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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61화 (61/190)

61화. 백업

만화라든지, 애니메이션이라든지. 그런 데서 최고의 제구를 가진 선수들은 이렇게 표현된다.

와, 9분할 제구! 와 16분할 제구! 와!

현실엔 그런 거 없다.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다. 만화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 게 진짜로 가능한 사람이라면 야구 선수가 아니라 기인열전 같은 데를 나가야지.

현실적인 수준에서 제구가 좋다, 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은 상하, 그리고 좌우의 꼭짓점에 대한 핀포인트를 가지는 수준.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한다면 존 밖에서도 원하는 대로 넣었다 뺐다가 가능한 수준.

최종형으로 발전한다면 핀포인트에서 조금씩 왔다 갔다가 가능한 수준.

‘프로 야구 선수 100명에게 물어봤다, KBO에서 제구가 가장 좋은 투수는?’이라는 설문에서 당당히 1등을 거머쥔 내가 딱 그 정도 수준이다.

데뷔하고 10년. 지금까지 데드볼을 맞춰 본 경험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1차적으로 제구가 좋으니까. 2차적으로는 몸에 맞춰버리면 강제로 주자 하나를 내보내게 되니,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도록 차라리 치게 하니까.

나는 프로다. 이겨야 한다. 아무리 악감정을 가진 상대라고 한들 일부러 맞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가 일부러 맞춘 게 아닐지라도 엄연한 나의 실수다. 메쟈에선 뭐, 자존심 때문에라도 사과 안 한다는데 여긴 한국이지.

이용호한테는 미안하지만 1차적으로는 아쉬움이 먼저 들었다.

왜 자꾸 빠지는 직구를 굳이 또 던졌나. 좋은 카운트 만들어 두고 왜 굳이 맞춰서 주자를 공짜로 내보내 주나.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쉬움이 옅어진 뒤 사과하기 위해 모자에 손이 가는 순간 들려온 말이,

“야, 선배한테 사과도 안 하냐? X발, X 같은 새끼가, 야!”

이건 선 넘었지.

이용호는 배트를 내던지며 내게 걸어왔다. 뜬금없는 쌍욕과 함께.

우우우우―!!

자연스레 벤치클리어링 발생.

주심은 곧장 앞으로 나서며 이용호의 앞을 막았고 규학이 또한 주심의 옆에 서있었다.

양 팀 덕아웃에서 모든 선수들이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나와놓고 왜 나왔는지에 대해선 의아한 상태.

“자자, 일부러 맞힌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하지.”

“아니, X발! 저 새끼 봐요! 야야, 야! 장난까냐?!”

구심이 좋게좋게 타일러도 뵈는 게 없는지 바락바락 대들며 나에게 삿대질을 이어간다. 이쯤 되니 우리 사람들도 슬슬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뭐요?”

“내가 뭐요? 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아니, 내가 일부러 맞혔어요?”

“일부러 맞혔어요? X발, 장난까냐? 어?!”

“야야, 참아라.”

“사과하고 끝내 그냥.”

“형형, 그만해.”

가장 먼저 옆에 붙어 있던 성훈이 형이 나를 툭툭 치며 말렸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이용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규진이 형까지 말렸고 기타 동생들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개X같은 새끼야, 선배한테 하는 말이 그거야?!”

어, 열 받네?

“아니, X발. 놔봐.”

사람 좋게좋게 좀 가려니까 뭐?

나를 말리는 이들을 밀쳐내고 이용호에게 다가갔다.

“내가 일부러 맞혔어? 내가 일부러 맞혔냐니깐?”

“일부러든 아니든, 사과는 해야 될 거 아냐!”

“사과할 타이밍은 줘야죠! 아니 무슨, 맞자마자 X발X발거리는데 내가 뭐라 그래요?”

“선배한테 바락바락 대드네?”

“선배? 선배? 선배라고? 선배라는 생각은 있고?”

“뭐?!”

“자의식 과잉은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라고 그래요? 내가 선배 맞춰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맞추는데요?”

“X발 너 나한테…….”

“선배한테 뭐요?”

“너…….”

“뭐. 말을 해보라고.”

이쯤까지의 대화에서 어렴풋하게 얻어낸 것. 본인이 행해 왔던 패악질에 대해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선배가 선배 같아야 선배지.”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무심결에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다시 마운드로 돌아갔다.

이다음의 상황을 걱정한 주심은 다음 공이 던져지기 전, 홈플레이트 앞으로 나와 양 팀 덕아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고.

이후 또 애매한 분위기가 형성되려고 하면 그땐 퇴장 파티가 벌어질 것이다.

