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스폰
- 초구부터 잡아당깁니다, 크게 날아가는데요오오! 넘어갑니다아!!
멋진 새끼.
국대 2번 타자. 강한 2번 타자. 타격 깡패.
뭐 대충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성현이. 녀석은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서 내 블론을 지워줬다. 이후 대주자로 나섰던 기범이가 삼진으로 물러난 뒤 진형이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승주,
- 이 타구는, 승부의 느낌표를 찍고오오오!! 돌아오지 않습니다아아!!
역시, 우리 팀 최고 클러치 히터답게 중요한 순간에서 쐐기 투런을 쳐냈고 내가 볼 땐 거기서 승기가 아예 우리 쪽으로 기울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점수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날의 8회 말 공격은 진짜 여러 번 돌려봐도 소름이었다. 멋진 놈들. 오늘도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날의 하이라이트를 다시 돌려보고 있을 무렵.
-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아, 안녕하세요. 혹시 김한울 선수 맞나요?
“…네. 맞는데요.”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
- 아, 네 안녕하세요. 롤링스톤즈 한국지사예요.
“네? 아, 네.”
롤링스톤즈. 미국의 유서 깊은 야구용품 업체다. 전통이 아마 100년을 넘어간다지.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절반 이상이 여기 제품을 쓰고 있다.
근데 여기가 왜.
“…스폰이요?”
- 네. 어… 일단 한 번 만날 수 있을까요?
“예 뭐…….”
- 혹시 언제쯤이 괜찮으실까요?
“어…….”
시계를 슬쩍 봤다. 오전 11시.
“…오늘 괜찮으세요? 가능하면 저녁 되기 전에요. 오늘 저녁에 부산 내려가야 돼서요.”
- 아, 네네. 혹시 식사는 하셨구요?
“아뇨, 아직요.”
- 그럼 저희 쪽에서 식사 대접 할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어… 예. 좋죠.”
- 네, 그럼 주소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1시에 시간 괜찮으실까요?
괜찮으실까요, 는 이분 말버릇인가.
“대충 어디쯤인데요?”
- 어… 건대에서 뵙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맞네, 말버릇.
“네네. 괜찮겠네요.”
- 네, 그럼 전화 끊으면 바로 주소 보내드릴게요. 이따 뵙겠습니다아~
“네네.”
- 아아, 맞다맞다. 김한울 선수. 혹시 지금 쓰시는 글러브 가져오실 수 있으실까요?
“네? 아, 네. 가져갈게요.”
진짜로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주소는 그리 멀지 않다. 차 타고 30분 정도. 밍기적대다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얼굴 좀 빡빡 씻어준 뒤 시간을 확인해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늦는 것보단 낫지, 하며 주섬주섬 옷을 집어다가 입은 뒤 집을 나섰다.
건대역 근처. 약속 장소로 잡힌 식당에 주차한 뒤 시간을 확인하니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냥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식당 이름부터 그럴싸하긴 했지만, 꽤 괜찮아 보이는 중식집이었다. 손님도 많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참 맘에 들었다.
맛은 어떠려나.
“몇 분이세요?”
“어…….”
생각해 보니까, 그쪽에서 오는 사람이 몇 명인지, 혹시 그쪽에서 예약을 해놨다면 이름을 뭐로 잡아놨는지. 설마 롤링스톤즈로 잡아놨으려나.
새삼 멍청히 서서 진짜 생각 없이 들어왔구나, 싶었던 찰나에 구세주가 등장했다.
“아, 김한울 선수?”
“네? 아, 혹시…….”
“네네. 롤링스톤즈예요. 저기, 오진아로 예약했는데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본인의 이름을 오진아로 소개한 사람과 함께, 그리고 또 다른 중년의 남자분 두 명과 함께 종업원을 따라갔다.
뭐 아예 작정을 한 건지 4명분의 세팅이 되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일단 반갑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롤링스톤즈 쪽에서 나왔구요, 저는 롤링스톤즈 코리아 오진아 대리예요. 이쪽은 제작부장님이시구요, 이쪽은 영업부장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세상에. 이게 뭐라고 부장님이 둘씩이나.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부장님 두 분도 허허 웃으며 인사해 주셨다.
스폰이라…….
“혹시 저희 제품 그… 아시죠오?”
“네네. 알죠.”
모를 수가 있나.
“써본 적도 있어요.”
“오.”
진아 씨의 입술이 동그래졌다.
“일단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요, 전화로 미리 말씀드렸던 거랑 거의 같은데요. 저희 쪽에서 김한울 선수 측에 글러브 관련해서 스폰을 좀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가능하다고 하면 스파이크도 저희 걸로 부탁드리고는 싶지만…….”
“아.”
글러브야 롤링스톤즈가 한 자리 떡, 하고 차지하고 있다고 하나 신발은… 좀…….
“…하하…….”
본인도 아는지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요. 글러브 회사가 글러브 잘 만들면 됐지 뭘.
