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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72화 (72/190)

72화. 열정페이

“건영아.”

“네?”

“…받아줘.”

“아…….”

불펜 포수도 엄연한 팀의 일원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고, 그사이 벌어지는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그들이 받아야 할 월급엔 열정이 껴있는 것이다.

그 열정의 근원. 팀에 대한 진정한 헌신과 사랑.

따라서 그 누구보다도 팀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는 일원들 중 하나인 것이다.

“…네!”

흐느적거리면서 공을 흔들어 보이자 곧 날아갈 이 공을 받기 위해 미트를 집었다.

팡!

팡!

가벼운 캐치볼.

공 하나 던지고 그다음 공을 던지는 인터벌은 현재 마운드에서 투구하고 있는 동성의 투수의 인터벌과 일치했다.

“형, 화이팅.”

“몰라. 믿지 마.”

손끝이 저릿하다. 어깨는 뻐근하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감각을 무시하고 몸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숨 한 번 쉬고 몸을 움직이면 건영이의 미트에서 커다란 포구음이 들렸다.

집중.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집중력은 좋다. 상태가 안 좋으니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조심하게 된다.

다만 일시적으로 낡아버린 몸뚱어리가 최고조의 집중력을 따라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카브!”

글러브를 뒤집어 아래로 까딱거리고 던진 공은 높게 붕 떴다가 떨어지는 커브. 아니, 높게 붕 떴다가 떨어져야 할 커브.

손에서 빠진 변화구는 앉아 있던 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정도로 높은 곳에 도착했다.

커브는 애매하네. 하나만 더 던져보자.

“카브으!”

팽!

깔끔한 소리가 나야 할 미트에선 요상한 소리가 났다. 평균의 소리와 멀어진 만큼 평균의 움직임과도 멀었다.

커브는 빼야겠다. 직구, 체인지업, 싱커, 슬라이더, 스플리터. 이 중에서 스플리터도 빼자.

끼익―

기름칠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불펜이 열렸다.

문을 잡고 있는 투수 코치님의 얼굴에선 미묘한 감정선이 보였다. 애써 무시하고 열린 길을 걸어나갔다.

-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와아아아!!

홈에서 등판하게 되면 항상 듣게 되는 노래는 이미 리그 내에서 나에 대한 상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와일드카드.

정상적인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내밀 수 있는 최후의 카드.

띠링―!

[열정]

-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1

- I don't know if you'll hold me, Or leave me here feelin' lonely―

열정.

간단하게 씨불일 수 있는 두 글자.

오늘의 나는 저들에게 얼마치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기대까지 부응해 보일 수 있을까.

투수 플레이트 근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공을 집어 들고 가만히 왼쪽을 올려다봤다.

모두가 나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지고 싶지 않다.

로진에 하얗게 버무려진 오른손으로 모자챙을 잡고, 글러브를 낀 왼손목으로 모자의 뒷부분을 누르고 모자를 고쳐 썼다.

때문에 자연스레 숙여진 고개, 하향 조정된 시야각 속엔 우리 덕아웃이 보였다.

크흥.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고 규학이를 쳐다봤다.

직구부터 시작했다. 우타자의 바깥쪽,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곳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하얀 물체에서 눈을 떼고 곧장 몸을 돌렸다.

132km.

미련없이 다시 뒤로 돌았다.

반구할 준비를 마친 규학이의 눈은 어떤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걸까. 뭐, X됐다, 싶겠지.

7번 타자, 조상욱.

후!

숨을 크게 내뱉고 내 정면에 집중했다. 집중력은 좋다. 집중력에 따라가자.

몸은 굼뜨지만 반대급부로 빨라진 두뇌 회전은 금방 상대 타자의 정보를 피력했다.

평균보다 살짝 위의 파워, 평균의 컨택, 평균보다 꽤 아래의 선구안.

세 가지의 단서만으로도 조상욱과의 승부에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팡!

“쓰뚜우우우라잌!”

반구를 받자마자 조금 전처럼 몸뚱어리를 뒤로 돌렸다.

134km.

나름 세게 빡세게 던진답시고 던졌음에도 형편없는 구속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균적으로 140km, 있는 힘껏 집어 던진다면 143km 정도까지는 간간이 꼽아주는 몸뚱어리가 이렇게 낡아버렸다니.

괜찮아.

“쓰뚜우우우라잌, 투!”

이런 타자와 굳이 정면 승부를 가야 할 이유는 없다. 적당히 꼬시면 어련히도 알아서 넘어올 거야.

간질간질, 타자 입장에서 긁고 싶어지게 만드는 곳에 두 개가 연속으로 들어갔다. 위치는 각각 몸쪽 직구와 바깥쪽 슬라이더.

아까 형편없었던 커브와 스플리터를 빼고 결정구로 삼을 만한 공을 생각해 보자, 무엇이 좋을까.

규학이의 결정은 또 한 번의 몸쪽 직구였다.

곧이곧대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는 걸 알기에 살짝만, 아주 살짝만 빼보도록 하자.

탁―

“파울―!”

목젖을 얻어맞고 두 동강 난 배트의 한 조각이 또르르 굴러 3루 라인을 탔다.

