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코칭
자선 야구 대회는 재미있게 끝이 났다.
승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합, 스코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당했던 삼진 세 개 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승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만큼, 출전하는 선수들은 성적보다는 퍼포먼스 그 자체에 의의를 둔다.
타순이 한 바퀴 정도 도는 3회 정도까지는 모두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으로 경기를 치렀지만 4회, 5회를 지나갈수록 본 모습으로 게임에 임하는 선수를 찾는 게 더 힘든 지경이 됐다.
타격 장비 대신 포수 장비를 차고 타석에 임한 헌철이.
모 만화 캐릭터의 코스프레를 한 배우.
본인의 별명대로 소닉의 파란 머리카락을 머리에 이고 타석에 들어선 선수.
나는… 꽤 많은 고민했다.
별명?
생각해 보니 나한테는 이렇다 할 별명은 없었다. 캐릭터라면 모를까.
캐릭터.
그래, 캐릭터. 하여 내가 선택한 것은 캐릭터.
마침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을 때 상대할 투수는 가야 퍼펙터스의 배준호. 그냥 적당한 친분이 있는 후배다.
초구, 137km의 빠른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는 걸 보고 배트를 집어 던졌다.
아니, 나 투순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 X팔.
웃으며 나를 달래는 포수와 심판을 뿌리치고 준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후 2구째, 나름 가감하여 130km의 직구가 미트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배트를 집어 던졌다.
적당히 안 하냐.
급정색하는 내 모습에도 준호는 꺄르륵 웃으며 110km 정도의 약한 공을 던졌고, 난 그 공에 삼진을 먹고 다시 한번 배트를 집어 던졌다.
연기가 끝나자 쭈뼛쭈뼛 다가가 집어 던졌던 배트를 다시 슬쩍한 건 덤.
경기 자체가 전반적으로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경기가 끝난 후 짤막하게 진행된 자선 경매. 여러 쟁쟁한 물건들이 많았다.
어느 선수의, 어느 가수의, 어느 배우의 팬이라면 꼭 갖고 싶을 만한 물건들.
내가 제출했던 글러브 또한 50만 원이라는 꽤 높은 금액에 낙찰을 받았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좋은 곳에 쓰임에 기뻤고, 또 내 가치가 생각보다 높았음에 한 번 더 기뻐했다.
“아, 재밌었다.”
경기가 종료되고 이제 집에 갈 시간. 모처럼 친해졌던 이들과 악수와 포옹으로 마무리하고 야구 가방을 챙겨 구장을 나섰다.
“아, 한울 씨!”
“아.”
서연 씨의 갑작스러운 등장.
“경기는 잘 보셨어요?”
“네. 한울 씨는 역시 투수네요.”
“하하…….”
굳이 안 짚어주셔도…….
“여러모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은데, 그, 고생하셨어요. 올 한 해.”
“그냥 해야 될 일 한 건데요.”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말짱해요. 관리 잘하고 내년 준비해야죠, 또.”
“사장님이 저한테 계속 찔러요. 한울 씨랑 자리 한번 만들어달라고.”
“오매, 그런 대단하신 분을 제가 만나도 되는 겁니까.”
“한울 씨도 충분히 대단한 분인데요.”
꺄르륵꺄르륵.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영양가는 없는 대화.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실래요?”
“아…….”
볼을 긁적였다. 어떤 점을 보고 나를 좋아해 주는지는 모르겠다만, 사양하는 게 맞겠지.
“죄송해요, 그…….”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던 도중,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쪼물딱이가 보였다.
“저기, 피디님 집에 데려다주기로 약속을 해서요. 게다가 저도 옷차림이 좀… 거시기하기도 하고.”
“그,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하하…….”
“아유, 진짜 죄송해요. 대단하신 분께서 밥 먹자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따위가 막 사양 같은 걸 하고… 이렇게 보니까 저도 좀 출세했네요.”
개소리에 서연 씨는 꺄르륵 웃었다. 하지만 눈가엔 묘한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 그럼 다음에 같이 먹는 건 가능하죠?”
“그……!”
사양을 하고는 싶은데, 명분이 애매하다.
“…예.”
“그럼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뭐라 답변할 새도 없이 본인 멤버들이 서있던 곳으로 달려가선 이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먼저 가지 않고 계속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빨리 갔으면 좋을 텐데.
“…은서 씨.”
“넹?”
할 수 없지.
“혼자 뭘 먹고 있어요.”
“타코야끼요.”
“…아니. 그래. 타요.”
“뭘요.”
“데려다줄 테니까. 타요.”
“에? 아니, 됐어요. 집 별로 안 먼데.”
“그런 게 있으니까. 타요.”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그런 게 있으니까. 설명해줄 테니까.”
“…….”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차에 탄다. 운전석에 앉고 시동을 걸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 차를 조금 움직이니 어쩜, 딱 에쎈트릭의 멤버들이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된다.
그 앞에 잠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니 굳이 서연 씨는 차 앞까지 달려 나와 인사를 받아준다. 멋쩍게 인사를 받아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워후, 적극적이시넹.”
