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올스타전, 어게인
A가 고장 났다. 그래서 고쳤다. 근데 이번엔 B가 망가졌다. 그래서 고쳤다. 근데 이번엔 다시 A가 고장 났다. 그래서 고쳤다. 근데 이번엔 C랑 D가 작살이 났다.
2018시즌의 원하 챌린저스가 그랬다. 불펜이 고장 나서 고치니 타선이 망가지고, 타선이 망가져서 고치니 이번엔 선발진이 작살이 났다. 이 팀한테 완전체의 모습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 걸까.
이러한 걱정 속에서 치러진 성운, KP, 한성, 6위, 7위, 8위 팀들과 펼쳤던 세 번의 3연전. 7승 2패로 마무리했다.
응?
이 9경기 동안 선발로 나섰던 투수들의 평균 성적을 내보자. 4.444…이닝 동안 평균 자책점은 무려 7점대!
절대로 이길래야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를 이어왔다.
와! 원하! 짱 쎄!
라고 좋아할 만한 여유는 절대 되지 않았다.
작살 난 선발진과 빠방한 타선, 그리고 평균 정도의 불펜을 가진 팀의 전략은 자연스럽게 수정되었다. 일단 타격전으로 난전을 유도하다가 후반에 왕귀한 불펜으로 누른다.
이 기간 동안 치러진 아홉 경기 모두, 양 팀 득점의 합이 두 자릿수를 넘었다. 이 기간의 중요성을 알기에 어느 한 경기라도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선발진은 조금이라도 안 맞고 버티려고 볼넷을 남발했다. 타선은 그걸 되갚아 주려고 타석에서 신중해졌다.
불펜은 모든 경기에 대기했다. 당연히 경기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선수들은 지쳐갔다.
[한울 씨, 혹시 월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KP전이 끝나고 한성과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민영 씨에게서 온 연락.
예! 없어도 내야죠!
평소라면 그리 대답했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중히 거절하자 날아온 답변은 음성 지원이 되는 것처럼 구구절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사람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올스타 브레이크는 너무 큰 휴식이었다.
선발진들은 부디 좀 정신 좀 차렸으면, 매 경기 머리가 아팠던 타자들은 머리 좀 식혔으면, 매 경기 불 싸질렀던 불펜은 몸을 녹였으면.
하지만 나는 안 된다.
“아…….”
2년 연속 불펜 투수 올스타 1위!
좋아해야 되는데. 기뻐해야 되는 게 맞는데.
…또?
사람이 참 간사하게도, 가야 퍼펙터스를 두 경기 차로 누르고 안정적인 4위에 오르고 나서 한숨이 놓이자, 올스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경기조차도 귀찮게 느껴졌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되게 제정신이야. 걱정하지 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형.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X발.
세 남자가 차 안에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나. 조수석에는 성현이. 성현이 뒤에는 명진이.
그래, 이 세 명이 원하 챌린저스를 대표해서 나가는 올스타 멤버인 것이다. 나랑 성현이는 팬 투표, 명진이는 감독 추천.
상수의 홍석진과 나름 비비던 승주는 아쉽게 졌다. 혁준이도 감독 추천을 받기는 했는데 요새 성적이 성적이다 보니 본인 쪽에서 좀 사양했고.
“하여튼. 형은 그게 문제라니까. 지치는 건 이해해. 이해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막해?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마쟈!”
“프로잖아. 프로면 그런 말 막 하면 안 되지. 지금 팀 상황 제일 잘 아는 우리랑 있으니까 괜찮지, 만약에 여기 구단 팬이 앉아 있어도 그런 말 했을 거야?”
“안 되지!”
입버릇처럼 나온 한마디의 파장은 어디까지 퍼지는 걸까.
성현이는 조수석에서 나를 열심히 조지고 있었고 명진이는 뒤에서 내 멘탈을 에멘탈 치즈로 만들고 있었다.
살살 녹는다. 진짜 집에 가고 싶다.
결국,
“X발! 다 꼬라박기 전에 닥쳐!”
“…….”
“…….”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이겼다.
힘겹게 인천 문학구장에 도착했다. 올해 올스타전 개최지는 비스코 러너즈의 홈구장. 일단 도착은 했는데 딱히 친한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확실하게 친하긴 하다, 라고 단언할 수 있는 두 놈의 상태는,
“옷 좀 제대로 입어 봐. 벌써부터 팬분들 보고 있어.”