볼보이가 뛰어오는 모습을 보다가 규학이에게 글러브를 보였다.

착, 소리가 나게 받아내고 생각도 정리할 겸 로진을 만지작거렸다.

플레이!

곧바로 플레이 콜이 떨어지자마자 포수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요구하는 공은 몸쪽 기잎숙한 싱커.

그립을 바꿔 잡고 다리를 들었다. 직구와 똑같은 딜리버리, 그리고 거의 일치하는 팔스윙.

그러나 몸속에 자리 잡은 피로는 손가락 끝이 공을 끝까지 누르지 못하게 만들었고, 몇십 년 동안 공을 던져오며 자리 잡은 감각은 순간의 재치로 더욱더 강하게 때리게 만들었다.

두탁!

“볼, 볼!”

아익.

그 결과 필요 이상으로 억눌린 공은 좌타석 라인을 그린 석회 가루를 지워냈다.

애꿎게 공 하나를 버린 셈이 되자 입맛이 썼다.

바로 공을 던져주는 구심에게 고개를 꾸벅, 인사를 하고 당장의 몸 상태를 탐지했다.

괜찮아. 괜찮아.

최면을 걸듯 세 글자를 반복하자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이리저리 사인을 골라내다가 규학이의 확신의 찬 눈빛을 보고 어느 지점에서 고개가 다르게 움직였다. 홀린 듯 그립을 잡았다.

직구. 몸쪽에.

수천 번은 반복했을 딜리버리는 정상이 아닌 몸 상태에서 똑같은 아치를 그렸다.

엉덩이가 포수에게 향하고, 오른 다리를 돌린다. 강제로 끌려 나오는 팔 끝으로 강하게 공을 때렸다.

“끄악!”

뻥!

직구에 영혼이 담겼나.

“스이윙, 아웃!”

손에서 살짝 빠진 직구는 예상 궤도보다 조금 높은 곳으로 향했지만 타자는 한 타이밍 늦게 배트를 휘둘렀다.

“쌰아악!”

배트를 휘두르는 데에 있어 온 힘을 다했는지 중심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한순간의 발악이 바로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갔다.

로진을 들어 올리며 내야진이 볼을 돌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성훈이 형의 말 없는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돌아온 공을 받았다.

대타, 양덕만.

양덕만 선배라…….

크보계의 대선배. 한성의 이재명 선배, 그리고 먼저 작년을 끝으로 은퇴했던 이효재 선배와 같은 연배.

선수로 등록이 되어는 있지만 사실상의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여기서 양덕만 선배가 등장한 연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미 마흔에 걸친 나이.

프로를 기준으로 둔다면 이미 파워도, 선구안도, 컨택도 많이 달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앞선 요소들을 모두 희생해서 얻어낸 가장 중요한 요소, 경험.

동성이 양덕만 선배에게 기대하는 건 바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이번엔 내가 먼저 움직였다. 네 손가락을 펴서 팔꿈치를 가리킨 뒤 모자챙을 만졌다. 이는 다른 손동작으로 교환되었다.

이를 지켜보는 타자의 눈빛은 뚫어져라 노려보아도 그 속을 보여주질 않는다.

후우…….

한숨을 쉬고 양손을 머리 뒤로 넘겼다.

대비하여 아래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끅!”

빵!

“스뚜우우우라잌!”

딴에 역의 역을 노려보고자 좌타자의 바깥쪽에 걸치도록 던진 체인지업이 통했다.

무엇이 역이고 무엇이 역의 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만히 지켜보며 가장 급한 불 하나를 켰다.

다음, 검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이 바쁘게 내 몸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살짝 부들거리려는 것을 감추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영혼이 한 번 더 담겨주면 좋을 텐데.

“끄아악!”

따악―!

영혼을 꾹꾹 눌러 담아 보냈을 텐데. 내 정성을 무시한 타자는 제대로 공을 쪼개 외야 멀리 날려 보냈다.

아, 장타다.

백업을 가야 하는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마운드 앞에 서서 공이 비행하는 것을 지켜봤다.

높은 시야각의 가장자리, 진형이가 열심히 뛰는 모습이 보였다.

제발. 제발.

사제가 신에게 기도하듯, 그 자리에서 멍청히 주저앉았다.

덕분에 조금 더 넓은 각도로 볼 수 있었다. 자유 낙하하는 공이 다치지 않도록 한 몸 바쳐 날아오른 진형이가 왼손을 뻗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몇백 미터를 주행하듯, 중견수의 몸이 길게 미끄러졌다.

완전히 정지했을 때 있는 힘껏 글러브를 치켜들어 보였다.

빨간색의 글러브 바닥과 대비되어 확실하게 보이는 하얀색 물질.

아웃!

와아아앗―!!

본인의 호수비를 본인조차 믿을 수 없는지 있는 힘껏 내야를 향해 공을 던진 뒤 커버를 왔던 성현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한다.

두 외야수가 마주친 손뼉에서 발생한 충격파는 땅에 닿았던 무릎에 힘을 불어넣었다.

크흥.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로진을 다시 들어 올렸다.

