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70화 (70/190)

70화. 쉼표

다시 한번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세 번의 만남으로 승리를 확정 지어버린 덕에 무려 3일이라는 시간이 추가된 짧은 휴식.

플레이오프라는 조금 더 거대한 무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될 구장은 바로 고척구장.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기 때문에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집 주변에서 놀아도 될 일정이었다.

짝짝짝!

그 중간의 하루. 자리에 앉자마자 건너편에선 해맑은 박수가 터졌다.

“믿고 있었어요!”

민영 씨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하고 있었다.

본인이 응원하는 팀이, 본인이 응원하는 선수의 활약으로 결선의 무대에 도착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좋은 모습을 뽐냈다.

팬이라면 좋아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근데 이제부터가 힘들 거 같아요.”

하지만 그 당사자의 입장으로는 밑밥을 깔 수밖에 없었다.

“알아요.”

“실망의 폭이 작아진다니, 다행이네요.”

“동성 무섭죠…….”

“무서워요, 솔직히. 어지간히 세야지…….”

콩라인이라는 멸칭 때문에 약해 보이지, 동성 또한 이번 시즌 무섭게 승을 쌓아올린 팀 중 하나였다.

5할 언저리를 겨우 맞춘 팀의 입장에선, 팀의 이름을 따라 도전자의 타이틀을 쓰는 것이 당연한 대결.

팬들도 알고 있다. 함부로 이겨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 선수들 모두가 더욱 최선을 다하리라 약속했다.

“내년을 기대하라는 말씀하실 거죠?”

“그 얘기로 밑밥 깔아야죠.”

“믿어도 되는 거죠? 한울 씨가 원하에 남아 있는 안에 할 수 있다고.”

이전처럼 강아지 같은 흐헤헤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진지한 분위기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네. 할 거예요.”

좋은 대답을 내놓고도 굳이 뜸을 들일 필요가 있는 대답인가 싶었다.

“그럼 됐어요.”

히히, 그렇게 원래의 모습으로 작게 잘린 고기를 입에 쏙 넣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나도 히히 웃고는 내 앞의 고기를 한입 물었다.

* * *

시즌 74승 1무 51패. 그리고 63승 2무 61패.

10게임 가까이 나는 이 승차는 정규 시즌 2위 팀과 3위 팀의 차이였다.

당연히, 모두가 동성의 승리를 점쳤다. 심지어는 원하의 팬들마저.

괜찮아, 여기까지만 해도 잘했어. 만족해.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선수들의 오기를 자극시켰다.

우리가 여기서 멈출 사람이라고?

이런 골자는 미디어 데이에서 아주 잘 뿜어져 나왔다.

감독님은 젠틀한 어조로 쉽게 승부를 끝내지 않을 거라 이야기했고 성훈이 형 또한, 비슷한 골자의 말을 이었다.

혁준이는 이전 미디어 데이에서 보였던 추봉기의 패기를 이어받았다.

노히트 노런, 한번 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동성에서 참석한 인원은 한동희 감독님과 3번에 3루를 치는 고명현과 국대 1선발인 현진이.

4강 팀을 꼽으라면 매년 한 자리를 예약하는 팀의 일원들답게 원하 대표의 도발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노히터 할 거지?”

“네. 할 거예요.”

등판 직전 몸을 푸는 투수 옆에서 노가리를 까는 게 이제는 내 하나의 루틴이 된 것 같다.

오늘도 혁준이 옆에 앉아 워밍업을 구경했다.

뻥―!

“아이, 굿볼!”

터질 것 같은 미트의 소리를 들어보면 없던 안심도 생길 법했다.

누구나가 믿지 않겠지만, 노히트가 말이 노히트지. 대충 그에 준하는 활약을 하겠다는 자신감 아니겠나.

쓰리이!!

근데 진짜 하는 거 아냐?

8회 말. 세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혁준이를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투구 수도 적당하게 102개. 조금 무리를 해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딱―!

“아… 까비.”

