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좀 쉬라고
합법적 휴식이 찾아왔다.
열흘.
구단 측에선 나를 2군으로 내렸다. 2군에 내려갔다가 1군으로 다시 올릴 수 있는 최소 기간과 같다 보니 나를 잠시 내리고 2군에서 불펜 하나 끌어다 쓸 생각인 것 같다.
부상자다 보니 팀에서도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휴식.
구단에선 휴식만을 강조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마요?”
“어. 편하게 쉬다 와.”
“캐치볼 정도는 되겠죠?”
“쉬라니까?”
“로테이트 커프만 할게요, 그러면.”
“쉬라고.”
“그럼… 튜빙만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쉬라고.”
“…….”
솔직히 조금 지쳤던 것도 사실. 등판 경기 자체는 그러려니 하지만 멀티 이닝이 많았다. 3일 동안 5이닝 던진 적도 있으니까. 지칠 만하지.
간만에 맥주 한 캔 까고, 닭 다리를 뜯으며 현장이 아닌 화면으로 야구 중계를 봤다.
다행히 선발진과 야수들은 아직 멀쩡했다. 불펜진으로 눈을 돌려보자면, 최은구 선배는 힘겹게 되찾은 제 페이스로 순항하고 있는 듯했다.
볼넷 수가 아직도 적다고 하긴 어렵지만, 이전에 비해선 그래도 봐줄 만한 수준은 되었다. 애초에 제구 기대하고 데려온 투수가 아니니까.
태웅이가 7이닝 동안 다섯 개의 실점을 허용하는 동안 타선은 차곡차곡 점수를 모아 9점을 만들었다. 8회에 최은구 선배가 등판했을 때 해설진은 약간 의아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 아, 최은구 선수가 8회에 올라옵니다. 오늘 2이닝은 던지나요? 김한울 선수의 빈자리가 벌써부터 커 보입니다.
뭐 그런 말들. 8회에 등판하여 볼넷 두 개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중간중간 삼진을 솎아내며 야수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닝이 끝났다. 한 번 공격 후 돌입한 9회 말, 신경석 선배가 등판했다.
- 불펜진에서 보직 이동이 있던 걸까요?
그제가 되어서야 최은구 선배의 8회 등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 물음은 9회에 등판한 신경석 선배.
왜?
팀 이동 후 첫 마무리 등판이 부담이 되었던 걸까.
첫 타자인 9번 타자 민종현에게 볼넷을 허용한 뒤 다음 타자에겐 좌월 직격 하는 2루타를 얻어맞으며 공 다섯 개 만에 1실점.
다음 타자는 2루수 땅볼로 처리했지만 2루의 주자가 3루에 안착하기에는 충분한 타구였다.
1사 3루. 등장한 3번 타자 홍석진은 차분하게 볼 세 개를 연속으로 골라낸 후 타격했지만 얕은 우익수 플라이로 카운트를 허용했다.
주자가 리터치해 홈으로 들어오기는 무리가 있었기에 주자 상황 그대로, 아웃 카운트만 하나가 올라갔다.
그리고 문제의 박해진 타석. 바깥쪽 커브는 너무 흘러나가 볼이 되었고 2구째에 잡아당긴 싱커는 3루 선상을 타는 파울이 되었다.
그리고 3구째, 몸쪽에서 시작해 살짝 말려 볼로 판정될 수도 있을 법한 직구를 잡아당겨 왼쪽 담장을 넘겼다.
깔끔한 투런포. 앞서 허용한 한 점을 더해 총 세 개의 실점. 점수는 9 대 8로 한 점 차가 되었다.
살짝 포기하고 있던 상수 쪽의 응원석은 다시 열불이 나기 시작했지만 다음 타자를 초구에 빗맞은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며 경기 마무리.
성공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실패라고 봐야 할까.
TV로 보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도 일단 세 개 중 두 개의 카운트를 평소 알던 신경석 선배의 땅볼로 처리했다는 점을 일단은 고무적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시합에서 이기기는 했다. 혼자 맘 편하게 집에서 놀고먹는 게 마음이 괜히 걸렸는데, 일단 내 휴식일 중 첫날 승리를 하긴 했기에 비교적 마음이 편해졌다.
비어 있는 맥주 캔과 치킨 박스를 정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뒤로 누웠다.
배부르고 술의 좋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눈을 감으니 약하게 잠이 몰려왔다. 어차피 내일도 쉴 텐데. 다가오는 잠기운을 굳이 막지 않았다.
* * *
“후욱, 후욱…….”
담배 끊어야 되나.
두 손을 각 무릎에 짚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빡세게 뛴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벌렁벌렁하고 뛰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는다.
