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47화 (47/190)

47화. 후두부, 측두부

어, 혁준아.

네?

너 머리 뒤에 두부가 있어. 이게 뭔지 아니.

…네?

명진이가 혁준이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후두부야. 이힛이힛…….

…….

그럼 네 옆에 있는 두부는 뭔지 아니.

아, 형. 제발… 제발…….

그건 바로 측두부란다. 히히히.

“으아아악!!”

악몽을 꾸었다. 상반신만 일으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잠에 약한 내가 곧장 정신을 차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악몽이었다.

이명진 나쁜 새끼. 후두부를 갈겨버릴라.

“후…….”

아, X발 꿈, 희망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요새 새로 생긴 버릇 중 하나, 일어나자마자 리그 순위 확인.

상수, 동성, 비스코, 가야. 위쪽 네 팀은 그대로였다. 가야의 세 단계 아래에 원하가 있고 거기서 또 한 단계 아래에 성운이 있다.

“보자…….”

상수랑 동성은 관심 없고, 가야랑 게임 차가 그대로 3게임.

우리가 상수와의 주말 3연전에서 2승 1패로 위닝시리즈를 가져갔음에도 승차는 그대로였다.

그래, 첫날은 내 3이닝 플러스로 이겼고 다음 날 경기는 깔끔하게 졌다.

직전 주중 시리즈에서 3연투를 한 두 불펜 선배를 고작 하루 쉬게 하고 내보내기도 어려웠고, 전날 3이닝 플러스를 던진 나를 또 연투시키기도 부담이었을 테고.

어제 선발도 마침 그냥… 5선발이라고 이름만 갖고 있는 2군급 신인이고. 반쯤 포기하는 경기였다.

그리고 일요일 경기, 다시 등판한 혁준이가 8이닝 동안 2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은 뒤 신경석 선배가 홈런 하나 허용하긴 했지만 우리가 앞서 얻은 5점과는 차이가 이미 컸다.

결국 편안이라는 특성을 얻고도 아직 써먹지를 못했다.

아쉽구만.

그래도 내일부터 있을 가야전들에선 힘 좀 볼 수 있겠지.

- Your love is…….

“아, X발 깜짝이야.”

그때가 되어서야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오늘 일어나 처음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꿈에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던 명진이 때문에 몇 분 더 일찍 일어났다. 그건 좋지만 그 과정이 너무 거지 같다.

진짜, 조만간 후두부 한 대 날려줄 거라 각오하고 얼른 씻으러 갔다.

깔끔하게 씻고 면도도 슥슥 해주고. 얼마 전 한 이발 덕에 깔끔해진 머리카락을 왁스로 슥슥 고정해 주고 거울을 봤다.

“X나 멋있어.”

옷도 머어엇있게 입어주었다. 일단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니 옷걸이가 된다.

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 탑승. 강남 쪽 식당으로 향했다.

“저기, 김한울로 예약했는데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막 엄청난 식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대로 엄청난 식당도 아닌 그냥 맛있는 곳.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새삼 요즘 세상 사람들 핸드폰 없으면 어떻게 사나, 싶었지만 나도 요즘 세상 사람이었다.

민영 씨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12시. 지금은 11시 47분.

조금은 시간이 남았기에 아까 마저 못 본 인터넷을 훑어봤다. 헤드라인에 있던 타 구장 정보들을 한번 확인하고 이번엔 팀 순위가 아닌 개인 순위로 넘어갔다.

…봐도 되겠지.

묘한 죄책감 비스무리한 걸 느끼며 홀드 쪽 탭을 눌렀다. 쭈르륵, 홀드를 많이 챙긴 선수들의 명단이 표기됐지만 가장 위에 있는 건 나.

내친김에 아예 가장 왼쪽에 있는 내 이름 자체를 터치하자 올 시즌 내 성적이 나왔다.

28경기 42.1이닝 2승 0패 17홀드 6세이브 47삼진 21볼넷 WHIP 1.09.

“오…….”

올해도 특급 불펜으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FA 계약 첫해, 오히려 이쯤 되면 혜자 계약이라 칭송받지 않을까.

흐뭇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나서 핸드폰의 홈 키가 아닌 검색 창의 홈 버튼을 눌렀다. 검색 엔진의 메인 화면이 나오자 잠깐 비추는 실시간 검색어의 내 이름.

어?

