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59화 (59/190)

59화. 투수들은 김한울처럼 던져야 한다

[김형철의 돌직구 ― 투수들은 김한울처럼 던져야 한다.]

김한울이 등판하여 투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여타 다른 투수들과는 어딘가 어색한, 혹은 다른 모습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일까?

빨라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느린 편인 구속?

그럼에도 여전한 칼제구?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딜리버리?

본인의 공이 담장을 넘어가도 그러려니 하는 점?

이것들도 틀린 점은 아니다. 심지어 이것들 이외에도 김한울에게선 어딘가 특별한 점이 많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이것들과는 거리가 멀리 있으니 잠시 비켜두자.

[김한울이 사인 교환 중 본인의 팔꿈치에 검지와 중지를 대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을 독자들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평범한 세트포지션, 혹은 사인 교환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중지, 약지, 소지로 모자챙을 가리는 모습]

[새끼손가락을 글러브 웹에 대는 모습]

[검지를 왼쪽 어깨에 대는 모습]

그럼 이 모습들은 어떻게 보이는가?

눈치가 빠른 이들은 이쯤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을 테니 설명을 해보자.

야구에는 정말 여러 가지 사인이 존재한다.

플래시, 블록, 터치, 시프트 업과 다운, 패턴 등등 조금 더 전문적인 이야기는 직전 칼럼을 참조.

여기서까지 그 얘길 하면 읽는 독자들의 머리가 많이 아파질 것이다.

이번 편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구종 사인.

주로 포수가 투수에게 내는 사인이며 어린 포수거나 벤치의 개입이 필요할 땐 벤치가 포수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이후 포수가 투수에게 사인을 내며 이 사인은 2루수, 그리고 유격수까지도 볼 수 있다.

똑똑한 키스톤 듀오는 외야수, 혹은 자기 옆 코너 내야수에게 이를 전달하여 수비 위치를 미리 선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구종 사인의 출처는 결국 포수, 어쩌다가 벤치에서 나온다는 점.

거의 모든 투수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고 해봐야 고개를 젓는 정도.

[투구 전 공을 쥔 오른손의 검지로 유격수 이명진에게 수비 위치를 지정하는 김한울의 모습]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다르다. 아주 다르다.

어느 정도로 다르냐 하면 때에 따라 포수 쪽에서 내는 사인보다 본인이 내는 사인의 수가 더 많다고 느껴질 정도.

심지어 본인이 적극적으로 수비수의 수비 움직임을 지시할 때도 있다.

김한울의 사인 교환 모습을 보면 마치 포수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거, 여기다가.

아냐, 그거 말고. 지금 던지면 배트 안 나와.

그럼 이건요?

그건 외야로 뜰 것 같은데. 차라리 이거 던질게. 그러면 유격수 땅볼로 병살 잡을 수 있을 거야.

좋아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그가 원하는 그림을 아주 높은 확률로 그려낸다.

본인 팀의 수비진들과 상대 타자들, 본인의 공과 본인의 상태에 대해 잘 알아야만 가능한 플레이. 무엇보다 ‘야구’에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플레이.

[병살을 잡은 후 기뻐하는 김한울]

김한울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 필자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재밌다. 진짜 야구를 보는 것 같다.

선배를 따라가야 하는 우리나라 정서상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풍토는 조금씩 바뀌어 나가고 있다. 투수와 포수, 덕아웃 간의 이런 건강한 대화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aqe****

└아 저게 사인이었구나. 팔꿈치 간지러워서 긁는 건 줄ㅋㅋㅋㅋㅋ

추천 2,523 비추천 84

―ujee****

└포수가 후배라 가능한 거 아님? 선배한테 저러면 개뼉다구 맞을 거 같은데

추천 2,211 비추천 378

alsd****

└머리 아파…….

추천 1,495 비추천 243

* * *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아홉 경기에서 원하는 무려 7승 2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4위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올해 초, 불펜으로부터 시작된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밑바닥부터 시작한 점을 생각하면 아마 4월 말, 5월부터의 승률은 상당할 거로 예상된다.