“신발은 그냥 있는 걸루 쓸게요. 아무래도 발 관련한 부분이라 익숙한 게 아무래도…….”
“네네. 이해해요. 그리고 오늘 자리도 저희 쪽에서 절대 강요 드리거나 하는 게 아니구요, 일단 저희 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그거 알아보려구 일단 온 거거든요.”
“네에…….”
“일단 계약 가이드는 이러합니다. 한번 확인해 주시죠.”
그리고 등판하는 영업부장님. 건네주시는 서류를 슬쩍 넘기며 확인했다.
…엉?
“…이렇게나 주세요?”
“허허, 꽤나 신경 쓴 금액입니다.”
스폰은 당연히 글러브 하나 챙겨주고 땡, 이 절대 아니다. 엄연한 계약이다.
홍보.
스폰해 준 선수가 자기네 글러브를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광고다. 그래, 이건 엄연한 광고 계약이다.
올해도 절반밖에 안 남았기에 서류상의 내용은 6개월 계약이었다. 이후 연 단위로 재계약하자는 건데, 그럼 이게 반 년짜리 금액이라는 소린데, 이래 많다고?
글러브 공짜로 바꾸는 셈 치기엔 대가가 꽤나 짭짤하다.
“예, 뭐… 글러브만 제 손에 맞으면 못 할 거 없죠.”
“혹시 가져오신 글러브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가방에서 글러브를 꺼내다가 진아 씨에게 건넸다.
많이 낡았다. 각은 당연히 무너졌고 경화 현상은 여기저기 이미 심하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살 때 꽤 돈 주고 산 값은 하는지 가죽 자체는 아직 버티고는 있다.
“꽤 오래 쓰셨네요.”
“그쵸 한… 5년 썼나 싶은데요.”
스파이크야 닳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바꿔줬지만 글러브는 딱히. 공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던지는 입장이다 보니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진아 씨는 글러브를 한번 둘러본 후 옆에 제작부장님께 건넸다.
“211로 끼시네요?”
“아, 네. 옛날에 투수 강습받고 검지 한번 금 간 적이 있어서요. 무서워서 1111로는 못 끼겠더라구요.”
직접 손에 껴서 펄럭펄럭 글러브질 몇 번 해보고 이리저리 살핀다. 혹시 사진 찍어가도 되겠냐는 물음에 괜찮다 대답하니 폰을 꺼내서 자세하게 사진을 찍으셨다.
“혹시 가다 쪽에서 원하는 거 있으세요? 이대로 갈까요?”
“가… 예?”
“가다요.”
“…가다가 뭐예요?”
“아, 패턴, 패턴. 글러브 패턴.”
“…….”
뭔 소리죠.
“글러브마다 가다가 다 있어요. 내야는 막는 스타일인지, 잡는 스타일인지, 하이브리드인지. 투수면 뭐 비틀어 잡는지, 레디얼인지, 일반인지. 외형으로 가면 패스트백인지 오픈인지.”
글러브의 세계도 생각보다 심오했다.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자 제작부장님은 친절하게 핸드폰에서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셨다.
레디얼이 뭔지, 일반이 뭔지. 패스트백이 뭔지, 오픈백이 뭔지. 그제야 대충 이해가 되었다.
“어… 근데 제가 다른 가다 같은 걸 안 써봐서…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럼 일단 올해는 지금 거랑 똑같이 진행하고, 오프 때 다시 만나서 얘기해 보죠. 그때는 저희 쪽에서 샘플도 좀 가져와서 설명드릴게요.”
“네네. 저야 감사하죠.”
다시 내 글러브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제작까지는 약 보름 정도가 소요될 거라 말씀하셨다.
그 외 기타 글러브의 크기, 색깔이나 모양 등까지 정하고 나서야 네 명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계약서에 사인. 두 부장님들과 진아 씨까지 한 번씩 악수를 한 뒤에 차에 타고 집이 아닌 잠실로 향했다.
KP와의 원정 시리즈가 예정되어 있기에 부산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주말엔 대구에서 가야와의 3연전. 각각 현재 6위와 5위에 랭크되어 있는 팀들.
폼이 살살 올라가고 있는 우리의 기세라면 이번 일주일간 충분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소리 노노.”
“아, 진짜라니까.”
“내 손모가지가 부러졌어도 아침은 온다, 알겠냐.”
뭔.
버스로 향하자 승주랑 훈이가 투닥거리고 있다.
나와 나이가 같은 둘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해서 같은 팀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15년 동안이나 같은 곳에서 밥을 먹어온 둘은 꽤나 친해 보였다.
지랄하네!
X발새끼가!
…꽤 친해 보였다.
“하이.”
“하이.”
“뭐 얘기하고 있었음?”
“규진이 형 여자 생겼다는데?”
“올?”
이건 못 참지.
“어디 피셜 썰이야.”
“명진이.”
“…….”
