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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48화 (48/190)

48화. 낙지볶음

“그거 뭐냐?”

“뭐긴.”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평소의 쓰던 글러브가 아니었다.

붉게 윤기 나던 색이 바래고 바래다 못해 다홍색이 되어버렸던 그 글러브.

이젠 아니다. 소가죽의 윤기가 가득한 검은색 글러브가 튀어나왔다. 쌔삥이 주는 감동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런 예술품을 감히 내가 써도 되는 걸까, 그 길었던 고민은 하나 더 드릴게요,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스폰받았어.”

“올. 김한울 출세했는데.”

“그러니까 캐치볼 좀.”

길들이기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러브를 받은 지 약 일주일. 집에 와서 매일 10분 정도 이리저리 만지작해 주기는 했다.

엄지 쪽 때리고, 새끼 쪽 때리고, 검지 쪽 때리고, 손바닥 쪽 돌돌 말아서 또 때리고, 제작부장님께 전수받은 길들이기 방식 그대로.

덕분에 받자마자 느껴졌던 딱딱함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미제 글러브 특유의 투박한 맛이 좋았다.

빵!

“살살 던져, 무서워 형.”

“이렇게 던져야 길 들지.”

빵!

“저 포수 아닌데요!”

“시끄럽다.”

볼집이라고 불리는 글러브 속 작은 공간.

이 공간으로 받아야 공을 빼는 넥스트 플레이에 유리하고, 던진 사람 입장에서 기분 좋은 뻥! 하는 포구음이 난다.

만약 그렇게 못 하면…….

짝!

“왁!”

이렇게 된다.

아직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 글러브, 아껴서 써야지!

그런 다짐은 손바닥을 짜릿하게 관통하는 고통에 무너졌다.

바닥에 내팽개치듯 벗어내고 얼른 손바닥을 비볐다. 짜릿함은 내 손바닥과 두 눈알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규진이 형은 뭐가 기쁜지 실실 웃고 있었다.

짜릿함이 좀 가시자 이내 다시 글러브를 꼈다. 그리고 계속되는 캐치볼.

빵!

211로 껴서 다행이야. 1111이었으면 내 검지는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아무래도 받는 것보다는 던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제대로 공을 잡는 것에 대한 능력은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이따금 규진이 형의 묵직한 직구는 내 손바닥에 거친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다.

X발.

그래서 나온 대책.

착!

착!

착!

“야, 웹으로 받는 거 아니지?”

“서, 설마…….”

“에이, 김한울이 가오가 있지. 서얼마, 그거 좀 아프다고 웹으로 받겠어?”

“…….”

X발, 들켰네.

볼집을 기준으로 손바닥의 정반대편,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웹 부분으로 받는 것.

규진이 형의 지적 때문이 아니라, 아니 진짜 아니라, 글러브의 관리를 위해서 이내 생각을 바꿨다.

아무래도 웹으로만 공을 받게 되면 이쪽에 끈에 계속해서 충격이 가게 되고, 그러면 또 보기 싫게 길이 들어버린다.

종합적인 이유 때문에 볼집으로 잡으려고 했다. 그냥 투수 강습 타구 연습이라도 한다 생각하자.

짝!

“X발!”

* * *

4위 가야 퍼펙터스, 5위 원하 챌린저스. 게임 차는 세 게임. 그리고 이어질 게임도 세 게임. 스윕하면 이번엔 공동 4위다.

올 시즌 컨셉은 공동이다.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첫 단추는 어느 정도 맞았다.

규진이 형이 압도적인 구위로 7이닝 동안 삼진 14개를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로써 리그 탈삼진 1위의 자리를 점점 공고히 해나가는 기분.

13게임 선발에서 76과 1/3이닝을 던지며 잡아낸 탈삼진의 개수는 무려 81개.

그 밑에 일요일에 등판했던 혁준이가 두 개 차로 쫓아가고 있고 또 그 밑에 동성의 현진이가 다시 두 개 차로 추격하고 있다.

각성은 내가 아니라 규진이 형이 한 거 같은데.