똑같은 기간 동안 성운 호크스가 6승 3패의 성적을 거두며 5위까지 치고 올라올 동안 같은 경쟁팀이었던 가야 퍼펙터스는 3승 6패로 나가리가 된 모양새.

겨우 세 경기 차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2승, 1패, 1승, 이후 5연패였던 점을 생각하면 분위기 반전이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비스코 러너즈.

우리가 7승 2패를 거둘 동안 비스코는 8승 1패의 더더욱 압도적인 성적.

우리가 선발의 삽질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거둔 호성적인 것과는 다르게 투타의 조화가 아주 안정적인 연승들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2경기.

비스코와 우리 사이의 승차는 오히려 벌어진 모양이 됐다. 계속 따라가고 따라가도 모자랄 때인데 우리 선발진의 부진은 여전했다.

올스타 브레이크 동안 머리 좀 식히길 바랐지만 전혀. 이전보다 막장에 가까운 투구를 이었다.

동성과의 3연전 동안 1승 2패. 혁준이가 4이닝 동안 2실점으로 일단 어느 정도의 컨디션이 돌아오는가, 싶었지만 준혁이가 5이닝 8실점.

그 사이에 규진이 형이 6이닝 3실점으로 살짝 돌아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이후 주말 3연전, 우리 집에서 가야와의 3연전 동안 좀 꿀을 빨았다. 세 경기를 모두 우리 걸로 만들며 3위 다툼에서 가야를 아예 저 낭떠러지 밑으로 쫓아낸 모양새.

비스코 또한 마찬가지, 다른 팀도 아니고 상수를 스윕해 버리며 격차는 여전했다.

작년에도 비스코랑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웠던 것 같은데, 올해도 비슷한 흐름이 될 것 같다. 7월이 마무리되고 8월에 돌입하면서도 우리와 비스코의 격차는 변하지 않았다.

“형, 정신 좀 차려봐. 이것 좀 이렇게 해봐, 응? 왜 던지지를 못해.”

“X새꺄!”

“악!”

킥킥대면서 규진이 형을 피해 도망갔지만 등짝에 야구공이 박혔다.

이전 등판에도 삽질을 했으면 이런 장난 안 칠 텐데, 그나마 주요 선발진 세 명 중 살아나는 분위기가 보여서 한 번 찔러본 장난이 거하게 먹혔다.

“형.”

“왜.”

“저번 경기 잘 던졌잖아.”

“잘 던진 거야?”

“맨날 3, 4이닝씩 5, 6, 7점씩 주던 거 생각하면 되게 잘 던진 거 아냐?”

“퀄리티 스타트잖아요, 6이닝 3실점이면.”

규학이까지 가세.

“그렇지.”

“뭐 달라진 거 있어?”

“모르겠는데.”

“음…….”

“왜?”

“알아야 다음에 안 그러지.”

“그건 그런데…….”

“투수 코치님은 뭐라고 하시든?”

“다리 말씀하시던데.”

“다리?”

듣고 나서 다리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이전에 느껴졌던 평소와의 괴리감이 사라져 있었다.

몸이 좀 붕 떠 있다고 해야 하나.

안 좋을 때의 형이 그랬다.

“언제 그러셨는데?”

“한 보름?”

“그래서 어떻게 잡았어.”

“다운사이징.”

아.

“지금은? 잘 되는 거 같아?”

“나야 모르지.”

뻥!

“이거면 됐다.”

“벌써요?”

“됐어. 감 좋을 때 그만두는 게 나아.”

“네네.”

불펜 세션을 마친 뒤 규학이는 배팅 케이지로 갔고 규진이 형은 가만히 불펜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굳이 그 옆에 앉아 형을 쿡쿡 건드렸다.

“…야.”

“응.”

“키 크면 무슨 느낌이냐?”

“갑자기?”

