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2이닝 플러스
2017시즌 정규 시즌 순위표 중 위에서 네 번째에 있는 아주 익숙한 이름.
“…와.”
원하 챌린저스.
원하가 포스트 시즌 올라갔던 게… 가장 최근이…….
내가 입단한 2008년. 그 전전전 시즌인 2005년. 원하 챌린저스는 정규 시즌에서 압도적인 전력으로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 지었다.
정규 시즌이 끝나고 나서 약 한 달 후 진행된 한국 시리즈에선 상대 팀을 4 대 떡으로 발라주고 그대로 통합우승 달성.
거기까지였던 건가.
그다음 시즌인 2006년. 원하는 이전 시즌의 위용은 어디다가 갖다 팔아먹었는지 귀신같이 리그 꼴찌를 거머쥔다.
압도적 꼴찌.
05시즌의 우승 멤버들과 거의 똑같은 멤버들을 가지고 어쩜 그렇게 팀 하나를 말아먹을 수가 있는 건지, 그대로 계약 기간이 2년 정도 남아 있던 당시 감독은 그대로 경질되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원하는 시즌이 끝난 후 진행된 1차 드래프트에서 가장 먼저 원하는 선수를 고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타격으로 보면 누구, 수비로 보면 누구, 포수로 보면 누구, 외야로 보면 누구 등등.
작년의 급격한 몰락이 선발 중간 마무리할 것 없이 다 같이 노나가지는 활약에 있었다고 판단, 투수들 중 가장 가치가 높았던 나를 지명했다.
계약금으로만 10억!
메이저에서도 노리고 있다는 점에 살짝 오버페이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난 딱히 말도 안 통하고 군대 때문에 왔다 갔다 할 점이라거나, 그 이전에 내가 메이저까지는 안 통할 거라 판단했기에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런 오판 덕에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원하에 입단했다.
그러나 입단한 후의 내 활약상은… 참담했지.
올해를 제외한 9년 동안, 원하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던 건 2011년, 4위로 턱걸이 진출한 후 준플레이오프에서 시리즈 전적 3 대 0으로 광탈했던 게 가장 최근.
아, 물론 나는 그때 엔트리 탈락해서 개인 훈련 같은 거나 하고 있었고.
아직 시즌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이대로를 유지만 한다면 무려 6년 만의 포스트 시즌 구장을 밟게 되는 것이다.
슬슬 여러 매체의 기사들에게서 경우의 수라는 단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상위 세 팀은 거의 확정적이기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진짜 재미는 4위 싸움.
시즌 마무리까지 약 한 달이 남은 상태에서 4위 원하 챌린저스는 54승 1무 54패, 5할. 5위 비스코 러너즈는 53승 1무 54패로 우리와 고작 반 경기 차이. 6위 성운 호크스는 51승 57패로 우리와 세 경기 차이.
처음에야 뭐, 올라가면 좋고 아님 말고 정도였지만 가시권에 들자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 함성은 우리가 딱히 무시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X 된다.
떨어지면 아주 커다란 일이 일어날 거다, 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딱히 뭘 할 수 있는 게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각 경기마다 모든 것을 갈아 넣고 퇴근하고 집에서 뻗는 것.
앞으로 한 달만 참자. 4강만 올라가면 거기서 광탈한다 한들, 만족스러울 거다.
“X됐네.”
그런 의미로, 오늘 금요일. 상수 타이거즈와 함께한 원정 2연전의 2패는 꽤나 뼈아팠다. 내가 뭐 등판해서 기회를 노려보고 비벼보고 등의 행동도 불가능할 정도의 무기력한 완패.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비스코와 성운은 각각 1승 1패씩만을 거두었다.
우리가 둘 다 졌으니, 쟤네가 둘 다 이겼으면 참 볼 만한 상황이 펼쳐졌을 텐데. 그래도 일단은 5위에서 잠시 브레이크가 먹혔다는 것에 안도하자.
* * *
졌다. 59승 1무 59패와 59승 1무 60패. 반 경기 차이로 뒤진 5위. 우리 원하에게 남은 경기는 7경기. 4위 비스코에게 남은 경기는 8경기.
성운은 55승 62패로 이미 리타이어. 4위 싸움은 비스코와 우리 원하와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다.
오늘 이겼으면 오히려 반 경기 차로 앞선 4위가 됐을 텐데.