투구 수 117개를 던지고 7이닝까지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규진이 형을 향해 다가갔다. 하이파이브. 이후 아이싱티로 갈아입으러 로커로 가는 걸 얼핏 봤다.

오늘 안 올라가나?

7회가 마무리되었음에도 딱히 콜이 없다. 나 말고 다른 투수가 올라가는가, 하고 불펜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최은구 선배가 보인다.

아 그런가.

3일을 쉬었으니까 올라갈 만하다.

하지만 무실점으로 일단 막아낸 뒤 올라간 건 최은구 선배가 아닌 지호였다.

“엥.”

오늘 상대 투수는 가야 퍼펙터스의 1선발이었던 윤석호. 아무리 1선발 투수라 한들 타격감이 올라온 우리 팀을 막기는 어려웠다.

또 반대로 포장을 해주자면 아무리 타격감이 올라오는 타선이라 해도 1선발은 1선발이었다.

소총부대의 총알을 몇 발 맞는 와중에도 규진이 형과 똑같이 7이닝은 던지며 2점으로 실점을 최소화했다.

그래, 2 대 0. 고작 두 점 차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지호를?

의아함이 들긴 했지만 일단 감독님의 결정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켜봤다.

최고구속은 비교적 평범한 144km. 평균적으로는 140km 초반대. 변화구는 느릿한 커브 하나랑 애매한 슬라이더 하나.

그냥 전형적인 프로 입단 1년 차 고졸 투수.

아, 슬라이더.

순간 내 슬라이더가 생각났다. 나중에 불펜에서 던져봐야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지호가 연습 투구를 마쳤고 3번 타자 최재원이 들어왔다.

가야의 장점이자 단점은 뭐랄까… 되게 무난한 중위권 팀? 괜찮은 1선발에 괜찮은 마무리도 가지고 있고 괜찮은 중심타선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다인 느낌.

그것밖에 없는 팀이 매년 최소 중위권은 유지한다는 건 바꿔말해 주요 멤버가 나름은 짱짱하다는 것. 그 시작이 지금 최재원부터다.

겁먹진 않았겠지. 니 패기 좀 보여줘 봐, 지호야. 너 그거 좋잖아.

덕아웃 난간에 팔을 기대고 지호가 아닌 타자를 지켜봤다. 타자야, 날 봐라. 불편함 좀 느껴다오.

전광판을 보니 144km. 직구 같은데 땅으로 처박히며 간단하게 원 볼부터 시작했다.

고작 공 하나 던졌을 뿐인데 지호의 얼굴이 얼어버렸다. 다음 공도 아마 직구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호의 투구 폼을 지켜봤다.

손끝을 떠난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비행하다가 이상적인 타격 포인트 지점보다 약간 뒤에서 비껴 맞았다.

파울이겠거니, 하고 멍청히 쳐다보다 공이 점점점, 빠른 속도로 시야를 가득 메운다.

“왐마!”

생존 본능 감사.

퍼억!

살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자 뒤통수가 서늘했다. 뒤를 돌아보니 덕아웃 안쪽, 강화유리가 깨져 있었다. 저걸 면상으로 받았다면 아마 난 벌써 이 세상에 없겠지.

“야야, 집중해라. 그러다 뒤진다.”

어느새 아이싱을 마쳤는지 작은 체구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차림새로 규진이 형이 등장했다. 쪼꼬미형을 옆에다가 두고 보란 듯이, 다시 난간에 팔을 걸쳤다.

타자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을 앞으로 쳐냈다. 불만이라면 굳이 중견수 앞으로 떨궜다는 것 정도.

“형 승 날아간다에 한 표.”

“X발.”

진심 가득한 악담에 규진이 형이 극찬으로 화답했다. 실실 웃으며 이원웅 타석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이제부터 우타자니까, 다시 파울 타구가 이쪽으로 올 일은 없겠지, 안심하며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지호에게 내 맘이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볼, 베이스 온 볼!”

아이.

경제적인 투구로 공 네 개 만에 주자를 내보냈다.