“욱, 우욱…….”
헛구역질까지 올라온다. 뒤집어지려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근처 앉을 만한 턱에 주저앉았다.
수… 숨질 것 같아.
핸드폰을 꺼내 뛰어온 거리를 확인했다. 3km. 운동선수가 뜀박질하기에 그리 긴 거리는 아닐지라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와 비슷한 속도로 계속해서 달렸다고 한다면 약간의 정상 참작은 되지 않을까.
나는 딱히 러닝을 많이 뛰는 투수는 아니었다. 하체, 하체, 하체, 투수에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이라지만 딱히? 하체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하체 말고도 신경 쓸 데가 많았다고 해야 하나.
구단 차원에서 런닝까지 막은 중에 이리 미친 듯이 뛰는 게 한편으로 마음이 좀 걸리기는 한다만, 어쩔 수가 없다. 뛰어야 된다.
내 동료들은 저렇게 피와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나란 녀석은 이리 놓고만 있다니! 참을 수가 없써!
같은 양심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물론, 안다. 내가 빠진 만큼 우리 팀은 좀 힘들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당장 구단에 달려가서 다시 싸우게 해주십쇼! 해도 응 꺼져, 가 돌아올 텐데.
다행히 신경석 선배의 마무리 연착륙은 성공 쪽으로 향하는 모양이다.
투수 코치님께 말씀드렸던 게 어느 정도 먹힌 듯, 처음 마무리로 등판한 이후의 세 경기에서 3이닝 동안 세이브 두 개를 챙겼다.
한 번 블론을 저질렀지만 이후 타선이 끝내기로 이기며 승을 챙기기도 했고.
덕분에 마음 좀 편하게 쉬어볼까… 하며 풀카운트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배너에 보이는 업데이트 알림.
오… 뭐냐.
이제는 적폐, 혹은 아저씨 게임이라 멸칭 받는 이 게임에서 특별하게 다른 업데이트도 아니고 시스템 업데이트를 했다고 자랑했다. 헤비 유저가 아니어도 관심이 생겼다. 자연스레 클릭.
뭐라뭐라 장황하게 써 있는 내용들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이었다.
훈련 시스템의 도입. 타자들에게 요하는, 아니면 투수들에 요하는 각 스탯이나 능력치들을 인 게임이나 아이템이 아니어도 올릴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
트레이닝.
그래, 이 게임은 이 시스템을 트레이닝 시스템이라고 이름 지었다. 꽤 괜찮은 네이밍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트레이닝 센터에 들어갔다. NPC가 등장해 뭐라뭐라 씨불이는 걸 대충 무시해 주고,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라는 화면이 나왔다. 당연히, 이제는 내 주캐나 다름없어진 ‘나’를 선택했다.
여기서 훈련할 수 있는 스탯은 총 다섯 가지가 있었다. 구속, 제구, 변화구, 구위, 체력. 이 미친 자본력의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한 선수당 최대로 트레이닝할 수 있는 횟수는 총 3번으로 제한이 되어 있었다.
근데 이 돈에 미친 게임 집단은, 아니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트레이닝 시스템에 돈을 요구했다. 만 원.
게임머니 만 원이 아니라, 실제 돈과 환율이 같은 게임 캐시 만 원.
명분은 이랬다. 뭐랬더라, 각 트레이닝마다 장비나 전문 인력을 고용하는 비용이 발생하니 뭐 어쩌구저쩌구… 그러면서도 웃긴 게 내가 원하는 트레이닝을 선택해서 진행할 수가 없다는 점.
랜덤!
그래, 저 다섯 가지 중 랜덤으로 훈련을 진행할 스탯이 결정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기본 만 원에 또 게임 캐시를 추가해 내가 원하는 스탯을 훈련할 수 있는 확률을 올릴 수 있단다.
최소 2천 원부터 최대 8천 원까지. 그 8천 원도 100%가 아니라, 80%의 8천 원이다.
이런 미친 게임!
그래도 모처럼 처음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했으니, 처음 1회는 무료로 진행해 주겠다고 한다.
단, 한 번 진행된 트레이닝은 초기화할 수 없으며, 무료로 진행할 시엔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김한울 선수를 트레이닝하시겠습니까?
뭐 어때, 하며 ‘예’를 누르자마자 열심히 운동장을 뛰는 캐릭터. 체력 당첨.
야발.
구속이나 당첨될 것이지.
무료라고 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열심히 훈련을 마친 캐릭터는 만세를 하며 자신의 스탯이 올랐음을 기뻐했다.
이내 게임을 끄고 컴퓨터를 껐다.
