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27화 (27/190)

27화. 1승

6점.

1회 초 공격부터 화끈하게 KP를 몰아세웠다.

볼넷, 볼넷, 뜬공, 고의사구에 이은 홈런은 만루 홈런.

이후 주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맞이한 6번 타자로부터 삼진을 솎아내며 그저 잠깐의 위기임을 증명해내려 했지만 이후 안타와 볼넷, 그리고 9번 타자로부터 3루타까지 얻어맞으며 순식간에 투수의 멘탈이 박살 났다.

배짱이 제일 큰 스탯이었던 투수의 멘탈이 무너진 뒤는 너무나도 뻔했다. 망가진 멘탈을 추스를 새도 없이 본인 팀의 공격을 지켜봐야만 했다. 부디 6점 이상만 내주길 바라면서.

“원하 챌린저스의 수비 위치입니다. 좌익수 유훈, 중견수 박진형, 우익수 강성현의 외야, 1루수 남기성, 2루수 전성문, 3루수 이성훈, 유격수 이명진, 그리고 문규학 포수가 황혁준 투수의 공을 받습니다.”

“이런 표현 써도 될지는 모르겠네요. 원하의 수비를 보고 있자면 참 쫀쫀해요.”

“표현이 참 재미있는데요. 어떤 의미일까요?”

“쫀득하다고 해야 할까. 빠질 것 같은데 잡히고, 흐를 것 같은데 막히고. 더구나 오늘 투수는 황혁준 투수잖아요? 상당히 빠른 볼을 던질 테고 휴식도 꽤나 챙겼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황혁준 투수가 어떻게 경기를 운용해나갈지 재밌어 보이네요.”

“이에 맞서는 KP 스타즈의 배팅 오더입니다. 1번 타자 1루수 안병국, 2번 타자 유격수 류승훈, 3번 타자 2루수 김기윤, 4번 타자 지명 타자 김성수, 5번 타자 포수 황하균, 6번 타자 우익수 이창현, 7번 타자 중견수 신용희, 8번 타자 좌익수 이경무, 9번 타자 3루수 하은민입니다.”

“올 시즌 리그에서 유일하게 팀 타율이 3할을 넘는 팀입니다. 16시즌에도 그랬고, 15시즌에도 그랬죠. 황혁준 투수가 아무리 빠르고 좋은 공을 던져도, 원하의 수비가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충분히 뚫고 나갈 힘을 가진 타선입니다.”

3할 1푼 2리.

2017시즌 KP 스타즈의 팀 타율이었다. 3할 타자라는 상징성 깊은 단어 뜻처럼 3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런데 개인이 아니라 팀이 3할을 친다? 3년 연속으로?

그 한마디가 가져오는 의미는 매우 컸다.

“황혁준 투수입니다. 2017시즌 28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하여 180과 1/3이닝 동안 평균 자책점은 3.14입니다. 14승 9패의 승패와 함께 삼진 212개로 리그 탈삼진 1위입니다. 볼넷은 119개이며 시즌 WHIP는 1.21입니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죠. 예리한 슬라이더와 간간이 커브와 체인지업을 구사하긴 합니다만 사실상 투피치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이닝 이팅 능력도 좋고 구위도 좋아서 꽤나 힘든 투수죠.”

“올 시즌 최고구속이 몇이었죠?”

“158km 아니었나요?”

“허허, 저 현역 때는 145km만 던져도 파이어볼러 소리 들었는데요.”

“김수찬 해설 현역 때 최고구속은 몇 km였습니까?”

“지금 디스하시는 겁니까?”

“하하하하!”

세 중년 남성의 잔망스러운 토크가 진행되는 동안 1회 말의 준비가 끝났고 안병국이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 몸쪽에 꽂히는 직구입니다. 152km, 스트라이크입니다.”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스윙, 2스트라이크.”

“높은 직구에 헛스윙, 삼진! 공 세 개로 깔끔하게 1번 타자를 마무리하는 황혁준입니다.”

