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편―안
3번 타자 홍석진이 등장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서서는 기지개를 켜듯이 등을 편다.
선구안은 리그에서 그냥 원탑 수준.
그런 선구안과 비교해서 컨택은 약간 달리는 편. 당겨치기보다는 잘 밀어치며, 밀어칠 때의 비거리가 더 길다.
아무래도 나이 탓이 조금 있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정보를 정리했다.
선발이 아닌 구원이기에 어려운 점은, 공 하나하나에 변하는 타자의 변화를 앞선 타석들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맞아야 한다는 점.
규학이는 슬쩍 자기 오른편을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한 번 까딱거렸다. 고개를 끄덕인 뒤 던진 공은 바깥쪽 직구.
“스트라이잌!”
꽉 차긴 했지만 확연히 들어간 공.
스탯이 오르면 이게 좋다. 이미지 속의 궤도와 똑같이 날아와야 하는 공이 이전과 분명 다르게 비행하니까.
홍석진의 선구안이라면, 그리고 홍석진의 컨택이라면 이 정도는 나올만한 공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카운트 하나를 넘겨버렸다.
그를 확인한 규학이는 이번엔 엄지손가락을 두 번 까딱였다. 사인 접수 후 양손이 올라감과 동시에 빠져야 하는 왼 다리.
하지만 이번엔 몸이 바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세 번, 숨을 세 번 쉬고 나서야 고개가 숙여졌다.
“끄읍!”
뻥―!
슬쩍, 하고 미트가 절묘하게 틀어졌다. 홍석진은 볼로 판단해서 배트를 내지 않았고, 또 그게 정답이었다.
“스트라이잌, 투우!”
배터리가 나와 규학이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규학이는 힌트를 얻었는지 이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끄악!”
펑!
“스트라이이이아웃!”
허무하게 홍석진이 물러났다. 배트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얼른, 얼른 스탯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지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만족감과 기대로 올랐던 기분은 이내 등장하는 다음 타자를 보자마자 다시 하강했다. 큰 산 하나를 넘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강한다. 더 큰 산이 보였다.
4번 타자, 바악!! 해애! 지이인!!
리그 대마왕, 뭐 대충 그런 별명이 붙어 있는 타자.
생각해 보니 오늘 전광판을 딱히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기분을 진정시킬 겸 구경했다.
79경기 0.364/0.431/0.653 31홈런 82타점.
미친 새낀가.
더욱 무서운 점은, 이놈은 매년 발전하고 있다는 점.
이제 겨우 1군 6년 차다. FA 때 얘 잡을 구단은 얼마를 줘야 잡을 수 있을까. 메이저로 꺼져버리라지.
…거를까?
순간 그 생각도 했다. 걸러도 되잖아. 얘만 아니면 되는데.
까딱.
하지만 포수의 의견은 나와 달랐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공 던질 준비를 마쳤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날아간 공은 규학이의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스트라이잌!”
홍석진에게 바깥쪽이라면 박해진에게는 몸쪽 꽉 차는 공. 박해진은 가만히 구경했다.
오랜만의 박해진과의 승부.
오랜만에 보는 내 공은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발전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진 또한 홍석진과 비슷한 의미의 구경이었을까.
따악―
와아아! …아아…….
“파우울!”
아니면 그냥 단순한 거리 재기였을까.
방금보다 반 개 깊게 들어간 공을 당겨서 담장을 넘겨버렸다. 폴대 바깥으로 빠져나간 공이기는 했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0-2. 뭘 던져야 할까.
삼진 잡기 좋은 카운트를 만들어 놓고 보자 현진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 개인적인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난 이렇게 대답했지.
“끅!”
박해진한테 삼진 잡는 거.
따악―!
여전히 최고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잘 맞고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보고 있으면.
타구는 박해진이 홈런을 쳤을 때와 비슷한 타구 속도를 자랑했다.
텅―!
“릴레이! 투투!”
“쓰리로!!”
다만 어딘가 삐걱거린 탓인지 타구는 담장의 상단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성현이가 진형이의 콜에 따라 던진 공은 성문이가 받아내고 더 이상의 릴레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문이가 오른손에 공을 잡고 양손을 뻗어 보이자 2루심이 타임을 외쳤다.
타임―!
타임을 부른 건 2루심만이 아니었다.
“…형.”
“왜 왔어?”
구심 또한 규학이의 요청에 타임을 불렀다.
“괜, 괜찮죠?”
“나 지금 되게 좋은데.”
“괜찮은 거 맞아요?”
“홈런 안 맞은 게 어디야.”
진심으로 대답했다. 실실 쪼개는 것에서 내 진심을 봤을까, 규학이는 별말 없이 다시 홈으로 돌아갔다.
됐어.
지금까지 나와 박해진의 상대 전적이 어떻던가.
내 기억이 틀리지 않으면, 통산 모든 타석에서 녀석은 나에게 홈런을 쳐냈었다. 그게 드디어 끝난 것이다.
