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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31화 (31/190)

31화. 주책과 팔불출 그 사이 어딘가

와, 실환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50억.

말이 50억이지.

“…느헷.”

최근 10년 동안의 고생이 떠올랐다. 최저 연봉에 가까운 돈을 받으며 생활했다. 약 3천만 원 정도.

적은 돈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 돈으로 나는 내 월세, 생활비, 야구용품에 들어가는 돈 등을 모두 충당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얼마 안 됐다.

하지만 그런 금전적인 부분보다 더 가슴 아픈 게, 나를 향한, 나를 믿어주고 써주는 사람들에 대한 욕들.

저런 거 왜 쓰냐?

“…스탯.”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하

포심 ― 57

커브 ― 46

슬라 ― 34

스플 ― 40

체인 ― 45

싱커 ― 4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모두 이 시스템, 스탯 덕이겠지.

“…….”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컴퓨터로 시선이 갔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컴퓨터의 파워를 켜고, 풀카운트에 접속했다.

내 팀 내에서 1선발 자리에 자리하여 공 던지는 모션을 보이고 있는 M 등급의 김한울 투수.

멍청히 쳐다보며 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게임 속 캐릭터만 쳐다본 기억만 남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들고 키패드에서 1번을 꾸욱 눌렀다.

“…어, 엄마.”

- 아이고, 아들. 고생했다. 맘고생 많았지.

“맘고생은 무슨. 엄마가 제일 맘고생 했지.”

- 나랑 네 아빠는 잘 있어. 걱정하지 말고, 넌 너 할 거 해. 이번에 4년 하고 끝날 거 아니잖아. 4년 뒤에 또 계약하면 그때 더 받어.

허허허. 어머니.

“10억 보냈다.”

- 뭐?

“10억 보냈다고.”

- 아유, 그걸 왜!

“왜긴. 효도 한번 해보려고.”

- 너 돈은! 너 쓸 건 남겨야지야!

“그거 보내도 한참 남았어. 걱정 말고, 얼마 못 보내서 미안해. 소고기 사 먹어요. 집은 아빠 집이니까 걱정 없네. 돈 더 벌면 아빠한테 차 바꿔준다고 얘기 좀 해줘. 엄마도 돈 아끼지 말고. 아니, 아끼는 건 아끼는 건데. 막, 어? 이상한 데다가 돈 아끼지 마. 이제 시장갈 때 택시 타고 다녀요. 김 여사 무릎 좀 생각해야지.”

- 아직 쌩쌩한데 무슨 택시여. 그런 데다가 돈 아끼는 거여!

“아니이이. 그런 거가 쓸데없이 돈 아끼는 거라니까. 택시비 얼마나 한다고. 좀 편하게 살어, 이제 좀. 이걸로 끝 아니고, 더 나오면 더 보낼 테니까,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김 여사 아는데, 분명 이걸로 호화롭게 움직인다고 택시 말고 버스 탈 사람인 거 알거든. 택시 타, 진짜. 진짜 나 확인한다.”

- 아이고 내 새끼…….

“아빠한테 안부 전해 주고. 나 나가봐야 돼서 끊을게.”

- 그래그래. 고생 많았다. 다치지 말고. 돈도 돈인데 다치지 말고. 그게 제일 중요해.

“다칠 게 뭐 있다고. 걱정 말고.”

- 그래. 사랑한다 아들.

“어, 어어…….”

…나도 사랑해.

이 다섯 글자가 입 밖으로 나왔어야 했는데. 끝내 꺼내지 못했다. 그 대가는 눈에서 흘러나왔다. 눈 옆으로 눈물이 흐른 자국이 너무나 따가웠다.

* * *

입단하면서 받았던 계약금에 이번 FA 계약으로 받은 계약금을 더한 뒤 지금까지 살아오며 쓴 돈과 엄마한테 보내줬던 돈을 뺀다. 그래도 아직 어마어마한 금액이 남아 있다.

