 오긴 한다.

“몇 점 차로 역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한 점 차면?”

한성 위너스 감독인 김선곤 감독님의 스타일을 대입해본다. 좋게 말하면 믿음의 야구. 나쁘게 말하면 방관하는 야구. 그런 감독 아래라면 선취점을 낸 타자를 한 번 더 내지 않을까.

“나올 것 같은데.”

“아, 그냥 직구로 대가리 찍어버릴걸.”

멘탈 돌아왔네.

쌉소리부터 지껄이는 것 보니 생각보다 멘탈 부분에서 타격은 적어 보였다. 실실거리며 다음 공격을 지켜보았다. 우리도 타순은 나쁘지 않다. 9번 훈이부터.

“일단 훈이가 나가는 거부터 기도하는 게 어때.”

“아까 덕아웃 들어오면서 성호 긋는 거 못 봤음?”

“아, 그거 관심법으로 봤음.”

“미친 새끼.”

상대편도 투수가 바뀌었다. 불펜 가동. 진짜 억지로 억지로 막기는 했지만 막은 건 막은 거다. 7이닝 동안 무실점. 결과적으로, 규진이 형보다 효과적인 투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야구는 9회 게임이다.

“좋아!”

“따라가, 따라가!”

“굿아이!!”

훈이 스트레이트 볼넷.

제구에 어려움을 겪는 볼넷이라기보단 아직 영점이 안 잡힌 느낌의 볼넷이다. 탄착군 자체는 바깥쪽 낮은 곳에 하나 정도씩만 빠지는 공들이었으니까.

명진이가 타석에서 한 발을 빼고 3루 주루 코치님을 쳐다봤다. 바쁘게 오가는 코치님의 오른손과 왼손. 두 손이 마주 보고 손뼉이 쳐지자 상대 포수도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과 왼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초구는.

“볼.”

명진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별다른 자세 없이 지켜보았다. 또다시 움직이는 양측 벤치. 공 하나하나에 작전과 생각이 교차한다.

2구.

틱―

“파울!”

강공 스윙이었지만 다시 슬라이더에 파울. 또다시 발 하나를 빼고 3루 코치님을 바라본다. 그에 복잡한 사인으로 화답하는 코치님. 또 그에 화답하는 상대 포수.

야수들에게 사인을 보낸 후 자리에 앉아 이번엔 투수에게 사인을 보낸다.

“뛴다!”

훈이는 2루로 스타트.

틱―

“1루!”

“퍼스트, 퍼스트!”

번트 자세가 나오자마자 있는 힘껏 달려든 1루수 김영국이 곧장 2루를 쳐다봤지만 스타트를 먼저 끊은 훈이는 2루에 안착하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1루에 커버를 들어간 2루수에게 송구하며 1아웃.

“…거르려나?”

“못 거르지. 다음 기성이에다 진형이인데.”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2번 타자 강성현. 최우석, 박해진, 홍석진과 마찬가지로 리그에서 탑 티어급의 야구 선수다. 우석이와 비슷한 유형이지만 발이 조금 느린 대신에 파워가 좀 더 장착된 타자다.

“하나 넘겼으면 좋겠네.”

사인이 오갈 동안 성현이는 배트를 제 아래에 두고 흔들거리며 투구를 기다렸다. 사인 교환 끝. 포수는 몸쪽에 앉고 미트를 보였다. 투수가 2루에 있는 훈이를 슬쩍슬쩍 쳐다보다가 왼 다리를 살짝 들었다.

“빼액!!”

촤악―

“세잎!”

인사이드픽에 살짝 역동작이 걸리긴 했지만 슬라이딩으로 세이프. 잠시 어수선했던 상황이 정리되고 다시 초구. 이번엔 포수가 바깥쪽에 앉았다. 살짝 들린 왼 다리는 이번엔 2루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나아갔다.

따악―!!

“X발.”

그 타구는, 초구부터 오른쪽 담장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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