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29화 (29/190)

29화. 어디 가면 진짜 뒤진다

시리즈 전적 2 대 1. 1차전은 혁준이의 완봉승으로 쉬이 승리를 챙기기는 했지만, 2차전과 3차전은 우리 팀의 약점과 단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완패. 그렇게 시리즈 스코어가 역전되었다.

거기에 우리 감독님은 한 가지 커다란 결단을 내렸다. 올 시즌, 선발 등판이 세 경기밖에 없던 나를 선발로 예고한 것.

위장 선발, 오프너의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최소 5이닝, 가능하다면 완봉승을 부탁했으니까.

“보자…….”

불펜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선발이든 구원이든, 정규 시즌이든 포스트 시즌이든, 심지어는 포스트 시즌 내에서 엘리미네이션 게임이든. 생각해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결국 똑같다. 던지고 이기는 것.

딱―

따악―

보올! 뽀오올!!

휘이익―!

각 팀에서 연습 배팅하는 소리, 그 파울 타구를 알리기 위한 소리 등등이 시끄럽게 섞이고 있었다. 침음성 한마디 내쉬고 불펜에 규학이가 들어오는 걸 보고 글러브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실 공을 던진다는 행위에 대해 그리 어렵게 생각할 건 없다.

전설적인 대투수 선배님께서 말씀하셨지. 어렵게 생각하니까 어려워지는 거다.

맞는 말 같다. 거기에 덧붙여 한마디를 더 하셨다.

조금 전 상황, 이다음 상황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지금이다, 지금 당장에 해야 할 것을 우선으로 생각해라, 그리고 실행해라.

2회에 7번 타자 신용희에게 뜬금포 한 대 얻어맞고 1 대 0으로 끌려가던 4회 말 우리의 공격. 덕아웃에 앉아 멍하니 팀의 공격을 지켜봤다.

우리의 공격은 6번 성훈이 형부터. 매 이닝 주자들이 나가고는 있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KP의 오늘 선발은 김무중. 팀 내에서 맡은 임무는 스윙맨이기는 하지만 주로 불펜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나와 비슷한 위치. 하지만 아무래도 나보다는 조금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초구와 2구를 지켜본 뒤 3구와 4구를 연속으로 커트했다. 카운트는 여전히 0-2. 짧은 인터벌 후 던져진 공은 딱히 좋은 소릴 내지 못하고 유격수 쪽으로 굴러갔다.

어… 와오아아―!!

하지만 멋들어지게 알을 하나 까버렸다. 선두 타자 출루.

흐름의 스포츠라는 야구. 우리 팀의 흐름과 상대 팀의 흐름, 과연 어느 쪽의 영향이 더 클까.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흐름이라는 것 또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

상대방이 떨어지든, 우리가 올라가든은 중요하지 않다. 너네가 20, 우리가 30이니까 우리가 더 높아! 를 경쟁하는 게 아니라 100이라는 큰 그릇을 두고 50 대 50으로 싸우다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그릇은 40. 하지만 방금의 실책으로 우리의 지분이 조금씩 늘어가는 걸까.

“이어가, 이어가!!”

이번엔 3루수 하은민의 송구 실책. 정확하게는 1루수 안병국의 포구 실책.

그리 멀리 튕겨 나가지는 않았기에 성문이는 1루에 멈췄지만 타격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성훈이 형은 이미 3루에 안착한 뒤였다.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소모하지 않고 맞이한 1, 3루의 찬스. 더구나 우리가 잘해서 만들어진 게 아닌 상대가 못 해서 만들어진 찬스.

상대방이 강제로 그릇에서 두 숟갈, 세 숟갈을 퍼서 우리 입으로 떠먹이고 있었다.

이럴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

“베이스 온 볼!”

가만히 받아먹는 거.

타격에서 영 활약을 못 하는 규학이까지 가만히 서서 공 네 개를 지켜보고 누에 걸어갔다.

알아서 자멸해 주는 상대를 앞에 두고 굳이 무언가를 하려 안 해도 된다. 여기서 뭔가를 해보겠답시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스윙, 아웃.”

이렇게 된다.

무사 만루를 두고 9번 타자는 스윙 세 번으로 아웃 카운트 하나만 헌납하고 돌아왔다.

아…….

제발.

세 번째 스윙이 끝나자마자 덕아웃 쪽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어떻게든 감춰보려고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감정을 그리 쉽게 억누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나조차도 한숨을 쉬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만루잖아?

