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동창회
4위와의 간극은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화요일과 수요일 경기에서 이기며 한 경기 차까지 쫓아갔지만 목요일 경기에서 깔쌈하게 패배하며 다시 두 경기차가 됐다.
오히려 그사이 성운 호크스가 KP 스타즈를 스윕하며 한 경기 차까지 쫓아온 형국이 되었다.
주말 3연전에서는 열심히 서울로 올라가 상수와 3연전을 치렀다.
같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지만 이번엔 상수의 홈 차례.
웬일로 압살하여 이긴 뒤 압살 한 번 당해 주고 2이닝 세이브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갔다.
9회 말에 박해진이랑 한번 붙나, 싶었지만 그 전에 위기 탈출 넘버원을 시전하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성운은 대구에서 가야와의 3연전.
바로 위의 팀과 바로 아래 팀의 3연전은 과연 어디를 응원해야 할까? 더불어 위도 아래도 각각 한 경기씩만 차이가 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허허.”
정답은 사이좋게 3무씩을 나눠 가지는 게 제일 좋겠지만 아쉽게도 성운이 2승 1패를 가져갔다.
“개판이네.”
코 쓱.
덕분에 우리는 자리에 앉은 채 공동 4위가 되었고 성운도 수치상으로만의 6위.
여기까지만 해도 개판인데 비스코가 동성한테 찌발리면서 4위와 3위와의 차이도 겨우 한 경기가 되었다.
개판.
상수는 여전히 리그 최강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동성은 여전히 콩라인을 유지했다.
7위부터는 사실상의 나가리들이었고. 3위 비스코와 6위 성운까지 게임 차가 겨우 두 경기가 된 개판이 펼쳐진 것이다.
이번 시즌 또한 4위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3위를 노려보는 것도 욕심은 아니지 않나?
“지호야, 5회 나간다.”
“네!”
내 오른쪽의 오른쪽에 있던 지호가 불려 나갔다.
규진이 형은 팀의 입장에서, 감독의 입장에서 계산이라는 것이 가능한 투수다.
어느 팀을 상대한다면 몇 이닝을 버티며 몇 점으로 막아주겠지.
오늘은 모처럼 그 계산이 빗나간 날이었다. 4이닝 동안 8실점.
어쩌다가 얻어맞은 뜬금포 때문이라면 투구 수 자체엔 영향이 없을 테지만 오늘 경기는 제구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볼넷만 7개.
겨우 4이닝 동안 102개의 공을 던진 뒤 강판당했다.
비스코의 2선발 박건하 역시 규진이 형과는 다른 의미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5이닝 동안 안타만 9개.
차이가 있다면 비스코의 타선은 공짜로 얻은 누를 잘 활용했고 우리는 지가 지 무덤을 판 정도.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안 들어가.”
그런 날이 있지.
어느새 내 옆에 앉은 규진이 형과 잡설이 시작됐다. 4 대 0으로 지고 있는 5회 말, 지호가 추격을 위해 출전했다. 연습 투구를 진행하는 투수를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형.”
“왜.”
“우리 3위 하자.”
“그게 하고 싶어서 되냐.”
“안 될 건 없을 거 같은데.”
“꿈은 크게 가지란 말 못 들었어?”
“그럼 1위.”
1위라…….
지호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고 타자의 자리에 박해진을 대입했다.
상상은 멋대로 진행되어 한국 시리즈 7차전 9회 말 2사 만루로 치닫고 있었다. 어느새 점수는 한 점 차.
“형.”
“왜.”
“우리 예전에 했던 얘기 기억나? 9회 말에 한 점 차인데 뭐 박해진이 나오면 어쩌고 했던 거.”
“그때 내가 뭐라 그랬는데?”
“형은 만루여도 거른다고 그랬지.”
“아…아. 기억나. 그게 왜?”
“생각이 좀 바뀐 거 같아.”
“뭐 어떻게?”
“나도 거를래.”
“박해진을?”
“어.”
“웬일로 정신 차렸네.”
“그냥.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최선이지 않나,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더라.”
“박해진 사랑은 포기한겨?”
“소름 돋는 말 좀 쓰지 마.”
꽤나 보기 좋은 반응에 규진이 형이 실실 웃었다.
“전에 현진이랑 밥 먹은 적이 있거든.”
“아, 현진이 오랜만에 듣네.”
“걔가 전에 나한테 물어본 말이 있거든. 선배님께선 야구선수로서 목표가 있으십니까. 그 말 듣고 머릿속으로는 어엄청 생각했거든. 별의 별 게 다 생각났지. 근데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내뱉은 거야. 뭐라 그랬는지 알아?”
“뭐라 그랬는데?”
“박해진한테 삼진 잡는 거.”
“호오.”
