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36화 (36/190)

36화. 외부 작용, 평균

팀 성적은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웃기게도 팀 내에서 괜찮은 개인 성적을 가진 이들은 또 꽤 있었다. 리그가 시작되고 아직 초반일 뿐이지만 이 언밸런스 속에서 팀은 굴러가야만 했다.

리그가 시작되고 약 두 달.

우선 우리 팀에서 타격으로 캐리하는 성현이의 경우는 홈런 9개로 리그 1위에 자리하고 있다. 펀치력을 갖고 있는 녀석이긴 하지만 시즌 20+ 정도를 기대할 수 있는 녀석이 벌써부터 10개 가까이 쳤다는 게 꽤나 고무적이다.

또 하나의 이변이라고 하면 타율 랭킹 12위에 우리 규학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 항상 멘도사 라인에서만 놀던 규학이가 3할 1푼 정도의 타율로 타율 12위.

우리 1선발 혁준이의 경우는 시즌 개막하고 세 번째 등판에서 완봉승을 달성하곤 현재 탈삼진에서 리그 2위. 그 누구도 예상 못 했던 탈삼진 1위는 바로 규진이 형. 개막 후 선발 5등판에서 삼진 42개를 솎아내는 엄청난 펀치 아웃!

원래 건재하던 확실한 선발 투수 두 명과 3선발에는 준혁이, 4선발에 태웅이. 준혁이는 4번 선발 등판하여 2승 1패 24이닝 동안 평균 자책점은 1.85.

기타 세부 내역까지 들어가 보면 좀 부실하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팀 내 선발진에서 평균 자책점이 제일 좋다. 태웅이는 아직 좀 오락가락하고 있고.

나?

개막 후 등판한 18경기에 모두 불펜으로 나서 27이닝 동안 한 점도 주지 않았다.

18경기 27이닝.

이닝 수가 경기 수를 넘어간다. 멀티 이닝이 다수 존재했다는 뜻. 아직까지는 괜찮다. 말마따나 시즌 초반이니까. 하지만 시즌 후반에 다가선다면 그때의 나는 어떨까.

딱―!

“…아.”

근데 어쩔 수가 없다.

최은구 선배. 12.2이닝 동안 볼넷 24개.

신경석 선배, 10.1이닝 동안 피안타율 .386.

“…한울아.”

“예.”

“올라갈 준비 해라.”

“예.”

그나마 저 두 사람은 나머지 불펜진들보다 조금은 낫다. 그나마…….

- Your love is the wildcard…….

익숙한 내 등장 곡. 우리 홈구장. 7회 초 2아웃 상황. 주자는 1루와 2루.

오늘은 얼마나 던지려나. 익숙한 루틴대로 연습구 몇 개를 던지자 떨어지는 플레이 콜. 전광판을 슬쩍 보고 상대 타자를 확인한다.

석 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승부수를 띄울 타이밍이라 생각한 건지 상대 쪽에선 6번 타자를 빼고 대타를 넣는 상당한 강수를 두었다.

홈플레이트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와 야수들에게 사인을 보낸 뒤 다시 제 자리에 앉아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규학이.

손가락의 움직임에 주목하고서 양손이 글러브에서 만났다. 주자를 한번 확인해 주고 빠르게 공을 던졌다.

“볼.”

바깥쪽으로 꽉 차게 던지려는 공이 살짝 빠졌나 보다. 별 아쉬움 없이 공을 다시 받아들고 사인을 확인했다.

바깥쪽으로 슬쩍 가라앉는 체인지업.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스트레치.

틱―

“파울!”

어거지로 멀어지는 공을 잡아당겨 1루 선을 넘기는 파울이 되었다. 다음 공은 같은 코스로 가는 싱커. 코스가 아니라 구속의 변화를 주고 싶은 모양이다.

공을 직구 그립에서 살짝 돌려 잡은 뒤 왼 다리를 들고 2루 쪽으로 향했다.

팍―

“세이입!”

딱히 잡으려는 의도는 없었던 인사이드픽에 주자는 잠깐 멍때렸던 건지 급하게 누로 복귀했다.

안도하는 모습에 괜히 아까운 맘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플레이트를 밟자 이번엔 타자가 한 발을 배터박스에서 빼고 3루 주자를 바라본다.

2아웃인데 뭔 작전이 나오려고.

의아했지만 나는 봐도 모르기에 규학이만 지켜보았다. 플레이트에서 잠시 발을 빼자 규학이가 걸어 나온다.

마스크, 미트, 왼쪽 가슴, 미트, 벨트, 왼쪽 어깨, 왼쪽 팔꿈치.

평소의 블록 사인은 야수들에게만 전달되는 사인이라면 이번 작전의 사인은 나 또한 참여해야만 하는 작전이었다.

사인을 접수하고 플레이트를 밟은 뒤 이번엔 구종 사인을 확인했다. 사실 안 봐도 되지만, 나름의 연기력이 필요한 작전이니까.

