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총평
시즌 말미에 다다라 리그 순위 3위를 확정 지었다.
남은 게임은 2경기. 원하가 61승 2무 61패. 성운이 어제 패배함으로 58승 1무 65패.
축제 분위기!
자연스레 모두가 행복해했다. 2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뿐 아니라 작년보다 한 단계 상승한 성적!
시즌 초부터 이어온 각 요소들의 미스매칭은 이미 다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견실한 선발! 탄탄한 수비! 응집력 있는 타선! 비스코에 비빌 수 있는 불펜!
아, 물론 몇 명만.
예상보다 빠르게 순위도 선점했겠다, 주전들 체력도 계속 안배해주며 우리의 목표는 이런 가비지 게임이 아닌 포스트 시즌임을 명확히 알렸다.
시즌 마지막 경기.
띠링―!
[피날레!]
-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슬라이더 +2
상대 팀은 비스코 러너즈. 작년 우리에게 지고, 올해는 성운한테도 져 2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이 좌절된 팀.
8회 초, 석 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로진을 만지작거렸다. 하얀색 플레이트에 검은 글씨로 뜬 텍스트를 오른발로 밟았다.
피날레.
멋지게 들어가자.
“스트락!”
방은민의 몸쪽으로 향하는 직구. 일단 지켜본다. 슬쩍 전광판을 봤다. 142km.
체력 안배의 효과가 있는지 생각보다 공이 좋다. 직구 위주로 가자.
멋있게 가자.
“파울!”
높게 빠진 커브 하나를 넘긴 뒤 직구에 타이밍이 늦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볼!”
나온 거 같은데?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왼쪽으로 돌아갔다. 규학이도 같은 생각인지 1루심을 가리켰다.
아쉽게도 양손을 옆으로 펴며 배트가 나오지 않았음을 알렸다.
낮게 떨어지는 스플리터, 도망가는 슬라이더, 몸쪽에 싱커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 뒤 두 번을 더 젓고 나서야 원하는 사인이 나왔다.
그래, 그거. 몸쪽에 하나 더 가보자.
오늘, 몸쪽 직구가 좋다.
“스윙, 아웃!”
헛도는 배트에서 눈을 떼고 곧장 마운드로 돌아갔다.
한 바퀴 빙 둘러 돈 뒤 로진을 만지작거리면 타이밍 좋게 라운딩이 끝나있다.
성훈이 형한테 공을 받고 다시 플레이트에 섰다.
글러브를 벗고 양손으로 공을 뽀드득 닦아내며 생각해 냈다. 내가 달라진 이후, 도저히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더욱 어렵게 가보자.
다섯 손가락을 펴고 글러브에 붙였다. 하지만 규학이가 반송한 손가락은 검지손가락 하나였다. 엄연한 불일치였지만 결과는 일치했다.
딱―!
“파울!”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커브. 억지로 걷어내서 때린 공은 성현이 옆에 떨어지는 파울.
라인 안에만 안 들어갔다뿐이지 타격 자체는 정타였기에 괜한 소름이 돋았다.
아냐, 카운트 잡았어.
빠르게 잡생각을 벗어내고 다시 사인을 기다렸다. 슬라이더를 두 번 거절하자 세번 째 슬라이더가 등장했다. 괜찮을까, 싶었지만 일단 따라보기로 했다.
“스윙!”
되네?
몸쪽에서 시작해 깊게 파고드는 슬라이더에 멋진 헛스윙.
- 많이 꺾일 필요 없습니다. 슬라이더지 않습니까. 필요한 만큼이면 됩니다.
필요한 만큼만.
현진이가 했던 이야기는 큰 울림이 있었다.
필요한 만큼만.
한 번 더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다. 이번엔 좌우가 아닌 상하의 변화.
글러브 손바닥에 살짝 누른 채 약지로 공을 밀자 비껴 잡는 그립이 쉽게 완성되었다. 바깥쪽 낮은 직구.
- 직구처럼 던지시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서 가라앉습니다.
투닥!
“스윙, 스윙!”
아직은, 필요한 만큼만이라는 단어의 심오한 뜻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과하게 떨어진 공에 헛스윙이 나왔지만 100% 원하던 모양새는 아니라 100% 만족은 하지 못했다.
프로텍터에 튕긴 공은 생각보다 조금 멀리 도망가버렸다.
잡아서 태그하기엔 많은 무리가 있었기에, 규학이는 얼른 달려나가 공을 주워담은 뒤 찬찬히, 천천히 1루로 던졌다.
“아웃.”
1루심의 무심한 콜로 두 번째 빨간불과 함께 다음 타자가 들어왔다.
시즌 마지막 등판, 마지막 타자.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내가 뭐 된 것도 아닌데,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가득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미친놈인가.
갑자기 실실 쪼개는 나를 보던 규학이가 왜 그러냐고 눈으로 질문했지만 무시했다. 얼른 끝내고 들어가자.
딱―
“파울!”
