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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35화 (35/190)

35화. 추락하는 것엔 날개만 있을 수도 있다

주심의 양손이 어깨와 평행을 이루었다. 홈 터치가 먼저였다는 판정. 규학이는 아쉬워하지 않고 곧장 3루와 2루를 체크했다.

주자들이 각자 제 베이스에 묶여 있음을 확인하자 곧장 타임을 부르고 우리 덕아웃을 향해 네모를 그렸다.

“빨랐어?”

“네.”

내 쪽에선 구심 때문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타이밍상으로는 뱅뱅으로 봐서 애매하다 싶긴 했는데, 규학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비디오 판독이 받아들여지자 심판들은 미디어 센터를 향해 헤드셋을 썼고 구장 내엔 의미심장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광판 한구석엔 비디오 판독 중…이라는 글귀, 화면 중심엔 홈 결전 상황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고.

“…난 모르겠다야.”

“예?”

“화면 각도가 저래서 그런가.”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닌지, 구심이 헤드셋을 벗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고 있었다. 전광판 오른쪽 아래에 비디오 판독에 걸리는 시간이 카운트 되고 있었는데 1분을 넘겼다.

2분까지 정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원심이 유지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팀은 실점 하나가 주어지며 내 퀘스트도 실패.

1분 30초, 1분 40초를 넘겨 1분 50초에 다다랐을 무렵, 구심이 헤드셋을 벗고 홈으로 걸어 나오며 주먹을 쥐었다.

“예!”

“호오오오오오!!”

외야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한 강견 성현이, 그리고 멋진 블록으로 실점을 막아낸 규학이에 대한 찬사!

우우우우우―!!

하지만 여긴 원정 구장이다. 당연히 여기 홈팬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듯 온갖 야유를 쏟아붓지만 비디오 판독으로 재결정된 판정은 다시는 번복되지 않는다.

“야, 너 구속 몇 나오냐.”

“투수 그만둔 지 꽤 돼서. 근데 아직 145는 나올걸.”

X발.

호수비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자 날아온 건 기만이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불펜에 앉아 우리 팀의 공격을 구경했다.

4번부터 시작된 타순은 선두 타자가 안타로 출루한 후 대주자 기범이로 바뀌며 분위기를 굳혀보려 했지만 오히려 견제사로 분위기가 살짝 넘어갔다.

이후 승주가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가자 아쉬움은 더더욱 커졌다.

다음으로 나선 성훈이 형의 병살타까지 완벽. 7구까지 버티긴 했지만 커트하겠답시고 툭 갖다 댄 공이 투수 정면으로 가버린 게 아쉬웠다.

괜찮아.

점수를 못 냈을 뿐, 점수를 안 준 것 또한 사실이다. 두 점. 한 이닝만 막으면 세이브. 이긴다.

글러브를 집어 들고 마운드로 나섰다.

몇 번째일까.

문득 피처 플레이트를 발로 슥슥 훑어내며 든 생각을 곧장 집어넣었다.

전광판을 보았다. 3번 타자에서 더블 플레이로 끝났으니 4번 타자부터 이닝이 시작된다. 4번 타자는 1루수 배덕현. 재작년까지는 나에게 극강이었던 타자다.

아니, 뭐… 나한테 극강이 아니었던 타자를 찾는 게 더 힘들겠지만, 특히나 도드라지게 보였던 타자 중 한 명. 통산 상대 타율이 아마… 6할이었나, 7할이었나.

하지만 작년은 0할. 작년부터 내 성적이 브레이크하며 배덕현과의 상대 전적 또한 브레이크를 내버린 것이다.

아, 명진이가 좋아할 만한 유우머구만.

플레이!

햄스트링 부상이 다 해결되기는 했지만 부담은 남아 있는 모양인지 안 그래도 느린 주력이 더더욱 급감된 모습이다. 하여 기성이를 위시해 내야진들은 모두 한없이 물러난 모양새. 땅볼 유도가 좋겠지. 된다면.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김욱 때와 다르게 작전이 바뀐 걸까. 초구부터 슬라이더와 직구를 던졌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스트라이크 두 개를 뺏겼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0-2의 카운트인데, 오히려 던질 공이 안 보인다.