“아니면 형님, 차라리 저처럼 저지를 반대로 입는 건 어떠신가요.”
운전대에서 손 놓자마자 아까의 리플레이였고.
정신 나갈 것 같애.
아찔해지는 정신을 힘겹게 다 잡고 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친한 사람이 없다는 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저들 또한, 나를 모를 수는 없었다.
다소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눈 뒤 올해도 동부 리그의 감독직을 맡게 된 김석주 감독님과 만나게 되었다.
“아,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네, 한울이. 투수 코치 제의는 아직인가?”
“아직 계약 3년 반 남았습니다.”
“까비.”
되도 않게 요즘 애들도 안 쓰는 어투를 구사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요새 피곤하지?”
“어…….”
1초.
1초 동안 오지게 많은 대답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오늘 등판할래?”
2초의 추가 시간을 얻었다.
“이한주 감독님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 올해 혹사 논란 벌써부터 나오는 건 알지? 근데 여기서까지 너 굴리면 나도 욕먹어서 솔직히 좀 꺼려져. 작년이야 그러려니 하긴 했다만.”
지금이야 없어졌다만, 몇 년 전까지의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단순 올스타전 이상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긴 쪽 리그가 월드 시리즈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가져간다!
그러나 단일 리그를 억지로 동과 서로 쪼갠 KBO는 냉정하게, 올스타전 그 자체로만 가지고 보는 이득은 없다.
아직 유명세가 애매한, 혹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선수들이야 감회가 남다르겠지만 나처럼 닳을 대로 다 닳은 낡은이에겐 그저 시간 외 근무 같은 느낌이다. 추가 수당 없는.
“전 감독님 판단 믿겠습니다.”
“짜식. 짬을 때리네.”
“에이,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면서.”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몸이나 풀고 있어라.”
“옙.”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동부 리그, 서부 리그할 것 없이 어차피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다.
어디 학교였지? 아, 거기!
대충 인사를 나누고 덕아웃으로 갈 무렵,
“한울 씨이!”
“아.”
“극혐하는 표정인 것 같은데요.”
“인 것 같은 게 아니라 맞는데요.”
“와.”
구단의 쪼물딱이가 등장했다.
“나 말고. 저기 명진이나 찍어줘요. 성현이나.”
“이미 찍고 왔어요.”
“걔네한텐 뭐 찍었는데요?”
“올스타전에 대한 각오나 소감 같은 거?”
“그것만 하면 끝나요?”
“일단은? 나머지는 실제 경기 때 영상들 편집할 거라서요. 우리 선수들 출전하는 것도 그렇고, 아니면 리액션이나.”
“하긴… 이런 데에 또 은서 씨 빠지면 섭하긴 하지.”
“그런고로, 김한울 선수!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카메라를 들고 쪼물딱이에서 PD님으로 변신했다.
“성현이한테 혼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알 사람은 알 테니까 그냥 이거 그대로 가져다가 써요.”
“에…….”
성현이의 깐깐함이라고 해야 하나. 예민함?
그런 것들은 본인의 실력이나 성적에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롯하게 ‘팬’들을 향해 있다. 참 프로 선수.
국대급의 선수로서 본인이 받는 사랑 이상을 되갚아야 하는 게 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멋진 녀석이다.
문제…라고 하면 좀 과하다는 점.
나 또한 팬들에 대한 감사, 또 답례는 얼마를 해도 모자라다 생각하지만 성현이는 과하다.
그 넘치는 에너지를 잘 갈무리하면 모르겠는데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한테 다 뻗쳐온다.
신인왕급 신인 멤버가 거만함에 사인 거절하는 걸 성현이가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쎈타까듯 드잡이질한 동영상은 이미 미튜브에서 흔한 ‘_프로 야구 선수의_팬 서비스.avi’ 이런 이름으로 유명하다.
그런 놈이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티어급 선수가 된 이후로 개근하던 올스타전, 작년에는 가벼운 햄스트링 긴장 증세로 한 해 쉬었다. 그리고 올해 복귀.
“형니임.”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나 또한 성현이의 자세를 멋있다고 생각한다. 따라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당장에 몸이 못 버텨주니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할 뿐.
경기에 나갈지 안 나갈지는 모르겠다만 나에게 다가오는 팬 한 명 한 명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다만…….
“이게 올스타전인가여.”
