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30화 (30/190)

30화. 계약

준플레이오프는 시리즈 스코어 1 대 3으로 졌다.

우리를 이기고 올라간 KP는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동성 호넷츠와 시리즈 스코어로 2 대 4로 패배했고, 동성은 4 대 떡으로 깨지며 역대 가장 재미없는 한국 시리즈가 되어버렸다.

개노잼.

요 몇 년, 리그 팀 순위가 상당히 고착되어 있었다. 1위 하면 결국 성수, 콩라인에는 동성이 있고 나름 중상위권엔 KP와 비스코, 중하위권에 가야와 원하, 하위권인 성운과 최약체인 한성.

약간의 순위 변동이 있다고 해봐야 맞붙어 있는 팀들끼리 투닥거리다가 한 계단이 바뀌는 정도.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번 시즌 가장 이변이었던 건 우리 원하였다.

끽 해봐야 한 계단 움직이는 게 전통이었는데, 무려 두 계단이나 상승해서 4위에 올랐었으니까. 그리고 덕분에 팀의 장점과 단점이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난 시리즈였다.

장점. 선발진, 수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끈끈한 그 무언가.

단점. 불펜, 불펜, 불펜, 불펜, 不펜, 火펜.

아마 이번 시즌이 끝나고 FA 계약이 끝나게 되면 구단 프론트는 머리가 좀 아프지 않을까. FA가 되었든 트레이드가 되었는 불펜진 보강을 좀 확실히 해야 하는데, 쉽진 않을 거다.

FA야 단순 계약이니까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트레이드는 글쎄.

누가 봐도 불펜이 약점인 팀에 불펜을 트레이드해 주는 트롤 구단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사기꾼일 것이다. B급 불펜 하나 줄 테니 A급 타자 가져가려는 거다. 헌 집 줄 테니 새집 달라는 양아치가 따로 없다.

구단 운영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구단은 아마 목숨 걸고 나를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이전 연봉도 최저가에 가까워, 활약은 A+급이야, 날 사면 보상 선수를 안 줘도 돼… 등등.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근데 그런 것치고, 날 만나러 온 이 사람의 얼굴엔 그런 절박함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요. 올해 영진 씨 인센티브 좀 받으시겠어요.”

“제가요?”

“영진 씨 아니면 저 원래 작년 끝나고 은퇴하려고 했잖아요. 영진 씨 덕에 붙어 있다가 대박 났는데, 인센티브도 없어요?”

“오… 듣고 보니 그러네. 찔러봐야겠다.”

그래서 좋았다.

구단 프론트 직원인 권영진 씨. 나이는 30대 초반. 알게 모르게 알뜰살뜰히 날 뒤에서 많이 챙겨준 사람이다.

그래, 신청했다. 슬슬 연예인 병 같은 게 들었는지, 슬슬 나도 뭔가를 사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한국 시리즈까지 끝나고, KBO의 8개 구단 중 원소속팀인 원하를 포함해 총 6개 팀에서 연락이 바로 왔다.

어느 팀들이라고 이야기는 못 하겠다만, 그만큼 이번 시즌 내 위상은 대단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주었다.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작년 시즌과는 정반대로 올해는 타고투저의 시즌이었다. KBO 리그 불펜진의 평균 자책점은 5.12. 그런 와중에 내 성적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58게임 71이닝 1.47 10승 1패 35홀드 10세이브 71삼진 36볼넷 0사구 WHIP 1.16. 리그 홀드왕. 리그 불펜 투수들 중 최소 평균 자책점 1위, 다승 1위, 삼진 1위, WHIP 1위. 승, 홀드, 세이브의 트리플 더블까지 완성.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FA 선수들 중 단연코 최대어가 된 것이다.

“김치찌개 사주십쇼.”

“오예.”

시즌 전 이 남자가 했던 말. 만약 이번 시즌에 잘되면 김치찌개나 사달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구장 근처 찌개 맛집으로 향했다. 단츨한 인테리어의 찌개집이었다.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는지 원목으로 만들어졌을 식탁이나 기둥, 평범하게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어진 바닥엔 파손의 흔적이 여실했다.

하지만 나와 영진 씨는 이곳을 참 좋아했다. 맛이 있기도 있거니와, 여기 오면 괜히 편안해지거든.

“김치찌개 2인분 주세요. 햄 사리 넣어주시구요. 아, 제육볶음도 주세요.”

“제육은 2인분부터 되는데, 어떡하실래요?”

“어… 그럼 찌개 하나랑 제육 두 개 돼요?”

“네네.”

“그럼 그렇게 주세요.”

이모에게 주문을 마치자 영진 씨가 실실 웃으며 쳐다본다. 괜히 찔린다.

“찌개는 영진 씨 다 드세요.”

“아뇨. 여기 찌개도 찌갠데, 제육 맛집인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감이죠.”

올. 제육 맛집.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둘 사이에 오간 말은 FA 계약과는 아주 먼 이야기들이었다.

