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다급함
황혁준 노히트 노런! 시즌 6승, 다승 단독 1위 질주.
황혁준(24)은 발전할 것이다. 아마 그대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전할 것이다.
전임 원하 챌린저스 감독이었던 이승재 감독(57)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5월 22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펼쳐진 KP 스타즈와 원하 챌린저스의 시즌 4차전 경기는 황혁준의 프로모션 무대였다.
1회 말, 선두 타자와 2번 타자에게 연달아 볼넷 두 개를 허용하며 시작부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다음 세 타자 모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첫 이닝을 깔끔하게 막았다. 이후 2회 선두타자에게 다시 볼넷을 허용하며 다시 불안을 보였지만 이 볼넷이 KP의 마지막 출루였다.
이창현에게 볼넷을 허용한 뒤 황혁준은 본인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이후 24타자를 연속으로 셧아웃 처리하며 시즌 1호이자 리그 통산 14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경험한 투수가 되었다.
최고 구속 157km의 직구와 황혁준의 트레이드 마크인 슬라이더는 여전했고 올 시즌부터 새로 장착했다고 밝힌 커브 또한 일품이었다.
선발 투수임에도 투피치 투수라는 비아냥을 듣고 오기로 써드 피치를 장착하기 위해 노력한 지 2년 만에 본선 무대에서 선보였고, 이는 꽤 주효한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황혁준의 제구. 황혁준의 제구는 썩 좋지 못하다. 겨우 존에 넣을 수 있을 정도. 그를 본인의 압도적인 스터프로 눌러오던 그가 제구력이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모습이 보였다.
6회 세 번째 타자로 나선 김기윤에게 직구 세 개가 연달아 볼 판정을 받자 117km짜리의 커브를 존 낮은 구속으로 넣으며 스트라이크를 잡는 모습은 특히나 일품이었다.
이후 김기윤을 직구와 슬라이더 하나씩으로 삼진 처리한 뒤 그 이후엔 별다른 위기라고 할 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기가 종료된 후 인터뷰에서 황혁준은 다시 한 번 같은 팀의 투수인 김한울(28)을 언급했다. 김한울이 본인의 폼을 참고해 역대급의 성적을 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김한울을 참고해 제구를 잡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공공연히 메이저리그에 대한 희망을 안고 있다 알려진 황혁준. 그는 과연 어디까지 발전한 뒤 미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을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황혁준이다.
* * *
노히트 노런. 투수의 가슴을 사정없이 나대게 만드는 단어 중 하나.
그걸 혁준이가 해냈다. 투구 수는 121개. 특히 7회였나 8회였나, 그쯤부터 혁준이 주변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경기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그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
하지만 이 오랜 전통의 룰을 깨부수는 이가 있었으니,
“형, 커브 이렇게 던지는 게 좋아요?”
황혁준 본인이었다. 나도 분위기를 알기에 불펜에 찌그러져 있었는데, 이놈아가 직접 불펜에까지 날 찾으러 왔다. 당황으로 물들어 껌뻑거리기만 하는 두 눈을 진정시키고 혁준이의 물음에 답했다.
아직은 오락가락하는 커브의 컨디션 중 오늘이 하필 가락하는 날이었나 보다.
본인 혼자서는 답을 찾지 못 한 듯, 결국 나에게까지 찾아와 커브에 대한 가르침을 갈구했고 난 선뜻 내 팁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6회부터 그는 더욱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노히트 노런이라는 걸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경험은 꽤나 신선했다. 더구나 그걸 우리가 당한 게 아니라, 우리 팀 선수가 해낸 것이라면 더더욱.
마지막 타자의 타구가 높이 붕 떴을 때 우리는 이미 덕아웃을 뛰쳐나왔고, 훈이가 타구를 잡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혁준이에게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여기가 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말고는 그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모습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만 축하하면 됐지.
그 마음에 혁준이의 뒤통수를 더욱 세게 쳤다. 그러면서도 내심 한쪽의 불안 아닌 불안이 있었다. 이날의 소요는 여기서 끝나야 할 텐데.
‘그날 야구장의 감정은 그날 야구장에 두고 와야 한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모 타자 선배께서 하셨던 말씀. 처음 들었을 땐 뭔 소린가 했지만, 연차가 거듭될수록 엄청난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 쉽지 않았으니까.
평소 종교의 힘으로 마음의 소요를 잘 컨트롤해 왔던 규진이 형은 그 선배의 말씀을 잘 따라 했다.
전날의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6이닝 동안 한 점만을 허용하며 짠물 피칭을 이었다. 중간중간 출루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 후속 타자는 곧잘 처리해 냈다.
“힘쇼.”
“엉야.”
7회 말. 규진이 형은 익숙하게 글러브를 손에 끼고 마운드로 향했다. 나와는 다르게 로진을 적당히 발라만 주고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를 살짝 뺐다가, 전혀 오버스럽지 않은 동작으로 중심을 앞으로 쏟는다. 그러면,
뻥!