“아, 일찍 오셨었네요.”

하지만 이를 제대로 확인해 볼 새도 없이 민영 씨가 등장하여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두어야 했다.

“아뇨, 방금 왔어요.”

매너 대사 한번 해주시고.

일행이 모이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간단하게 예약했던 것 달라는 짧은 말로 주문이 끝난 뒤 다시 둘이 되고 이야기가 꽃피기 시작했다.

“안 힘드세요?”

“금요일은 좀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이틀 쉬니까 좀 괜찮아졌어요.”

“전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요. 한울 씨가 왜 굳이 중간에 남아 있는지…….”

“이게 편해요. 심적으로. 마무리 같은 귀족 자리는 저한테 안 어울려요.”

굳―이 따지자면 마무리의 하루 계획표는 선발의 주간 계획표와 비슷했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나가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것이.

하지만 중간은 다르다. 정해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일단 언제 내보내야지, 언제 나가면 좋겠다는 틀은 있지만 막상 지켜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나갈 수 있냐 여쭤보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쇼. 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 전설적인 대투수 선배님의 유명한 명언.

내가 그 정도로 숭고한 사명감으로 공을 던지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내 방식대로 이해했다.

나가라면 나가지 뭐.

그게 나에게 잘 맞았다.

“아, 그리고 기사 봤어요!”

“네?”

“네?”

내가 반문하자 오히려 다시 반문이 날아온다.

“지금 한울 씨 실검 1위인 거 모르세요?”

“아… 방금 얼핏 본 것 같긴 한데. 확인은 안 해 봐가지고…….”

“히히…….”

민영 씨는 잔망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세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 좋을 것 같네요.”

뭐지. 불안하게. 나 뭐 스캔들이라도 났나. 아니면 뭐 연루됐나.

얼떨떨하게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까 그 검색 엔진을 켜자마자 보이는 내 이름을 터치하자 뜨는 기사들 중 가장 위의 기사에 눈이 갔다.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야구용품 업체 롤링스톤즈와 함께 모교에 야구용품 3천만 원 쾌척.]

“아.”

빠르게 손이 그 기사를 터치했다.

롤링스톤즈라는 미국의 100년 전통의 야구용품 업체가 있는데 어쩌고 저쩌고, 막 그래가지고 이렇게 돼서 야구용품 3천만 원어치를 기부했다, 대충 그 내용.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댓글 반응은 아주 좋았다.

그저 빛……! 뭐 이런 댓글부터 롤링스톤즈라는 업체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도 보였다.

나로서도, 사측으로서도 충분히 각자 기부한 금액 이상의 이미지를 누린 상황이지만…….

“얘기하지 말라니까…….”

“네?”

부담스럽다.

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기사 내용은 딱히 틀린 말을 하거나 왜곡된 내용은 없지만 누락된 부분은 있었기에 중간중간의 내용을 첨언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야기하지 말아달라 했는지.

“음… 전 오히려 알려진 게 좋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민영 씨의 생각은 달랐다.

“한울 씨가 그렇게 기부하시는 걸로 인해서 다른 선수들 또한 자기 모교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학생들에게 기부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굳이 다른 선수가 아니더라도 다른 야구용품 업체 측에서 기부를 할 수도 있구요.”

멋쩍음에 꼼지락거리는 내 손가락을 보고 웃은 민영 씨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럼 그 용품을 받은 학생들은 더 편하게 야구하고, 또 그러니까 더 좋은 성적을 내겠죠? 그러면 당연히 미래의 한국 야구의 질도 훠얼씬 더 품격있어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낸 미래의 선수들이 또 기부를 하고, 또 더 미래의 선수들이 또 기부를 하고!”

…짝, 짝, 짝.

입을 헤― 벌리고 멍청하게 민영 씨를 쳐다봤다.

“민영 씨는 저보다 야구를 좋아하시네요.”

“한울 씨보다는 아닐 거예요.”

“저는 야구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돈벌이니까 그냥 붙잡는 수준이구요. 좋아한다는 단계는 이미 초월한 거 같아요.”

“그래도 안 좋아하면 붙잡는 것조차 못 해요.”

천사를 보았다. 예쁜 천사를.

“아, 그래서…….”

뭔가 기부 이야기 덕에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 아다리가 꽤 잘 맞게 된 것 같다. 내 오른발 옆에 고이 세워져 있던 쇼핑백을 들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거. 민영 씨 선물이에요.”

