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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34화 (34/190)

34화. 작년 리턴즈

시범 경기라는 게 생각보다 재밌다. 약 3개월 동안, 충분한 휴식과 그 휴식으로 충전한 기운으로 캠프 동안 얼마나 재각성을 했는지를 드디어 팬들에게 증명하는 자리.

그럼에도 전혀 믿을 게 못 된다. 고작 8경기 동안 홈런 10개치고 시즌 중 방출될 수도 있고, 8경기 동안 출루 한 번도 못 하다 정규 시즌에서 타격왕을 해먹을 수도 있다.

투수들도 비슷하다. 시범 경기 동안 15이닝 무실점하던 투수가 정규 시즌에선 8점따리가 되어 마찬가지로 방출이 될 수도 있고, 시범 경기 중에 탈탈 털리기만 하던 쩌리가 정규 시즌에선 리그 MVP로 우뚝 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시범 경기 또한 엄연한 경기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 미니 시즌 중에 좋은 성적을 낸 팀의 팬이나 선수의 팬은 당연히 고양된다. 특히 이전 정규 시즌에서 삽을 펐던 팀이나 선수라면 더더욱.

올해는 다르다!

그렇다고 시범 경기에 부진했던 팀이나 선수의 팬들이 축 처지는 것은 아니다.

복권!

앞서 이야기한 불확실성을 언급하며 시즌 중에 충분히 반등할 거라 확신한다.

작년 정규 시즌 압도적인 꼴찌에 머물렀던 한성 위너스는 이번 미니 시즌에서 8승 무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작년 시즌의 부진이 단순한 우연이라 홍보했다.

디팬딩 챔피언 성수 타이거즈는 3승 5패의 애매한 성적.

우리 팀은?

“…이건 좀 심한데.”

1승 7패.

“이거 어떡하냐.”

“낸들 알겠소.”

7개의 패전 중 3개는 신경석 선배, 3개는 최은구 선배. 그래, 불펜진이 말아먹은 것이다. 죄다. 싸그리.

아무리 불확실성에 빗대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고 싶어도 좀 심했다. 캠프 연습 경기 때부터 시작된 두 외부 영입 인사들의 부진은 이제 시작이었던 것이었다.

아, 이건 좀.

웬만하면 좋게좋게를 생각하는 내가 봐도 좀 심한 상황이었다.

선발이 아무리 잘 던지고, 절대적인 불펜 에이스인 내가 있어도 선발이 모든 경기 9이닝을 던질 수는 없고 내가 매 경기마다 나가 등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

문제가 있다면 찾아서 해결을 하면 된다. 말로는 쉽지, 실제로 행하긴 대단히 어려운 것. 안다. 아는데, 어쩔 건데. 어려우면 어떡할 건데. 어쨌든 해결해야지.

해결.

그럼 해결법은 무엇일까. 기껏 외부에서 영입해 온 두 선수를 방출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고, 조정해야지. 갈아엎어야지. 어떻게든 개조해서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원인.

그렇다면 이 부진의 해결법이자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플레이 스타일이 극명하게 정반대에 있는 두 사람인 만큼 해결법도 각자 다를 것이다. 사이드암과 강속구 정통파.

130km 중후반의 공과 싱커, 커브 등으로 내야 땅볼을 유도해야 할 사이드암 투수의 공을 땅에 깔리지 않고 공중으로 붕붕 떴으며, 150km를 쉽게 던지는 강속구의 공은 아예 존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피안타율 0.362와 7이닝 동안 볼넷 23개.

엽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성적들은 실화였다. 야구가 팀 스포츠라고? 개인 혼자서 날뛸 수는 없는 스포츠라고? 아니,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반대의 방향으로.

“어떡하지, 진짜.”

“어쩌긴. 작년 리턴즈지.”

“작년만큼이나 되겠냐.”

“…….”

특히 우리 감독님과 신영준 투수코치님의 얼굴은 요 며칠 내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같아도 그러지. 선수야 지 한 몸만 잘 간수하면 어떻게든 연봉으로 보상받지만, 코칭 스태프는 다르다. 그들의 성적은 팀 성적으로 귀결되니까.

“신인 중에서 써먹을 만한 애들 안 올라오나.”

“…글쎄.”

없다.

우리 팀의 약점은 불펜. 그 누구보다 프론트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나 보다. 작년 드래프트 때 상위권을 투수들로 싹 쓸어 갔다.

내가 눈이 높은 걸까.

근데 내 눈에 차는 신인 친구들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결과로도 나타났다.

시범 경기가 끝나고 얼마 뒤 맞이한 개막전에선 그래도, 어떻게든 이겼다. 초반부터 상대 투수진을 두들기며 아예 큰 점수 차로 불펜에게 기회를 안 줘버렸으니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개막전 포함, 다섯 경기 동안 2승 3패. 리그 극초반임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지, 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게임 트랙을 복기해 보면 아니올시다였다.

패전 세 개 모두 불펜진들이 각자 나눠 가졌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해 볼넷과 피안타를 남발했다.