까득, 하는 소리가 손가락에서 났다. 땅에다가 툭 내던지고 성문이가 받은 공을 다시 받았다.

9번 타자, 김석호.

슬슬 한계점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아무리 내가 처맞아 왔어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타자가 커 보인다.

정신병인가.

고개를 털고 다시 쳐다보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작아 보였던 규학이의 손가락도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끄악!”

빵!

“스투우우라잌!”

영혼이 담기면 잘되지 않던 일도 되게 한다, 라는 걸 이번에 던진 커브로 알았다.

불펜에서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던 커브는 평생 던져왔던 그 어느 커브보다 아름다운 궤도를 가지고 있었다.

살짝 낮았던 반구를 낮은 허리로 받아내고 다시 밟는 플레이트.

괜찮아.

포수의 손가락에 맞춰 두 손가락이 움직였다.

“읍!”

다시 한번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향하는 직구, 처럼 보이는 체인지업,

“볼―”

을 쉽게 지켜보는 타자. 이번엔 영혼이 안 실렸나. 그럼 영혼을 쉽게 실어 보낼 수 있는 직구를 던져보자.

이번 정규 시즌 내내 때려낸 안타들 중 정식으로 담장을 넘긴 타구는 두 개.

그리고 앞선 세 경기, 그중 최근 두 경기에서 때려낸 홈런 또한 두 개.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이 통계를 내 마음대로 조작했다. 두 개라는 수치가 이 타자의 최고치일 것이라고.

직구 그립을 잡고, 영혼을 실어서 때리면 일단 카운트 하나는 더 벌 수 있겠지.

“으… 끅!”

내가 정확하게 계산한 점.

영혼이 실린 직구는 내내 130km 중후반에서 놀던 구속을 141km까지 끌어올리게 해주었다.

따악―!

내가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점.

그래 봐야, 영혼만 담겼지 구위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는 물공이라는 점.

“…….”

우두커니 서서, 앞선 양덕만 선배의 타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타구를 지켜봤다.

그 짧은 새에 눈동자를 살짝 내리면 열심히 담장으로 달려가는 성현이가 보인다. 거기서 다시 시야를 올리면,

…….

…….

담장 앞에 있던 관객이 공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 참 웃기게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실점을 해놓고 나서야 머리가 차가워졌다.

띠링―!

[열정]

-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1

- 실패한 퀘스트입니다.

디폴트에 맞춰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주심에게 글러브를 보였다. 공을 받고 다시 로진을 닦았다.

1번 타자, 최용환.

우타석, 내 시야 오른편에 있어야 할 최용환은 감지되지 않았다.

내 두 눈알이 탐지한 것, 탐지하는 것은 규학이의 손가락과 미트.

뻥!

“스뚜우우라잌!”

뻥!

“스뚜우우라잌, 투!”

138km, 136km.

딱히 힘을 과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둘러서 허를 찌른 것도 아니다.

그저 아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대충 쑤셔 박은 공 두 개는 최용환이 꿈쩍도 못 하게 만들었다.

새까만 색의 글러브와 대비되는 하얀색 손가락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18m나 떨어져 있으면, 이런 것까지 보이지는 않겠지.

침이 꼴깍 삼켜졌다. 방아쇠 증후군처럼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진정시켰다.

멋지게 들어가자!

언제 들었는지 모를 목소리가 떠올랐다.

멋지게 들어가자. 멋지게 들어가자.

“끄악!”

뻥!

“스위잉, 아웃!”

멋지게. 멋있게.

“아아악!!”

후련함과 후회가 뒤섞여 튀어나왔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비슷했다.

넌 최고야.

어딘가 울컥이는 마음에 씨익 웃으며 뛰어갔다.

“야, 점수 내자, 내자아악!!”

무수히 쏟아지는 악수 요청을 하나하나 보답하고 불펜이 아닌 덕아웃에 앉았다.

벤치에서도 봤겠지. 다음 주면 모를까, 오늘 당장의 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투수라는 걸.

“가자, 가자아악!!”

어딘가 다운되어 있는 덕아웃의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실점을 한 주제에 가져선 안 될 생각인 줄은 알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

가장 크게 박수 치고,

아웃!

가장 먼저 자리에서 달려나가고,

아웃!

가장 먼저, 또 가장 크게 소리쳤다.

아웃!

“…….”

하지만 돌아오는 답신은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색한 웃음으로,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기뻐하는 동성의 선수들을 지켜봤다.

마지막까지 박수를 치기 위해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두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울고 있는 녀석도 보였고 분한지 상욕을 지껄이는 친구도 보였다.

짝짝짝짝짝!!

“아, 괜찮아아, 잘했어!”

짝짝짝!

“나가자!”

가장 밝게 웃으며, 가장 먼저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구단의 볼보이가 건네준 플래카드의 한끝을 잡고 섰다.

우리의 도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뭐 대충 그런 멘트.

지켜질 거라 약속은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약속하기 어려운 멘트를 아무렇게나 들이대는 양심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쉬움과 후련함 사이 그 어딘가에서, 우리의 2018 포스트 시즌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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