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53화 (53/190)

53화. 어긋남

7이닝 8실점.

7이닝이나 막았음을 칭찬해 줘야 할까, 아니면 8실점이나 했음을 질책해야 할까.

3위 싸움, 혹은 4위 싸움이 점점 격해지고 있는 가운데 올스타 브레이크 전 하위 세 팀과의 첫 경기 혁준이의 성적표였다.

단순한 유망주였던 1년 차와 2년 차를 지나 3년 차 구속이 갑자기 뻥튀기되며 성적 또한 뻥튀기가 되었다. 좋은 의미로.

하지만 이번 경기는 혁준이답지가 못했다.

제구는 확실히 좋아진 게 체감이 된다. 그리 점수를 내주면서도 볼넷은 겨우 두 개.

다만 그게 더 안 좋은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죄다 안타였다는 소리니까.

혁준이가 내려오자마자 타선이 힘을 내어 3점을 한꺼번에 창출했다. 덕분에 혁준이의 패배가 날아감과 동시에 우리 팀의 승리도 다가왔다.

본인의 패전이 날아갔음에도, 또 팀의 승전고가 울렸음에도 데뷔 후 최다 실점이라는 멍에를 쓴 혁준이는 웃지 못했다.

덕아웃에 돌아온 모습은 평소 알던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며 욕을 하는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만족했다.

생각은 있네.

이러네 저러네 해도 나이로 보면 아직 한참 어린 녀석이다. 지금의 분함이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아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되었다. 일단 투수조의 조장이니까.

“혁준아.”

“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혁준이의 옆에 앉았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까지는 몸이 잘 움직였는데, 막상 입을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보다 잘던지는 녀석한테 충고를 하는 게 웃겨서? 그런 말 없이도 알아서 잘할 녀석이라서?

아니.

“…머리 뒤에 두부가 있으면 뭔지 알아?”

“네?”

“후두부야.”

“…….”

이명진 개새끼.

“머리 옆에 있으면 측두부고.”

“…….”

미안하다. 못난 형이라.

* * *

다음 날, 혁준이는 전날의 감정을 씻어내렸는지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나타났다.

혀어엉! 하고 소리치며 다가오는 모습은 평소 알던 혁준이였다. 후두부와 측두부의 역할이 컸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혁준이 다음인 규진이 형. 심심할까 봐 규학이랑 캐치볼하고 있는 곳에 가서 말을 걸어주었다.

아, 내가 심심할까 봐.

시선은 자연히 날아다니는 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팡!

프로라는 타이틀을 받고 있는 이상 던지는 입장이 되든 받는 입장이 되든 아득하게 평균 이상을 넘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던지든, 잘 받든 하니까.

팡!

기분 탓인가? 아니면 규학이가 문젠가?

“형.”

“왜.”

“…아, 아냐.”

기억하고 있는 포구음과의 괴리감이 점점 커져 간다. 정확하게 설명은 못 하겠다. 기분 탓으로 넘기는 게 맘 편해지는 지름길인 걸까.

팡!

그런 와중에도 계속 이어지는 포구음에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꽤나 불편했다.

따악―

와아아―!!

하지만 이제 모두가 불편해졌다.

타구가 넘어간 담장을 보는 규진이 형의 표정은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럴 수 있지. 언제나와 다르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더구나 상대 타자는 우석이. 우석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러나 150km 초반을 때리던 사람이 140km 중반을 밀어 넣으면 처맞는 건 당연했다. 우석이뿐 아니라 그다음 타자도, 그다음 타자도.

4이닝을 던진다고 하면 삼진 5개를 뽑아내야 할 투수는 5실점을 했다.

그 날 리그 탈삼진 1위 투수는 4이닝 동안 탈삼진을 하나도 뽑아내지 못하고 강판되었다.

* * *

리그 초반. 큰 기대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기대 정도는 갖게 한 외부 영입 인사 둘은 큰 실망을 안겼다.

외부 영입이라 욕을 먹었을 뿐, 사실 표면적인 그림을 보면 원하 챌린저스의 흔한 1패 중 하나였다.

리그 초반에서 중반 사이. 외부 영입 인사 둘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선발진은 건재했고 나를 중심으로 내 앞, 그리고 내 뒤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줄 수도 있는 점수를 안 줬다. 하지만 그와 오버랩되며 다가온 타선의 부진은 가져와도 될 점수를 가져오지 않는 불상사를 낳았다.

리그 중반, 현재. 끈끈함, 응집력, 뭐 그런 표현으로 흔히 표현되는 우리 타선이 바뀌었다. 빵빵 터뜨린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다.

원하 챌린저스의 불펜 트리오 이외에 지호가 가세하여 소소한 활약도 첨가해 주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따악―!!

또 넘어가쒀어!!

나이수 배앳!!

“야, 혈 뚫렸네!”

“침 맞아봐. 좋더라.”