“…썅.”

그리고 오늘 일요일. 리그 개막하고 맞이한 첫 일요일 시합에서 패배하며 2승 4패가 된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4 대 2로 이기고 있다가 8회 말, 4실점을 도로 내주며 2점의 리드가 바뀌었고 9회 초 한 점도 못 내며 게임 마무리.

슬쩍 감독님 쪽을 보니 당연히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 팀 모두. 그리고 제일 어두운 표정은 당연히 이런 대참사의 당사자들. 두 선배는 덕아웃 내에서 전혀 고개를 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신경석 선배와 항상 자신감 가득이던 최은구 선배가 저러고 있는 게 어색할 정도.

뭐야, FA 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래?

흔히들 말하는 FA 먹튀. 그런 점을 의심하기엔 어렵다. 억 단위가 오가는 FA인 만큼 작은 계약이 아닌 건 맞다.

하지만 스포츠 뉴스 윗줄에 노출될 만한 계약들은 아니었다. 소규모 계약. 계약 당사자들로서도 한 건 크게 땡겼다고 이제 눕자! 할 만한 건 아니라는 거다.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봤다. 그렇게 열심히 런닝을 뛰던 신경석 선배를, 그렇게 쇠질을 열심히 하던 최은구 선배를.

순수하게 기량이 부족한 것이다. 아니, 부족한 게 아니라 부족해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지만, 처음부터 부족했던 것보단 낫다. 사라진 부분을 찾으면 되니까.

다만 이 부분은 내가 발을 뻗을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경석아, 은구야. 잠깐 와봐라.”

저기 우리 투수코치님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부분인 것이다.

* *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아주 당연한 논제지만 실행하기엔 생각보다 어려운 이야기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자 만루. 아웃 카운트는 하나도 없이. 점수는 2 대 0으로 앞서는 상황에서 8회 말 수비.

비스코 러너즈와의 주말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 어제 경기는 이겼다. 선발은 잘 틀어막았고 타선은 초장부터 열심히 점수를 뽑아내 우리 팀 불펜 투수들이 강제로 휴식하게 만들었다.

그 기세를 이어 1회 초부터 성현이의 투런으로 선취점을 뽑아냈지만 그게 양 팀 통틀어 나온 점수의 전부였다.

이후 쭉 이어지다 7회, 신경석 선배가 등판하여 2루타와 안타를 허용하고 내려왔다.

다음으로 최은구 선배가 등판해 공 네 개로 만루가 채워졌다. 탄착군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전형적인 쓰로워의 모습.

서둘러 내가 올라오게 되었다.

“제가 볼 때 두 점은 줘도 될 것 같으니까, 편하게 가도 될 거예요.”

슥슥 플레이트를 정리하고 있을 무렵, 규학이가 제 딴에는 긴장을 풀어줄 생각이었는지 뭐라 한소릴 한다.

나도 알아, 인마.

훠이훠이 녀석을 홈 플레이트로 쫓아냈다. 플레이트 뒤로 물러서 전광판을 쳐다보며 공을 닦았다.

두 점 앞서는 8회 말, 무사 만루에 등판. 2번 타자부터 상대하면 된다. 다음 우리 공격은 9번 훈이부터 시작된다. 나한테는 두 점의 분식 회계가 허가되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9회는 둘째치고, 지금 이 당장의 상황으로 두 점 이내로 막아내는 것.

띠링―!

[불펜 에이스의 위엄]

- 무사 만루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내세요. (0/1)

- 보상 ― 커브 +2

…아니, 무실점으로 막자. 딱히 미션 때문은 아니야. 아니라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2번 타자 김욱. 키가 매우 작다. 내가 알기로 KBO 내에서 최단신으로 알고 있는데.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키 작은 타자의 역할을 아주 잘하는 타자였다.

발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 좋고 컨택 좋고 뭐 그런.

상성으로 보자. 어떻게 보면 내가 유리하고, 어떻게 보면 내가 불리하다.

어떻게든 상황을 창출하는 것에 유리한 타자. 어떻게든 변수를 창출하지 않는 투수.

아마 중계진에서 대충 비슷한 단어들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플레이!

플레이 콜이 떨어짐과 동시에 규학이의 양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야수들에게 사인을 준 뒤 이내 쪼그려 앉아 내게 사인을 준다. 초구는 뭘까, 몸쪽 깊게 꽂히는 낮은 직구를 볼로.

약간 이해가 안 되는 콜이지만 규학이의 부탁이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글러브 안에 공을 넣었다. 3루, 그리고 2루 주자를 한번 체크한 뒤 다리를 들었다.

어차피 도루는 없으니까, 힘차게 던지자.

틱―

“파울―!”

올.

초구부터 배트가 나왔다. 볼에. 저 위치에. 왜일까. 김욱이, 비스코가 던져준 저 행동들을 힌트 삼아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게 규학이, 나와 우리 수비진이다.