덕아웃에서도 포구 음이 크게 터진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다들 잠든 중에도 혼자 제이패드와 노트를 펼치고 분석을 잇던 규진이 형이 생각났다.
내가 잠들기 직전까지, 그리고 잠에서 깬 이후로 나누었던 대화, KP의 팀 주간 타율이 어쩌니, 바빕은 어쩌니,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효과적으로 잘 막고 있었다.
따악―
와아아악―!!
넘어가쒀!!
단 한 명, 3번 타자 김기윤만 빼고.
우리 팀의 유일한 실점이자 KP의 유일한 득점이었던 1점은 1회 말부터 터진 김기윤의 솔로 홈런이었다.
7회 말 선두 타자를 잘 잡고 맞이한 김기윤은 초구부터 노림수가 있던 듯, 있는 힘껏 잡아당겨 왼쪽 담장을 훌쩍 넘겼다. 맞자마자 훈이가 멍청히 서서 타구만 바라볼 정도의 비거리.
그제야 당했다는 듯 투수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와아아아―!!
그래도 어째. 이미 넘어간걸.
부대끼며 살아온 게 10년이 넘어간다. 규진이 형이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눈에 보였다.
스트라잌!
스트랔!
스트라아아우!!
별생각 없겠지.
우리가 10년 동안 이렇다 할 작은 다툼도 없이, 잘 맞게 살아온 건 성격의 유사함에 있었다. 비슷한 생각, 비슷한 대처. 그 모습은 인 게임에서도 나타났다.
어쩔 수 없지.
넘길 수 있는 부분은 넘긴다. 넘길 수 없으면 넘기려고 노력한다.
그게 규진이 형과 내 멘탈이었다.
“악, X발!”
들어오자마자 글러브를 자리에 던지듯 내려놓곤 크게 소리쳤다.
분함 10%, 어이없음 10%, 분위기 전환용 80%짜리 욕설.
“여어, 홈런 두 방 맨.”
“닥쳐.”
“저런.”
7이닝 동안 2실점. 누가 봐도 호투. 매우 높은 확률로 그 팀의 승리를 점칠 수 있는 투구였지만,
아웃!
와아아아―!
팀이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그저 패전 투수에 지나지 않는다.
“형은 잘했어.”
“잘하면 뭐해, 졌는데.”
“타자들한테 그 말 해보실?”
“…….”
7위와 6위의 게임 차는 3경기. 어제 7위 팀의 승리로 2경기가 되었지만 오늘의 패배로 다시 3경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내일 경기에서 이긴다면 다시 2경기가 되고 진다면 4경기로 아주 멀어진다.
고작 5월 중순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슬슬 우리도 다급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 * *
직구… 커브… 스플리터… 싱커랑 체인지업… 그리고…….
“…슬라이더.”
모르겠다.
“…안 꺾이는데요?”
“그, 그러게.”
다음 날 불펜. 게임은 10 대 7로 앞서고 있다. 1실점만을 허용하던 준혁이가 5회, 뜬금없는 쓰리런으로 실점을 순식간에 4로 변경시키기는 했지만 경기 초반부터 두둑하게 뽑아낸 점수 덕에 여유는 아직 많았다.
투구 수가 꽤 많았던 준혁이는 거기서 바로 내려오고 6회, 최은구 선배가 투입됐다.
평소의 KP 스타즈라면 150km대 중반의 공도 받아놓고 때렸겠지만 선발 준혁이의 직구는 그에 비하면 초라한 140km 초반.
기어를 세 단계나 올린 셈이 되는 강압적인 투구에 크게 맥을 못 추었다.
6회는 깔끔하게 세 타자를 삼진, 2땅, 1땅으로 막고 내려온 뒤 7회, 신인 투수 지호가 올라갔다.
150km 중반의 공에 압도당하던 KP는 이번엔 140km 중반대의 공을 상대하자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3점.
큰 타구나 볼넷 등의 공짜로 하나의 누를 더 갈 수 있는 수단 없이 그들은 3점이라는 소소한 빅이닝을 만들며 점수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바로 다음 회에 실책으로 또다시 역전시켰다는 게 함정.
그보다 바로 직전, 역전 주자가 출루하자마자 바로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언제나처럼 8회 등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여, 불펜에 당도했고 가벼운 스트레칭 후 건영이를 앉혔다.
직구. 잘 들어간다.
커브. 좋다.
스플리터가 좀 안 먹는다.
싱커. 좋다.
체인지업, 완벽. 근데…….
“하나 더.”
“스라이다아!”
빵!
“…안 꺾이는데요?”
“…….”
불펜 투구 중 슬라이더가 유독 말을 안 들었다.
영어 쓰는 외국인이 아니라 저기 어디야, 무슨 생전 처음 듣는 말 쓰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 마냥, 도통 통하지가 않았다.
아니, 최소한 사람이면 몸짓이라도 쓰지, 이건…….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슬러브처럼 각이 크다.
뭐 그런 장점은 딱히 갖고 있지 않다. 그냥 슬라이더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구나, 정도. 실제로 내가 던지는 구종들 중 가장 자신이 없는 구종이기도 하다.