박해진이 데뷔하고 지난 6년간, 박해진으로부터 단 한 개의 삼진은커녕 단 한 개의 아웃조차 잡은 적이 없었다.
박해진도 사람이니까, 아웃도 잘 당하고 삼진도 잘 먹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지.
“박해진 좋아하는 거 맞네.”
“아 제발.”
경기는 깔쌈하게 졌다.
우리가 비스코한테 지며 게임 차가 순식간에 두 게임 차로 벌어졌다. 반면 성운이 가야를 저격하며 승리를 거두었고 이렇게 공동 4위 팀이 세 팀으로 늘어나는 더 큰 개판이 펼쳐졌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규진이 형과의 대화 마지막 부분 덕이 아닐까.
하면 되지.
막연함의 끝을 달리는 무심한 발언이었지만 무거웠던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둘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 정체되어 있던 팀원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었다. 올라갈 수 있다. 올라가면 되지.
* * *
“웬일이에요?”
“놀러 왔어요.”
“진짜 날로 드시네.”
영진 씨는 선제공격을 웃음으로 회피했다.
“한 대 피우러 가시죠.”
“예예.”
흡연자 둘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흡연실로 이어졌다. 방금 피고 나온 길이지만 영진 씨는 못 참지.
자연스럽게 각자의 입에 담배를 한 개비씩 물고 불을 붙였다.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영진 씨가 먼저 운을 띄웠다.
“요즘 정신없어요. 좀 머리나 식힐 겸 현장에 잠깐 나왔어요.”
“왜요? 요즘 뭐 바쁠 게 있나?”
“트레이드 때문에요.”
“아.”
7월이 시작되며 슬슬 짜증 나는 날씨의 빈도가 높아졌다. 체력과 성적이 쭉쭉 떨어질 시기.
각 팀들은 이 선수들의 체력을 보충할 방법 중 하나로 트레이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마감 시한인 7월 31일. 아직 한 달여가 남았지만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윈 앤 루즈 트레이드에서 윈 쪽으로 향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들어와요?”
“당연히 들어오죠.”
“누굴 달라고 하는데요?”
“강성현 선수랑 한규진 선수 오퍼가 제일 많아요. 아, 이명진 선수도 꽤나.”
각 FA가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이다. 명진이 같은 경우도.
특히 성현이는 아예 올 시즌이 끝나면 FA가 된다.
“보낼 거예요?”
“어림도 없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쪽에서는요? 우리도 좀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와야 될 텐데.”
“흠. 그럼 한울 씨가 데려올 수 있다면 어디 포지션으로 데려오고 싶으신데요?”
“…너무 많은데.”
“많아요? 전 오히려 하나만 얘기하실 줄 알았는데.”
“불펜이요?”
“네. 말고 또?”
“아니, 이제 불펜은 됐어요.”
“음?”
불펜, 火펜, 不펜하고 노래를 부르던 이가 갑자기 득도를 한 표정을 지으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그럼… 어디요?”
“야수들 좀. 어떻게 안 돼요?”
“야수라… 어디?”
“외야 내야 포수 하나씩.”
“이유는요?”
“애들밖에 없잖아요. 얘네가 아직 어리고 쌩쌩하니까 망정이지, 얘네도 나이 먹고 늙고 어디 다쳐봐요. 그럼 그 빈자리는 어떡하려고.”
“그 생각도 해보기야 했는데…….”
구단 운영이라는 게 말이 쉽지.
“지금 우리 2군은 어때요?”
“썩…….”
“별로?”
“네. 노장 선수들도 그렇고 신인 선수들도 그렇고 썩…….”
지명 타자 승주를 제외한 8명의 야수. 이들은 거의 개근을 하며 출전하고 있다.
이따금 1.5군급, 2군급 선수들이 체력 안배를 위해 로테이션을 돌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해당 포지션의 성적은 좀 안쓰러워질 정도.
외야에선 병천이가 백업으로 일단 1군에 붙어 있기는 한데 사실상의 2군급의 타자. 수비는 그럭저럭 쓸 만하긴 한데 타격이 민폐급이다.
내야 쪽에선 일단 기범이가 올라운드 백업으로 붙어는 있으나 얘도 스탯이 좀 치우쳐져 있다.
백업 포수로 있는 주호 또한 타격 스탯은 기성이나 성현이급으로 볼 수 있지만 수비는 정말… 너어는 진짜…….
정말 문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그래, 어쩔 수 없이 그 나물에 그 밥으로 계속 연명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좀 트레이드로 땡겨 봐요.”
“그게 맘처럼 잘 안 되네요. 1.5군급 백업 멤버 얘기하면 나오는 반대급부가 누군지 아세요? 최소 전성문 선수부터 시작해요.”
“음…….”
백업이 아무리 잘해 봐야 백업이다.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시기라고 하지만 결국 긁지 않은 복권이다.