규학이의 두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게 꽤 웃기다. 검지, 중지와 약지와 소지, 검지와 엄지. 세 번의 변화 후 다시 셋포지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2루를 확인했다. 명진이, 그리고 성문이와 차례로 눈이 마주치고 다시 규학이를 보았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약 2초. 이후 다시 규학이를 바라본다. 타겟팅을 위해 타자의 몸쪽 낮은 곳에 미트의 포구 면이 보인다. 다시 1초 정도 뒤, 미트가 사람의 눈처럼 깜빡, 하고 감겼다.

촤악―!

그와 동시에 몸을 왼쪽으로 돌려 2루를 향했다. 팀원들 간의 신뢰가 중요한 견제 사인. 빠르게 반전되는 시야 속에서 성문이가 어느새 2루에 도착해 있는 게 보인다.

희끄무레한 배경 속에 정확하게 보이는 성문이의 글러브. 몸을 트는 동작은 이미 빨랐기에 스냅만을 이용해 정확하게 던진다.

아웃사이드픽 완성.

“아웃!”

예에!

덕아웃으로 들어가며 아웃을 표시했던 2루심의 손동작이 절로 카피되었다. 멋진 작전 속에서 함께했던 성문이, 규학이와 하이파이브를 한 뒤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요, 어떻게 잡았냐.”

“아까 형 2루 견제할 때 주자가 좀 멍때리더라구요.”

“올.”

생각 없이 시간이나 괜히 좀 끌어보려고 견제 한번 해본 게 주효했나 보다. 오예. 덕분에 공 2개만 던지고 이닝을 끝낸 셈이 됐다.

“다음이 8회인가…….”

타자와의 승부가 아니었으니 조금 전 타석에 있던 타자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하여튼 6번부터 시작하는 8회.

“한울아. 8회까지 되겠냐.”

“예, 가능합니다.”

“부탁한다.”

“예이.”

재킷을 오른쪽 어깨에만 걸치고 우리 팀의 공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은 이다음에 있을 수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6, 7, 8번. 첫 타자만 조심하면 그다음은 어렵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9회 초.

비교적 쉬운 하위 타순을 내가 상대하고,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9번 타자부터는 누가? 설마 또 내가?

하지만 투수 코치님의 어조는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9회에 누군가가 올라간단 소린데, 누가.

이번 7회 말 공격에서 최소 한 점이라도 만들어준다면 9회에 올라올 누군가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질 텐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세 타자로 깔끔하게 끝났으니까.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두고 글러브를 집었다. 찬찬히 걸어나가 마운드에 섰다.

8개의 연습 투구 이후 플레이 콜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규학이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사인 교환은 빨랐다. 이전 끊어진 타석에서의 2구는 나름의 힌트가 되었다.

땡긴다.

성문이를 약간 오른쪽으로 당기고 기성이를 살짝 뒤로 물린다.

초구 사인은 반대의 의미로 과감했다.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는 게 아닌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체인지업. 성문이 쪽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확실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손의 위치만 살짝 옮겨 그립을 잡았다.

탁―

“파울!”

다른 걸 생각했는지 오히려 체인지업에 늦은 스윙으로 포수의 왼편으로 향하는 파울이 났다. 오늘은 저쪽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는 모양. 고개를 젓다가 바깥쪽 직구 사인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공 두 개 정도는 충분히 빠졌을 코스로 향하는 직구는 움찔거리는 것조차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바로 다음 공, 몸쪽 직구로 1-2의 카운트를 만들었다. 다음은?

걸치는 슬라이더에 대한 사인을 젓고 나온 포크볼 사인. 나쁘지 않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쪽의 중간 지점을 향해 비행하다가 급격하게 땅으로 향하는 변화에 타자는 어설픈 스윙으로 건드리고 곧장 1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원래의 유격수 정면 위치로 향했지만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상태, 명진이는 몇 걸음 뛰어가 백핸드로 공을 잡아 한 걸음을 아끼며 1루에서 카운트를 잡았다.

멋진 수비에 박수를 쳐주고 돌아오는 공을 받았다. 아직 쓸만한 공이기에 그대로 플레이트를 밟았다. 7번 타자 신용희와 8번 타자 이경무. 딱히 무섭지 않은 타자들이다.

맞아봐야 2루타 정도. 둘 다 파워는 최하급이었기에 부담 없이 상대하였고 또 그대로 좋은 결과를 얻어 8회 초 수비가 깔끔하게 끝났다.

그리고 9회 초엔 누가 올라가나, 하고 보니 최은구 선배가 몸을 풀고 있었다. 8회 초와 9회 초 중간, 8회 말 공격에서 한 점을 추가하여 7 대 3의 점수가 되었다. 네 점.