그러나 노히트 노런이라는 건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아웃 이후 만난 장동운이 초구부터 우전 안타를 때려내며 곧장 기록이 사라져 버렸다.

동성에서 그나마 약점을 꼽으라면 선택할 수 있는 장동운의 타격이었던 탓에 밀려오는 아쉬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흔히들, 경기 후반 노히트가 깨지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들 하지.

팀의 모두도 알기에 규학이를 비롯해 투수 코치님이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단호히 타임을 거절했다. 애먼 눈만 껌뻑거리다가 투수 코치님은 덕아웃으로 돌아와야 했다.

딱―!

“찍고, 세컨!”

“태그, 태그!!”

그리고 만난 다음 타자, 김석호. 공 두 개로 리버스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내며 이닝을 종료했다.

“한울아.”

“네?”

“너가 마무리 좀 해줄 수 있냐.”

“저요? 신경석 선배는요?”

“점수가 하나밖에 없어서. 일단 네 쪽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서 그래.”

“네. 괜찮습니다. 선배한테는 말 좀 잘해 주세요.”

“그래.”

대답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글러브를 집어 들고 빠르게 덕아웃으로 향했다.

6번 성훈이 형부터 시작되는 9회 초. 8번에 규학이가 껴있기 때문에 이닝이 생각보다 빠르게 끝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건영아아!”

“네!”

불펜으로 걸어가며 어깨를 쭉쭉 늘려주고 있었기에 곧장 공을 잡았다. 가볍게 던지며 캐치볼이 시작됐다.

공을 던지고, 또 공을 받고. 다시 던지기 직전 무의식적으로 그라운드로 눈이 향한다.

“쟤는 아직도 던지네.”

- 선배님.

- 왜.

- 제가 성장했다는 것을 꼭 선배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 아냐, 안 보여줘도 돼.

-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제발.

- 보여드려야겠습니다.

- X벌놈이.

미디어 데이 전날 걸려온 현진이의 전화. 짧은 통화 내역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에 기가 갈렸다.

8이닝 동안 내준 점수는 성현이의 솔로 홈런 한 방.

같은 기간 동안 한 개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은 혁준이가 더 상대 우위라고 평할 수 있지만 녀석의 퍼포먼스 또한 대단한 것임에는 분명했다.

“직구!”

빵!

서두르자.

우리의 타순은 썩 좋지 않은데 저기 투수는 현진이.

몸을 풀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것 같다. 중간에 필요 없는 루틴은 모두 버리고 빠른 템포로 공을 던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한울아, 가자.”

공격이 끝난 것도 모른 채 공을 던지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평소 느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고척구장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압도.

준플레이오프와는 다르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작년 KP를 만났던 사직구장에서도, 얼마 전 성운을 만났던 대전한밭구장에서도, 이런 감각은 느끼지 못했다.

한 계단 위의 공기.

‘준’이라는 글자 하나가 붙고 안 붙고의 차이였을 뿐인데 압도당하고 있었다.

띠링―!

[플레이오프!]

- 삼진 하나를 포함하여 세이브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1

플레이트를 밟자마자 정면, 포수의 훨씬 위 기록실 창문에 텍스트가 등장했다.

1번부터 상대해야 하는 까다로운 타순. 미션을 성공하고 아니고는 2차적인 문제로 밀어두기로 했다.

이기자.

동성이라는 강한 팀을 이런 큰 무대에서 만나 이기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잡을 수 있을 때 잡자.

플레이!

플레이 콜이 떨어지고 최용환이 자리를 잡았다. 우석이가 워낙 압도적인 스펙터를 자랑해서 그렇지, 최용환도 국대 1번 타자감으로 충분한 타자다.

약점이 없는 1번 타자.

사기에 가까운 멘트를 말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속에서 열불이 나는 타자.

“볼!”

커브를 일부러 아래로 깔았다. 각이 워낙 큰 커브라 끝까지 보고 치려 했던 흔적으로 배트의 노브가 살짝 보였다.