그런 선수를 선구안 좋고 발 빠르고 수비 좋은 2루수와 교환하는 멍청이가 어딨다고…….
“근데 이게 다른 구단 죄다 그래요.”
많네? 꽤나. 그게 우리가 아닌 게 다행인 거고.
“하긴. 우리 약점이 좀 뻔하긴 하지.”
“뻔한 것치곤 좀 많죠.”
“근데 불펜은 이제 진짜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아니. 좀 부족하긴 한데.”
우디르가 내가 된다.
“급한 불은 껐으니까요. 은구 선배랑 신경석 선배는 1인분들 하고 있고. 나도 아직 내 자리 지키고 있고. 지호는 나름 잘 크고.”
그러니까…….
“이길 경기만 던진다 생각하면 돼요. 질 경기에 안 나가서 체력 보존하면 되니까, 당장은. 이 부분은 감독님 재량이긴 한데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
“이젠 야수들 체력이 관건이다?”
“성훈이 형이 서른하나에. 승주랑 훈이도 이제 서른 됐고. 성문이가 스물아홉이고 성현이, 명진이, 기성이 얘네가 스물여덟이에요. 준비해야죠.”
“그렇기야 하죠.”
답답함이 첨가된 담배 연기는 평소보다 더욱 뿌연 색으로 보였다.
“아니면 신인 애들 빨리 키우거나.”
“그게 더 어려운 거 아시면서.”
“내가 할 거 아니니까.”
“와, 인성.”
치익―
담뱃불을 꺼뜨리고 흡연실을 나섰다. 헤어지기 전 가벼운 인사도 잊지 않았다.
“맘 같으면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는 음… 4위 정도는 확정 지었으면 좋겠어요.”
“4위?”
“네. 슬슬 자리를 잡아놔야 안정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들지 않겠어요?”
“되게 쉽게 말씀하시네.”
“제가 할 게 아니라서.”
“와, 인성.”
두 흡연자는 실실거리며 서로의 인성을 한 번씩 구경하고 헤어졌다.
* * *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약 10일.
남은 세 번의 3연전 일정은 다음과 같다. 성운, KP, 한성. 차례차례 순위가 내려간다. 대진운이 생각보다 좋게 뽑힌 것 같다.
최소 6승 3패를 노린다. 물론 더 뽑아내면 좋고.
오늘은 그중 성운과의 3연전. 어제 인천에서 3연전을 끝내자마자 피곤을 풀고 뭐도 없이 곧장 대전으로 내려왔다.
“살 만하냐.”
“살려줘.”
“살 만하네.”
그렇게 오랜만에 우석이랑도 만나고,
“명규 오랜만.”
“아직도 풀카운트 함?”
“가끔. 옛날만큼은 못 하고. 넌 설마…….”
“하는데 왜.”
“아냐. 그럴 수 있지. 화이팅.”
“안히.”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동기 셋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색했던 사이는 이용호라는 희대의 개쓰레기 덕에 똘똘 뭉칠 수가 있었다.
같은 동기들끼리 모여 낄낄대다가 끝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는 약속이 잡혔다. 고개를 끄덕이며 콜을 외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형, 우석이랑 명규랑 같이 밥 먹을 건데 형은?”
“난 쉴란다.”
내일이나 내일모레 선발이 예정되어 있는 투수는 생각보다 예민해 보였다. 더구나 이전 등판을 제 손으로 뒤집어엎었던 기억이 있다면 더더욱.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노트와 제이패드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상대 타자 분석 뭐 그런 거겠지.
“뭐 주의할 점 있어?”
“아니… 딱히.”
“주요 타자들은?”
“평소랑 비슷해.”
이게 작년까지의 성운이라면 우리 입장에서는 꽤나 좋은 의미였을 것이다. 1번 타순에서 우석이가 혼자 지랄생쇼를 다하며 머리채를 잡고 하드 캐리하는 그림.
얘만 막으면, 혹은 나머지 사람들이 우석이의 손길을 거부하면 패배하는 그림.
똑같은 표현이 올해 들어서 쓰임새가 달라졌다. 6위에 머무르고는 있지만 3위와 세 경기차밖에 나지 않는다. 바닥에서 한성이랑 손잡고 노닐던 때의 성운이 아닌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점으로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타격. 수비는 평균보다 약간 위였지만 타격이 평균보다 훨씬 아래였던 팀.
타격이 작년보다 성장하며 평균보다 약간 아래 수준까지 올라왔고 당연히 승이 쌓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경계해야 할 타자는 당연스럽게 우석이를 포함해 파워의 상승으로 5번으로 후진 배치된 김태훈, 비슷한 유형의 오영빈. 그리고 하위 타순에서 3번까지 올라온 명규.
한 명만 경계해야 할 팀이 곳곳에 지뢰가 박힌 팀으로 바뀌었다. 피곤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