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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55화 (55/190)

55화. 동생들

투수 1등이랑 타자 1등. 국가 대표 1선발이랑 국가 대표 4번 타자.

국제 대회마다 매번 출전하기 때문에 나름 친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색함이 감도는 꼴을 보아하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현진이 너는 여기서 뭐 하냐.”

“아… 선배님 뵈러 왔습니다.”

“왜?”

“…죄송합니다.”

아, 제발. 제발 허리 90도로 숙이지 마.

“죄송한 게 아니라, 무슨 일이냐고. 너 오늘 선발 아니야?”

“맞습니다.”

“몸 안 풀어도 돼?”

“그런 것보다 선배님 얼굴 뵙는 게 더 중요합니다.”

“…….”

아. 아, 제발. 아, 제발 현진아.

“그리고… 해진이… 는 왜?”

“이현진 선배가 여기서 있길래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

어색함.

덩치 큰 남자 세 명이서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한 모습은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있잖아.”

“예.”

“예, 선배님.”

“머리 뒤에 두부가 있으면 뭔지 아니. 그건 바로 후두부야.”

유쾌해져라, 얍.

“…….”

“…….”

“머리 옆에 있으면 측두부고.”

“…….”

“…….”

둘은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하하하하하하!!”

현진이는 로커가 떠나가라 복식 호흡으로 웃어제꼈다. 박해진이 경멸하는 대상이 하나 늘어난 순간이었다.

“하하하! 너무 재밌습니다, 선배님! 그런 유머는 어디서 가져오신…….”

“뒤질래?”

“죄송합니다.”

“장난하냐?”

“죄송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웃기냐?”

“죄송합니다.”

“넌 내가 하는 말이 다 장난 같지?”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아닙니다.”

명진이 넌 이런 걸 대체 어떤 낯짝으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웃음 끊지 말라고.

“이게 사회생활입니까?”

“그런 거지.”

나쁜 새끼들.

“그래서, 현진이는 무슨 일로?”

그래도 내 고고한 희생 덕에 어색함은 많이 가신 상태였다.

“아, 하나 여쭤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뭘?”

“요새 제가 커브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150km 초반대의 직구를 기본으로 오른쪽, 왼쪽으로 휘는 변형 패스트볼을 주력 상품 삼는 친구다.

쓰리쿼터에서 나오는 체인지업은 좌타자들에겐 특히나 더더욱이 악몽이었고 슬라이더는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커브를?”

여기서 뭐 더 얼마나 해먹으려고.

“예. 근데 생각보다 좀 어려워서… 선배님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어…….”

왜 나한테.

“왜? 저기 다른 팀이긴 한데 우리 코치님도 현역 때 커브로 좀 유명하셨고. 너네 팀 코치님도 계시잖아. 동성에 다른 커브 잘던지는 사람도 있을 텐데.”

“예. 1차적으로 말씀하신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보긴 했는데 다들 딱히… 설명이 도움 되지는 않았습니다.”

“나도 딱히 커브가 엄청 좋은 투수는 아닌데, 굳이 나한테?”

내 구종들은 모두 평범하다. 프로 투수들을 기준으로 삼자면 겨우 평범한 수준.

엄청 많은 변화구들과 칼제구 덕에 성적이 좀 나와줄 뿐, 특출나게 김한울하면 이거! 하는 구종조차 아직 없다.

커브라고 다를 건 없다. 구속대는 105km에서 115km 사이. 구속이 느린 만큼 궤도 자체는 상당히 큰 편이다.

각이 큰 거지 예리한 게 아니다.

“혁준이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웬 혁준이.”

“혁준이가 올해부터 커브를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럴걸?”

“혁준이 커브도 꽤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이유로 김한울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걔랑 나랑 뭔 관계가 있다고…….”

“선배님께 꽤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한테도 한 말씀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적팀인 녀석한테 이런 걸 알려줘도 될까? 더 강해져서, 우리한테 더더욱 강해지면 우리 손해 아닌가?

“안 될 건 없지.”

그럼 어때.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경기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예. 저도 일단 미리 말씀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럼 후에 시간 따로 내겠습니다.”

“어, 그래.”

아, 제발.

녀석은 마지막까지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나서야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혹시라도 누군가가 봤다면 뭐 꼰대 논란이니 학폭 논란이니 그런 거 나왔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요즘 그것 때문에 시끄러운데.