말이 쇼핑백이지, 그냥 천원샵 가서 산 종이봉투 비스무리한 쇼핑백. 그리고 내용물도 뭐 딱히 대단한 건 아니다.

“이, 이건…….”

내 입장에선.

“저, 저한, 저한테 주시, 주시는 거예요?”

“네, 선물이니까요.”

“…….”

때가 잔뜩 끼고 여기저기 갈라져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래된 야구 글러브. 하지만 내 팬이라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어, 어떡해애…….”

“아니, 울지 말고.”

진짜 울려고 한다. 제발 그러지 마요.

좋아하는 야구 선수가 실사하는 용품을 가지고 싶어 하는 팬은 많다.

그걸 받아서 소장할지.

아니면 취미로 야구를 하는 사람이 그 선수의 기운을 받아서 본인의 야구를 할지.

아니면 중고 장터에다가 내다 팔지.

결정은 그 사람의 몫이라 하지만, 여기 민영 씨는 첫 번째 사람에 속할 사람이었다.

“아, 이거. 아빠한테 숨겨야 돼요.”

“예? 왜요?”

“아빠가 보면 분명 자기한테 달라고 할 거예요. 아, 어떡하지, 내 방에도 서슴없이 들어오는 사람이라 방에 어디 장식해도 보고 뭐냐고 물어볼 텐데.”

“어…….”

그건 생각 못 했는데.

“그… 아버님께는 조만간 사인볼 하나 드린다고… 대충 뭐 그렇게…….”

“네… 그래야겠네요.”

오히려 너무 큰 선물을 받아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고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시키고 쇼핑백에 조심히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민영 씨랑 캐치볼이라도 같이 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나중에 기회되면 캐치볼이라도 한번 같이하실래요?”

그 생각이 제멋대로 뛰쳐나갔다.

“네?”

“아, 아니.”

“좋아요!!”

“…네.”

박력.

“조만간 연차 한번 내야겠네요.”

“…….”

단호함까지 느껴지는 눈빛은 약간 공포심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럼 오늘 대구로 내려가시는 거예요?”

드디어 식사가 나왔다.

필라프와 스테이크, 그리고 파스타.

민영 씨는 파스타를 바로 가져가 이리저리 잘 섞었고 나는 스테이크를 가져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약 1분 정도의 먹기 위한 준비작업이 끝나자 둘은 기쁘게 포크와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쵸. 이제 가야랑 시리즈죠.”

“세 게임이면…….”

에이, 설마.

“스윕하면 되겠네요!”

“…….”

제발.

“노력은 해볼…게요.”

“한울 씨도 그렇고, 신경석 선수랑 최은구 선수도 등판 가능하죠?”

“그쵸? 저도 오늘로 3일 쉬고, 최은구 선배는 한 5일 쉰 건가. 신경석 선배도 한 이닝 정도는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아마 무리는 안 시킬 것 같아요.”

“그리고 한규진 선수 선발이구요!”

“네네.”

“이겨야죠!”

왜 강단이 저기서 느껴지는 건지.

선수로서의 승부욕이나 집착은 저쪽이 더 큰 것 같다. 그 오오라가 나에게까지 닿는 느낌은 썩 괜찮았다.

“그럼 한울 씨가 보시기에 올해는 몇 등할 것 같으세요?”

“음…….”

입으로 향하던 필라프를 잠시 내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두뇌 풀가동.

“…4위?”

“작년처럼요?”

“네. 근데 작년보다는 좀 여유 있는 4위가 아닐까요?”

“헤에… 거기서 준플레이오프에서 이기고?”

“이겨야죠. 이겨서, 플레이오프도 올라가고. 한국 시리즈도 올라가고. 한국 시리즈에서도 이기고.”

“한국 시리즈 우승!”

“해야죠.”

작년 준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 난 3년을 불렀지만 그 기간을 조금은, 혹은 당길 수 있는 만큼 당겨도 되지 않을까.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기쁜 웃음을 짓도록 만들고 싶었다.

노력.

아직 한참 멀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지 만으로 1년 반. 꽤 긴 시간을 받았음에도, 덕분에 리그 탑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바꿔 말해, 더 발전할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은 결코 작지 않으리라는 것.

일단 내일부터 시작될 가야 시리즈. 당장 새로 추가된 편안 특성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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