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불펜 3대장
새로 영입된 선수들, 그리고 빠르면 지금 당장, 늦는다면 언젠가는 우리 원하의 기둥이 될 신인 선수들까지, 모두 인사가 끝났다.
아, 꿀잼 예상!
이런 곳에 당연히, 구단 공식 미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은서 씨가 빠질 수 없었다. 얼타고 있는 신인 선수들에게 다가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꽤나 제 역할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꽤나 귀염귀염하게 생긴 아가씨가 달려들며 계속 말을 걸어주니 신인 친구들도 꽤나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벌써 10년 전인가. 늙었네. 샹.
캠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각자 포지션별로 맞춰 특화 훈련을 진행하거나 모두가 모여 전체 수비 훈련이 진행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코치진들은 물론 감독님까지 강당 의자에 앉아 초청된 외부 강사의 인성 교육까지 들어야 했다.
‘프로.’
이 두 글자가 주는 중압감은 모르면 가벼운 거였고 알면 꽤나 무거운 거였다.
“야, 똑바로 안 하냐. 웃음이 나와?”
팀 내에서 중간보다 좀 위. 투수들로만 한정한다면 그것보다 살짝 더 위.
현재 원하에서 나이나 연차로 따졌을 때의 내 위치였다. 되게 귀찮은 자리다. 군대로 따지면 분대장 달고 있는 상병 중간 느낌.
군대도 안 갔는데 어떻게 알긴, 내 상황을 군필 친구한테 토로하니 나온 감정 결과였다.
“죄, 죄송합니다!”
때문에 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했다.
투수 수비 훈련, 영어로 하면 피쳐 필딩 프랙티스, 줄여서 PFP. 투수에게 있어 투구 훈련만큼 매우 중요한 훈련이다.
게임 내적으로는 본인을 스치고 빠져나갈 타구를 본인이 막아 자책점을 낮출 수 있을 것이고, 게임 외적으로는 직선타에 면상에 처맞고 저세상 가는 것을 막아주는 훈련인 것이다.
근데 감히, 이제 막 입단한 쪼꼬미들이 신성한 PFP 시간에, 실수를 해놓고 쪼개?
이전의 나였어도 불편했을 상황이었지만 분대장이라면 그 불편을 직접 표현해야 했다.
병장이 나서는 거 봤냐. 분대장한테 짬 때리지.
야, 쟤 너무 나댄다. 너 애들 관리 안 하냐?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몇 번 더 되자 결국 빡친 내가 한마디 했다. 그제야 정신 차리는 신인급들.
이게 다 어? 형이 너 잘되라고 해주는 소리야. 알지?
“형.”
“엉.”
“사람이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나 봐.”
“뭐래.”
규진이 형은 내 말을 무시하고 마운드에 섰다. 마운드에 서서 셋포지션을 잡은 뒤 투구 모션을 취한다.
당연히 공은 없고. 투구 모션이 끝날 무렵 김관희 수비 코치님이 약한 타구를 오른쪽으로 친다.
“쓰리, 쓰리!”
“써드!”
그럼 규진이 형은 그걸 빠르게 잡아서 3루로 송구.
“나이수!”
“좋다아!”
주자 2루 상황에서 약한 내야 땅볼이나 강한 번트 타구를 투수가 잡은 경우, 투수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뭘까?
“일루!”
정답, 그냥 콜 듣고 따라 한다.
“워후!!”
“오우야.”
내 차례에 온 타구는 너무 느렸다. 체감상 포수 앞에 떨어졌다시피 한 공을 맨손으로 잡아 페이드 어웨이 슛을 쏘는 것처럼 던졌다.
“자자, 어린 친구들. 방금 한울이 형 하는 거 봤제? 이래 하면 니네는 큰일 나는 기라.”
“에이, 코치님.”
“여기 한울이 형은 닳고 닳았어. 아주 낡았다, 이 말이야. 어? 야구판에서 구른 게 10년이다, 이 말이야.”
낡았…….
“그만큼 경험이 쌓였고 순간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몸이 알고 있어야. 하지만 너네는 아직 아니야. 감독님이 말씀하신 거 기억하제? 느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알겠지이?”
예!
다음은 주자 1루와 2루 상황에서의 수비.
틱― 하는, 투수 입장에서 너무 듣기 좋은 타구인 빗맞은 타구음. 근데 그게 나한테 오는 건,
“쓰리!”
생각보다 부담이 크다.
“자, 1루랑 2루야. 그럼 3루에선 뭐지?”
“포스 아웃입니다!”
“그래, 수비 입장에서 무려 두 타이밍이나 여유가 있단 말이지. 빠르게 안 해도 돼, 써드 얼굴 보고 정확하게만 던지면 편하게 하나 잡을 수 있는 거다. 알겠나.”