2번 타자 류승훈.

“자, 초구부터 느린 커브가 나왔어요? 109km인데요, 존에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바깥쪽에 꽉 차는 직구, 스트라이크입니다.”

“몸쪽! 지켜보며 삼진입니다!”

3번 타자 김기윤.

“또 초구에 느린 커브예요. 111km의 느린 커브에 어이없는 헛스윙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얻습니다.”

“몸쪽 직구를 건드렸지만 3루 선상을 벗어나는 파울입니다.”

“다시 한번 하이 패스트볼! 1회 말은 공 11개로 깔끔하게, 삼진 세 개로 막아내는 황혁준입니다!”

타자 일순하며 6점을 뽑아낸 쪽, 3타자가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 쪽.

양 팀이 가지고 있는 9번의 기회 중 단 한 번씩만을 사용했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측이 느끼는 격차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솔로포로 한 점 쫓아가기는 했지만 다음 수비에서는 오히려 세 점을 덤으로 되갚아주는 수비.

9회 초 원하의 공격이 끝난 뒤의 점수는 9 대 1. 광고가 끝난 후 마운드에 서있는 건 여전히 황혁준이었다.

“오늘 황혁준 선수가 경기를 마무리 지으려는 걸까요?”

“투구 수가 8회까지 98개였죠? 9회까지 올라오기엔 조금 애매하지 않나요?”

“아뇨, 황혁준 투수 말고 올라올 만한 투수가 없어요.”

권명훈 캐스터와 이영진 해설위원과는 다르게 김수찬 해설위원은 단호하게 황혁준의 9회 등판이 정답임을 역설했다.

“지금 점수 차가 8점 차인데, 현실적으로 본다면 원하가 이길 확률이 매우 크죠, 이번 경기는?”

아무리 시합의 극후반이라고는 하지만 섣불리 승부를 결정짓는 언사는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워낙 독설가 캐릭터에 하는 말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이 되어버리니 듣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고 듣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 또한 김수찬 해설과 같은 생각이었음도 한몫했고.

“그렇지만 어차피 9회를 막아야 경기가 끝나요. 지금 원하가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니에요. 점수가 더 필요한 것도 아니고, 상대 타선을 공 9개로 삼진 3개로 끝낼 필요도 없어요. 그냥 경기 마무리만 하면 돼요. 그렇게 경기를 끝내고 ‘기세’를 이어야 돼요.”

화면은 그라운드를 비추고, 황혁준이 연습 투구를 진행하고 있다.

“점수 차가 있으니까 다른 투수를 올린다? 불펜이 강하면 몰라요, 약점인 불펜이 올라와서 점수 주면? 줘도 몇 점 안 줄 테지만, 점수를 준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거죠. 내일 경기를 위해서.”

“실제로 지금 원하 불펜은 김한울 선수 외엔 딱히 눈에 띄는 선수도 없는 게 사실이구요.”

“그쵸. 이효재 선수를 올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지 모르지만, 아껴야죠. 아낄 수 있으면. 지금 황혁준 선수의 등판은 이 두 가지를 염두해 둔 거죠.”

강철 체력답게, 황혁준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155km를 상회하는 직구를 위시한 예리한 슬라이더는 아무리 팀 타율 1위의 팀이라고 해서 쉬이 넘볼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9회 말 KP 스타즈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인데요. 오늘 황혁준 투수는 8이닝 동안 안타 두 개와 볼넷 하나만을 허용하며 KP 스타즈의 타선을 확실히 묶어놓고 있습니다.”

“투구 수도 8회까지 98개로 아주 좋았구요.”

“삼진도 지금까지 11개나 솎아내었는데요, 삼진 개수에 비해 투구 수가 아주 적네요?”