아, 참고로 방금의 홈런은 다행스럽게도 상대 팀의 홈런이 아닌 성현이의 홈런이었다. 두 번째 타석 만루 홈런에 이은 쓰리런, 연타석.

혼자서만 무려 7타점을 뽑아냈다. 기성이가 투런을 한 방 또 보내고 진형이가 소소하게 1타점을 보탰다.

이 세 명이서만 10점. 7회 초 공격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10점이면 승기를 다졌어야 하지만 겨우 한 점을 다시 제쳤을 뿐이다.

선발 준혁이가 3이닝 동안 7실점, 이후 4이닝 동안 나머지 불펜들이 2실점.

사실 우리 불펜이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난 이제 통달할 것 같다. 상상 그 이상, 내가 봤으니까. 여긴 딱히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선발. 선발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리그 초반, 타고투저의 리그에서 유일한 1점대 평균 자책점을 마크하던 준혁이는 한 번 삐끗하여 2점대 중반까지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다시 유지했다.

하지만 오늘의 경기는 그걸 3점대 후반까지 점프 기어를 태우는 등판과 같았다.

7회 말 최은구 선배가 등판해 1실점을 허용하여 다시 동점이 되긴 했지만 8회 초, 주요 타선들 중에서 유일하게 타점이 없던 승주가 2타점 2루타를 작렬시키며 다시 두 점의 리드가 생겼다.

그렇게 8회 말, 내가 마운드에 섰다.

띠링―!

[동창회]

- 최우석, 곽명규에게 아웃을 잡으세요. (0/2)

- 보상 ― 포심 +1

오랜만에 포심 스탯.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걸 인정하는 건지 예전처럼 2, 3, 5씩 퍼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최근 들어 보상으로 직구가 등장하는 경우 자체가 없었다. 겨우 1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퀘스트였다.

포수 머리 위에 떠 있는 텍스트를 읽고 흐뭇해하자 타석에 있는 우석이가 미소 지었다.

너 말고, 새꺄.

최근에 이런 소릴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너 까는 맛으로 프로 생활 버텼는데, 요즘에는 너랑 상대하는 게 너무 재밌다, 즐겁다. 야구 선수로서의 본성을 너로 인해 다시 깨우치는 요즘이다.

맨정신에 해도 으! 소리가 나오는 대사를 소주에 숙성된 혀로 지껄여 봐야 그냥 술주정뱅이일 뿐이었다.

“사잌!”

생각해보면 사실 그냥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사잌, 투!”

그날, 내가 이 스탯과 처음 만난 날. 그 날 우석이에게 삼진을 잡은 뒤부터 녀석은 나에게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했다.

“쓰리이!”

바깥쪽 직구.

규학이의 미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긴 우석이가 조용히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띠링―!

[동창회]

- 최우석, 곽명규에게 아웃을 잡으세요. (1/2)

- 보상 ― 포심 +1

일단 하나 됐고.

다음 2번 타자 김성훈과의 승부는 좀 아쉬웠다. 꽉 차는 변화구와 직구 하나씩으로 2스트라이크를 잘 잡아놓고 던진 스플리터가 손에서 빠지지 않았다.

정가운데로 밀려들어 가는 느린 직구를 요즘 2번 타자는 놓치지 않나 보다.

2루를 밟고 타임을 부르는 김성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손에 바른 로진백을 다소 신경질적인 모양으로 땅에 내던질 무렵 구심의 플레이 콜이 나왔다.

포수의 손가락에 온갖 정신을 집중해야 하건만, 이상하게 타자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맹.

맹구.

명규라는 이름 탓도 있는 건 사실인데, 실제로 어딘가 맹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우리 사이에 붙었던 별명이다.

안 돼, 여기서 터지면 진짜 미친놈 확정이야. 진정해 가슴아, 진정해 머리야, 네 뒤엔 후두부가 있고 네 옆엔 측두부가 있어!

“아아악!!”

이명진 개새끼!

사인을 고르던 투수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자 타자는 물론이고 우리 팀과 상대 덕아웃, 심지어는 심판들까지 깜짝 놀랐다.

타자 얼굴 보고 웃는 미친놈에서 그냥 미친놈으로 엘리베이션되었지만 괜찮다. 덕분에 온전히 사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소지, 검지와 중지, 그리고 다섯 손가락.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양손을 모았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2루 주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 상태 그대로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쏠렸다.

“볼!”

오늘 스플리터가 안 빠진다. 빼야겠다. 밸런스도 묘하게 안 맞는다. 타자에만 집중하자.

검지와 중지, 중지와 약지와 소지, 엄지.

이번엔 주자를 눈으로 묶기만 하고 던질 때는 포수를 봤다. 아까 우석이가 삼진 당했던 곳, 거기.

“사잌!”

저기가 오늘 좀 넓은 것 같긴 한데, 잡아주니까 던져야지.

투수가 그런 맘이면 타자는 저길 잡아준다고? 가 얼굴에 보여야 하는데 워낙 맹―한 명규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약지와 소지를 어깨에 붙이자 포수를 거쳐 다시 복잡한 사인으로 재탄생되었다.