두 점 차로 앞선 8회에 등판해 세 타자를 깔끔하게 막고 내려왔다. 근데 믿었던 이효재 선배가 끝내기 쓰리런 맞고 그대로 시합 끝.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퇴근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날아온 민영 씨의 연락. 직접적으로 응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괜히 비싯하고 웃음이 샜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일은 꼭 이길게요, 뭐 대충 그렇게 답장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을 무렵, 전철은 내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붐비는 전철 안 사람들을 헤집고 내렸다.
아, 빨리 차를 사든가 해야지 원.
가방을 괜히 한 번 더 동여매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내일은 모처럼 쉬는 날이다. 얼른 가서 쉬어야지.
* * *
9월 중순을 넘기고 슬슬 말에 다가가고 있다. 이제 슬슬 각 팀들의 순위에 대한 윤곽이 잡혔을 시기이지만, 우리 원하는 아직이다.
비스코와 우리의 순위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뒤바뀌어 있을 정도로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했다.
지금 현재, 비스코에게 남은 경기는 1경기, 우리에게 남은 경기는 2경기. 리그 순위는 62승 2무 61패로 비스코가 5위. 62승 2무 60패로 우리가 4위.
재미있게 되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동성 호넷츠와의 2연전이, 비스코는 그보다 더 일찍 리그 1위로 한국 시리즈를 선점한 상수 타이거즈와의 마지막 경기.
한 번만 이기면 된다. 한 번만.
우리가 63승을 어떻게든 만들기면 한다면 상대 전적에서 앞서는 우리가 4위를 확정 지을 것이다.
“…실화냐.”
그러나 오늘 동성 호넷츠의 선발 투수 이현진. 이 새끼는 눈치도 없는지, 8회까지 산발타 3개만 맞고 우리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3점 앞선 지금, 9회에까지 마운드에 올라 우리의 의욕이 직접 아주 깊은 땅굴을 파도록 만들었다.
151km.
9회 말의 초구이자 오늘 경기 97구째 공은 아직까지도 150km를 넘기고 있었다. 국대 1선발이라는 단어가 어디 안 가는지, 녀석은 아직 땀을 흘리거나 딱히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선두 타자로 나선 규학이는 초구부터 이런 공이 몸쪽으로 날아오자 깜짝 놀라는 모양새였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한 뒤, 바깥쪽 볼에서 바깥쪽 존에 걸치는 투심에 루킹 삼진.
9번 타자 훈이는 6구까지 버티긴 했지만 어설프게 커트한 공이 내야로 흘러들어 갔다. 3루수가 잡아 편하게 1루로 던졌고 이내 2아웃.
그다음 타자들이 각각 오늘 처음으로 나온 볼넷과 행운의 텍사스 안타로 2사 1, 3루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다음 타자는 허무하게 초구에 투수 땅볼로 물러나며 현진이의 완봉승을 구경해야 했다.
1패. 리그 막바지에 다다라서 맞이한 이 1패는 너무나도 뼈아팠다.
“이겼네?”
더구나 경쟁팀의 승리. 비스코는 63승의 고지를 선점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고 우리 팀은 62승으로 리그 5위로 내려앉게 되었다.
이기면 돼. 이기면 돼. 이기면 되는 거야. 후.
이기면 된다.
“…혁준아.”
“네.”
“내일 이기자.”
“…네.”
내일 선발로 예정되어 있는 혁준이가 옆을 지나갔다. 결연에 찬 짧은 대화가 오갔다.
이기자.
포스트 시즌에 올라가서, 비록 광탈 당한다고 하더라도 올라가고 싶다. 올라가서 더 높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겹게 떼어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구장을 나섰다.
이기자. 내일은 이긴다.
* * *
결국 마지막 경기까지 와버렸다. 4위와 5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팀들의 순위는 모두 정해졌다. 남은 건 우리 원하와 4위에 랭크되어 있는 비스코 러너즈 두 팀.
다만 한쪽은 63승 2무 61패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한쪽은 거기서 승 하나가 모자란 상태.
이기면 돼.
마법의 주문처럼 계속 외우고 또 외웠다.
오늘 전국 구장에 진행되는 시합은 잠실구장에서 진행되는 동성 호넷츠와 원하 챌린저스, 이 두 팀 간의 시합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있는 경기는 정확하게 4위가 어느 팀으로 결정 날지에 대한 것만 확인할 수 있는 알짜배기 시합인 것이다. 시즌 직전 누가 이렇게 대진을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재밌게도 짜놨다.
경우의 수를 따질 필요 없다. 이기면 된다. 순위 싸움 생각하지 말고, 이기는 것에만 신경 쓰자.
시합 전 미팅에서 감독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침 오늘 선발은 1선발인 혁준이. 타선에서 조금만 분발해 준다면 이길 수 있다.
