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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65화 (65/190)

65화. 미디어 데이, 어게인

“지금부터 2018시즌, 원하 챌린저스와 성운 호크스의 준플레이오프 미디어 데이를 진행하겠습니다.”

MBS의 간판 야구 캐스터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구 캐스터인 권명훈 캐스터의 진행하에 미디어 데이가 시작되었다.

시작이 알려지자 기자들은 작년과 비슷하게 이런저런 포즈들을 부탁했다.

주먹을 보여달라느니, 상대방한테 삿대질을 해달라느니, 허리춤에 손을 얹어달라느니.

1차적인 상황이 해결된 후가 되어서야 메인 출연자 여섯 명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아 원래 이런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원하 챌린저스 측에서는 이한주 감독을 비롯해 김한울 선수, 강성현 선수가 나와 있습니다. 감독님, 시청자 여러분께 먼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원하 챌린저스 감독 이한주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어 성운 호크스의 김경호 감독과 추봉기 선수, 최우석 선수가 나와 있는데요, 김경호 감독님께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에, 안녕하십니까. 성운 호크스의 김경호 감독입니다. 제가 코치 시절에나 잠깐 들렀던 이 자리에 다시 앉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허허허.”

매우 편한 분위기.

권명훈 캐스터가 뭐라뭐라 서론을 잇고 있었다.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아 이리저리 눈을 둘러보다 눈이 마주친 한 사람,

너냐?

나다.

우석이.

어젯밤까지 우리 집에서 퍼질러 마시다가 같이 왔다. 그런 의미의 눈빛 교환도 있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것과는 달랐다.

여기서 너를 볼 줄을 몰랐는데.

나라고 알았겠냐.

거의 즉전감, 평범한 유망주.

고등학교 시절 썩 달랐던 두 사람의 대우가 역전되기까지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출감 불펜 투수, 국대 1번 타자 중견수.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상황은 관계없이, 팀의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하위권. 그것도 만년 하위권.

작년, 우리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처럼 성운의 올해 포스트 시즌 진출 또한 6년 만이다.

철없던 시절에,

히히, 우리 같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자!

그런 소리나 지껄였던 두 사람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우선 이한주 감독님, 팀이 2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되었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올해는 운이 조금 좋았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요소요소적으로 부족했던 부분이 극명하게 보였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팀워크적인 부분에서, 다른 부족했던 부분을 잘 메워주었기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김경호 감독님께서도 조금 전에 말씀해주셨는데요, 원하와 비슷하게 6년 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에… 사실 이한주 감독님의 말씀과 비슷하게 저희도 올해 운이 조금 좋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작년과 비교했을 때 성장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 또한 분명 있습니다.”

두 감독이 이렇게 사리는 이유.

상수 타이거즈 시즌 81승으로 역대 팀 시즌 최다 승 기록 갱신. 동성 또한 74승으로 상당한 승수.

1위 팀과 2위 팀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승수에서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5할을 간신히 넘겼을 뿐인 원하가 무려 3위, 5할 근처에도 못 간 성운이 무려 4위.

“진부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 질문을 안 드릴 수가 없죠. 각 감독님들과 선수분들께선 상대 팀의 어느 선수를 가장 주의하고 계신가요?”

우선권은 우리 쪽으로 던져졌다.

“아무래도 최우석 선수죠. 최우석 선수를 잘 막느냐 못 막느냐가 저희 팀의 승리에 직결될 것 같습니다.”

“저는 추봉기 투수요. 시즌 후반기 와서 공이 무섭더라구요. 가장 첫 번째 만날 테고 길게 가면 한 번 더 만날 텐데, 분석 많이 할 겁니다.”

감독님, 성현이. 그리고 내 차례.

“저는 명규… 아니, 곽명규 선수요.”

“아, 최우석 선수가 아닌가요?”

“얘는…….”

하…….

쇼맨십, 프로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

야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대놓고 도발을 시전했다. 유쾌한 도발에 장내는 물론 뜬금없이 무시를 당한 당사자도 껄껄 웃었다.

“김경호 감독님은 원하 선수들 중 누구를 가장 경계하십니까.”

“에… 전 강성현 선수입니다.”

“아, 강성현 선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데요.”