그에 상대 팀 감독님이 나서 항의 아닌 항의를 해봤지만 이미 이용호의 업보였다.

그때야 아차 싶었는지, 분함을 아직도 못 이겨 씩씩대던 이용호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쪼인트 좀 까이겠네.

그건 그거고, 작금의 상황을 내 기준에서 이야기하자면 위기 상황이 배가된 것이다.

석 점 차를 두 점 차로 만든 것도 억울한데, 쓸데없이 주자까지 하나 내보낸 셈이 되어버렸다.

후.

호흡 하나로 털어버리고 다시 규학이에게 집중했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등판하기 전 준혁이에게 해줬던 말. 그걸 하면 된다.

“스트라잌!”

이경준 몸쪽 깊숙하게 스트라이크를 하나 넣으며 시작했다.

“스윙, 스윙!”

그리고 아주 멀게 느껴지면서 또 엄청 느려 보일 체인지업까지 하나 추가.

공을 만지작거리며 다음 공을 생각했다. 싱커? 스플리터? 느낌이 그쪽으로는 썩 향하지 않았다.

커브.

분명 오늘 홈런 하나 맞았던 공인데, 이상하게 커브 쪽으로 마음이 향했다.

여기서 맞으면 투런인데, 그러면 동점 허용인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 검지손가락은 모자챙을 만지고 있었다.

주자를 흘끗 확인하고 셋포지션에 들어갔다. 규학이는 바깥쪽에 앉아서 미트를 대고 있었지만 그쪽이 아닌 오른쪽 무릎에 집중했다. 딱, 존의 가운데가 되는 부분.

딱!

높게 뜬 공에 순간적으로 멈칫, 하다가 찬찬히 떨어지는 공을 억지로 땡기는 모양새가 됐다.

느린 공을 무리해서 당긴 공은 빠르긴 했지만 절대 좋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었다.

“세컨! 바로!”

성문이가 정면에서 잡고 2루로 토스. 1루 주자는 이용호, 문득 예전 명진이의 악송구가 생각났다.

“여유 많다, 천천히!”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그에 명진이는 위로 점프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빠르게 옆으로 벗어나 1루로 던질 자세를 만들었다.

“아우웃!”

말했던 것처럼 여유 있게 더블 플레이.

예에에에―!

호오오오!

분위기 좋은 팀답게 덕아웃으로 향하는 동안 온갖 괴성이 가득했다.

명진이랑 하이파이브, 성문이랑도 하이파이브. 이내 불펜으로 돌아오자 따라온 규학이가 물어봤다.

“형, 방금 실투였죠?”

“뭐가? 커브?”

“네. 가운데로 오던데요?”

“아니, 일부러 그랬는데.”

“에? 왜요?”

“그냥, 병살 잡고 싶어서.”

“싱커가 더 좋지 않아요?”

“근데 마음은 커브를 외치더라.”

“근데 가운데는 좀…….”

“내가 커브가 빠르지가 않잖아. 각도 크고.”

“그쵸.”

“그러다 보니까, 코너 노리면 배트가 안 나와.”

“근데 정성훈은…….”

“삼진 잡고 싶었는데 걔가 잘 친 거고.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이며 신경석 선배가 몸을 푸는 쪽으로 갔다.

“선배, 미안해요. 한 점 줘버렸네.”

“한울이가 한턱 쏘면 되지.”

“아, 오케. 쏘지 뭐.”

“오예.”

참 해맑은 사람.

흐흐 웃고선 의자에 앉아 사이드암 투수의 폼을 구경했다. 어떻게 저렇게 던지지.

“아이, 나이스볼!”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몸동작으로 신경석 선배는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경기 종료 후 우석이에게 문자가 왔다.

[잡아드림.]

성운은 비스코에게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비스코와 같은 선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공동 3위.

이젠 내려가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킬 때다.

답장으로 내일도 가능? 이라고 물어본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D로 내리려고 할 때 답장이 도착해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쌉가능.]

친구의 답장은 아주 맘에 드는 대사였다.

* * *

프로 야구 팀의 전력을 일단 네 가지로 나눠보자.

수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투수와 수비, 공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타격과 주루. 난 이 네 가지를 각각 30, 20, 40, 10의 비율로 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투수의 30. 이를 다시 선발과 불펜의 비중으로 나눠보자. 옛날, 불펜이 천시받던 시절엔 선발 25와 불펜 5의 비중. 아니, 5? 5도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대불펜의 시대가 열리며 선발 20, 불펜은 10. 혹자는 15 대 15의 절반을 이야기했고 심지어 불펜의 중요성을 더욱 중요히 보는 이들 또한 있었다.