“그냥. 내가 키가 좀 컸으면 더 좋았을까 싶기도 해서. 요새 하도 안 풀리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내가 188cm. 규진이 형이…….

“형이 키가 몇이었지.”

“뒤질래.”

“쏘리.”

160cm 중반 그 어딘가.

“난 형 피지컬로 형 공을 던지니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 키 크면 좋은 게 상식이잖아.”

“상식이 왜 상식이야. 평범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상식인 거지.”

“올. 그럴듯하게 씨불이는데.”

“아, 땡큐.”

휘이익―!!

관객분들은 타구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휘익! 휘이이익!!

타자들의 타구가 슬슬 나부끼기 시작하자 장내엔 온갖 호루라기 소리와 무기질하게 녹음되어 있는 안내 멘트가 흘렀다.

가만히, 말없이.

이젠 집 앞에 지나다니는 계란 장수의 외침처럼 익숙한 소리는 좋은 백그라운드 사운드가 되었다.

“…형.”

“왜.”

“오늘 이용호 나오겠지?”

“아마도.”

희대의 개새끼.

나도 나지만 특히 규진이 형 입장에선 더더욱 이를 갈고 있는 새끼.

최근 들어 조금씩, 약간 반고정 느낌으로 좌익수에 기용되고 있다.

한 번 당했던 햄스트링 부상의 영향이 여간 작은 게 아닌지, 한성의 주전 좌익수 최형선은 근래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최근 5경기 연속 8번 타자 좌익수 선발.

“아마 그 새끼, 형 비웃으면서 나올걸.”

“그럴걸.”

“어때. 이번에야말로 머리에 한 방 날릴 수 있는 기회인데. 도전?”

“싫어. 안 그래도 성적 개판인데.”

“까비.”

2위 현진이와 10개 이상의 차이로 탈삼진 순위에서 1위를 달리던 규진이 형의 순위는 이제 떨어지고 떨어져 1페이지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연쇄적으로 다른 성적들도 저미해진 탓에 되게 애매한 투수 느낌이 되었다.

“전에 감각 좀 잘 살려봐. 공 좋더만.”

“너 오늘 올라오겠지.”

“아마? 한 3일 쉬었으니까. 왜, 제 힘이 필요하십니까?”

실실거리며 되물었다.

“왜긴. 게임 질 거야?”

“이겨야지.”

이겨야지.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네 글자였지만 오늘의 규진이 형은 달라 보였다.

경기 시작 후 허용한 볼넷은 2이닝 동안 1개. 삼진은 무려 4개를 뽑아냈고 나머지 두 개의 카운트는 볼넷으로 나갔던 주자를 포함한 병살타였다. 그때까지 투구 수도 겨우 23개.

오늘 느낌이 좋다.

3회 초가 시작되고 타석에 들어선 정성훈 또한 4구만에 높은 직구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내며 간단하게 아웃카운트 하나가 올라갔다.

내야에서 돌아다니던 공을 받은 뒤 플레이트를 밟은 규진이 형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니가?

이용호는 여전히 거지 같은 웃음으로 등장했다. 아, 진짜 면상 한 대 세게 맞추고 싶다. 이가 갈린다.

“왜 그러세요?”

보다 못한 준혁이가 옆에서 물어볼 정도.

“있어, 그런 게.”

대충 대답하고 대결을 지켜봤다. 규진이 형 손에서 떠난 공이 상대 타자의 면상과 만났으면 하는 바람과 규학이의 미트에 박혔으면 하는 바람 두 가지가 맘 속에서 거세게 부딪혔다.

스트라잌!

투수는 다행히 이성을 선택했다. 높은 곳으로 향하는 직구는 충분히 존을 통과했다는 판정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후 커브에 틱! 하는 소릴 내며 어쭙잖은 파울 타구 하나. 한 번 더 날아간 높은 직구는 어렵게 건드려서 파울이 된 뒤 그것보다 훠얼씬 높은 공을 간신히 참아내는 모양새였다.

배트 멈추겠답시고 춤추는 모양새가 꽤나 웃겼다.