“워낙에 빵빵 터뜨리더라구요. 맘 같아선 모든 타석 다 고의사구로 보내버리고 싶어요.”

“추봉기 선수는요?”

“윤승주 선배가 많이 무섭습니다.”

“윤승주 선수요. 클러치 능력이 대단하죠.”

“네. 윤승주 선배 앞에 분들은 긴장하셔야 될 겁니다.”

다른 의미의 도발. 성능이 확실했다.

“자, 그럼 최우석 선수는요?”

“일단 얘는 제끼구요.”

일단 나를 한 번 거르고 시작한다.

“저도 원하 1선발인 황혁준 투수를 좀 많이 분석해야겠네요.”

“네, 다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질문인데요. 본인 팀에서 이 선수를 주목해야 한다, 싶은 선수들 있으십니까. 김경호 감독님부터 말씀해 주시죠.”

“에… 영빈이가 좀 후반에 주춤했는데요. 시즌 거의 막바지에 감이 살아나지 않았나 싶어요.”

“오영빈 선수 말씀해 주셨구요. 추봉기 선수는요?”

“이송인 선수 볼 무섭습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성운 호크스의 마무리 이송인.

올 시즌까지 3년 연속 30세이브의 좋은 기록을 나타내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타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인원 중 한 명.

“최우석 선수는요?”

우석이는 대답 대신 본인 팀 동료와 감독을 한 번 슥 훑은 뒤 마이크를 잡았다.

“전 태훈이 얘기가 왜 안 나오나 싶네요.”

“김태훈 선수요.”

“네. 명규가 워낙 좋아서 타순이 올라온 거지, 태훈이가 못 해서 내려간 게 아니거든요.”

본래 성운의 3번 타자. 하지만 명규의 급격한 약진으로 인해 5번으로 살짝 밀려나 버렸다.

“각각 오영빈 선수, 이송인 선수, 곽명규 선수 지목해 주셨습니다. 김한울 선수는 누구를 주목해 주실까요?”

“신경석 선배요. 신경석 선배가 시즌 초반에만 안 좋았지, 중반엔 아주 좋은 마무리였구요, 후반기엔 정말 극강이었거든요. 그 모습 이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9월 한 달 평균 자책점이 0점대죠. 맞습니다. 강성현 선수는요?”

“전 혁준이요.”

“황혁준 선수요?”

“네.”

“전 타자 쪽에서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요. 투수를 지목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외야잖아요, 제가? 멀리서 보는데도 던지는 거 보면 좋더라구요. 작년이 저희 팀… 아니… 저희 세대? 입장에선 첫 포스트 시즌인데 혁준이가 완봉이었나? 아, 완투. 완투했었잖아요. 큰 게임에서 잘하는 것 같더라구요.”

“빅게임 피쳐의 자질이 보인다는 말씀 같군요.”

“네.”

“좋습니다. 먼저 신경석 선수와 황혁준 선수가 나왔는데요, 감독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호가 아마 한 건 하지 않을까요.”

“장주호 선수요?”

“네. 규학이 수비가 워낙 좋아서 선발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대타로 나섰을 때의 결정력이 매우 높을 겁니다.”

시즌 말미부터 벼락치기식으로 시작된 수비에 대한 속성 강의는 최근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슬쩍 듣자하니 꽤나 좋다는데, 잘하면 선발로도 한 경기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상대 팀에게 덕담 한마디씩 해볼까요? 먼저 이한주 감독님.”

“아, 예. 최근 몇 년간, 저희 원하랑 같이 하위권에서 자주 만나던 팀 아닙니까. 모처럼 위에서 만났는데, 앞으로 이곳에서 자주 만났으면 합니다.”

“아, 진짜 좋은 덕담입니다. 강성현 선수도 한마디 해주실까요.”

“어… 이상하게, 성운은 좀 뭐랄까. 이런 말 해도 되나, 정이 좀 가더라구요.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게 맞지만, 저는 재밌는 게임을 하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정말 좋은 이야기입니다. 김한울 선수는요?”

“아니, 내가 하려고 했던 얘기를 앞에 두 분이 먼저 해버려 가지고 제가 할 말이…….”

하하하하!

아니,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짠데.