행복 회로를 돌려본다.

볼 두 개를 먼저 보고 시작한 1번 타자 명진이의 타석. 그다음 공은 바깥쪽 애매한 직구를 하나 지켜보았고, 그다음으로 들어온 슬라이더에 파울이 나며 2-2의 카운트가 됐다.

만약 여기서도 점수를 못 낸다면? 그대로 경기 포기해도 난 후회가 없다.

“빠졌어, 고고고고!!”

오.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는지, 살짝 무리하며 던진 변화구가 포수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백보드 쪽으로 굴러갔다.

포수가 서둘러 달려가 잡은 뒤 홈으로 커버 온 투수에게 던졌지만 그것마저 한 번 더 빠져나가며 그라운드 쪽으로 강하게 굴러갔고, 빠르게 백업 와있던 유격수가 잡으며 2루 주자까지 들어오는 걸 막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점수는 1 대 1로 이제 동점.

주자를 2루와 3루에 두고 타자와는 3-2 카운트.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의 험난함에 이미 한 번 삐끗한 투수는 높은 직구로 볼을 하나 추가하며 다시 만루를 채워버렸다.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팀 내에서 타격으로 보자면 가장 믿음직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2번, 성현이.

파워, 정확, 주루, 수비, 송구.

타자를 평가하는 가장 흔하고도 정확한 다섯 가지 툴 모두가 가장 뛰어난 간판타자.

따아악―!!

와아아아앙아!!

“갔어, 갔어!”

“왈아!!”

“갔다아아악!!”

믿었다. 그 대가로 은총을 받았다.

“이야아!”

“새끼, 됐어!”

“제에에엔장!!”

“믿고 있었다구!!”

퍽, 퍽―

“악, 윽, 아파! X발!”

만루 홈런에 대한 대가는 팀원들의 애정 가득한 터치였다.

성현이가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팀원들의 애정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동안 3번, 그리고 4번 타자가 범타로 물러났지만 4회 말에만 무려 다섯 점을 뽑아내며 동점을 넘어 네 점의 리드를 챙겼다.

4회 초까지의 투구 수는 68개. 8회까지만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다면, 9회에 이효재 선배가 막아준다면. 5차전까지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퀘스트.

띠링―!

[엘리미네이션 게임!]

- 경기를 승리로 이끄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5회 초 수비, 마운드에 올라 플레이트를 발로 슥슥 닦으며 퀘스트 내용을 복기했다. 완봉을 해라, 완투를 해라, 하물며 승리 투수가 되라는 말도 아니다. 이번 게임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 퀘스트의 내용을 떠나 이기고 싶다.

“플레이!”

그러려면 내가 잘해야겠지.

5회 초는 6번 타자 이창현부터.

플레이트를 밟은 채 규학이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평소에도 좋았지만, 오늘따라 규학이의 흐름이 좋다. 굳이 고개를 젓지 않아도 좋은 사인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도, 그다음의 백업이 좋다.

바깥쪽 직구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던진 공이 볼, 그다음으로 던진 슬라이더는 지켜보며 스트라이크,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던진 바운드되는 포크볼에 헛스윙,

“츄라아악!”

그리고 몸쪽 높은 곳으로 꽂히는 직구에 움찔거리기만 하고 지켜보며 삼진.

손가락에 묻어 있는 로진의 상태가 괜찮았기에 딱히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내야수들이 라운딩하는 걸 지켜봤다.

“나이스으!”

마지막으로 공을 받았던 성문이가 던져주는 공을 받고 다시 플레이트에 섰다.

7번 타자 신용희. 체구가 매우 작고 말랐다. 파워는 없다. 타율이 3할 플랫으로 높은 편이지만 맞아봐야 별 타격은 없다. 체구에 비해 발도 느린 편이기에 주자로서의 부담도 덜하다.

“스락!”

구심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스플리터가 존을 통과했음을 인정했다. 한 번 더 포크볼. 이번엔 바운드되게.

틱―

그런 공을 굳이 건드렸다. 한 손을 놓으면서까지 컨택된 공은 1루수 기성이 쪽으로 펑고와 비슷한 바운드로 갔고 굳이 안 와도 된다는 수신호를 보내며 본인이 직접 1루 베이스를 밟았다.

다음 타자가 타석으로 들어올 동안 기성이가 바로 유격수에게 공을 던졌고 유격수는 2루수에게, 2루수는 3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성훈이 형에게서 공을 받고 마운드에 섰다. 문득 공 던지는 기계가 된 것 같아 웃겼다. 피식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힘들게 억눌렀다.