만족.
사람이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장타라고 해도 홈런이 아닌 것에 감사했다. 성장하고는 있구나.
“스트라이이잌!”
2루 베이스를 밟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박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인마.
“스트라이이잌, 투!”
드디어 오늘 상대해 본 덕에 정보가 많은 타자가 보였다.
박해진과 이름이 같은 하해진. 팬들은 이 둘은 박하 형제라고 부른다지.
“스트라이이이아웃!”
하지만 박해진은 감히 누군가가 따라볼 수 있는 타자가 아니었다.
하해진이 아무리 박해진의 하위 호환이라고 해도 결국엔 하위 호환, 절대 못 이길 타자가 아니었다.
한번 박해진을 상대해 본 뒤라 그런지 그다음 타자들이 이상하리만치 쉽게 느껴졌다.
조금 전의 하해진도 그렇고, 지금 상대하는 신헌철도 그렇고.
“스트라이잌!”
초구를 몸쪽에 바싹 붙였다. 원래라면 볼로 판정받겠지만 규학이의 프레이밍이 참 빛났다.
저걸 주호한테도 좀 전수해주면 좋을 텐데.
투닥―
“스윙!”
“투투!”
바운드되는 스플리터에 헛스윙이 나온 뒤 스타트를 끊었다가 다시 돌아가는 주자에게 공이 향했다.
벤트 슬라이딩으로 다시 베이스를 밟고 흙이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터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플레이트를 밟았다.
0-2. 뭘 던지면 좋을까, 규학아.
몸쪽 직구? 스플리터 한 번 더?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가 없으니 좀 답답하긴 했다.
직구, 싱커, 체인지업에 커브와 슬라이더, 모두 좌타자 상대로 던질만하거나 강점을 보이는 구종들이었지만 우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종, 슬라이더가 없으니 조금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몇 번 골라내다가 발을 뺐다. 약간의 답답함이 느껴져 위를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스탯이여, 힘을 주소서.
엄지, 검지, 중지로 사인을 냈다. 괜찮겠냐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박해진을 슬쩍, 쳐다보다가 다리를 들었다.
주자가 있는 상황임에도 슬라이드 스텝이 아니었다. 왼 다리만 안 뺐다뿐이지 와인드업이나 다름없었다.
“끄악!”
하지만 덕분에 공에 편하게 힘을 실을 수가 있었다.
뻥!
“스윙, 아웃!”
헛스윙 삼진.
“쌰아아아!”
높은 공에 배트가 나오는 걸 보자마자 절로 양 주먹이 쥐어졌다. 해맑게 뛰쳐나오는 규학이를 끌어안았다.
무슨 한국 시리즈 우승한 것도 아니고 노히트 노런한 것도 아닌데 기쁨이 살짝 과하다는 느낌이 얼핏 들었다.
그 두 가지를 내가 실제로 해보지는 않았지만, 한껏 고양된 내 마음은 그와 비슷할 것이라 떠들어댔다.
[멀티 이닝]
- 1실점 이내로 막으세요. (1/1)
- 보상 ― 싱커+2
- 특별 퀘스트 성공! 랜덤 특성 획득! 상태 창에서 확인하세요!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58
커브 ― 51
슬라 ― 35
스플 ― 41
체인 ― 46
싱커 ― 44+2=46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랜덤 특성 획득! 해제 시 특성 1개를 랜덤으로 획득합니다.
규학이의 뒤, 홈플레이트에서 빛나는 텍스트.
스탯이 상승했음과 동시에 랜덤 특성 하나를 얻었다는 텍스트 뒤로 천천히 자기네 덕아웃에 돌아가는 박해진이 보였다.
마! 조만간 형이 삼진 잡아줄게!
새로 얻을 특성과 함께라면 진짜 박해진을 삼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얼른 저 랜덤 특성이라는 걸 까보고 싶었지만 약간 뒤로 미루었다. 그보다 지금은 이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고 싶었다.
* * *
크흥. 에헉코록.
잠에서 깨어나고도 몇 분, 아직 맹한 정신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괜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주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쏴아아―
따뜻한 물을 맞으면서도 정신은 영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 차리려고 수도 레버를 찬물 쪽으로 돌려볼까 했지만 그건 미친 짓인 것 같았다.
한여름에도 찬물은 몸에 못 대겠다. 차가워.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 씻고 나와 거실에 앉았다.
찰칵―
자리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장면은 마치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에 넣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왼쪽 두 손가락에 담배를 집은 채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보자… 순위…….”
인터넷에 들어가 스포츠탭으로 돌렸다. 그리고 국내 야구. 그 아래에 순위.
“상수… 동성… 비스코… 가야.”
그리고 원하.
어제 우리는 이겼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선상에 있던 성운이 졌다.