컴퓨터를 꺼서 분명 모니터가 어두워야할 텐데, 아니 어둡긴 한데 거기에 떠있는 퀘스트 창.
띠링―!
그리고 효과음.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0/3)
- 보상 ― 체력 +1
X발!
가챠에 실패한 그들의 마음이 이러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돈 풀충전해서 구속에 꼴아박았지!
“아… 미친.”
자연스레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 와중에 직접 뛰라고?
그래, 이게 어디야. 그래도 고작 3km니까, 하고 가볍게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 3km 언저리가 되는 곳을 확인하고 설설 뛰었다.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0/3)
- 보상 ― 체력 +1
하지만 올라가지 않는 카운트.
뭐지, 버근가.
한 번 더 뛰었다.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0/3)
- 보상 ― 체력 +1
여전히 올라가지 않는 카운트.
너무 느리게 뛰어서 그런가, 하고 이번엔 좀 열심히 뛰었다.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0/3)
- 보상 ― 체력 +1
- 주의! 대충 뛰면 훈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올라가지 않는 카운트. 그리고 추가된 주의사항.
어쩔 수 없이 이번엔 3km를 전력 질주했다.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1/3)
- 보상 ― 체력 +1
그제야 올라가는 카운트.
못 해먹겠다.
총 9km를 뛴 첫날은 거기서 종료했다. 나이가 30이 되니 영 체력이 아니올시다였다.
하고 다음 날, 3km를 다시 뛰었다. 어느 정도 몸을 풀고 뛰었기에 살짝 할 만하다는 기분에 한 번 더 도전,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투수는 하체! 하체는 런닝!]
- 3km를 러닝하세요. (3/3)
- 보상 ― 체력 +1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하+1=중
포심 ― 57
커브 ― 48
슬라 ― 34
스플 ― 40
체인 ― 45
싱커 ― 4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와! 체력이 올랐다!
하지만 스탯이 올랐다는 것에 기뻐하는 건 잠시, 숨질 것 같은 육신은 여전했다.
“…으, 우욱!”
주저앉아서도 헉헉거리며 진정시키기를 몇 분, 좀 괜찮아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3km를 한 번 뛴 후 역방향으로 한 번 더 뛰었기에 집 근처였다.
“…오?”
집 계단을 올라가는데, 좀 넉넉한 기분이 느껴진다. 고작 3층이지만 계속 계단을 걷다 보면 집에 다 와서 약간의 불편함이 남던 다리가 멀쩡했다. 벌써부터 스탯이 적용된 걸까.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땀범벅이었던 몸이 뽀송뽀송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형님, 송해 아저씨가 샤워하고 나면 하는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뽀송뽀송해!
“풉…….”
아, 자존심 상해.
갑자기 예전, 명진이가 쳤던 쌉소리가 생각났다. 면전에서 정색하자 나중에 생각나면 웃길 거라던 녀석의 말이 맞았다. 갑작스레 빨리 명진이가 보고 싶어졌다. 약간 혀 짧은 소리로 형님형님 하는 놈은 꽤 귀여웠다.
“웜메, 시간 빠른 거…….”
벌써 10일이 지났다. 앞선 일주일 동안은 열심히 퍼질러 놀다가 마지막 이틀 빡시게 운동했다.
체력, 아마 투구 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아니면 연투 능력이 좀 향상됐을 수도 있고.
어찌 됐건 좋을 거다. 이거 계속하면 나중에 선발도 하고 막 그러려나.
내가 빠진 열흘 동안 팀은 8게임을 진행하여 5승 3패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만들어냈다. 승률 3할 중반따리 팀임을 생각하면 꽤나 반등하고 있다는 이야기.
우리보다 한 계단 위에 위치해 있던 한성 위너스는 슬슬 자기네 자리 찾아가는 중인지 5경기였던 게임 차가 1경기로 줄어들었다.
우리 팀이 연패를 거듭하고, 1위 상수 타이거즈가 작년보다 더한 역대급 시즌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타 팀들 간의 승 인플레이션이 잠깐 발생했다.
3위까지는 그렇다 치고, 4위부터 8위까지 각 팀별 승차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당장 4위와 우리의 게임 차가 10경기밖에 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이번 시즌 목표는 3위다. 작년에 4위였으니까, 한 계단은 성장해 줘야지.
이제 슬슬 5월의 중간에 다가가고 있었다. 시즌이 끝나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충분히 할 만하다. 그래도 너무 멀리부터 보지는 않는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내일, 우리와 1게임 차밖에 나지 않는 한성 위너스와의 홈 3연전. 싹쓸이하고 곧장 7위로 올라설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역전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