예!
주자 1루에 놓고 수비.
“투투!”
“쎄간!”
주자 3루에 놓고.
“일루로!”
주자를 1루와 3루로 놓고. 이때가 제일 머리 아프다.
“홈 보고!”
“투! 투투!”
주문에 따라 몸은 2루를 향하면서도 시야는 3루를 훑는다.
1차 캠프는 전반적으로 포지션별 훈련의 비중이 높다. 그렇게 각자의 기량을 높인 뒤 2차에서 통합, 융화를 시키기 때문에.
여기서 살아남으면 미야자키에 남아 2차 캠프를 잇는 거고, 떨어진다면 여기서 대만으로 향한다. 대만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는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자자, 무리하지 말고. 시즌 길게 보는 거 아니다, 인생을 길게 봐라, 친구들.”
어느 정도 수준이 있고 자리가 보전이 된 선수들은 미친 듯 열불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이런 데서 열심히 하다가 다치는 게 개인적으로도 팀적으로도 더 손해니까.
하지만 신인들을 비롯해 아직 자리가 없는, 혹은 1.5군급의 선수들까지는 이야기가 다르다. 정말 목숨 걸고 해야 한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다.
언제까지고 2군에 처박혀있지는 않을 거다. 언젠가 기회는 온다. 하지만 그 기회가 한 번 오냐, 두 번 오냐, 다섯 번 오냐에 대한 차이는 어마무시하니까.
코치진 분들도 그걸 알기에, 과열되려고 하면 타이밍 좋게 끊고 나와서 중재시켜주셨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슴다!”
통합 훈련 끝. 오늘의 훈련도 끝. 이제 쉬면 된다. 숙소로 들어와 씻고 난 뒤 침대에 누웠다.
그으으윽…….
하는 피곤함이 순간 몰려와 잠시 눈을 감았다. 잠들기엔 살짝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딱히 어색함은 없는 시간. 아마 잠들고 일어나면, 2차 멤버가 결정 나겠지.
* * *
2차 캠프가 진행되고 며칠 뒤. 연습 경기가 진행되었다. 시합의 개념으로 따진다면 올해 첫 시합. 상대 팀은 같이 미야자키 쪽에서 캠프를 진행하는 성운 호크스.
시합 전 후리한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우석이와 만났다.
“새끼, 좀 풀렸네?”
“니 받은 돈 절반 내 건 거 알지?”
“미친놈이.”
“지는.”
오랜만에 만나 사랑과 애정으로 대화가 오간 뒤 이내 본인들 덕아웃으로 돌아와 시합을 준비했다.
어차피 리그의 규율을 따를 필요는 없기에 코치진들을 제외하면 약 30명 정도의 선수가 덕아웃에 있다.
아마 교체가 상당히 잦을 것이다. 야수들은 물론, 특히 우리 불펜진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감독님께서 딱 하나 공언한 게 있었으니, 점수 차가 몇 점이 나든 7회엔 신경석 선배, 8회에는 나, 9회에는 최은구 선배. 이 세 이닝 동안에 정해진 투수들의 경우는 몇 점을 처맞든 내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선발은 혁준이. 몸 상태를 천천히 끌어올리고 있는지 전광판의 스피드건엔 145km 전후의 구속이 찍히고 있었다. 아마 2이닝에서 많으면 3이닝 정도 던지지 않을까.
형형!
형 커브 좀요.
형 몸쪽 잘 꽂는 거 방법 있어요?
형 커브 이렇게 꺾는 거 맞아요?
형 체인지업은 어때요?
형 투심 던져볼까요?
형 커브가 잘 안 꺾이는 거 같아요.
형 포크볼은 어떻게 던져요?
형 스플리터랑 포크볼 어떻게 나눠요?
형형.
혀어어엉.
“…X벌놈.”
이번 캠프에서 날 제일 귀찮게 한 녀석이다. 작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때의 완봉승 이후, 본인이 무언가 느낀 게 있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날 붙잡고 쫓아다니며 날 귀찮게 했다.
왜 나야.
내가 녀석의 폼을 참고하여 릴리스 포인트를 당겨 구속이 올라갔다, 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느낌으로 나를 참고하여 작년 완봉승 때의 제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때의 감각이 워낙 좋아 그 본인인 나를 아예 따라다니며 하나하나 좇아 하려는 모양새였다.
말이 귀찮다지, 보기 좋았다. 열심히 하려는 게 보였으니까.
실제로 재작년 말부터 연습했던 커브는 막상 작년엔 거의 써먹지 못했고, 올 캠프 투구 때부터 조금은 쓸 만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걸 아마 여기서 써먹으려는 모양이고.
“플레이볼!”