훈이 대신 들어간 병천이가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보다 빠르게 땅에 떨어진 공은 먼저 파울 콜을 얻어냈다.
타자에겐 다행이고 나도 나쁘지 않다.
슬라이더로 파울을 얻어냈으니까, 반대 공으로 가자.
포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볼!”
몸쪽에서 보다 깊게 파고드는 체인지업이었지만 처음부터 깊게 시작한 로케이션은 타자가 무시할 만한 위치였다.
이걸로 가자.
규학이의 사인이 나오기 전에 검지로 모자와 팔꿈치를 찍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엄지손가락이 한 번 까딱거린다.
그래, 그거.
“끄악!”
딱―!
몸쪽 깊은 곳,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높은 곳. 하지만 분명히 스트라이크인 곳.
“떴다!”
공이 높게 솟구치는 걸 보자마자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빠르게 올라갔다가 빠르게 내려오는 공을 따라 손이 내려왔다.
팔이 지면과 수평이 되었을 무렵엔 공은 기성이 글러브에 안착한 이후.
띠링―!
[피날레!]
-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슬라이더 +2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59
커브 ― 52
슬라 ― 38+2=40
스플 ― 41
체인 ― 48
싱커 ― 46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아, 기성이 잘 잡네!”
“아, 내가 좀 잡지!”
8회 말과 9회 초. 비틀어져 있는 1이닝을 마치면 2018년의 한 시즌도 끝이 난다.
8회 말은 아쉽게도 세 타자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9회 초, 신경석 선배가 경기를, 시즌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운드에 섰다.
“스트라아아앜!”
간지 나는 구심의 동작. 저렇게 오바를 떤다는 것은 노란불 두 개가 사라지고 빨간불 하나가 생겼다는 뜻.
알록달록했던 전광판은 빨간불 하나가 모두 잡아먹은 뒤 하나 더, 그리고 이후 일곱 개 모든 불이 켜졌다.
마지막 공일 거야.
배터리가 사인 교환을 마쳤다. 투수의 왼 다리가 들렸다. 허리를 숙이고 팔이 옆으로 돌아 나왔다.
옆으로 크게 휘는 커브는 배트의 끝자락에 겨우 걸쳐 유격수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약!
왁!
으아악!
공이 굴러가는 시간은 고작 1.5초. 유격수가 잡은 뒤 1루로 송구하기까지 1.5초.
3초라는 그 짧은 찰나에 우리 덕아웃엔 무언가를 억누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팡!
“아웃!”
와아아아악!!
가즈아앗!!
예쌰아아아!!!
기성이는 1루심의 콜을 마저 듣지도 않고 미트를 벗어 하늘 위로 던져버렸다.
기쁨.
몇십 명에 달하는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몇천 명, 몇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도 우리와 교감해 주고 있었다.
승리의 원하! 최강 원하! 나가자, 싸우자! 우리는 원하!
고작 리그에서 3위에 올랐을 뿐인데도 우리 모두 즐거워했다.
누가 보면 우승이라도 한 줄 알겠지만 알 게 뭐야, 우리가 기쁘다는데.
[다시 한번,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겠습니다!]
작년과는 다르게 올해 또한 미리 만들어졌을 이 플래카드가 마음에 쏙 들었다.
다시 한번.
팬들 앞에 서서 인사를 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선수들 사이에선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양감.
고개를 돌리면 많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의 수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주치는 감정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시즌이 종료되었다.
63승 2무 61패. 리그 3위. 준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우리의 시선은 일주일 뒤 만날 성운 호크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 * *
2년 연속 타고투저.
2018시즌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점수 대파티.
투고타저의 2016시즌에서 급작스럽게 타고투저로 넘어왔던 17시즌보다 더 많은 점수들이 휘날렸다.
때문에 최은구 선배의 4점대 초반, 신경석 선배의 3점대 중반의 점수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커 보였다.
시즌 초에 만났던 부진이라는 필터를 덧씌워 보면 더더욱. 올해 신인인 지호도 4점대 중반으로 큰 힘을 보탰다.
시즌 중반의 방황을 재빨리 뿌리쳐 낸 선발진들의 활약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혁준이가 14승, 규진이 형이 11승. 준혁이는 8승에 머물렀지만 일관성으로만 보면 가장 큰 점수를 받을 태웅이가 10승을 찍는 대기염을 토해 냈다.
이 네 명의 평균 자책점을 계산해 보면 4.34.
이 정도 평균자책점이면 타선빨로 거둔 승리라 폄하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리그 전체를 보면 3점대는커녕 2점대 투수도 찾기가 힘든 지경.
하지만 이런 와중, 정규 이닝에 들지는 못했지만 유일하게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투수가 있었으니……!
57경기 63.2이닝 1.26 6승 40홀드 8세이브 69삼진 21볼넷 1사구 WHIP는 0.96
나. 바로 나.
2018시즌, FA 계약 첫해 성적. 오버페이가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키고 오히려 돈값 이상의 효자 계약이라는 평가를 얻어냈다.