“이현진 선배랑 친하신 것 같습니다.”

아, 얘가 있었지.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 후배였거든. 대체 뭔 생각으로 나를 저렇게 따르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다시 덕아웃을 향했다.

“따를 만한 사람이니까 따르지 않겠습니까.”

“…….”

이내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다시 걸음이 멈췄다. 가만히 서서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박해진 또한 시선을 맞춰왔다.

“…야.”

“예.”

“넌 나 어떻게 생각하냐.”

“예?”

아니. 고백 아니야. 극혐하지 마.

“아니, 그냥.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나도 일단 나름 우리나라에서 이름 좀 날리는 투수가 됐다고 느꼈었거든. 근데 현진이랑 너 사이에 껴있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져서.”

열등감?

아니,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현진이와 박해진은 열등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압도적인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몇 단계 위의 인물들이라 경외심마저 들게 하는 녀석들이지.

딱히 답변을 바라고 보낸 질문은 아니었기에 다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바라지 않던, 혹은 꽤 바라던 답변이 들렸다.

“좋은 투수라고 생각합니다.”

“됐다. 그거면.”

이번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다들 재밌게 하자고. 다치지 말고.”

나와 박해진의 합류로 완성된 동부 리그 올스타팀 앞에 김석주 감독님이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사로 팀의 사기를 북돋웠다.

다치지 말자.

프로 선수에게 제일 중요하면서도 제일 말도 안 되는 대사. 나만 생각이 많은 건지 나 이외의 사람들 모두가 예! 하고 크게 대답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화장실.”

“형님 오늘 등판 안 해요?”

“모르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넌?”

“전 쭈구리입니다.”

“같은 쭈구리끼리 구경이나 하고 있자.”

원하 챌린저스 소속으로 참가한 세 명 중 유일하게 선발로 선정된 성현이는 언제나처럼 2번 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1번 타자로 나선 송인호가 타석으로 향했다. 야구 팬이라면 그 누구나가 눈을 뗄 수가 없는 올스타전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팬들의 환호가 끊기질 않는 와중 상대 선발로 낙점된 현진이의 연습 투구도 끝이 났다.

공 세 개로 깔쌈하게 삼진 먹고 송인호가 돌아오며 반대쪽 타석에 성현이가 들어섰다.

성현이와 현진이.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네랑 현진이랑 동갑이지? 너랑 성현이가 같은 고등학교였고.”

“예예.”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내가 3학년 때 얘네가 1학년. 1학년 때는 명진이도 그렇고 성현이도 그렇고, 아직 두각을 나타낼 때는 아니었는지 만나본 적은 없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너넨 어땠냐?”

“어떤 게요?”

“뭐긴, 야구하는 거지.”

“평범했슴다.”

“고등학교 때 뭐 월클, 메이저 이런 거 없었고?”

“저희 같은 양민한테 뭘 바라십니까.”

흠.

“쟤는?”

“이현진이요?”

“어. 나 졸업하고 나서 얘기는 잘 몰라서.”

“이현진 뭐… 개싸가지죠.”

“개싸가지라…….”

쌉소리를 지껄였으면 지껄였지, 욕설에 가까운 말 자체는 거의 하지 않는 명진이 입장에선 아주 강한 표현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친한 후배를 욕하는 팀 후배의 말이었으나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틀린 말은 아니거든.

“아니, 맞췄으면 그래도 미안하다는 표시는 해야죠. 저 쟤 때문에 2학년 때 황금사자기 못 나갔어요. 나중에 프로 와서 만나서 기억은 나는지 뭐라 한마디 듣긴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늦었죠. 쟤 때문에 프로 못 올 뻔한 거 생각하면…….”

과몰입.

당장 본인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건 아주 좋지만 그게 심하면 절대 좋지 못하다. 아니, 본인은 모르겠고 그 주변인들이 피곤해진다.

“근데 저야 10년 전 일이니까 지금이야 뭐 그러려니 하려고는 해요. 이제 부러졌던 팔도 아픈 건 없고. 무사히 프로 와서 한자리 꿰차고 있으니까. 그리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것도 알긴 아니까요. 근데…….”

따악―!!

와아아―!!

갔다, 갔다!!

워어, 가써어!!

“…성현이는 좀 다를걸요.”

공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

이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녀석답지 않게 1루를 향해 뛰지 않았다.