직구야 당연히 던져야 하니 놔두고, 커브는 리그 중상위권에 꼽힌다.
변화각이나 꺾임 정도는 중간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특유의 제구와 직구 콤비네이션은 그 평가를 한 단계 올려줄 수 있었다.
나는 싱커를 참 좋아했다. 언제 던져도, 누구한테 던져도 명분이 있는 구종이거든. 초구를 잡고 싶은데 맞을까 봐 부담될 때, 주자가 있어 병살을 잡고 싶을 때, 억! 하면서 카운트 잡고 싶을 때.
스플리터는 좀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었다. 잘 먹히는 날은 내가 가진 구종 중 제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자랑하지만 안 먹히는 날엔 끔찍하다. 내 실점의 대부분의 밋밋한 스플리터다.
체인지업 또한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다. 우타자에게도 던지긴 하지만 진정으로 힘을 내는 순간은 좌타자를 상대할 때. 컨트롤 뿐 아니라 커맨드도 리그 최상위권인 나는 체인지업 덕에 좌타자 상대가 너무 편했다.
그리고 슬라이더…….
“스라이닥!”
빵!
제일 자신 없는 구종. 맘 같아선 봉인해 버리고 싶은 구종.
예전엔 딱히 슬라이더에 관한 고민은 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슬라이더를 던지든 직구를 던지든 처맞는 건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내 슬라이더에 대한 빈도는 점점 줄기 시작했다.
“올라가자.”
“아, 예.”
찝찝함만 남긴 채 마운드로 향했다. 이닝 시작 전 투수에게 주어지는 약 8개의 연습 투구. 평소라면 직구 몇 개를 시작으로 나머지 구종들을 하나씩 던져봤을 텐데, 시작부터 글러브를 내 왼쪽으로 까딱였다.
빵!
‘……?’
규학이의 표정은 그러했다. 두 눈을 껌뻑이면서도 내게 공을 다시 던졌다. 규학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글러브를 왼쪽으로 까딱였다.
빵!
“…….”
다시.
빵!
“…….”
빵!
…아.
빵!
빵!
빵!
다시.
빵!
연습 투구 8개를 모두 슬라이더로 채웠다. 그럼에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왜 안 꺾이지.
규학이에게 공을 받고, 관성처럼 글러브를 왼쪽으로 까딱였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플레이!”
연습 투구 끝났구나.
그제야 전광판을 확인했다. 2번 타자부터였다.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 규학이를 노려봤다. 사인이 나왔다. 몸쪽 직구, 바깥쪽 싱커, 바깥쪽 커브, 바깥쪽 직구,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다시 사인을 내는 규학이.
“볼!”
백도어를 노렸던 슬라이더는 전혀 꺾이질 않고 직구처럼 날아가 바깥쪽의 볼이 되었다.
따악―!
“…미치겠네.”
몸쪽에서 안으로 파고들기를 기대했던 슬라이더는 그냥 한가운데 실투가 되어버렸고 그대로 우중간의 담장을 넘어갔다.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3번 타자, 김!! 기!! 유운!!!
장내 아나운서가 연타석 홈런을 기대하며 크게 이름을 부르자 김기윤의 등장 곡과 함께 관중석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응원! 하면 떠오르는 부산 사직구장.
팀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가 등장하자 안 그래도 시끄럽던 응원석이 더더욱 북적인다.
따악―!
그리고 난 그들의 염원을 배신하지 않았다.
“…X발.”
스트라이크 두 개를 먼저 잡아둔 뒤 던진 슬라이더.
오, 이번엔 좀 꺾였다, 싶었지만 내 착각이었다.
아니, 꺾이긴 꺾였는데 한창 타격감이 올라오는 듯한 김기윤에겐 어림도 없었다.
연타석을 얻어맞아 본 게 처음은 아니다. 한창 쩌리 시절, 타자들 기 좀 살려줘야지! 같은 자기합리화를 몇 번이나 했던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내가 누군데!
“스르라이이이앜!”
포기.
이후 고개를 아무리 저어도 슬라이더 사인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자체적으로 슬라이더 봉인을 선언하고 규학이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스르라이잌, 아우우!”
그러자 결과가 따라왔다.
“솨아악!”
이젠 단어의 형태조차 남지 않게 되어버린 구심을 뒤로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규학아.”
“예, 형.”
“나 슬라이더 봉인할까 봐.”
“갑자기요?”
“…슬라이더 어떻게 던지더라?”
슬라이더. 릴리스 후 날카롭게 휘며 떨어지거나 휘는 구종.
알아. 안다고.
이쯤되니 게슈탈트 붕괴 비스무리한 게 왔다.
어떻게 던지더라.
가만히 앉아 공을 노려보며 슬라이더를 연구했다. 이리 잡아보고 저리 잡아보고.
이렇게 꺾던가? 아닌데.
9회 말, 신경석 선배가 등판해 세 타자를 모두 땅볼로 잡아낼 때까지 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팀원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할 때가 되어서야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좋아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