우리는 그대로 5위를 유지했지만 성운의 입장에서는 멀쩡히 서있던 5위에서 한 단계 떨어진 6위로 내려앉은 셈.
계속 투닥거리고만 있던 장소에서 좀 벗어날 기미가 보이는 것 같다.
“다음이 가야랑 하네.”
이번 주말 3연전이 끝난 후, 월요일 휴식일 대구로 내려가 가야와 3연전을 붙게 된다. 가야와의 게임 차는 세 게임.
일단 상수와의 남은 두 게임을 모두 이긴 뒤 대구로 내려가 가야에게도 3연승을 하여 순위가 역전되는 행복 회로를 돌려본다.
“…어림도 없지.”
그렇게 되면 팀 10연승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결과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욕심이니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어느새 내 좌우명 비스무리하게 된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지금 이 집 안에 퍼질러 앉아 있는 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냉장고를 열었다. 딱히 먹을 만한 게 안 보인다. 시켜 먹을까.
“네. 네네. 한 시간이요?”
아니, 무슨 짜장면이 한 시간이나 걸려.
“…네. 안 불게만 해주세요.”
하지만 짜장면은 어쩔 수 없지.
11시를 살짝 넘긴 시간. 딱 점심때에 맞춘 잘못일까, 짜장면이랑 탕수육 작은 세트 시켰는데 무려 배달 예상 시간이 한 시간.
한 시간 동안 마땅히 할 게 없어지자 컴퓨터를 켰다.
“어… 아.”
할 게 없어 컴퓨터를 켰다지만 컴퓨터를 켜도 별다른 건 없었다. 미튜브나 뒤적거리다가 인터넷 기사나 좀 찾아보다가.
누워서 핸드폰으로도 할 수 있는 걸 굳이 자리에 앉아서 하자니 어딘가 불편했다. 얼른 컴퓨터 끄고 누워서 하자, 하여 컴퓨터 종료에 마우스 커서를 옮길 때,
“아.”
그래도 모처럼 컴퓨터를 켰는데. 풀카운트가 생각나 오랜만에 접속했다.
딱히 이렇다 할 업데이트 목록은 없었다. 그냥 선수 추가랑 특이 폼 추가 정도. 이 정도면 없데이트나 다름없다.
이왕 켰으니 한 판 정도 돌렸다. 당연히 내 선발은 나. 게임 속의 나는 150km 중후반대의 공을 마음껏 뿌리며 상대방을 농락했고 게임은 9 대 0으로 이겼다.
상대방은 7회쯤에 빡쳤는지 뭐라뭐라 지껄이기는 하는데 그냥 채팅을 차단하고 플레이하니 게임이 그리 클―린할 수가 없었다.
만족스러운 내 캐릭터. 흐뭇하게 팀 관리 창에서 내 캐릭터를 띄워두었다. 체력 상태 관리해 주고 멘탈 관리해 주고 또…….
“아, 맞다.”
그제야 어제 게임이 끝난 후 얻었던 랜덤 특성을 떠올렸다.
“어… 스탯?”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58
커브 ― 51
슬라 ― 35
스플 ― 41
체인 ― 46
싱커 ― 46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상태 창을 불러오자 내 눈 바로 앞에 텍스트가 떴다. 여기까지는 기본 특성. 그리고 맨 아랫줄.
[랜덤 특성 획득! 해제 시 특성 1개를 랜덤으로 획득합니다.]
약하게 반짝반짝거리는 빛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얼른 까 봐라, 뭐 이런 거 같은데. 근데 어떻게 까는 거야.
“랜덤. 특성. 획득. 해제. X발!”
뭐 마우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단어들을 늘어놔도 뭐 달라지는 게 없다. 슬슬 빡칠 때쯤,
“악!”
손으로 건드리니 점등되던 노란빛 대신 그냥 노랗게 빛나기만 한다. 이건가 싶어서 마우스처럼 툭툭 건드리자
띠링―!
아니, 잠깐만.
[랜덤 특성 획득!]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게 해줘야지!
특성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시스템은 나 따위에게 관대함을 풀어주지 않았다.
“편안이라…….”
TV 광고 속 모 아저씨가 속을 쓰다듬으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났다. 나를 보는 이들이 그렇게 된다는 걸까.
편안이라…….
이전에 갖고 있던 특성들을 떠올렸다. 해탈, 그리고 불편.
처음 봤을 땐 뭐 이딴 특성이 다 있나 싶었고 또 그 특성의 설명들 또한 뭐 이딴 설명이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단순히 스탯 몇을 올려준다는 그런 특성보다도 더 대단한 특성이었다.
스탯 뻥튀기된 직구 따위가 처맞아봐야 오히려 멘탈은 흔들릴 것이고 불편한 감정은 본인이 느낄 테니까.
“편안… 편안…….”
이런 특성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다 써먹어야 잘 써먹었다고 생각이 날까.
똑똑― 짜장면이요!
일단 밥 먹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