“삼진을 주무기로 잡는 투수들은 보통 투구 수가 많다고 하죠. 맞는 말입니다. 왜냐면 삼진은 뭐 흔히들 최소 공 세 개, 초구에 카운트 잡으면 공 하나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극단적인 이야기구요.”

“초구, 낮게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입니다. 말씀 계속 부탁드립니다.”

“예. 아무리 땅볼, 뜬공으로 아웃을 빠르게 잡아낼 수 있다 해도, 그건 그 장면뿐이죠. 경기 전체를 두고 본다고 하면 모든 타자마다 그렇게 잡아내긴 어렵잖아요?”

“그렇죠? 모든 타자가 초구에 배트를 내주진 않을 테니까요. 2구는 직구가 높게 빠집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스터프를 가지고 있는 투수라면 확정적으로, 공 세 개로 카운트 하나를 잡을 수 있다는 거죠.”

“아, 생각을 바꿔서 해본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에는 강력한 구위와 좋은 제구가 필수지만요. 단순히 공만 빠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3구째도 직구가 높은 곳으로 빠지는데요. 카운트 2볼 1스트라이크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조금 놀란 게, 황혁준 선수가 원래 제구가 리그에서 수위권을 다투는 투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황혁준 선수의 제구는 마치, 같은 팀의 김한울 선수의 제구 수준을 보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영진 해설위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김수찬 해설 말씀을 듣고 나니 재밌네요. 이번 시즌 김한울 선수의 약진에 대해 물어보니까, 폼 적인 부분에 있어서 황혁준 선수를 많이 참고했다, 뭐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어떤 부분에 대한 참고일까요? 4구는 바깥쪽 직구를 지켜보는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합니다.”

“말을 하기로는 릴리스 포인트를 앞으로 당겼다, 그런 말을 했는데요. 그 부분에 있어서 황혁준 선수의 폼을 참고했다고 해요. 근데 이게 말이 쉽지, 남의 폼 가져다가 나한테 적용하는 것도 어렵고, 릴리스 포인트라는 게 자기 맘대로 앞으로 끌고 나오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또 아니거든요.”

“일종의 영업 기밀로 남겨 두고 싶은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허허허!”

“이번에는 존에 들어오는 높은 직구를 때렸는데요, 힘없이 높이 뜨며 좌익수 쪽으로 날아갑니다. 좌익수 유훈이 이미 자리를 잡고 쉽게 잡을 수 있는 타구입니다. 1아웃.”

이어 3번 타자 김기윤이 등장했다.

“이어 3번 타자 2루수 김기윤입니다. 오늘 앞선 세 타석에서 삼진 두 개를 당했지만 바로 직전 타석에서 좌익수 뒤를 넘어가는 솔로 홈런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초구는 바깥쪽에 직구인데요, 157km가 나옵니다.”

“빠르네요, 허허.”

“앞서 공격적인 투구에 대해 김수찬 해설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오늘 KP 스타즈의 선발 투수였던 임재혁 선수도 이와 비슷한 투수로 봐야 할까요?”

“그쵸. 다만 차이라고 하면 임재혁 선수가 황혁준 선수에 비해 비교적 경험이 적었고, 또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갔을 때 이에 대해 받쳐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없어 보였다는 게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구째 역시 바깥쪽 157km짜리 직구인데요. 이전 공과는 다르게 크게 빠지며 카운트는 1-1이 됩니다. 이영진 해설께선 현역 시절에 황혁준 선수와 맞대결해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아마 세 번 정도인가 해봤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기억나십니까?”

“아마 세 번 다 삼진 당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씀 안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황혁준 선수의 공을 체감하면 어떤 느낌인가요?”

“많은 분들이 단순히 황혁준 선수의 공이 빠르다, 그것만 보고 대단하다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것 말고도 봐야 할 게 더 있습니다.”

“몸쪽으로 꽂히는 155km 직구입니다. 어떤 게 또 있을까요?”

“바로 디셉션이죠.”

“디셉션이라고 하면 숨김 동작을 이야기하시는 거겠죠?”