나름 전국구 수준의 야구 선수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올스타전과는 연이 없던 명진이. 올해가 첫 출전이다.
팀 내에서 가장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이놈이 오늘 어떤 짓을 터뜨릴지가 걱정된다.
“명진아.”
“예에, 형님.”
“형이랑 약속 하나만 하자.”
“예. 말씀하시죠.”
“오늘 끝나고 말야. 기자들이 나한테. 아까 이명진 선수의 그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김한울 선수는 알고 있는 겁니까? 같은 소리 안 하게 해줘.”
얼굴에 물음표 붙이지 마, 새끼야. 실화야.
이해가 안 되는 듯하지만 뭐 어떡해, 선배가 말하는데 대충 알았다만이라도 해야지.
진담은 거기까지였고 그다음은 실없는 쌉소리들의 향연이었다. 실실거리며 이야기하다,
한울 씨이~!
“아, 야. 나 어디 좀 갔다 올게.”
“넹. 다녀오세요.”
누군가를 발견하고 우리 덕아웃 옆쪽으로 달려갔다.
“오셨네요.”
“네에! 생각해 보니까 저희 구장에서 보는 건 처음 아닌가요?”
“아… 그러네.”
정중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또 그 이유가 이해는 되지만 서글픈 건 서글픈 거였다.
알겠다는 답장에 딸려온 이모티콘의 표정은 평소 떠올릴 수 있는 민영 씨의 울먹거리는 표정과 똑같았다.
그게 저저번주 주말 시리즈 때. 하여 내가 역으로 제시했다. 다다음주 월요일에 만나자. 그때라면 나도 괜찮다.
주중 시리즈가 있어야 할 시기에 올스타 브레이크로 인해 쉬게 되니 전혀 무리될 게 없었다. 민영 씨는 당장 연차 수정하겠다고 난리가 났다.
그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으니 뭔가 준비는 해야 할 텐데… 싶어서 준비했던 게 올스타전 티켓 세 장.
사실 구단에선 두 장만 줬다. 그리고 이 두 장은 우리 부모님께 전해 드릴 예정이었으나 귀찮다는 아버지와 이런 양반 두고 자기 혼자 가기는 좀 그렇다며 어머니도 패스.
내가 개인적으로 구한 한 장은 민영 씨만 주려고 했으나… 얼떨결에 두 장이 더 남게 되었으니까, 그냥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세 장 다 줬다.
“근데 아버님께선…….”
“아, 맥주랑 치킨 사러 가셨어요.”
“올스타전도 많이 와보셨어요?”
“와보고는 싶었는데 못 왔죠. 워낙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까…….”
“모처럼 오셨으니까 재밌게 보고 가요.”
“한울 씨는 오늘 등판 안 하실 거죠?”
찐 원하 팬들은 대부분 이런 반응이다. 쓸데없는 올스타전에서까지 무리하지 마라.
“감독님도 일단 편의 봐주신다고는 하시긴 했는데… 이미지나 눈치 관련해서는 저도 어쩔 수 없네요, 허허.”
“차라리 어디 그냥 아프다 하지 그러셨어요.”
“원하 팬들 입장에선 그게 더 걱정되지 않아요? 부상으로 따지면 올해만 두 번째 되는 건데.”
“그것도 그렇긴 한데…….”
뭐 일주일 동안 뭐 하고 지냈냐, 요즘 팀 분위기는 어떠냐, 어쩌다 오가는 문자로는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전송되었다.
그물망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오, 자네.”
민영 씨의 부모님들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진.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한 손에는 맥주 2,000cc 큰 잔, 한 손에는 치킨 한 마리. 옷차림은 평범한 아저씨 배바지에 원하 챌린저스 저지와 모자.
영락없는 원년 야구 팬 아저씨였다.
옆에 민영 씨 어머니와도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어찌 보면 아버님보다 더욱 긴장해야 할 상대였으나 이쪽도 좋은 분이셨다.
민영 씨가 항상 밝게 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 것 같다.
슬슬 집합 시간에 가까워지자 덕아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계속 말하면서 아버님께서 주신 음료수를 마셔서 그런지 문득 화장실이 생각났다.
“으허.”
시원하게 볼일 보고 덕아웃으로 다시 향했다. 시간은 아직 5분 정도 여유가 남았다.
가서 좀 앉아 있어야지, 생각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박해진이랑 현진이가 있었다. 묘한 분위기로.
앉아서 쉬긴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