1년간 어떻게 지냈다를 서로 소개하기 바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웠던 점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오후 2시, 조금 늦은 점심시간에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꽤나 널찍한데 우리 포함해서 세 테이블. 그나마도 우리 말고 나머지 두 테이블은 우리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을 무렵 계산하고 나갔다.

“오.”

새빨갛게 윤기가 가득한 양념. 탱글탱글한 고기. 뜨끈뜨끈하게 올라오는 하얀 김.

제육 맛집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얼른 젓가락으로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크으…….”

겁나게 맛있다.

“드세요. 뭐 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더 드시고. 음료수라도 드실래요?”

“그럼 사이다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이모! 콜라랑 사이다 하나씩 주세요!”

곧장 이모를 불렀다. 뚜껑이 따진 음료수병 두 개와 다른 플라스틱 컵 두 개가 배달되었다.

“아이고, 올해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한울 씨도 고생하셨습니다.”

백주 대낮부터 술을 처먹을 수는 없으니, 음료수를 마치 술 따르는 것처럼 두 손 공손히 서로가 서로에게 따라주었다.

깜찍하게 공중에서 짠― 까지 하고 몇 모금 마시니 맥주보다는 아무래도 덜하지만 청량감이 생겼다.

“영진 씨.”

“네.”

이후, 별다른 말들 없이 밥 먹는 데에만 열중하다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저랑 계약하고 싶어 하죠?”

“당연하죠. 원하 말고도 이미 다른 구단에서도 연락 오지 않았어요?”

“음…….”

살짝 고민했다.

“네. FA 얘기하자마자 바로 연락들 오더라구요.”

“오, 대박.”

남의 일인 양. 그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몇 개나 왔어요?”

“원하 빼고 다섯 개.”

“대박. 아, 그럼 여기서 이 대사를 쳐야 하나.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미친, 억.”

뜬금없는 개드립에 김치찌개의 고춧가루가 숨구멍을 콕 찔렀다.

캘럭콜룩큭크헉.

잠시 좀 추하게 기침을 하다가 진정이 되었다.

“근데 그냥 원하랑 계약하려구요.”

“저희 얼마 드린다고 말도 안 했는데요?”

“잘 챙겨주실 거 아니에요?”

“잘 챙겨드려야죠? 근데 지금 내부에서 정한 금액에다가 얼마 추가해야 될 것 같은데.”

호오…….

“그럼 오히려 제가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여기.”

그는 파일철 하나를 내밀었다. 겉면의 ‘원하 김한울 선수 FA 계약 가이드’라는 깔끔한 타이핑이 되어 있었다.

표지를 열고 첫 장을 확인했다. 첫 장부터 팩트가 씨게 아팠다. 내 약점들이 써 있었으니까.

많은 수술 이력, 많은 투구 이닝 수, 한계점에 다다른 듯한 내 구속, 작년까지의 처참한 성적과 올 시즌의 최고의 성적을 더해도 여전히 맘 아픈 통산 성적.

두 번째 장엔 반대로 올 시즌 내 활약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떤 점을 잘했고, 어떤 때에 어떤 점이 뛰어났으며 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잘 헤쳐나가리라 예상된다.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나의 이야기를 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다음 장엔 최근 몇 년 FA 계약들에 대한 흐름들에 대한 정리였다.

나와 비슷하지만 살짝 아래의 성적을 기록했던 선수들이 몇 년 얼마를 받았었는지, 나보다 못한 선수들은 또 몇 년에 얼마를 받았는지.

재미있는 건 나보다 좋은 성적으로 계약한 선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장.

“…진짜요?”

“네?”

“진짜 이렇게 준다구요?”

“아, 마지막 장 보셨어요?”

입으로 향하던 젓가락을 멈추지 않고 영진 씨는 대답했다.

“…네.”

“네. 일단 그건 일차적인 금액이에요. 아무래도 아까 말씀하셨던 것 중에 다른 구단들에서 연락이 왔었다는 게 좀 걸리네요. 일단은 거기에 있는 보장 연도와 보장 금액은 최저선이라는 거 감안해 주시구요, 저도 구단에 돌아가서 몇 가지 더 말씀드리…….”

“할게요.”

“…고 진행… 네?”

“할게요. 그냥 이걸로 할게요.”

“어…….”

여기선 진짜로 놀랐는지 그 넉살 좋은 영진 씨도 살짝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진짜 그것만 받으시게요?”

“이것도 많은데요.”

“아니, 잠깐만. 액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본다면 많은 금액이기는 해요. 억 단위의 돈이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근데 한울 씨, 잘 생각해 봐요. 다른 구단들에서 실제로 연락이 왔잖아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는 모습은 영진 씨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둘도 아니고 우리 빼고 다섯 개라면서요? 이건 무슨, 경매 수준이에요. 지금까지의 연봉 때문에 그 금액이 커 보일 수는 있는데,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구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예?”

선수는 적게 달라고 하고, 구단은 많이 준다 하고.

