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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39화 (39/190)

39화. 기억 속의 구도

내가 돌아왔다!

열흘간의 휴식 후 방문한 홈구장은 어딘가 새롭게 느껴졌다. 어디 하나 달라진 건 없는 게 분명한데, 다른 시기도 아니고 시즌 중에 푹 쉬어버리니 더더욱 새로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열흘이라는 꽤 긴 시간을 쉬고 집을 나설 때가 돼서야 이야, 이거 감 잃었으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네비를 켜지 않아도 구장까지는 제시간에 잘 도착했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끄고 트렁크를 열어 짐을 빼는 일련의 동작까지도 이전의 기억과 대부분이 일치했다.

“왔냐아.”

“여어, 히사시부리.”

“미친놈.”

가장 먼저 반겨준 건 규진이 형이었다. 어제 선발이었기에 꽤나 몸이 찌뿌둥한 지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흡연실로 향했다.

“오.”

“여어. 오랜만임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애초에 이렇게까지 안 쉬어도 되는 거였는데, 감독님이 강제로 쉬게 하신 거라서요. 영진 씨는요? 저랑 계약하고 보너스는 좀 받았어요?”

“아, 네. 큰돈은 아닌데, 구단주님한테 쪼끔?”

역시 돈이 최고야. 항상 짜릿해.

꽁돈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영진 씨는 실실 웃으며 필터와 가까워진 불씨를 껐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그도 담뱃갑에서 새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나저나 참 다행이었어요. 신경석 선수도 그렇고 최은구 선수도 그렇고. 한울 씨 없는 상태에서 그 두 분이 반등 못 했으면 어우… 보너스로 받았던 돈에 손해 배상금까지 물어줄 뻔했어요.”

“구단에요?”

“네. 그 두 분 데려오자 건의한 게 저였거든요.”

각자 계약 기간은 4년으로 똑같지만 신경석 선배는 총액 10억, 최은구 선배는 총액 9억.

“저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네.”

“…저한테 원래 얼마까지 주실 생각이셨어요?”

“음, 그때 한울 씨랑 밥 먹고 구단주님한테 말씀드렸거든요. 타 구단에서 오퍼가 꽤나 왔다더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우리 말고 5팀이라 말씀드리니까 처음 가이드 금액 있죠? 거기서 플러스 20억을 땡기시던데요?”

왐마.

“만약 제가 그거 다 받았으면 두 선배는 여기 못 왔겠죠?”

“음… 두 분 다 데려오는 건 꿈도 못 꿨을 거고… 진짜 둘 중 한 분한테 애타게 매달려서 한 분 정도 될까 말까 아니었을까요?”

나한테 줄 돈 아껴서 다른 불펜 투수나 데려와주십쇼.

구단 측은 본인이 직접 본인 돈을 깎는 조건을 충실히 이행했다.

“몸 관리 잘하세요, 진짜. 이제 한울 씨 없으면 안 돼요.”

“예예. 걱정 마십쇼. 저도 최대한 안 아플라니께.”

학연, 지연, 흡연.

그중 흡연으로 뭉친 두 남자는 실실 웃으며 흡연실을 빠져나왔다. 흡연실 문 앞에 두었던 가방을 다시 어깨에 들쳐메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러는 중,

“한울 씨이!”

나를 부르는 해맑은 목소리.

“은서… 아니. 예. 오랜만이네요, PD님.”

“한울 씨도 오랜… 윽, 담배 냄새나요.”

“담배 피웠으니까 담배 냄새나죠.”

“윽! 오지 마요!”

“자기가 왔으면서.”

복귀 후 첫 출근부터 카메라를 들이대는 은서 씨를 휘휘 물리쳤다. 그러면서도 영상 분량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조금 이따가 다시 오겠단다.

대충 알았다 대답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가던 길을 갔다.

“아, 오랜만입니다.”

“몸은 괜찮아?”

“괜찮아요. 걱정 마십쇼. 선배님은 괜찮으십니까.”

“어어. 이제 좀 살 거 같다, 야.”

신경석 선배와 마주쳤다.

이렇게 잘 웃고 해맑은 사람인데, 성적이 곤두박질칠 때 축 처져 있을 때의 표정은 보는 내 마음이 더 아팠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의 짐을 좀 떨쳐냈는지 환하게 웃으며 나의 복귀를 맞아주었다.

덕아웃까지 갈 길은 아직 한참 먼데, 여러 사람과 복귀 인사를 나누었다.

성현이는 틱틱대며 왜 이제 왔냐 타박하고, 승주는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장난스럽게 툭툭 치며 아프냐? 좀 더 아프지, 새끼, 하고 친구들끼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규학이는 마치 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울먹거리기 직전이었고 성훈 선배는 가볍게 왔냐, 한마디.

세상 사람 다정한 양택균 타격 코치님은 꼬옥 안아주시기까지 해주셨다. 아아… 사랑해요, 코치님.