“오…….”

문이라고는 현관문, 주방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 방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밖에 없던 원룸에서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산 건 아니고 전세로.

방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도 그렇지만 거실이라는 개념의 공간이 생긴 게 참 신기했다. 신축 빌라였는데 이 부분에서 구단의 지원과 집주인 분이 원하의 골수 팬이었다는 점에서 몇 가지 혜택을 받아 아주 좋은 조건으로 입주했다.

방 하나는 당연히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나머지 방 하나는 가볍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내 야구용품들, 그리고 약소하지만 내 기념품들이 자리해 있다.

2017 KBO 홀드왕.

원하 챌린저스 4 김한울.

약소한… 트로피 하나.

삐빅―

그리고 무엇보다 차가 생겼다. 이 점이 제일 중요했다. 뚜벅이 생활에서 벗어나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을 때 움직일 수 있다는 이점은 생각보다 중요했으니까.

“흐헷…….”

삑―

삐빅―

삑―

삐빅―

삑―

신기해서 차 문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연타하며 자동으로 열렸다 잠겼다 하는 차를 구경했다.

원하 자동차 라인업 중 대형 세단 라인업에 속하는 리마인. 옵션이란 옵션은 다 때려 넣었다. 난 소중하니까.

원하 챌린저스 소속의 선수답게 원하의 차량을 선택했다. 경차, 소형차, 중형차 다음 단계인 대형 세단.

영진 씨와 함께 자동차 매장에 들어갔을 때, 딜러의 모습이 아직도 생경하다. 그 약간 기함을 하는 듯한 그 표정이란.

최고 트림에 풀 옵션. 6천4백에서 이런저런 프로모션이랑 딜러 할인, 그리고 원하 계열사 직원 할인 등등 죄다 때려 넣어서 5천5백까지 떨어진 금액을 일시불로 촤악 긁을 때의 쾌감이란.

X발, 이 맛에 돈 쓰지.

며칠 뒤, 차량을 인수하자마자 바로 운전하여 영진 씨를 태웠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기에 이 양반 태우고 스테끼나 썰러 갔다.

주말 저녁에 시꺼먼 남정네 둘이서 고오급 스테끼를 썰러 가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영진 씨나 나나 그런 부담은 딱히 느끼지 않았다.

그냥 행복했고 재밌었다. 생각해보면 덩치 큰 남정네 둘이서 꺄르륵거리며 빨빨빨 돌아댕기는 꼴이 꽤나 웃겼다.

한 보름 뒤면 이 차 냅두고 또 전지 훈련을 가야 한다. 영진 씨는 전지훈련 갔다 와서 사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지만 난 무시했다.

차! 내 차!

“으흣.”

삐빅―

잠겼던 문이 다시 열리고 운전석에 탔다.

“좋아… 좋아… 크.”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 버튼을 누르자 조용하게 부르릉 한 번 하고는 계기판과 화면에 불이 켜졌다.

잠시 기다렸다가 매립되어 있던 네비에 가야 할 주소를 찍었다.

사이드를 내리고 기어 버튼에 붙어 있는 버튼 당기자 후진 기어로 들어가며 네비 화면에 차 뒤의 화면이 펼쳐졌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도 같이 확인하며 차를 뺀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 20분 정도 걸린 운전. 안전하게 차를 주차한 뒤 내려서 차 문 손잡이의 버튼을 눌렀다.

삐빅―

삑―

삐빅―

삑―

아, 가자.

삐빅―

철컥하는 소리에 안심하고 바로 옆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 오셨어요?”

“네네. 오랜만이네요.”

오늘은 생각보다 사람이 꽤 있다. 당황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나를 맞아주는 사람 맞은 편에 앉았다.

“하아… 진짜 다행이네요.”

“어떤 게요?”

“한울 씨가 원하에 남아주신 거요!”

민영 씨는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으며 박수 쳤다.

“구단에서 더 준다고 했던 게 진짜예요?”