천천히 몇 걸음 걸어가며 홈런을 확정 지은 후에야 설설 뛰기 시작했다.

높게 내던진 배트는 성현이가 몇 걸음 더 뛰고 나서야 땅에 떨어졌다.

“쟤네끼리 뭐 있었냐? 사이 좋을 것 같은데.”

야구에 미친 놈과 프로에 미친 놈. 합쳐서 프로 야구에 미친 놈들.

언뜻 보면 되게 합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저랑 비슷한 거 같아요. 성현이도 이현진 공에 맞아서 고생 좀 했거든요.”

“넌 어디 맞았었다고? 팔?”

“네. 여기. 여기 부러졌었어요.”

자기 왼쪽 상박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쟤는 어딜 맞았길래.”

“뚝배기요.”

어쩐지. 성현이가 현진이한테 이상하게 극강이더라. 독기를 품었었구나, 아주.

지금이야 나름의 제구력을 갖고 있는 현진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1학년 때는 어지간히 형편없었다.

벌써부터 145km를 때리는 1학년! 와! 하고 좋아했는데 3이닝 동안 볼넷 11개 줄 거라는 건 생각도 못 했지.

아, 제구 때문에 쟤가 나를 그렇게 존경하나?

91년생 동기이자 10시즌 신인이었던 녀석들은 시작부터 그렇게 엇갈린 채였나 보다.

어느새 베이스를 다 돌고 홈에 들어온 성현이는 팀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좋아했다.

챌린저스 마스코트한테 인형 하나 들고 다시 덕아웃을 나가 근처에 던져주고 다시 들어왔다.

“좋냐?”

“등신 같은 새끼. 공 여전히 병신 같네.”

워후. 꽤 센데.

“야, 리그에서 좀 그렇게 쳐라.”

“치잖아.”

“…아니, 더 잘하자고.”

개소리였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명진이 옆에 앉았다.

나랑 우석이 같은 포지션인 고등학교 동기동창들은 이내 쌉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지들끼리 놀고 있었다.

3번으로 나섰던 홍석진 특유의 볼 고르기 때문에 시간도 꽤나 길었기 때문에 이 둘의 쌉소리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아, 강성현 해설위원님, 강성현 선수의 선제 솔로 홈런으로 동부 리그가 선취점을 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완벽한 스윙이었죠. 원하의 이명진 선수가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팔꿈치 각도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어요.”

“개소리 그만하시구요. 아, 방금 공은 투심인가요? 홍석진 선수가 꼼짝도 못 하고 삼진을 당합니다.”

“아, 저거는 배…….”

뭐라 더 하고 싶긴 한데, 우리 팀 선수도 아닌 데다가 꽤나 선배다 보니 뒷말을 삼켰다.

그렇게 홍석진이 삼진으로 물러난 뒤, 타자 1등과 투수 1등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박해진 타자와 이현진 투수의 대결입니다.”

“박해진 선수가 홈런 하나 쌔려 줬으면 좋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X같아서요.”

“아, 저런.”

카운트 1-2까지 박해진을 몰아넣을 때까지 두 사람의 쌉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공 하나를 더 골라낼 때도, 그다음 공을 박해진답지 않게 어설픈 스윙으로 커트할 때도,

따악―!!

“아아, 잘 맞았는데요오! 넘어갑니당!”

“아, 이거죠! 이렇게 쳐야죠! 이명진 선수는 저 스윙을 보고 팔꿈치 각도를 좁혀야 할 필요가 있어요!”

“닥쳐, X발!”

밀어서 우측 담장을 넘길 때까지도.

팬들을 위한 구경거리를 자처한 성현이와는 다르게 박해진은 보는 입장에선 조금 밋밋하다 느껴질 정도로 정숙하게 베이스를 돌았다.

덕아웃에 도착해선 호랑이 인형을 받아 관중석으로 던지고 자기 팀원인 홍석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삼진, 홈런, 삼진, 홈런, 삼진.

극과 극을 달리는 1회 초가 끝난 뒤 현진이가 내려가고 상수 타이거즈의 박동일이 마운드에 섰다.

저어쪽 건너서 보이는 우석이. 국대 1번 타자답게 제일 먼저 타석 가까이에 붙어서 투수의 타이밍을 재보고 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바라본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뭐 오늘 조심해라, 그런 거 같은데,

너나 잘하세요.

나는 그에 엄지로 내 목을 그으며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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