다시 움직이다 만난 명진이는 나를 보더니 헛! 하는 이상한 소릴 냈다.

그리고 형님, 길을 가다가 나무를 주우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우드득입니다, 같은 개쌉소리를 지껄였다.

야 이 새끼야, 그럼 길다가 음식 주우면 푸드득이냐 이 새끼야.

그 한마디에 명진이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길을… 가다 음식을 주우면… 푸드득… 메모…….

진짜로 메모를 했다. 소름 돋는 새끼.

“몸은? 괜찮고?”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치….”

“…….”

“…네. 말짱합니다.”

어렵게 당도한 덕아웃. 열흘 만에 뵌 감독님의 표정은 이전보다 살짝 밝아져 있었다.

당연히 신경석 선배와 최은구 선배, 이 두 골칫덩이의 반등이 한 부분 차지할 거고 그 무엇보다 내 복귀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거다.

“신경석 선배한테 마무리 이야기는 감독님이 하셨습니까?”

“아, 투수 코치한테 들었는데 네가 얘기했던 거라면서?”

“예.”

“마무리 얘기는 내가 했지.”

“뭐라고 합니까?”

“뭐라 그러긴. 그냥 알았다고 하지.”

하긴.

“그럼 앞으로 불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은구랑 경석이만 바뀐다고 보면 돼. 너는 그대로 네 자리고. 가끔씩 상황 봐서 선발 등판 할 수도 있는 정도. 근데 그냥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될 거야.”

“넵, 알겠습니다. 그거에 맞춰두겠습니다.”

“근데 그래도 결국 그 셋 중에 가장 확실한 게 너니까. 아마 네가 제일 고생할 거야.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야겠다.”

“아익, 영광입니다.”

나를 써주는 사람한테, 니가 제일 믿음직하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기 진작 빡빡 되는 느낌.

대충 내 짐 가져다 두고, 가방에서 스파이크를 꺼냈다.

시간은 오후 3시. 벌써부터 스파이크를 신기엔 대단히 이른 시간이지만 열흘 만의 등장에 공을 좀 만져보고 싶었다.

어디 적당한 캐치볼 상대 없나,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건영이가 보였다.

“야, 건영아.”

“아, 형니임! 몸은 괜찮으십니까?”

또 똑같은 질문에 또 똑같은 대답의 레퍼토리. 대충 넘겨주시고.

“가볍게 좀 던져보고 싶은데 캐치 좀 부탁해.”

“옙.”

건영이는 렉가드만 차고 있던 상태에서 미트만 들고 얼른 뛰쳐나왔다. 피칭이나 롱토스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공을 던진다는 감각 자체만 느껴볼 생각이기에 파울 지역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어깨 문제면 좀 더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니, 애초에 열흘씩이나 쉴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다른 데는 모르겠는데, 어깨는 진짜 어려워요, 형님.”

“아, 너도 어깨였지.”

건영이 또한 고교 시절 꽤나 전도가 유망한 포수였다. 던지는 쪽이든 치는 쪽이든 힘 하나는 인정받아 장래가 꽤나 유망한 포수였는데, 고2 겨울 때 얻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고3 여름까지 경기에 뛰지 못했다.

이후 출장한 몇 번의 경기에서도 어깨와 관련한 평가에서 최하점에 가까운 스케일을 받으며 프로 진출에 실패한 케이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어깨 부상을 당해 봤던 녀석이었기에 더더욱 감정에 이입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5m 정도에서 가볍게 툭툭 던지기 시작한 공은 한 번 오갈 때마다 한 걸음만 치씩 멀어져 어느새 한 베이스 거리까지 멀어졌다.

딱히 롱토스를 즐겨 하는 편도 아니고, 또 할 생각도 없었기에 거기서 더 멀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거리에서 세게 던지지도 않았다. 밸런스 조정에 모든 초점을 맞춘 캐치볼.

총 15분 정도의 캐치볼이 끝나자 고생하셨슴다! 하고 인사한다. 나도 적당히 잘 인사 받아준 뒤 팀 훈련으로 돌입했다.

PFP도 좀 하고, 튜빙도 좀 땡겨 줬다. 간만에 고무줄 좀 땡기니까 어깨가 빳빳해졌다.

투수 코치님 피셜, 오늘 선발이 완봉 페이스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8회에 올릴 거라고 예고하셨다.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규학이를 찾아 헤맸다.

어렵사리 만난 뒤 간만에 사인도 좀 재설정해 주고, 요새 팀 분위기에 대해 좀 물어보는 등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시간은 6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모든 팀 엔트리는 각자의 덕아웃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국민의례가 진행되고, 시구까지 진행되고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오늘 선발은 3선발인 준혁이. 쓰리쿼터보다 낮은 쓰리쿼터 사이드에 가까운 낮은 팔각도로 공을 던지는 친구다. 직구 구속은 살짝 떨어지는 편. 140km대 초중반 정도.