시작하자마자 안타와 볼넷으로 순식간에 동점 주자까지 나가자 규학이가 타임을 불렀다.

“내 승 깨진다에 한 표.”

“그거 내가 먼저 걸었는데. 반대쪽 거시죠, 선생님.”

“…얼마.”

“10만 원?”

“콜. 매국노 새끼.”

“난 평소부터 형한테 10만 원 주는 게 꿈이었어.”

“지랄하네.”

나의 패배를 이리 간절히 빌어야 한다니.

지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홈으로 돌아가는 규학이가 보였다.

규학이는 올라가서 뭐라고 했을까. 문득 규학이가 타임 부르고 올라와서 다른 투수들한테는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다.

“형.”

“왜.”

“규학이가 끊고 올라오면 뭔 소리 해?”

“별 얘기 안 하는데.”

“무슨 얘기하는데.”

“끝나면 밥 먹을 거냐, 치킨 먹자 그런 얘기.”

쓸데없는 얘기를…….

“그럼 지금 지호한테는 뭔 얘기했을까.”

“제육볶음 먹자 하지 않았을까.”

“제정신 아니네.”

“그치.”

지호는 제육볶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까.

규학이가 한 번 끊고 내려온 직후의 공 두 개는 또다시 볼이었다.

또 바운드되는 직구, 그리고 높은 존에서 떨어지지 않는 슬라이더.

“야, 지호야아아아!! 형은 낚지볶음도 좋아한다아악!!”

입가에 손을 모으고 크게 소리쳤다. 갑자기 덕아웃에서 본인을 콕 찝는 목소리에 지호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와 눈을 맞췄다.

잠시 그렇게 눈을 껌뻑이다가 헛, 하고 웃고는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한울아.”

“왜 그러십니까.”

“넌 진짜 미친놈인 것 같아.”

“아, 극찬 감사.”

지호는 제육볶음보다 낚지볶음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스츄라이이!

스츄라이이, 투우!

곧바로 카운트 두 개를 잡아내고는,

딱!

“쓰리, 쓰리!”

“바로 1루로!”

“뻐스뜨!”

바깥으로 빠져나가다 마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애매하게 맞춰낸 배준호는 타구를 3루 쪽으로 보내버렸다. 라인에 살짝 붙어 있던 덕에 성훈이 형은 한 발만 앞으로 나와 공을 잡고서 침착하게 1루로 던졌다.

주자가 2루에 남기는 했지만 스타트를 끊었던 주자들의 발을 생각하면 이것만 해도 아주 크다.

따악―

비록 그다음 타자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아 1실점 하여 점수가 한 점 차로 변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다음 타자는 또 명진이가 잡아내 2루로 토스하며 세 개의 아웃카운트가 모두 올라갔다.

“10만 원 준비해라.”

“제발 좀 가져가라.”

이닝을 마치고 내려오는 지호를 향해 달려나갔다. 등을 팍팍 쳐주며 격려했다. 다른 팀원들과도 하이파이브를 한 뒤 지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선배님, 혹시 낙지볶음 좋아하십니까?”

“어?”

진짜로 낙지볶음 소릴 낼 줄이야.

“아니, 규진이 형이 너 제육볶음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대서.”

한마디로 그냥 쌉소리였다는 쌉소리.

“왜. 낙지볶음 사줄까? 대구에 낙지볶음 맛있는 데 있지 않나.”

“아, 아닙니다. 갑자기 선배님 보고 힘이 났습니다.”

“악, X발. 오글거리는 소리 하지 마, 제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음에도 지호는 옅게 미소 짓고 인사했다.

9회 초는 2번 성현이부터 시작했음에도 추가점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엔 원래의 마무리가 아닌 최은구 선배가 마운드로 향하는 게 보였다.

여기서 최은구 선배가?

감독님은 무슨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걸까.

“선배애!”

“어?”

나가다 말고, 내가 부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이따가 끝나고 낙지볶음 드시러 가시겠습니까. 지호랑 같이 갈 생각입니다. 여기 규진이 형이랑.”