“아… 네. 근데 제가 부담스러워서 깎았어요.”

“왜요오!”

이전에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한 번 더 연설.

“와… 인성.”

내 이야기에 감동한 거 같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새삼 찐 원하 팬이다.

“그래서 구단 직원분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 줄 돈 아껴서 그 돈으로 다른 불펜 투수나 사오라고.”

“그것도 좋네요. 준플 때는 좀 심하긴 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상욕하시는 거 진짜 오랜만에 봤어요…….”

“하하…….”

사귀는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뭐 썸을 타는 사이도 아니고.

그런 잿밥에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난 내 급을 안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의 이목을 잡아끌 정도로 아름답게 웃는 사람, 알고 보면 대단한 직업과 부를 축적해 놓고 있고 그 뒤엔 상상 이상의 대단한 집안이라는 점은 당연히 주눅이 들 수밖에.

언감생심, FA 대박 한 번 터뜨렸다고 나대지 말자.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자주 만난다고 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좀 이상하고. 진짜 어쩌다가, 서로 시간이 되면 만나서 커피 한잔 하고 밥 먹고 딱 그 정도.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야구 이야기뿐.

짝!

“아, 맞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박수를 치며 새로운 운을 띄웠다.

“그… 한울 씨. 좀 부탁이 있는데요.”

“네?”

“저기…….”

자꾸 눈치를 본다.

“그… 진짜 어려운 부탁인 건 아닌데요. 저도 좀… 떠밀려서 받은 부탁이라서…….”

“아… 네.”

뭐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설마, 진짜 무슨 승부 조작 같은 브로커와 연결되어 있던, 그럼 사람인가?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할 사람도 아니고.

“그… 저기… 그게…….”

계속 말을 끌며 이야기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니까요오, 그.”

그러다 이내 결심했는지 이를 악물고 서두를 꺼냈다.

“저희 아버지 좀 만나주실 수 있으세요?”

“예?”

“그 몇 번인가 말씀드렸었잖아요? 저희 아버지도 원하 팬이시라고 말씀드렸었죠? 오늘 집에서 나오는데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구요, 어디 가냐고. 그래서 그… 무의식적으로 한울 씨 얘기를 해가지구, 그…….”

“아아.”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막 이상한 애교까지 피워가면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안 그러면 자기 삐칠 거라면서.”

민영 씨는 하아, 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음 대사를 이었다.

“말도 없이 같이 나오는 건 아무래도 실례니까, 얘기는 해보겠다고 했거든요. 아, 물론 부담되시면 거절하셔두 돼요. 그 점도 미리 얘긴 해뒀으니까요.”

“아뇨, 뭐… 괜찮아요.”

“아, 진짜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항상 저 응원해 주시던 분 아버지 뵙는 건데요. 그 아버지 분도 제 팬이시라고 하면 더더욱 감사하구요. 아니지, 제가 대접 한번 해드려야겠네요.”

화악― 하고 밝아지는 민영 씨의 표정.

이내 전화기를 꺼내 들더니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네, 괜찮으시대요! 네, 조심히 오세요!”

“…저기.”

“네!”

“지금요?”

“아, 네.”

저도 사람인데. 마음의 준비라는 게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현실에서 마음의 준비를 바랄 수 있는 건 몇몇 기득권뿐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인 나는,

“…….”

“…….”

민영 씨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중년의 남성분과 마주 보게 되었다.

무섭다.

민영 씨랑 그렇고 그런 관계에 있는 사이도 아니고, 몰래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하물며 내가 흑심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린다. 무섭게 날 노려보고 계시니 더더욱.

“그… 안녕하십니까.”

“그래. 반갑습니다.”

인사하시며 내미시는 손. 황송해하며 허리는 놔두고 다리만 살짝 펴고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악수를 받는 모습이 완성되었다.

“내, 원년부터 원하의 팬이었거든. 우리나라 야구가 82년도에 출범했잖아요.”