변화구는 꽤 좋은 평가를 받는 체인지업과 커브를 던진다. 딱, 신경석 선배가 팔 좀 올리고 선발 뛰는 느낌.

현재 평균 자책점만을 따졌을 때 1등은 혁준이도 아니고 규진이 형도 아닌 준혁이다.

시즌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안 된 시점에서 2.15. 세부 내역까지 들추다 보면 아, 그래도 3선발은 3선발이네, 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던지고 있다는 말은 충분히 할 수 있는 투수다.

시합은 타격전으로 흘렀다. 6회까지 마친 지금, 양 팀의 안타 수를 합치면 20개를 넘어갔으니까.

단지 준혁이는 주자를 내보내도 영리하게 수비를 이용하는 투구로 실점을 최소화하는 반면, 상대 팀은 내보내는 족족 점수와 연결되었다.

스코어 8 대 3.

7회가 되자 최은구 선배가 올라갈 줄 알았지만 다른 투수가 올라갔다.

올 시즌 고졸 신인인 김지호.

평범한 오버핸드 투수다. 구속도 평범, 변화구도 커브와 슬라이더 정도. 지호는 2루타 하나와 볼넷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7회를 잘 막았다.

이후 추가점 없이 맞이한 8회 초.

-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와아아아―!!

잠실구장에서 아주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내 등장 곡.

“아 돈 노이필 홀―미, 오 립미 히 필린 론리…….”

마운드로 걸어가는 동안 내 등장 곡을 흥얼거렸다. 플레이트 뒤에 비치되어 있는 로진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깨끗한 오른손을 보면 뭔가 어색하다. 하얀색 가루가 잔뜩 묻어 있어야 내 손 같다.

규학이가 던져주는 공을 받고 플레이트를 오른발로 슥슥 훑었다. 열흘 동안 구경도 못 했지만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지난날의 기억 속 구도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후 발끝을 붙여가며 족장을 표시해둔 뒤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직구 사인을 보여주고 던진 직구는 듣기 좋게 빵! 소릴 내며 규학이가 원하던 곳에 향했다.

슬라이더, 커브, 싱커, 체인지업, 스플리터까지, 각 구종들을 한 번씩 테스트했다. 전혀 변함이 없었다. 위의 의미든, 아래의 의미든. 딱 스탯만큼.

8개의 연습 투구가 모두 끝난 뒤 내야수들의 라운딩마저 끝나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4번 타자 조태풍부터다.

상대하기 좀 껄끄러운 타자이긴 하지만 점수 차도 점수 차겠다, 굳이 에둘러 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플레이!”

플레이트를 밟고 듣는 플레이 콜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약간 올라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백보드 뒤,

띠링―!

[복귀전]

- 복귀전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막으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1

나를 반겨주는 오랜만의 퀘스트까지 완벽했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규학이의 사인에만 집중했다. 초구는 높은 곳으로 가는 애매한 커브.

“하이 볼―”

요구했던 대로 가기는 했는데 애초에 스트라이크를 바라고 던진 건 아니었기에 볼이 나와도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직구.

“스윙!”

103km짜리와 무려 40km 가까이 차이가 나는 직구에 타이밍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멋진 헛스윙과 함께 카운트가 동률을 이루었다.

바깥쪽 체인지업, 하이패스트볼, 바깥쪽 직구까지 거르고 몸쪽에서 꺾여 들어가는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제일 자신 없는 구종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딱히 부담은 없었다.

“볼!”

내 딴에는 나름 괜찮게 말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조태풍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쉽게 골라냈다. 서운하게.

이후 이전과 아예 똑같은 사인이 나올 때까지 계속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도 않게 골라내며 카운트는 3-1이 되었다.

불리한 카운트.

규학이는 이런저런 사인들을 요구했지만 다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한 가지 사인이 나오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웅―

“스윙!”

별거 없었다. 그냥 또 똑같이 몸쪽으로 들어가는 슬라이더. 제구 좋기로 소문난 내가 3-1에서 몸쪽으로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또 던질 줄은 몰랐는지 동요하는 게 보였다.

마! 이게 심리전이다.

마음 같아서는 똑같은 공을 또 하나 던져보고 싶은데, 솔직히 그건 조금 무섭다. 하지만 미친놈 옆엔 또 미친놈이 하나 더 있다고, 내가 결정하기 어려운 걸 규학이가 결정해 버렸다.

또 똑같은 공.

속으로 피식 웃으며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공이 내 손을 떠나고 규학이의 미트로 향하는 그 찰나의 순간 생각이 들었다.

이야, 나 제구 새삼 좋네.

4구 연속, 직구도 아닌 슬라이더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방향으로 꺾여 들어갔다. 차이점이라면 각 공마다의 카운트.

딱―!

공이 높이 뜨자 나는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떴따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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