몸쪽 직구, 바깥쪽 싱커, 스플리터 바운드, 걸치는 체인지업.

네 번째에 고개를 끄덕였다.

틱―

“파울!”

생각보다 조금 더 빠진 체인지업이었지만 어거지로 건드려 파울로 카운트가 유지되었다. 오히려 느린 거 하나 더 던져보고 싶은데. 몇 번 고개를 젓다 보니 괜찮을 것 같은 사인이 나왔다. 낮은 커브.

딱―!

와아아아―!!

낮은 볼을 억지로 잡아당겨 기성이의 옆을 총알같이 빠져나가는 안타가 되었다. 수비가 부족한 기성이가 아니라 그 수비 잘한다는 박해진이 앉아 있어도 못 막았을 타구.

다행인 건 선상을 타고 나가는 타구임에도 주력 탓에 1루에서 멈췄다는 것.

그러자 당연히, 대기하고 있던 대주자 전문 이정은이 1루로 나섰다. 1루를 밟은 채 골반을 이리저리 푸는 모양새는 어떻게든 2루로 가겠다는 출사표였다.

5번 타자가 나타났다. 최주영. 배덕현과 비슷한 느낌의 타자지만 전반적으로 한 끗발씩 떨어지는 느낌. 병살에 욕심내지 않고 하나만 우선 노린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난이도는 쉬워질 것 같다.

“파울!”

“파울―”

“볼.”

“파울!”

일단 내 쪽에 아주 약간 유리한 카운트까지는 만들었다.

“세입―”

사인을 보고 셋포지션으로 들어가면서 몸을 틀었다. 딱히 잡을 생각도 아니었고 기성이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애써 태그까지 가지 않고 내게 공을 돌려주었다.

다시 사인을 확인. 무사 1루에 발 빠른 주자. 근데 앞서 공 네 개를 던지며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안 뛰나? 뛸 생각이면 차라리 좀 빨리 가지.

투닥!

“스윙, 스윙!”

스플리터 사인에 규학이가 원하는 대로 땅바닥에 처박아줬고 타자의 배트가 애매하게 끌려 나왔다. 타자는 아니라고, 안 나갔다고 항변하지만 1루심까지 갈 것도 없이 주심이 나와서 스윙을 인정해 버렸다.

바운드되는 공이었지만 깔끔한 블로킹으로 제 바로 앞에 공을 떨궈놓았기에 1루 주자가 2루까지 가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제자리에서 공을 주워다가 2루를 향해 척! 하는 송구 자세를 취하는데, 멋있네.

박수를 짝짝 쳐주고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한창민이 좌타석에 등장했다.

아, 귀찮게 좌우좌 뭔데.

뒤를 슬쩍 보니 야수들이 바쁘게 수비 위치를 움직이는 게 보였다. 괜히 로진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벌어준 뒤 사인을 구경했다.

“볼!”

“파울!”

“볼!”

“스트라이크!”

뭐지.

공 네 개를 던지며 묘한 점은 타자가 아니라 주자에서 느껴졌다. 공 네 개를 던질 동안 주자는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

직전 최주영의 타석까지 생각하면 무려 9개를 던질 동안. 등장하면서 생난리를 피웠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

그냥 딱히 뛸 생각이 없는가 보지. 타자만 신경 쓰자.

“뛴다아악!!”

그렇게 안일하게 던진 공은,

“볼!”

볼이 되며,

“쎄잎!”

주자가 공짜로 한 베이스를 더 전진하는 포석이 되었다.

성문이에게서 공을 받고 플레이트 쪽에 닿자마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규학이에게 미안하다는 표시를 보였다.

이건 내 책임이다. 내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주자는 주자고, 타자는 타자다.