과연 니가 이 공에도 그렇게 맹할 수 있을까.

손끝을 떠난 공은 방금 전의 공과 같은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틱!

그리고 끝에서 살짝 도망가며 배트의 끝을 맞고 3루 선상을 탔다. 명규의 다리라면, 성훈이 형의 수비라면 충분히 1루에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2루 주자는 3루에 안착하게 된다.

“파울, 파울!”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터진 3루심의 파울 콜. 과연 이 파울은 누구에게 손해일까.

팡!

나네?

“스윙!”

명규는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한 뒤 그런 표정을 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주자 2루 상황에서 최고의 아웃카운트.

[동창회]

- 최우석, 곽명규에게 아웃을 잡으세요. (2/2)

- 보상 ― 포심 +1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58+1=59

커브 ― 51

슬라 ― 35

스플 ― 41

체인 ― 46

싱커 ― 46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일단 1사 주자 2루에서 최근 핫한 타자에게 삼진을 뺏으며 한숨을 돌렸다. 근데 너무 돌렸나.

따악―!

“…왐마.”

오영빈은 초구부터 배트를 냈다. 하늘을 쪼갤 듯이 타구가 날아갔지만 폴대 바깥으로 날아가면 투수의 가슴은 한 번 내려앉는다.

정신 차려야지. 안 끝났다.

오늘 체인지업이 괜찮은 것 같다. 초구 몸쪽 직구로 일단 카운트를 잡았으니까, 파울 났던 타구 자체는 잊어버리자. 카운트만 생각하자.

내 공을 뭐로 생각한 건지 141km의 직구에 빨랐다. 전반적으로 타이밍이 빠르다면 체인지업이 정석이다.

규학이랑은 이제 눈빛만으로 대화가 통할 것 같다. 체인지업을 생각하자 체인지업 사인이 나왔다.

“스윙―”

아, 저게 걸쳤어야 됐는데.

헛스윙도 나쁘지는 않은데, 헛스윙이 아닌 당겨서 1루나 2루 쪽 땅볼을 생각했던 터라 괜히 아쉽다.

아냐, 좋게 생각하자. 0-2 카운트야. 사인 보자.

포수의 손가락이 깜빡, 깜빡, 깜빡, 세 번 교차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발을 빼서 타이밍을 정리한 뒤 다시 사인을 봤다.

“…아.”

왜, 그런 날이 있다. 투수는 어지간히 맘에 안 들어서 던지기 싫은데 포수가 어지간히 계속 요구할 때.

두 번 연속으로 같은 사인이 나왔다면 아마 규학이의 사인이 아니라 벤치의 사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이 아닌 한숨엔 다소 불안함이 붙어 있었다.

“후우…….”

슬쩍, 하고 글러브 안에서 공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두 손가락 사이에 공이 낀 형태가 됐다. 이대로, 직구 던지듯이 콱, 하고 내려찍으면!

딱―!!

“…X발.”

담장을 넘어간다.

“아니…….”

아니시에이팅 발동.

동점 투런포를 때려 내고 좋아하는 타자가 홈을 밟는 모습을 처연히 지켜보았다.

괜히 입 안의 붉은 살을 톡톡 씹어대며 주심에게서 공을 받았다. 뽀드득 문대고선 내 할 일을 이었다.

아니시에이팅으로 인한 버프가 꽤나 괜찮았다.

“사이이이잌―!!”

공 네 개로 다음 타자를 처리하고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향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규학이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드잡이질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까의 스플리터가 규학이의 사인이었으면 어쩔 거고, 또 벤치의 사인이었으면 어쩔 건데.

털썩, 하고 앉아 우리 팀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거기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신경석 선배가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의지의 표명.

훈이 가즈아아아!!

유, 훈! 유, 훈!

촐싹거리는 모양으로 배트를 휘두르며 배터리의 사인 교환을 기다렸던 훈이의 배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

“아익, 가자!!”

유격수의 키를 넘기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덕아웃의 난간을 부여잡고 소리 질렀다.

분위기!

우리 원하가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 이거라도 맘껏 뽐내자.

명진이가 희생 번트를 성공시켰을 때도, 성운의 벤치에서 성현이를 고의사구로 내보냈을 때도 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가즈아아아앗!!

딱―!

기성이 특유의 밀어치는 타격.

좌선 상에 닿고 깊은 곳으로 굴러가는 동안 훈이와 성현이는 이미 홈에 들어왔다.

“선배, 멋지게 들어가자아악!!”

손쉽게 역전을 시킨 뒤 맞이한 9회 말.

등판 조건이 확실하지 않았음에도 웜업을 강행했던 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멋지게 들어가자!

대충 그럴듯한 말을 씨불이며 빨간불이 하나씩 적립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숭한 웃음이 나왔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뒤에야 끝을 맞이한 경기가 끝이 났다.

올 시즌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지옥의 9경기, 일단 첫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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