“어…….”

뜬금없는 개소리였지만 최은구 선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 이기면 내가 산다.”

“아뇨, 얘가 살 거예요.”

“아, 형. 선배님이 사신다는데 쌉소리 할래.”

“닥쳐.”

팀 내 최단신과 최장신의 티키타카를 구경하던 최은구 선배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마운드로 다시 향했다. 로진을 살짝살짝 만지고 이내 연습 투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과하지 않게, 딱 허리선까지만 올라온 뒤 천천히 내려가는 무릎. 엉덩이가 포수 쪽으로 향하며 양손이 그저 갈라지고, 이내 같은 곳을 바라볼 뿐인데,

156km.

“형.”

“왜.”

“형은 최고 구속이 몇이야.”

“55.”

“X발. 불공평해, 세상은.”

“뒤질래?”

“왜.”

“너 키 몇이야.”

“…….”

미안.

더 건드렸다가는 점프해서 내 후두부를 날릴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네 뒤에… 두부가 있으면… 후두부… 흐흐…….

“악! 이명진 개새끼!”

2루 쪽에서 규학이의 롱팩을 받을 무렵 들려오는 제 이름에 명진이가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라운딩을 돌렸다.

“왜?”

“쟤 아주 나쁜 놈이야.”

미친놈인가.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이내 나를 무시했다.

플레이!

한 점 차, 평소와 같은 셋업이 아닌 오랜만에 마무리로 등판한 최은구 선배는 간만에 입은 예전의 옷이 딱히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유의 불안불안한 제구 자체는 남아 있긴 했지만,

“스윙, 아웃!”

첫 타자를 스윙 삼진으로 돌려보내고,

“스윙, 아우웃!”

그다음 타자 또한 스윙 삼진으로 돌려보냈다.

다음 타자는 직구로만 승부하다 풀카운트까지 닿게 되었다. 9구째는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노려봤지만 실패.

상대편은 당연하게 대주자를 냈다. 이내 규학이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오른손으로 자기 몸 구석구석을 터치했다.

해석하면 그냥 투수는 홈만 보고 내야는 1루만 보자. 주자 신경 쓰지 말자는 이야기. 좋은 판단이다.

“스츄라이이!”

156km. 또 나왔다.

“오늘 최은구 선배 최고구속 넘는 거 아냐? 대구구장이 구속이 잘 나오던가?”

“너 대구에서 안 던져 봤냐?”

“…….”

덕분에 대구구장 스피드건의 중립성을 잘 알았다.

“스윙!”

직구를 노렸는지 낮게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이 나왔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주자는 당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루로 향했지만 투수가 그러했듯, 포수는 아예 2루로 던지지도 않았다.

2루로 커버 들어가던 성문이는 가다 말았고. 오늘 최은구 선배의 구위를 보자면 계속 저래도 될 것 같다.

“직구?”

“난 슬라이더.”

“10만 원 콜?”

“너 지면 20만 원인 거 알지?”

“…아.”

1-2. 주자가 2루에 있긴 하지만 딱히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상황.

최은구 선배는 여기까지 상황을 만들어 놓고 공을 쉽게 던지지 못했다.

발을 한 번 빼고, 또 한 번 빼고.

두 번씩이나 발을 뺀 뒤 셋포지션에 들어갔을 때, 은구 선배는 홈도 아니고 정면도 아니고 2루 주자 쪽도 아닌 애매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

나와 눈이 마주친 후, 이내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였다. 그 후 왼 다리가 들렸고 빠르게 공이 포수에게 향했다.

타닥―

“스윙, 스윙!”

슬라이더! 낫아웃!

당연히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타자는 배트를 멀리 내던지고 1루로 전력 질주했지만 깔끔한 블로킹 덕에 규학이는 편히 1루로 공을 던질 수가 있었다.

그렇게 경기가 종료.

“오메, 이겼네.”

“승 축축.”

무심한 박수로 축하를 해주었지만 축하를 받은 당사자는 현물을 요구했다.

“야. 20만 원.”

아,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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