“그렇죠. 화면으로 볼 때는 황혁준 선수의 투구 폼이 어딘가 특이하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딱히 받지 않을 텐데요.”

“맞습니다. 한가운데로 몰리는 156km 직구는 포수 뒤로 넘어가는 파울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타석에서 공이 나오는 게 잘 안 보여요. 155km짜리 직구가, 체감상으로는 진짜 165km짜리로 보입니다.”

“김수찬 해설께서 보시기엔 이영진 해설이 말씀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죠.”

“다시 한번 직구를 꽂아넣는데 한 번 더 포수 뒤로 넘어가는 파울이 됩니다. 156km!”

“의도하지 않더라도 머리 뒤에 숨겨 나오거나, 암 스피드가 평균보다 빠르거나, 몸에 감춰진다거나. 이런 부분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동작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6구째인데요, 몸쪼오옥!! 159km!!”

“이야…….”

“체감상 제 현역 때 두 배 정도는 빠른 것 같은데요? 허허허.”

김기윤 선수는 구심에게 살짝 깊지 않냐 어필을 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이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내야에서 라운딩된 공이 황혁준에게 돌아왔다. 다시 왼발로 마운드를 밟고 사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2017 KBO 준플레이오프 1차전, 원하의 승리가 되기까지 앞으로 아웃 카운트는 단 한 개가 남아 있습니다. 타석에는 4번 타자 김성수가 들어옵니다. 앞선 세 타석 삼진, 볼넷, 3루수 땅볼입니다.”

“아까 김수찬 해설께서 말씀하신 부분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점수 차가 나는 9회 말에 2아웃이라고는 하지만 KP는 쉽게 황혁준 선수를 놓아줘서는 안 되겠죠.”

“초구는 낮게 바운드 되는 공입니다.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홈런은 필요 없어요. 사실 이쯤 되면 안타도 딱히 필요 없어요. 볼넷은 크게 의미가 없고, 잘 맞은 타구, 그거 하나면 됩니다.”

“아, 안타나 볼넷도 크게 의미가 없다는 말씀은 조금 의외인데요.”

“점수 차가 8점 차인데, 카운트가 1개 남았어요. 카운트 하나를 걸고 최소 8점을 내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잖아요? 만약 그렇게 해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면 당연히 KP 입장에선 더더욱 좋겠지만요.”

화면 속의 황혁준은 양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새 공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게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KP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2구째는 높은 곳으로 살짝 빠지는 변화구인데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습니다. 그럼 김성수 타자가 말씀하신 대로 좋은 타구를 만드는 것이 KP에겐 어떤 실리를 가져다줄까요?”

“리그에서 타격을 주도하는 KP가 오늘은 황혁준 선수 한 명에게 꽉 눌려 제대로 된 무언가를 하나도 못 보여줬어요. 하지만 내일은 다르다. 내일을 두고 보자, 이런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거죠.”

“원하에게 말씀이신가요? 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카운트 2-1.”

“아니죠. 본인 팀인 KP에게 이야기하는 거죠.”

“팀 사기와 관련된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4구, 아 때렸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타구는 잘 맞아서 뻗어가는데에!!”

잘맞은 타구. 쭉쭉 뻗어나가는 공은 우중간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지만 그곳엔 이미 강성현이 공중에 몸을 띄운 뒤였다.

“우익쑤우! 강성현이 끝까지 따라가 다이빙을 하며 잡아냅니다! 이렇게, 2017 KBO 준플레이오프 1차전! 원하 챌린저스가 먼저 1승을 챙기고 내일을 향해 다시 도전하게 됩니다!”

2017 KBO 준플레이오프 1차전.

원하 챌린저스는 황혁준의 완투승, 윤승주의 만루 홈런 포함 2홈런 6타점을 등에 업고 쉽게 승리를 선점했다.

시리즈 스코어 1 대 0. 포스트 시즌 최하위 팀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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