일반적인 그림에선 절대 상상하려야 상상할 수가 없는 그림이 홈구장 옆 김치찌개 집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제가요.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멋진 놈 되는 거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돈 얼마 깎는다고 의리있는 놈 되는 거 아닌 것도 알고. 기사 같은 거엔 좀 멋있게 나가겠죠.”

흐뭇하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근데… 최소한 은혜는 아는 놈이거든요. 그렇게 알려지고 싶고. 미디어 데이 때 이미 다 불어버렸어요. 기억하세요?”

“어떤 거요?”

“기자들이랑 얘기할 때. 은퇴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막았다. 오히려 연봉 올려줬었다.”

“아… 네. 기억나요.”

“그냥, 구단에서도 좋게 생각하세요. 아, 천오백만 원짜리 투자가 제대로 먹혔구나.”

“…….”

씨익 웃으며 서류철을 덮고 다시 영진 씨에게 내밀었다.

“저한테 줄 돈 아끼고, 그 돈으로 다른 불펜 투수나 데리고 와줘요. 올해 봤잖아요. 나, 미디어 데이 때 한 말 때문에라도 좀 그래 줘요.”

“또 뭐라고 하셨었죠?”

“3년 안에 한국 시리즈 우승한다고 씨불였는데, 아 왜 그랬지. 미친놈인가.”

“아하하핫!”

그에 영진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돌아가서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네. 일어나시죠.”

식사는 이미 마친 상태. 이야기도 마쳤다.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이 되자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카운터로 향했다.

“2만5천 원입니다.”

“넹.”

카드를 이모한테 건넸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그럼 들어가십쇼.”

“예. 영진 씨도요.”

“일단 오늘은 가계약 정도의 느낌이니까요. 한… 이틀? 정도 후에 다시 오셔 가지고 그때 진짜로 도장 찍으시면 돼요. 내일 시간이랑 해서 연락 드릴게요.”

“네네. 연락 기다릴게요.”

악수 한 번. 살짝 내가 힘을 써서 영진 씨와 포옹 한 번.

영진 씨는 남자와의 포옹에 살짝 극혐 하는 눈치였지만 지금의 내 기분은 너무 좋았기에 애써 무시했다.

* * *

[오피셜][단독] 김한울, 원하와 4년 50억 보장 FA 계약 완료.

[구단주와 김한울이 구단 마크가 프린팅된 벽 앞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2017시즌 KBO 리그가 종료되고 난 뒤 가장 빠른 1호 FA 계약이 성사되었다. 원하 챌린저스의 김한울(28)이 그 주인공. 4년 동안 원하의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되었다.

계약 기간은 4년이며 계약금 20억, 연봉은 7억5천만 원으로 최소 보장액은 50억, 그 외 인센티브나 옵션 등에 관해선 공개하지 않았다. 역대 불펜 투수들 중에선 단연 역대 최고 계약이다.

올 시즌 김한울의 활약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불펜 투수였다. 투고타저였던 작년과는 정반대로 타고투저의 시즌이었다. 그런 와중에 71이닝 동안 1.47의 평균 자책점만 허용하는 최고의 모습을 보였다.

그중 세 경기는 선발 경기로 나서 5이닝 무실점, 6이닝 2실점, 6이닝 1실점으로 선발로의 가능성도 선보였고 6년 만에 진출한 포스트 시즌에서도 2차전에서 1이닝 무실점, 4차전에서는 한 번 더 선발 등판하여 6이닝 2실점의 호투를 보이기도 했다.

올해 김한울의 활약상을 나타내는 지표는 이뿐만이 아니다. 35개의 홀드로 리그에서 홀드 단독 1위이며 10승과 10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불펜 투수들 중 평균 자책점, 다승, 삼진, WHIP 부문에서 각각 1위의 압도적인 활약이었다.

구단 관계자는 올 시즌 원하 챌린저스의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점, 또한 현재 리그에서 김한울 이상은커녕 김한울보다 살짝 아래 정도의 불펜 투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금액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김한울은 ‘작년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오히려 연봉을 높여주며 은퇴를 막았다. 원래는 구단 측에서 더 준다고 했는데 그 은혜를 알기에 내가 더 깎았다. 근데 내 성의를 무시하고 구단이 멋대로 금액을 더 올렸다. 내가 깎으려고 하자 더 올려버리기 전에 빨리 사인하라고 재촉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로써 원하는 리그 최고의 불펜 투수인 김한울을 다시 품에 안게 되었으며, 이를 발판삼아 올해 준플레이오프 참패의 설움을 잊고 다시 재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rk31****

└됐따아!!

추천 3,946 비추천 335

―stoe****

└와… 내가 알던 김한울이 맞냐. ㄹㅇ 가슴이 웅장해지네

추천 3,212 비추천 121

―aiwd****

└오버페이 걱정이 안 드는 건 아닌데, 근데 얘보다 못한 애들이 얘보다 훨씬 많이 받는 게 사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추천 2,255 비추천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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