1번 타자는 우석이가 아니었다. 라인업 카드에 녀석의 이름이 안 보이는 걸 보니 휴식인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저쪽 감독님의 판단이겠지.
“스트라잌!”
오.
초구부터 커브가 나왔다. 119km. 커브 따위가 내 슬라이더와 비슷한 스피드라는 게 불편하다.
커브, 직구, 커브, 직구, 커브, 직구, 커브, 직구.
혁준이의 볼 배합은 이러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아예 작정하고 커브를 익히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봤을 때 괜찮다, 쓸 만하다라고 느끼는 커브의 비중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보였다.
3이닝 동안 삼진 네 개, 볼넷 두 개, 피안타는 없고. 깔끔하게 막고 내려왔다. 그 3이닝 동안 우리 1.5군급 타선은 상대 2군급 선발 투수를 열심히 두들겨 6점을 뽑아냈다.
7회에 신경석 선배가 오르기까지 3이닝이 남았다. 규진이 형이 올라가나? 싶었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4회 말 오르는 투수는 이번에 입단했지만 즉전감 평가를 받는 신인 투수, 김지호. 즉전감이라는 말은 립서비스에 가깝고, 이번에 입단한 투수들 중 그나마 제일 나은 정도.
1이닝 동안 홈런 하나 내주고 마무리. 다음 두 이닝은 원래 우리와 함께했던 투수들이었다. 2이닝 동안 세 명이서 사이좋게 1실점씩.
6 대 4.
노린 건 아니었겠지만, 실제 리그에서 우리 불펜 3대장이 나설 수 있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7회 말, 신경석 선배 등판.
사람 몸이 뭐 어떻게 저렇게 꺾일 수가 있나, 싶은 모양새로 허리를 꺾어 옆보다 아주 살짝 아래 각도에서 공을 던진다.
내가 유연한 건 어깨나 팔꿈치 이쪽이지 허리 아래로는 뻣뻣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특히 골반. 야구 선수인데 다리 찢기가 90도가 안 된다.
신경석 선배가 던진다고 알려진 구종은 테일링 가득한 직구, 그리고 서브마린이라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싱커와 크게 횡으로 휘는 커브 정도. 직구의 구속은 대략 130km 중후반대에서 논다.
옆이나 밑으로 던지는 투수가 싱커랑 커브를 잘 던지면 진짜 치기 힘들다.
특유의 팔각도 때문에 솟구쳐 오르는 느낌에 횡으로 훅 도는 커브, 안 그래도 휘는 직구와 비슷한 속도에 더 떨어져 휘는 싱커까지.
말 그대로 내야 땅볼에 특화되어 있는 투수인 것이다.
“…어?”
근데 웬걸.
따악―
딱!
따악―!
우중간 2루타, 중견수 뜬공, 우익수 뜬공, 좌월 홈런, 다시 우익수 뜬공.
1이닝 동안 다섯 타자를 상대하여 동점을 내주고 돌아왔다. 홈런이야 맞을 수 있다지만, 아웃이 모두 뜬공으로 나왔다.
심지어 세 타구 모두 거의 라이너성의 플라이라는 게 마음에 상당히 걸린다. 슬쩍 감독님과 투수 코치님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8회 초 공격에서 다시 한 점을 내며 7 대 6. 이후 올라간 8회 말 수비에서는 첫 타자 초구에 우전 안타를 하나 내주긴 했지만 내야 플라이 하나와 5-4-3 병살을 만들어내며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이닝 마무리.
9회 초 공격에서 또 한 점을 내며 8 대 6으로 다시 두 점 리드가 생긴 상태에서 최은구 선배가 등판했다.
시즌 한창일 무렵 선배의 직구는 아무리 느려도 150km 밑으로 떨어지지를 않는다. 본인 최고 구속으로는 156km.
변화구로는 어찌 보면 직구보다 구종 가치가 높은 슬라이더 하나. 전형적인 투피치지만 불펜이라는 점과 구위가 좋다는 부분을 보아 마무리로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게 하는 투수인 것이다.
근데…….
볼!
로우 볼!
볼!
하이 볼!
로볼!
볼!
볼!
“…어…….”
볼넷, 볼넷, 삼진, 안타, 삼진, 볼넷, 볼넷, 안타, 끝내기 패.
최은구 선배의 9회 말 등판 성적표였다. 아직 시즌 시작 전임에도 몸 관리 자체는 잘했는지 구속이 벌써 150km를 찍을 정도로 뛰어난 구위였지만 전혀 존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억지로 집어넣겠다고 힘을 빼고 툭 던진 직구는 통타당했고 선구안이 안 좋거나 성질 급한 타자들이나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휘둘러 삼진 하나 헌납했을 뿐.
아무래도 이번 시즌 또한. 결국 우리 팀의 주요 포인트는 불펜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