아, 그건 좀.
잠시 잡담을 하는 사이 당사자가 등장했다. 우리 쪼꼬미 귀요미 규진이 형.
“형, 형!”
“어?”
“형 여자 생겼다면서요!”
훈이는 곧장 규진이 형한테 달려갔다.
“…….”
규진이 형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두 눈만 껌뻑껌뻑.
“아니… 그. 뭐. 썸 같은 거긴 한데. 어떻게 알았냐?”
“맞지? 맞쥐이?! 십만 원 내놔!”
“지랄 노노. 사귀는 게 아니라 썸이잖아. 그럼 생긴 건 아니지. 내놔, 십만 원.”
“아니, 만나는 거면 만나는 거지.”
“만나는 게 아니자너어!”
또 시작이다.
“야야. 그러지 말고. 반씩은 맞고 반씩은 틀리니까 니네 둘 다 서로가 서로한테 5만 원씩 줘라. 그럼 되잖아.”
“아.”
“그래, X벌.”
그러더니 두 놈은 지갑에서 5만 원을 꺼내더니 서로에게 건넸다. 상대방에게 받은 5만 원을 다시 지갑에 넣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똥멍청이들인가.
그래놓고 좋다고 친구 모드로 돌아간 둘을 놔두고 규진이 형과 함께 버스로 향했다.
“…그거 뭐야?”
“뭐긴. 공부할 거.”
버스에 앉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규진이 형은 노트를 하나 꺼냈다. 옆에는 본인의 제이패드를 꺼내고.
야구 선수가 공부를 할 게 무엇이 있을까.
“KP?”
“엉.”
바로 상대 팀이지.
규진이 형은 내일모레 선발이 예정되어 있다.
데뷔한 지 어언 10년을 넘긴 사람임에도 야구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게 메카닉이든 야구 자체의 이론이든.
야구 이론 같은 것들에도 꽤나 관심이 있는 나였기에 그런 규진이 형과 야구 이야기를 하는 건 꽤나 재미있었다.
너 FIP가 어쨌느니, 형 최근에 뜬공 비율이 늘어났나니, 바빕신의 기운을 빌어보자느니.
때마침 옆을 지나가던 투수 코치님이 극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가셨던 게 기억났다.
“근데 KP가 갑자기 왜 무너졌지.”
“운빨 같은데, 난.”
“운?”
그냥 기록지만 보고 세부 내역까지 챙겨볼 여유는 없었기에 나보다 조금 더 전문가인 규진이 형의 정보를 살펴보기로 했다.
제이패드를 툭툭 건드리더니 화면에 웬 그래프 하나가 등장했다.
쪼르륵쪼르륵.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기둥과 선은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악, 내 눈!
“요점만 말해 줘, 형.”
“라이너가 다 잡혀서 그래, 얘네 지금. 볼삼비도 안 좋고 땅볼도 많아진 건 맞는데, 다 정면으로 가니까. 점수가 안 나.”
“흠…….”
설명을 대충 듣고 나서야 그래프가 이해되었다. 뭐 대충 여기 있는 기둥이 작년의 인플레이 타율이고, 이쪽이 올해의 인플레이 타율. 거기 옆엔 직선 타구의 인플레이 타율이 비교되고 있었다.
반타작.
작년의 KP와 올해의 KP는 다른 팀이 되어 있었다.
노 피어!
만년 하위권이던 KP는 새로 부임한 감독님의 주문 아래 망설임 없이,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했고 모든 능력치에서 하위권이던 팀은 타격만큼은 알아주는 팀이 되어 있었다. 그 기조는 계속 이어져 작년까지 계속되었었다.
올해라고 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두려움 없이 상대 투수를 박살 낼 준비를 마쳤었다.
다만 그 결과가 평소와는 달랐기에 겁을 먹은 걸까.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휘두르던 타자는 멍청히 초구 스트라이크를 내주었고, 2스트라이크에서도 거침없이 휘두르며 투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타자는 또 멍청히 존 한가운데에 꽂히는 직구를 두고 보기만 했다.
악순환.
현재 그들의 타격은 최은구 선배의 투구와도 같았다.
한 번 삐끗하자 밑도 끝도 없이 저 아래를 향해 처박히는 모양새. 개인이 아니라 팀 단위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면 글쎄, 그것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그래도 조심은 해라. KP가 다른 팀도 아니고… 타격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해도, 얘네 금방 올라올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
“선생님, 어디 그에 대한 근거가 따로 있습니까.”
“있겠냐, 그냥 감이지.”
쳇.
실실 웃으며 제이패드를 끄고 노트를 폈다. 창문에 팔을 기대고 규진이 형이 하는 걸 계속 구경했다.
뭘 쓰고, 인터넷으로 뭘 찾아보고, 제이패드를 툭툭 건드려 뭐 수치를 조작하고. 규진이 형의 제이패드 화면이 암전됨과 동시에, 내 시야도 함께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