리그 홀드왕, KBO 리그 최초 40홀드 돌파, KBO 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홀드, 불펜 투수들 중 최소 평균 자책점, 최소 WHIP.
그래, 나는 그 누가 뭐라 해도 내 명함을 내밀 수 있는, KBO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아직 많았다.
구속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130km 후반대에 머무는 구속은 그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당장 내년 시즌 종료 후 있을 프리미어12에 내가 나가냐 마냐, 나간다면 얼마나 통하겠냐, 이런 떡밥은 벌써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그건 너무 먼 미래 얘기고.
타선은 모두 고루고루 활약들을 펼쳤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는 이를 꼽으라면 당연 성현이.
동성의 현진이와 동시에 FA로이드를 거하게 빨았는지, 야잘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342/.413/.568 슬래시라인에 31홈런 102타점. 도루도 12개를 보탰고 외야에서 어시스트 15개로 외야수 중 단독 1위를 기록하며 5툴 플레이어임을 마음껏 홍보했다.
무서운 새끼. 부디 나처럼 팀에 남아줬으면 좋겠다. 다른 팀 가서 만나면 진짜 무서울 것 같다.
페이지를 쭉쭉 내리다가, 무심코 박해진의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성현이의 기록을 본 뒤라 웬만한 타자 기록으로는 안 놀랄 자신이 있었는데.
.363/.444/.698 51홈런 143타점.
내가 뭘 본 거지.
잘못 본 건가, 싶은 마음에 잠시 두 눈을 닦고 다시 핸드폰 화면을 노려봤다.
.363/.444/.698 51홈런 143타점.
변함은 없었다. 사실이었다.
“와…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진짜.”
“왜?”
“아니, 이거 봐봐.”
“…이젠 그러려니 한다.”
옆에 있던 우석이는 박해진의 기록을 봐도 시큰둥했다.
“익숙하냐?”
아, 얘도 국대였지.
우석이 또한 타고투저의 기운을 받아 좋은 성적을 찍어냈다. 3년 연속으로 좋은 기록.
슬래시라인만 따지자면 .313/.401/.502. 20-20 클럽에 한 번 더 가입해 냈다.
“사실 엄청 질투했거든. 해진이 걔.”
“잘해서?”
“잘한다는 정도로 설명이 되냐?”
“아니긴 하지.”
“진짜 X발, 나는 빈 스윙으로 피로 골절까지 당하면서 겨우겨우 이 자리 왔는데.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떡하니 나타나서 국대 4번 친대는 거야. 열이 뻗쳐, 안 뻗쳐.”
피로 골절.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평범한 외야수 중 하나였던 우석이는 미친 듯이 연습에 매달렸다.
지금이야 시대가 변했으니 연습이 모든 것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10년 전, 15년 전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었다.
“그치. 뻗치지.”
“그래서 가만히 지켜봤어. 그 새끼 하는 꼴. 근데 뭐……”
소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실실 쪼갰다. 허파에 바람 들린 마냥.
“야. 너 그런 말 들어 봤냐?”
“뭐.”
“그 왜.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뭐 그런 말 있잖아. 뭐였지.”
“아…….”
정확한 텍스트가 기억이 나지 않아 핸드폰을 켜고 대충 검색어를 집어넣으니 올바른 문장을 읊을 수가 있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거?”
“그래. 박해진은 천재고, 나는 노력하는 놈이고. 근데 내가 저 새끼한테 왜 지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랬는데 보니까.”
후우…….
“천잰데, 노력 X나 하는데, 그걸 또 즐겨.”
무서울 만한 새끼가 맞았다.
“너 그때, 현진이한테 뭐라 했다매.”
“뭘.”
“너네 작년인가 밥 먹으면서.”
“아… 그거. 그 새끼가 너한테 그 얘기하든?”
“좀 됐어. 어쩌다가 나온 얘기라서.”
“X발.”
큭큭, 웃으면서 흑역사를 떠올렸다.
“박해진한테 삼진 잡는 거?”
“그래. 걔 성적 절반은 내 거야.”
“맞지.”
“X발놈이.”
“팩트 밴이냐?”
친구들끼리의 시시덕거림이 잠시 잦아들자 놈은 갑작스럽게 무게를 잡았다.
“야.”
“왜.”
“진짜로 해진이한테 삼진 잡고 싶냐?”
“싫겠냐. 처맞은 게 얼만데. 한 번은 돌려줘야지.”
“그럼 진짜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고 있어.”
“아니. 너 아직 한―참 멀었다.”
“니가 뭔데 그런 소릴 하는데? 성적 이마이 찍었으면 됐지.”
“그걸로 만족하냐?”
“…….”
아니.
이 두 글자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니가 뭐 때문에 야구하는지 함 생각해 봐라.”
놈은 그런 말을 남기고 다시 자리에 디비 누웠다. 시간은 새벽 2시.
말을 나눌 상대가 사라지니 느껴지기 시작하는 술기운에 나도 그대로 등을 댔다.
하지만 우석이의 마지막 말은 나를 빠르게 잠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