주자의 출발과 함께 닿은 기성이의 괴성은 무의식중에 규학이가 2루로 송구하기 쉬운 곳으로 공을 던지게 했다. 높은 바깥쪽. 일종의 피치 아웃이 되었고, 그 지점은 누가 뭐래도 볼인 구역.

그렇게 카운트가 3-2가 되었다. 그렇다고 작금의 상황이 딱히 무조건 불리하진 않다. 뭣하면 1루로 채워도 된다는 마음으로 던져도 된다. 물론, 진짜 그렇게 되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프긴 하지만.

규학이도 같은 마음인지 나온 사인은 바운드 되는 포크볼이었다.

오늘 포크볼 많이 나오네.

부웅―!

“스윙!”

저쪽 신사분이 보낸 스플리터입니다.

바운드가 되는 공에 한창민은 멋진 헛스윙으로 보답했고 규학이가 요령껏 막았다.

배트가 헛돌자마자 한창민은 배트를 휙 던지며 1루로 뛰기 시작했다.

규학이는 바로 1루로 던지지 않고 2루 주자를 한번 확인한 뒤 1루로 던질까, 말까를 시전하며 계속해서 2루 주자를 체크하고 나서 빠르게 1루로 송구했다.

“쓰리!”

공이 포수의 손에서 확실히 떠나는 걸 확인한 2루 주자가 3루로 스타트를 끊음과 동시에 기성이가 바로 3루로 공을 던졌다.

팡―!

“쎄잎!”

세이프가 되긴 했지만 괜찮다. 2루에서의 세이프니까. 순전히 타이밍만 재어볼 생각이었던 듯, 스타트만 끊은 뒤 곧장 2루로 돌아갔고 3루에서 공을 받은 성훈이 형이 2루로 빠르게 던졌지만 살짝 늦은 세이프.

평소 빠른 라운딩으로 다져진 우리 내야진은 스타트만 끊었어도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추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대다내!

성문이가 던져주는 공을 받아 다시 플레이트에 섰다. 7번 타자 윤현정. 7번 타자까지는 그래도 조심하는 게 맞다. 어느 정도 배트를 돌릴 줄은 아니까.

안타로 2루 주자가 들어오는 건 괜찮다. 의외의 한 방으로 동점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 어느 쪽이건 퀘스트 실패는 확정이지만 전자는 다음을 막으면 되지만 후자는 점수를 내고 다음을 막아야 한다.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타임이요!”

타이임―!

“왜?”

뜬금없이 타임을 부르고 규학이가 올라왔다. 진짜 뜬금없어서 왜?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어떻게 던지죠?”

“너 다른 투수들한테도 이러냐?”

“아뇨. 근데 형한테는 뭔가 컨펌 받고 사인 내야될 것 같아요.”

“외주 냈냐? 컨펌 받을 거면 감독님한테 받지 왜.”

“아, 형.”

“…홈런만 안 맞게 하자. 3루타도 괜찮으니까.”

“네.”

막연하게 던진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짧은 대화 후 홈으로 돌아가 앉았다. 이번엔 또 우타석에 들어선 윤현정의 타격 폼을 슥 훑어본 뒤 나온 첫 사인은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채워도 되니까.

그런 맘으로 던진 공은,

딱―!

잘 맞고 1루와 2루 사이를 갈랐다. 라인에 붙어 있던 기성이와 2루 주자 커버하느라 넓어진 1, 2루 간의 정확히 가운데를 가르고 빠져나가는 안타. 데굴데굴 굴러가는 타구를 향해 성현이가 또 달려드는 게 보였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속으로 뭐라뭐라 하면서도 몸은 벌써 홈플레이트 뒤로 뛰고 있었으니까.

백업 지역에 다다랐을 무렵, 이전 이닝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되었다.

아까도 이랬던 거 같은데.

성현이가 공을 던지는 모습이 조금 전과 똑같다. 똑같이 공을 받은 규학이가 똑같이 주자를 막는다.