8번 타자 이경무. 바로 직전 타자인 신용희와 매우 비슷한 유형의 타자다. 다만 타율이 조금 더 높은 대신 파워에서 조금 더 떨어지는 느낌. 하지만 크게 차이가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다.

“볼.”

“파울!”

“스트랔, 투!”

“볼.”

“파울!”

2-2에서 던진 포크볼을 커트해 냈다. 확실히 앞선 신용희보다 컨택에서는 조금 앞서는지, 땅에 처박히려는 공을 억지로 밀어내며 파울을 만들어냈다.

“파울.”

“파울!”

“파울―”

그다음 세 개가 더 커트되었다. 갈 길 바쁜데 이러고 있는 게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고 아까 생각한 기계처럼 플레이트에 다시 섰다.

후…….

몸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낮게 떨어지는 커브,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

커트해 낸 최근 세 개의 구종이다.

“파울, 파울!”

그다음 바닥으로 떨어지는 포크볼을 커트해 냈다. 타구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타자의 발을 스쳐 맞고 나왔는지 구심은 두어 발 정도 나서며 이전 콜보다 크게 파울 사인을 보였다.

그럼 이다음 공은 그건가.

검지 손가락 하나.

맞네.

사인을 접수하고 양손이 머리 뒤로 넘어감과 동시에 왼발이 한 발 뒤로 빠졌다. 보일 듯 말 듯한 정도로 허리의 반동이 시작되었다.

힘차게 왼발이 날아올랐고 빠르게 골반이 앞으로 전진했다. 왼발이 땅에 닿자마자 엉덩이가 빠르게 돌았고 그 힘으로 상체가 끌려 나왔다.

펑―!

“스윙, 아웃!”

몸쪽 높은 쪽 직구. 규학이 오늘 리드 좋네.

5회까지, 84개로 마무리. 이어 공격에서 한 점을 더 추가하며 점수는 6 대 1이 되었고 6회 말 수비에선 공 딱 16개를 던졌다.

9번에게 1루 강습, 1번에게는 삼진. 중간에 2번한테 뜬금포 하나를 또 얻어맞긴 했지만 3번을 3루수 직선타로 처리하며 6이닝 2실점, 투구 수는 딱 100개.

“고생했다.”

“예이.”

6회에 들어와 확실히 공에 힘이 떨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강한 타구를 세 개나 맞았다. 그중 하나는 호수비, 또 하나는 직선타로 잡혔고 나머지 하나는 홈런이었다. 내려올 때가 됐다. 이제는 운명에 맡기는 것밖에 없다.

그냥 제가 7회까지 던지면 안 될까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라왔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여기서 더 던지겠다고 진상 부려 봐야 내 손해다. 우리 불펜진이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거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따악―!

“…아.”

믿은 내가 병신인가.

7회 초 수비부터 그런 소리가 나왔다. 다섯 점의 리드는 두 점의 리드로 줄어들었다.

8회 초부터 이효재 선배를 투입하는 강수를 띄웠다. 성공했다. 8회 말에 한 점을 다시 도망가면서 리드는 석 점으로 불어났지만 사건은 결국 9회 초에 다시 한번 터졌다.

4번 김성수부터 시작하여 홈런, 볼넷, 뜬공, 안타, 2루타, 삼진, 안타, 홈런, 땅볼. 타자 일순을 허용한 수비의 결과는 처참했다. 세 점의 리드라는 상태는 동일했지만 그 주체가 바뀌었다.

석 점 뒤진 채로 맞이한 9회 말. 허무하게 땅볼과 뜬공으로 2아웃이 되자 응원석의 홈팬들은 처절하게 우리를 응원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이 가을의 향취를 이대로 보내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스트랔, 욱!”

하지만 보내주기 싫어도 보내줘야 하는 것이 있는 법. 그게 우리의, 올해 원하의 가을 야구였다.

시리즈 스코어 3 대 1. 팀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확연하게 보여주고 가을의 야구가 끝났다. 모두 정리되고 슬슬 대부분이 퇴근할 때까지, 난 덕아웃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2017년도 원하 챌린저스의 야구는 이제 끝이 났다. 하지만 내 야구는 아직 안 끝났다.

남을 거지?

형, 남아줘요.

너 어디 가면 진짜 뒤진다.

“…….”

아직, FA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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