내 마음은 15 대 15.

아무래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지 같은 불펜이 전통인 팀이 내 팀이라서 그러지 않을까.

자, 이 15 대 15의 비율을 ‘현재’ 원하 챌린저스에 대입해 보자. 선발진 15점 만점에 12점. 불펜진 15점 만점에 8점.

규진이 형은 진작에 좀 살아나는 모양새였고 혁준이도 제 페이스를 찾았다.

너 하던 거 해.

다섯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걸 장황하게 설명한 보람이 있었다.

뱁새는 뱁새가 하던 걸 해야 한다. 가랑이 찢어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가 있다.

아직 어린 축에 속하던 혁준이는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이름 비슷한 준혁이 또한. 얘는 문제점이 팔랑귀였던 게 참 웃긴다. 혁준이와는 다른 이유지만 결국 해 준 말은 같았다.

너 하던 거 해.

시즌 초처럼 압도적인 성적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본인의 역할은 나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선발인 태웅이는 뭐… 얘는 사람이 일관성 있어서 참 좋아.

불펜진엔 네 명이 있다. 중간에 속하긴 했지만 일단 나를 필두로, 최은구 선배와 신경석 선배, 그리고 고졸 신인 지호까지.

두 선배는 본연의 모습을 완전히 정착시켰고 지호는 본인의 색깔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머진… 그만 알아보자.

시즌 초부터 팀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어디가 좋으면 어디가 망가지고, 거기를 고치면 다른 데가 부러지고. 그리고 8월을 지나며 팀 밸런스가 조금씩 맞아 들기 시작했다.

8월 한 달 성적, 20승 7패. 7할 4푼의 압도적인 팀 승률.

이를 바탕으로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비스코의 천장을 뚫어내고 리그 3위에 안착하여 이 수준을 유지하려고 한다.

더 위를 노리는 방법이 더욱 중요하겠지만 시즌이 한 달여 남은 상황에서 바로 위에 있어야 할 동성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는다.

그저 4위였던 비스코를 제치고 어느새 4위의 자리를 차지한 성운과의 자리 또한 네 경기라는 것, 이것에 만족했다.

만족.

어느 부분에 만족했느냐.

대타, 박병천

대타, 김도훈

대타, 박헌희

한 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있는 9회 초 공격, 세 타자를 모두 백업 멤버들로 대타를 낼 수 있는 용기.

“가자가자!”

“아, 빠따 굳아이, 굳아이!!”

“에에에이!”

작년의 시즌 말은 즐거움과 기대로 피로를 잊고 지냈을 뿐이었다.

엄연하게 축적된 몸에 대한 타격감을 6년 만의, 혹은 데뷔 후 첫 포스트 시즌 진출이라는 기대감으로 무시해 왔을 뿐.

결국 그냥 포스트 시즌 가 ‘본’ 팀에서 끝났다. 이럴 때 마법처럼 외치는 말이 있지.

올해는 다르다.

이렇게 여유가 있으면 이게 좋다. 팀 선수들 체력 안배도 체력 안배지만,

딱―

톡!

따악―!

“아아아악!! 헌희야! 우리 허니!! 이 꿀단지 같은 쎼에끼야아악!!”

경쟁.

포스트 시즌 엔트리는 30자리.

선발 넷, 불펜진의 넷, 배팅 오더 9명과 대주자 기범이, 대수비보다는 대타의 역할에 집중될 주호까지.

이렇게 19명을 제외한 11자리는 아직 그 누구도 정해지지 않았다.

무한 경쟁!

만년 하위권에서만 놀던 팀이 2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에 가까워지면 이런 부가적인 효과까지 낳게 되는 것이다.

“예에에! 선배님, 달달하십니까아악!!”

백업 멤버들은 그 누구보다도 알고 있다. 1군급, 메인 멤버들은 쓸 만하지만 1.5군급, 준 레귤러 자리는 아직 그 누구도 정해지지 않은 무주공산이라는 것을.

투런 하나 넘기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헌희와 하이파이브.

목적 의식이 주입된 선수들의 집중력은 남달랐다. 우리 기준에서 1.5군급의 멤버들로 라인업을 짜도 패기로 승리를 거머쥐는 모양새가 많았다.

기대.

지엽적인 부분만 확실했던 작년보다 올해의 우리가 조금 더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 것이다.

“아이, 지호 잘한다, 잘한다!”

“감사합니다!”

9회 말을 세 타자로 깔끔하게 막고 경기를 종료시키는 지호까지 완벽.

조금씩, 조금씩. 시즌 초부터 어긋났던 밸런스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포스트 시즌이라는 결선의 무대에 맞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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