무사 만루에서 몸쪽 깊은 볼에 스윙. 로진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초구부터 들어올 걸로 예상한 거겠지.

김욱과 심판이 잠시 무어라무어라 대화를 한다. 그에 규학이도 곁다리로 뭐라뭐라 하고 난 뒤 다시 플레이 콜이 떨어졌다.

이 대화에서 규학이는 어떤 힌트를 얻었을까. 이전 공과 비슷한 사인이 나왔다. 다만 이번엔 존에 걸치게.

쌉가능이지.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 cm 단위의 제구도 될 것 같다.

“볼!”

에이.

자신만만하게 던진 공은 오히려 더 깊게 들어가 볼이 되었다. 타자 다리에 안 맞은 게 다행일 정도. 규학이한테 좀 미안해진다. 머리 아파하는 게 느껴진다. 그래, 다음 공은?

타자의 바깥쪽으로 꽂히는 백도어 슬라이더.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 내 슬라이더가 각이 아주 작은 것도 아니고 아주 빠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공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고개를 젓기엔 애매해 셋포지션을 잡은 뒤 발을 뺐다. 슬쩍 규학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사인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예 내가 검지와 중지를 왼쪽 어깨에 붙여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뒤 규학이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틱―

몸쪽 높은 곳으로 향한 직구는 어설프게 맞은 뒤 내 쪽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아, 이거… 놓치면…….

“인필드 플라이!”

까비. 탄도가 낮았기에 슬쩍 고의낙구 가능이지 않았나 싶었는데, 구심이 바로 인필드 플라이 아웃을 선언하며 타자의 아웃 카운트만 하나가 올라갔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내가 던지고 받은 공에 딱히 이상이 없자 바로 플레이트를 밟으며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3번 타자 방은민. 3번 타자를 치는 만큼 단점이 딱히 없지만 그렇다고 3번 타자라기엔 딱히 큰 장점도 없는, 좋게 말하면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나쁘게 평가하면 특출난 게 없는 타자.

여기서 병살을 잡아낸다면 좋겠는데.

무사 만루에서 1사 만루로 바뀜으로 수비 입장에서 잡을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 제일 이상적인 건 카운트 좀 잡다가 바깥쪽 떨어지는 커브로 3땅 유도해서 병살 잡는 거. 그다음은 삼진.

이제 규학이의 설계를 보자. 뜬금없이 바운드 되는 스플리터가 나왔다. 어떤 분위기를 읽은 걸까. 딱히 의심이나 생각 없이 던진 공은 원했던 대로 낮게 바운드, 쉽지 않았던 공이었지만 규학이가 멋지게 블로킹을 하며 빠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타자는 딱히 반응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애꿎게 카운트 하나만 헌납한 것이다.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바로 구심이 새 공을 던져줬고 받아 다음 플레이를 이어야만 했다.

다음 공, 몸쪽 직구.

오늘 몸쪽 직구가 많네.

“스트라이크!”

김욱 타석의 초구, 이번 타석의 초구가 모두 볼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전 이닝까지 소극적이었던 비스코의 타선이 이번 이닝에 들어 초구부터 적극적이다. 실제로 이전 타석의 김욱까지 매우 대담하게 배트가 나왔고.

때문에 방은민까지 초구부터 그럴싸한 볼을 유도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도박수가 몸쪽 직구. 통했다.

틱―!

“파울!”

거기서 연계되는 몸쪽 싱커까지.

딱―!

“파울―”

이후 존 아래로 떨어지기를 바랐던 스플리터가 어설프게 몰려 순간 식겁했지만 오히려 힘이 들어갔는지 잘 맞은 파울 타구로 그쳤다. 그래서, 다음 공은?

바깥쪽에 슬라이더…….

구종이 많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부담이기도 하다. 선발도 아닌 불펜의 입장에선 쓸데없이 패가 많거든.

내 구종 중 스탯이 가장 낮은 슬라이더. 살짝 빠른 커브 정도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가장 던지고 싶지 않은 구종.

하지만 규학이를 믿어보자.

후우…….

그렇게 던진 공은 우타자 바깥쪽 꽉 찬 존으로 날아갔다.

딱―!

거기서 더 바깥쪽으로 흘러나갔다. 하지만 잘 맞았다. 아니, 잘 맞긴 했다. 꽤나 빠르게 날아간 공은 우익수 성현이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3루 주자 누구였지?!

홈 라인 타이밍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홈플레이트 뒤로 열심히 뛰었다.

8번 타자 김영철.

주루 센스 자체는 하위권이나 발놀림 자체는 나름 빠른 편.

홈플레이트 뒤 백업을 도착했을 무렵, 성현이는 규학이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었고, 3루 주자 김영철도 이를 악물고 뛰는 게 보였다.

0.1초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견인 성현이가 던진 공은 노바운드로 규학이의 미트에 꽂혔다. 얼른, 공을 잡자마자 다가온 김영철을 향해 규학이가 몸을 틀었다.

탁―!

촤악―!

“쎄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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