툭―

“볼―”

거의 메다꽂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거칠게 땅바닥에 박힌 스플리터는 규학이의 미트가 따라가다가 포기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볼이었다.

볼 두 개.

리그 수위권의 1번 타자를 상대로 영 좋지 않은 카운트부터 시작하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높은 공.

어차피 최용환에 대해 결정구는 높은 곳으로 봐야 한다.

띄우게 해야 한다.

우타자 따위가 1루까지 4초 플랫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그다음은 진심으로 무서움이 느껴졌다.

볼 두 개로 먼저 시작하게 된 투수는 당연히 카운트를 잡고 싶어 하겠지. 그걸 노리자.

볼 두 개로 먼저 시작하니까 하나쯤은 봐도 여유가 있겠지.

두 갈림길 사이에서 최용환은 어느 쪽을 고를까.

“스트라잌―!”

전자였을까, 후자였을까.

몸쪽 깊숙하게 박히는 직구를 지나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전의 두 공보다 적극적이었던 움직임은 아직까지도 나를 헷갈리게 했다.

하나만 더. 어떻게든 하나만 더 잡자. 뭐로 잡지?

“아.”

최용환을 보고 우석이를 떠올리니 문득 우석이와의 승부가 떠올랐다. 자세한 내역들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뜬금없었던 공 하나.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검지와 중지를 펴 보이자 규학이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세 개의 손가락으로 치환되는 것을 확인하고 자세를 준비했다.

내가 던질 공은 높은 커브. 이게 들어왔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만 높게 가야 한다. 몰리지 않아야 하고, 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최고의 집중력을 가지고 던진 공은 딱,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위치로 비행했다.

띡!

“억!”

근데 그걸 쳐?!

보다, 보다, 보다, 보다 들어 오길래 무심코 흘러나온 배트에 맞고 타구는 내 오른쪽으로 굴러갔다.

아, 애매한데!

포수가 잡아서 던지기엔 멀고, 3루수가 달려들어 잡기엔 타자의 발이 너무 빠르다. 내가 잡아야 한다, 내가 던져야 한다.

이미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임을 실행한 몸은 3루 라인 선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이이!!”

필터링 따위 없이 입에선 내가 잡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이 향하는 진행 방향보다 한 발 앞, 왼발이 당도함과 동시에 오른손에 공이 닿았다.

무슨 그립이 잡혔는지도 모르겠다.

막무가내로 집어 든 공에 약지까지 걸쳐 던지게 되었다.

시야 속에서 날아가는 공이 어느 지점에서 수욱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보니 체인지업 계통이 아니었을까.

쿠닥―!

등짝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을 인지했을 무렵 시야는 바쁘게 휘둘렸다.

한 번, 두 번 땅바닥의 잔디가 시야에 들어왔을 무렵에야 내가 몇 바퀴 굴렀다는 걸 깨달았다.

때문에 시야에서 사라진 1루의 상황은 내 맘을 애달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우우웃!!”

심판들 특, 호수비 나오면 콜 더 강하게 부름.

“형, 괜찮아요?!”

“등은? 숨 잘 쉬어져?”

주변에서 내 안위를 걱정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그보다는 1루에서의 상환 판단이 우선이었다.

멋진 주먹질에 대한 불만으로 최용환이 혹여나 자기네 덕아웃에 네모를 그리지는 않을까.

2번 타자, 조!! 희!! 지인!!

그러나 이내 다음 타자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에 확실하게 아웃 판정을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등짝이 아파 왔다.

“…형.”

“괜찮냐?”

“나 멋있었죠.”

팀원들의 걱정에도 내 입은 쌉소리를 나불거리고 있었다.

“X나 멋있었어.”

흐흐.

항상 차갑고 무뚝뚝하던 형이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내린 극찬에 등짝의 고통도 잊을 수 있었다.

탁탁―

“몸 상한다. 적당히 해라.”

“아, 물론요.”

친절하게 등에 묻은 잔디까지 털어주는데 오히려 이게 더 아팠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플레이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1루 쪽으로 시선이 닿았다.