촤악―!

탁―!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이번엔 구심에게 가려지지 않아 확실하게 보였다. 규학이의 미트가 주자 옆구리에 닿는 모습이.

“아우우우웃!”

띠링―!

[불펜 에이스의 위엄]

- 무사 만루의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내세요. (1/1)

- 보상 ― 커브 +2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하

포심 ― 57

커브 ― 46+2=48

슬라 ― 34

스플 ― 40

체인 ― 45

싱커 ― 4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구심은 멋진 자세와 함께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기쁨을 표출했다. 그건 우리 팀도 마찬가지. 끝내기 어시스트. 곧장 규학이에게 달려가 헤드락을 걸었고 팀원들 간의 하이파이브가 이어졌다.

“아, 형 안타 좀 그만 맞아.”

“네가 투수 할래?”

“해볼까?”

“쏘리.”

이놈도 딴에 야잘잘인 놈이라, 맘먹고 투수하면 또 씹어먹을 것 같다. 살짝 경계심을 내비치자 녀석도 피식 웃고는 제 글러브를 들이댔다.

착!

하고 공중에서 글러브와 글러브가 만났다.

* * *

폭발력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응집력이 있는 타선, 주루는 스타팅 멤버에서 몇몇을 제외하고 리그 평균, 혹은 평균 이상. 수비는 리그에서 최상위권.

누구나가 봐도 꽤 괜찮은 팀이라고 생각하겠지. 야수들만 본다면. 그럼 여기다가 이 팀의 투수진들을 살펴보자.

1선발과 2선발은 그대로 건재하고, 3선발은 조금씩 기량이 올라오고 있었다. 4선발은 아직 좀 오락가락하는 모양새가 보이긴 했지만 이닝 자체는 어떻게든 처먹처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불펜은?

작년, 팀 수준이 아니라 리그 수준으로 봐도 최고의 불펜 투수라 할 수 있는 선수는 FA 대박을 터뜨린 후, 오히려 돈값 이상의 모습을 보이며 팬들과 구단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근데 이게 다야. 다라고.

외부 영입으로 데려온 두 불펜 투수는 영 힘을 못 쓰고 있었다. 한쪽은 피안타율이 수직 상승했고 한쪽은 공이 전혀 존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나머지 원래 있던 불펜 투수들 또한,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의 연속이었다.

시즌 개막하고 약 한 달. 10승 20패. 리그 꼴찌.

선발 투수진 평균 자책점 리그 1위, 그리고 시즌 개막하고 지금껏 단 한 점도 허가한 적이 없는 미스터 제로 불펜 에이스를 두고 팀은 추락했다.

따악―!

“…에이. 텄다.”

혁준이가 7이닝 동안 투구 수 113개로 꾹꾹 막아낸 뒤 등판한 8회, 선두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이후 세 타자를 모두 삼진 처리하며 4점의 리드가 이대로 굳어지나 했지만,

따악―!

와아아아―!!

어림도 없지.

유명한 구절 하나가 있지.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다. 아니, 감히 반론한다. 우리는 다르다. 날개가 있다. 날개는 있다. 날개만 있어서 문제지.

태업, 불화, 불성실, 뭐 대충 그런 단어들. 그런 단어들도 점철된 결과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그 새끼만 X나 조지면 되니까.

하지만 이 결과의 당사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남 일 같지 않았으니까. 불과 2년 전 내 얘기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누구보다 저 맘 잘 아니까.

“괜찮아! 괜찮아, 새꺄! 왜 울고 그래! 좀 처맞을 수도 있는 거지!”

투수조의 조장이 할 수 있는 건 응원과 격려밖에 없었다.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는 게 아니라, 날개만 있는 걸 수도 있다.

이 생각마저 뒤죽박죽되고 있었다. 누가 날개고 누가 본체인지. 주객이 전도된 머릿속과 사실을 말하는 척해야 하는 얼굴의 괴리감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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