극악의 볼넷 허용률은 여전하지만 또 나름 괜찮은 탈삼진율 또한 어느 정도 유지는 하고 있다. 좋은 구위와 전혀 안정되지 않는 탄착군 덕에 오히려 상대 타자들이 소극적으로 반응하니 일단 피안타율 자체도 낮은 편.

믿어보자.

세이브 상황이 아님에도 일단 클로저 역할을 맡고 있는 최은구 선배가 마운드에 올랐다. 9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9회 초 수비.

플레이―

사인 교환 후 왼 무릎이 벨트선까지만 올라간 뒤 천천히 내려갔다. 멋이 있긴 하지만 꽤나 요란 법석한 내 투구 폼과는 정반대로 아주 정갈함이 뛰어난 최은구 선배의 폼. 정갈한, 단정하게 던지는 모습이지만,

153km.

결과는 꽤나 과격하다. 어떻게 저렇게 던지지.

하지만 공은 규학이가 점프를 해야 할 정도로 높게 붕 뜬 곳으로 날아갔다.

어떻게 저렇게 던지지, 절망편.

사인을 보낸 직후 규학이는 양손을 찬찬히 움직이며 최은구 선배의 안정을 꾀했다. 그게 먹혔는지, 공 두 개가 연속으로 존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지켜보며 투수의 카운트가 되었고 이후 한 번 더 높은 공이 날아가며 2-2.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은 꽤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악순환이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아오거든.

리그 상위권의 제구는 애초에 아니어도 억지로 존에 욱여넣을 정도의 최소한의 제구는 갖고 있던 사람이 저렇게 되는 걸 보면.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 정도나마 가지고 있던 제구가 살짝 삐끗하여 한 게임을 망친다. 다음 게임, 이전의 실패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처음 몇 번은 상대 타자도 무의식적으로 배트가 끌려 나오긴 하지만 이후엔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배트 자체를 잘 내려 하지 않는다.

존에 넣기만 하면 카운트를 쉽게 가져올 수 있는데, 그 난이도 쉬움이 더욱 부담을 가중시킨다. 더더욱 존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더더욱 배트가 나오질 않는다. 더더욱 들어가지를 않는다.

무한 루프.

이번엔 아예 땅으로 처박힌 152km의 직구가 이를 대변한다. 다음 공 또한 땅으로 향하며 2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아놓고도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다.

익숙하다는 양, 규학이는 시간을 조금 끌어보려 미트를 벗고 공을 슬슬 닦으며 투수를 격려한다.

“볼!”

“볼―”

“볼!”

“볼, 베이스 온 볼!”

이미 깊숙하게 박혀버린 그 순환은 그리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의 힘으로는 더더욱. 이미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다.

“스트랔!”

“볼!”

그렇다면 이럴 때 어떤 작용이 필요할까. 본인, 혹은 본인의 편 또한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면 상대 쪽으로부터 얻어내야 한다.

딱―

“쓰리, 쓰리!”

지금처럼.

“1루!”

“아냐, 세컨!!”

“투, 투!!”

모처럼 배트를 낸 2번 타자의 타구가 3루수 정면으로 향했다. 원바운드로 잡아낸 뒤 성훈이 형은 몇 걸음 뛰어 3루 베이스를 찍어낸 후 곧장 1루를 향하다가 야수들의 콜에 2루를 향했다.

2루에서 공을 받은 성문이가 있는 힘껏 1루로 공을 던져보지만 3루에서의 멈칫거림이 트리플 플레이를 벗어나게 했다.

“야아!!”

“좋아, 나이쓰리!!”

“성훈이 형, 날 가져요!!”

뜬금없는 행운에 팀의 분위기가 한껏 고양되기 시작한다.

외부 작용. 평균.

전혀 연관이 없을 이 두 단어를 억지로 연관시켜본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스트라잌!”

“스윙!”

평균치에서 한참 벗어나 있던 누군가가, 외부 작용으로 인해 평균으로 돌아간다. 그 평균이 높은 곳에 있든 낮은 곳에 있든.

“스윙!”

바운드되는 슬라이더를 규학이가 막아낸 뒤 재빠르게 잡아 타자를 태그하며 3아웃, 시합이 끝났다.

외부의 운이 아주 강하게 작용했던 한 이닝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막은 셈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이닝을 막아낸 최은구 선배는 이전 등판들의 마지막과는 정반대로 환하게 웃는 얼굴로 팀원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나도 얼른 달려가 최은구 선배와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이내 1루 측 파울라인 앞에 서서 우리 관중석을 향해 다 같이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덕아웃으로 향하는 최은구 선배의 뒷모습을 보았다.

수직을 향하다가 바닥으로 향하던 그래프의 방향이 위로 살짝 틀어졌다. 아주 살짝.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 자체에만 만족해도 괜찮다.

인생사라는 게 생각보다 뜬금없어서, 이런 별 말 같지도 않은 일로 반전이 일어나고는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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