오늘 직구 좋은데.

꽤 높게 빠진 공이긴 했지만 구속 자체는 평소의 공을 회복한 모양새가 확실해 보였다. 154km. 나라면 다음 공을 몸쪽으로 체인지업 던져볼 텐데.

펑!

“스윙!”

화끈하네.

그냥 힘으로 찍어눌렀다. 한가운데에다가 153km짜리 직구가 꽂혀도 타자는 멀뚱히 쳐다보다가 이를 갈며 다시 돌아갔다. 넌 이따가 좀 만났으면 좋겠네.

잠시 숨을 돌리고 혁준이를 보니 여전히 안쓰럽다. 얘는 점점 안 좋아진다. 하다하다 원래 등판일이었던 어제는 아예 등판 한 번을 뛰었다.

“혁준아.”

“네.”

부르면 네 형! 왜요? 왜요왜요왜요? 이딴 식으로 해맑게 대답을 해야 하는 아이가 축 처져서 대답을 하는 꼴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후두부랑 측두부가 도와줄 수가 없다.

“너도 생각은 해봤을 거 아냐. 요즘 왜 이러는지.”

“네… 해봤죠. 당연히.”

“왜인 거 같냐?”

“…모르겠어요. 그냥 안 들어가고 들어가면 맞아요. 잘 뺐다 싶으면 다 보고 그냥…….”

안 될 때의 나 같네.

“나 같은데.”

“형이요?”

“언제냐. 2년 전의 나 같다는 생각 안 드냐. 들어가면 처맞고, 아 이거 헛스윙 잡았다 싶으면 다 흘려보내고.”

“아…….”

너 설마…….

“야.”

“네.”

“너 설마 나 따라 하냐?”

“형을요?”

작년 준플에서 완봉승 때 언저리부터.

이 녀석의 행보를 보자면 이건 충분한 합리적 의심이야.

“롤 모델 뭐 비슷하게야 삼고는 있죠?”

“왜?”

“전 형 되게 멋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보다 잘 던지는 놈이 그런 소리 해봐야 아부로밖에 안 보여.”

“에이, 형이 저보다 잘 던지죠.”

“누가 그딴 개소리를 해, 자꾸.”

“팬분들이요.”

“아주 정확한 눈썰미를 가진 분들이구나.”

“…….”

“뭐.”

녀석의 눈치를 피해 냈다.

“혁준아. 형 따라 하지 마라.”

“왜요?”

“그럼 애초에 넌 날 왜 따라 하려고 하는데? 내 어느 부분을 보고?”

“멋있잖아요.”

“그니까 뭐가.”

“막, 원하는 곳에 공 딱딱 집어넣고 막, 그러면 게임하는 것 같고 재밌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 같은 제구가 멋있다고 느껴진다?”

“네.”

흠…….

“이해는 하는데. 과몰입은 하지 마라, 혁준아.”

“웬 과몰입이요?”

“왜 그런 말 못 들어 봤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그런 말이 있어요?”

“요새 애들은 이런 말도 몰라?”

“틀…….”

“뒤질래?”

크흠.

“넌 니 스타일대로 던지면 되지. 나도 너 많이 부럽거든? 난 최근까지 145km만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안 될 거 있어요? 형도 그 나이 먹고 계속 구속 오르고 있잖아요.”

“그 나이 먹고?”

“…….”

“…내가 내 생활신조마냥 생각하면서 사는 게 있거든.”

“뭔데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할 수 있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거. 잘하는 거. 제구되고, 변화구 많아. 수비 좋고 견제도 꽤 괜찮아. 그것밖에 없어. 공 느려. 구위가 좋은 것도 아니야. 체력이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내 할 일 하는 거지. 니가 할 수 있는 건 뭔데?”

“…….”

녀석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를 툭 치고 덕아웃 밖으로 나가서 깔끔하게 이닝을 마치고 돌아온 규진이 형의 등을 때렸다.

“아, 나이스 피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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