동성의 선발 투수는 팀의 세 번째 선발 투수. 매치업에서 당연히 우리가 앞선다. 이겨야 한다.
하지만 부담이 되었을까. 혁준이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지 5회까지 안타를 내주지는 않았지만 볼넷은 여섯 개나 내줬다. 그러면서도 병살은 곧잘 잡아내며 투구 수는 5회까지 80개 언저리.
하지만 우리 팀 타선은 더했다. 혁준이보다 더한 부담을 짊어졌는지 5이닝까지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다. 퍼펙트.
불리한 카운트 싸움 탓에 투구 수는 혁준이보다 조금 더 많은 90개 언저리지만 시합 내용 자체로만 보면 우리가 조금 밀리는 모양새였다.
5회 말 공격이 끝나고 클리닝 타임, 팀의 주장인 성훈이 형이 모두를 불러모았다. 크게 이렇다 할 이야기는 없었다. 약 2분 정도의 짧은 연설을 몇 글자로 압축하면 부담 내려놓아라.
자리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별 쓸데없는 말일지 모르나, 프로 레벨에 와선 오히려 이런 게 더 크다.
타격할 때 허리를 더 돌려봐라? 수비할 때 중심을 낮게 잡아라? 투구할 때 어깨가 안 넘어온다?
더 쓸데없다. 정신적인 안정을 부여해 주는 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던 허리가, 높았던 중심이, 안 넘어오던 어깨가 넘어온다.
야구는 멘탈 게임.
피지컬적으로나 메카닉적으로 완성 단계에 이른 ‘프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프로 타이틀 떼야 한다.
주장의 짧은 격려에 힘이 났는지 6회 초, 혁준이는 제구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삼진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억지로 욱여넣은 투구는 강한 타구가 되어 그라운드로 돌아갔지만 집중력을 발휘한 야수들은 열심히 뛰어가 잡아냈다. 던졌고 또 잡아냈다.
아웃카운트 세 개.
마지막, 담장을 원바운드로 맞춘 타구를 쫓아가 잡은 뒤 2루에서 타자 주자를 잡아낸 성현이의 송구에 혁준이는 평소보다 더 크게 환호하고 주먹을 꽉 쥐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때 투구 수 92개.
공격은 나름 활기를 되찾았다.
무력하게 삼진 아니면 땅볼만 양산해 내던 타선은 7번 타자부터 시작된 6회 말서부터 볼넷을 시작으로 안타까지 뽑아냈으니까. 다만 점수를 내지 못했을 뿐.
와아―
꺄하핫!
원정팀 쪽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난다. 조금 더 특정 지어 보자면 동성 쪽의 유니폼이 아닌, 우리와 4위 경쟁을 하고 있는 비스코의 저지를 입은 무리들 사이에서만 일어났다.
우리는 지면 5위. 우리가 이기면 자기네가 5위.
이해는 한다. 다만 굳이 여기 와서까지 저러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내가 그 당사자라 더더욱.
슬슬 힘에 부치는지 심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마운드를 향하는 혁준이의 등짝이 오늘따라 넓어 보였다.
0 대 0. 7회 초 수비. 선두 타자는 3루수 땅볼로 잡아낸 뒤 볼넷, 그리고 안타로 만들어진 1사 1, 2루. 그다음 1루 쪽 땅볼이 나왔지만 타자 주자만 잡아내며 2아웃에 2루와 3루가 되었다.
딱―
퍽!
“악……!”
“타임, 타임!”
타구가 혁준이를 향했다. 향한 것뿐만 아니라 정강이 쪽에 맞았다. 타구는 그리 멀리 튀지 않아 혁준이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1루로 던져보겠답시고 공을 쥐고 1루를 향하지만 정지 지시를 받곤 그대로 멈춘다. 그리곤 이내 오른쪽 정강이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곧장 심판은 타임을 부르며 경기를 중단시켰고 우리 팀의 주요 인사들 몇몇 또한 마운드로 뛰쳐나갔다.
투수 코치님이 가장 먼저 달려가 혁준이의 상태를 살폈고 구단 트레이너 또한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뒤 투수 코치님은 두 팔을 교차시켜 보이며 더 이상의 투구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을 덕아웃에 전달했다.
그 시그널을 본 우리 감독님의 표정은 이렇다 할 변화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덤덤하게,
“한울아.”
“예.”
“2이닝 플러스 되겠냐.”
날 부르셨다. 잠시 마운드를, 그리고 그라운드를 훑어보고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