“예예,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그때도 내가 원하에 다니고 있었거든. 그때 우리나라 풍토가 어땠는데, 내 회사가 원하니까. 응? 당연히 야구도 어딜 응원해야겠어. 원하를 응원해야지. 사실 반강제로 원하를 응원하게 되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오메…….

민영 씨 이상의 찐팬이셨다.

“대단하시네요. 한 팀만 거의 35년 동안 바라보신다는 게…….”

“허허, 나이 먹어가면서 고집만 세져 가지고 그런 거 같아요. 원하가 최근에 꼴찌만 하고 막 그래도, 내 원하만 바라봤다니까.”

“아이고, 영광입니다.”

그럼 내 쩌리 시절도 다 보셨다는 건데.

“우리 김한울 선수한테 참 고마워요. 덕분에 올해는 아주 좋은 경험을 했어.”

껄껄껄 웃으시며 다시 손을 내미시자 아까와 같은 자세가 자동적으로 나왔다.

“난 김한울 선수가 쭈욱, 원하에 남아 줬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은퇴하고 일할 거리가 없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내, 이래 봬도 원하라는 나름의 대기업에서 임원직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니까.”

오메…….

“아무한테나 이런 얘길 하지는 않아요. 김한울 선수가 입단했을 때부터 봐왔거든. 김한울 선수가 얼마나 성실하고 사람 좋은지 내가 아주 잘 알거든.”

“아이고,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그냥 대기업에 계신 분이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원하라는 우리나라 순위권 안에 드는 대기업에서 무려 임원…….

이후 나에 대한 공치사가 계속 이어졌다.

10년간 한 팀에서 고생했다, 올 시즌 갑자기 비상한 이유가 무엇이냐, 고생 많았다, 팀이 잘된 건 모두 그대 덕이다, FA 때문에 솔직히 걱정했는데 남아 주어 고맙다, FA 계약 과정에서 금액을 본인이 더 깎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착한 청년이다, 등등.

그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그래, 우리 민영이랑 만난 지는 얼마나 됐지?”

“예?”

내가 더 의아해하자 아버님께서 더더욱 의아해하신다.

“민영이랑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무례인 건 아는데, 대답은 나오지 않고 대신 시선이 빠르게 민영 씨 쪽으로 향했다. 그 상태로 두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자 민영 씨가 안절부절못한다.

“아, 아버지…….”

“왜!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설명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

“우리 민영이가 말이야, 집 안에서 김한울 선수 이야기를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쫑알쫑알, 응?”

“아, 아빠아!”

“봐봐, 내 딸이기는 하지만 좀 예뻐? 지금은 얘도 나이를 좀 먹기는 했는데 말이야, 한 10년 전만 해도 어디 길거리만 나가면 연예인 해볼 생각 없냐고 명함을 몇 장씩 받아서 집에 왔단 말이야.”

아버님께선 나이에 맞지 않게 큭큭, 웃으시곤 다음 말을 이으셨다.

“지금도 이뻐, 이쁘지, 암. 직업도 좋아, 돈도 잘 벌어와.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집안도 꽤 좋은 집안이지 않아요?”

아버님에 대한 이미지 수정 완료. 주책과 팔불출 그 사이 어딘가.

내가 가만히 굳어 있는 모습과 민영 씨가 찡찡대는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껄껄껄 웃으시곤 다시 말을 이으셨다.

“김한울 선수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내 다 알고 있어요. 내 나이가 몇인데. 내 감히, 나 같은 게 우리 민영이랑 만나도 되나 뭐 그런 생각했겠지.”

뭐라 대답을 해야 하지.

“걱정 말아요. 민영이도 김한울 선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고, 아비인 나도 그렇고. 내 슬쩍 집사람한테도 얘기해 봤는데 집사람도 좋아하더이다. 그러니까, 부담 말고 김한울 선수만 결정하면 돼요.”

“아빠아…….”

부담 갖지 말라 하셨는데, 부담은 몇십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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