다른 팀들과 다르게 성운은 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갔다. 무슨 자매 구단인 느낌처럼.

맨날 하위권에서 자주 붙어 있던 팀이라 정이 붙은 걸까.

앞으로는 위에서 같이 놀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근데 하필 내 순서가 마지막이었던 탓에, 앞서 두 사람이 모두 내 분량을 가져가 버렸다.

“…내년에 또 만나요.”

결국 짧게 끝냈다.

강성현 선수가 한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나도 비슷한 마음이다.

재밌게 게임하자.

우석이가 먼저 그렇게 운을 띄운 뒤 추봉기는 좋은 상대와 만나 기분이 좋다 이야기했다.

김경호 감독님께선 무엇보다 다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페어플레이가 무엇인지 경쟁하자는 정말 감사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렇게 제가 좋게 분위기를 띄운 이유가 있는데요, 그럼 곧바로 상대 팀에게 도발 한마디씩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권명훈 캐스터는 묘한 웃음을.

장내의 기자들은 모두 개꿀잼에 대한 예상을.

단상에 있는 우리 여섯 명은 긴장을.

한 공간 안에서 여러 감정들이 뒤섞였다.

“먼저 김경호 감독님.”

다행스럽게 우선권은 성운 쪽부터였다. 저쪽 감독님께서도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 예상은 못 하셨는지 어버버, 하시다가,

“저, 저희가 이길 겁니다!”

하는 귀여운 도발을 남기셨다. 이어 추봉기는,

“노히트 노런 보여드리겠습니다.”

라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구요. 너, 진짜 각오해라.”

우석이는 대놓고 나를 찍었다.

아하하하!

그에 나는 장내를 복식 호흡을 통한 웃음소리로 메웠다.

“아, 김한울 선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데요. 김한울 선수가 바로 받아쳐 주시죠!”

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선 넘네?”

아, 찢었다.

세 글자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성현이는 추봉기를 가리켜 조심하라고 이야기했고 감독님께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짧고 굵은 멘트를 남기셨다.

이후 기자들의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빠지면 섭한 예상 스코어.

자세한 스코어 자체는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는 통일되었다. 모두 본인 팀의 스코어가 3이라는 것.

준플레이오프를 대비해서 특별하게 한 것이 있냐, 개인훈련으로는 어떤 것을 진행하고 있냐 등, 여러 질문들이 뒤를 이었다.

작년과는 다르게, 성현이에게 뭐 올해 끝나고 FA는 어쩔 거냐는 생각 없는 질문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대망의 티저 영상을 다 같이 시청했다. 작년엔 오프닝 영상 느낌으로 영상을 보고 시작했었는데, 이쪽이 더 멋진 것 같기도 하고.

이후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마지막으로 사진을 몇 번 더 찍고 나서 모든 일정이 종료되었다.

고생하셨다, 내일 봅시다, 등의 이야기를 마치고 우석이와 악수를 나누었다.

“선 넘는 건 너고.”

“진짜 선 넘는 게 뭔지 보여줘?”

“이미 많이 넘으셨는데요.”

“아이 X팔.”

두둑하게 덕담을 교환한 뒤 헤어졌다.

이젠 진짜로 적팀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오지 않고 구단 숙소에 머물 예정이란다.

얼른 꺼지라고 손짓해 준 뒤 감독님과 성현이에게 붙었다.

“성현아.”

“예, 감독님.”

“찢어봐라.”

감독님이 타선에 깡패를 풀었다!

“한울이도, 선 많이 넘고.”

“예.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최소한 플레이오프는 밟아 봐야지. 광탈은 한 번이면 돼.”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웃어 보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성현이의 얼굴엔 웃음 이외의 감정도 같이 비치되어 있었다.

결연.

“형.”

“왜.”

“괜히 집에 갈 때 계단에서 구르지 말고. 몸 사려.”

“저주하냐?”

“형이 중요하니까. 몸조심하라고.”

작년에 혁준이가 나한테 그랬었지. 츤데레라고. 진짜 츤데레는 저 새끼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이 넘치는 말을 한 뒤 놈은 쿨하게 사라져주었다.

올스타전 때 MVP 타고 생긴 본인의 차를 탄 뒤 회장을 빠져나가는 놈은 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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