이제 본인의 역할을 끝냈다는 의미로 아이싱티를 입고 있는 현진이가 보였다.

드디어 내려왔네. 연장 가도 이길 수 있겠지.

뭐 순간 그런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돌려 말해 마음이 편해졌다.

압도당하던 기분을 돌려줄 준비가 되었다.

딱―

어설프게 목에 맞은 공이 데굴데굴 내 왼편으로 굴러가는 모습은 반사적으로 내 다리를 왼편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기성이 들어가!”

공을 따라가는 시야 구석에서 기성이의 검은색 스파이크가 보였다. 내 콜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사라지는 검은색 스파이크.

글러브로 공을 집어다가 1루 쪽으로 향하는 모멘텀을 받아들인 채 툭 밀었다.

천천히 내 손을 떠나는 공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1루에 막 도착한 기성이가 본인의 탄색 미트를 내밀고 있었다.

“아우웃!”

다시 한 번 심판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발현됐다. 한 대 맞으면 진짜 골로 갈 법한 라이트 훅을 선보이며 타자를 덕아웃으로 돌려보냈다.

“어우, 오늘 형 뭐야. 약 먹었어?”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오늘 진짜 날아다니네, 형.”

“너도 수비 이렇게 좀 해봐.”

“아.”

기성이에게서 공을 건네받으며 잠시 팩트로 몇 대 때려준 뒤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몇 바퀴 구르고, 빠르게 뛰어댕기는 모습은 순간적인 체력을 빠르게 깎아 먹고 있었다.

숨을 조금 고를 겸 로진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고명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또 좌타. 얘는 그래도 띄워 치는 스타일이니까 내가 관여할 부분은 적겠지.

“스트라잌―!”

아싸리 띄워 치라고 초구부터 커브를 던졌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구경 한번 하라고.

바깥쪽 절묘한 곳에서 공이 마무리되도록 던졌다. 멀뚱히 구경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거길 잡아준다고?

“스트라잌―!”

응, 아까부터 잡아주더라.

똑같은 곳으로 직구를 던져주며 구심의 성향을 확인시켜 주었다.

“볼―”

이후 깜짝 선물로 몸쪽에 직구를 하나 던졌지만 볼,

“하이볼―”

그리고 헛스윙 한 번 노려보려고 높은 곳에 직구를 던져봤지만 한 번 더 볼을 받아냈다.

2-2의 카운트가 되자 뻔한 수법을 한번 써볼까,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엄지랑 검지.

그러나 포수는 진부한 게 가장 좋은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글러브 속에서 검지와 약지가 반시계 방향으로 살짝 돌아갔다.

가볍게 체인지업 그립을 완성하고, 그리고 던진다.

부웅―

스윙―! 아웃!

“어후…….”

평소 같았으면 쌰아악! 와아악! 이야악! 뭐 그런 괴성을 지르면서 마운드를 내려왔을 텐데 예정에도 없던 연속 호수비에 진이 다 빠졌는지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 형, 나이스!”

“고생했다.”

띠링―!

[플레이오프!]

- 삼진 하나를 포함하여 세이브하세요! (1/1)

- 보상 - 전 구종 +1

아.

승리를 확정 짓고 모든 이들이 그라운드로 나왔을 때, 시간 차로 튀어나오는 미션 완료 알림.

“쌰아아악!!”

팀 승리, 개인 세이브라는 메인에 더불어 미션이라는 보조 목표물까지 얻고 나서야 무의식은 기쁨을 표현하라 명령했다.

“정신줄 놨네.”

“많이 아팠냐?”

당연히 그 모습은 옆에 있는 이들 눈엔 미친놈처럼 보였을 테고.

항상 그런 놈으로 각인이 되어 있던 나였기에, 팀원들은 미친놈 맞네라는 짧은 감상평을 남기고 3루 측 응원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리즈 스코어 1 대 0. 일단 동성을 한 번 잡고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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