팝콘 대신 타코야끼를 우물우물 씹으며 이 광경을 재미지게 쳐다보는 쪼물딱이의 이마를 찰싹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무슨 일인데요? 굳이 혼자 가도 되는 사람 데려다준다 그러고. 하긴, 내가 가만 놔두면 좀 걱정될 정도로 여리긴 하지.”
“여린 게 아니라 애 같은 거지.”
“뭐요?”
“뭐.”
“내가 왜 애야!”
“너 키 몇이야.”
“…….”
에이 씨.
은서 씨는 거칠게 욕설을 하고 입 안에 있던 타코야끼를 씹어댔다.
“무슨 일인데요, 그래서.”
“아니… 서연 씨가 밥 먹자 그래서.”
“오!”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건지, 은서 씨는 금방이라도 팝콘을 가져올 법한 표정으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모야모야, 썰 좀 풀어봐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떻게 돼. 지금처럼 된 거지.”
“서연이 밥 먹자고 했는데 그걸 까고 나를 데려다주고 있다고?”
“그래요.”
“…뭔데. 나 좋아해요?”
“미쳤어?!”
“아니, 아니고선 말이 안 되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연이 밥 먹자는데.”
뜬금없이 남 연애사를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흐응…….”
묘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정면을 주시했다.
어딘가 어색해진 사이에 괜한 말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근데 한울 씨도 확실히 하는 게 좋아요.”
“뭘요.”
“뭐긴. 여자 얘기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뭐가 갑자기야. 계속하던 얘기가 그건데.”
그 어색함 사이 쪼물딱이가 먼저 선공을 시전했다.
“서연이 한울 씨 좋아한다는 건 알죠? 에이, 모를 수가 있나. 몰랐다고 하지 마요, 몰랐으면 진짜 한울 씨는 고자야.”
“자꾸 이상한 단어 쓸래?!”
“틀린 말도 아닌데. 그렇잖아요, 저렇게까지 텔레파시를 보내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다 아는데 본인이 모르는 게 말이 되나.”
낼름, 하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타코야끼를 입에 집어넣고선 우물거리며 입을 놀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요.”
“서연이랑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확실하게 정해요. 그러다가 서로 안 좋은 꼴 보니까. 그게 예의이기도 하고.”
“웬 뜬금없이 연애 코칭이야.”
“왜? 할 수도 있지.”
“그렇게 연애를 잘 알아요?”
“그러엄. 내가 또 한 연애 하지!”
“그러는 지금 남자친구 있는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운전 중인 사람을 그렇게 노려보면 쓰나.
“간 보는 듯한 모양 하지 말고, 빨리 결정해요. 아니, 뭐 그렇게 복잡해. 그냥 사귀든 말든 이전이라도 그냥 만나볼 수도 있는 거지. 상대방이 너무 거대해서 부담스러워요?”
“아니… 그건 딱히 상관없는데.”
“올, 대인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럼 왜요?”
“음…….”
민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흐음. 썸까지는 아닌데. 음… 썸 직전 같은 느낌의 사람이 있긴 하거든.”
“헤에…….”
“뭔데, 그 반응은. 나라고 여자 못 만날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 딱히. 그래서요? 그분이랑 서연 사이에서 고민하는 거예요?”
“아니, 나를 어떤 놈으로 보는 거야.”
“흐흐.”
“그렇게 웃지 말고, 진짜로 무서우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요.”
“그분이랑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게 좀 고민이라 그렇지.”
“잘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거구만.”
“그런 거지.”
“흠.”
아, 그렇다면 이 연애 코치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구만, 음음!
같은 쌉소리가 옆에서 들리는데 이젠 무서울 지경이다. 다행히 은서 씨의 집 근처에 도착하였기에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다.
“아, 이 코치님만 믿게나, 자네.”
“누가 코치야.”
“나.”
“니가 왜 코치야.”
“한울 씨의 연애 코치.”
“소름 돋는 말 하지 말고 빨리 가, 빨랑.”
“이히히.”
훠이훠이, 은서 씨를 비껴내고 집에 갈 네비를 찍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찍으란 네비는 안 찍고, 상태 바에 찍혀있는 연락에 눈이 먼저 갔고 손은 자동적으로 따라갔다.
민영 씨의 연락.
[링크]
[풉… 야잘잘 어디갔어요… 풉……!]
[아… 보셨구나…….]
[제가 타격까지 잘하는 걸 알면 다른 타자들한테 미안해지잖아요.]
“…….”
내가 써놓고도 자괴감이 잔뜩 드는 소리였지만 이보다 더 괜찮은 대사는 딱히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바로 옆에 숫자 1이 사라지자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기가 살짝 애매해졌다.
“뭐야, 그분이에요?”
“으악!”
진심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니, 매너 어디 갔어요?”
“코치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대드는 선수가 어딨어요.”
그러면서 훅 들어와 핸드폰을 낼름 노려본다. 생선을 앞둔 고양이 마냥 씨익 웃는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선 슬쩍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 봐라.”
“이히히.”
음흉하게 웃으며 민영 씨와 나누었던 연락 내역을 살피고선 흐음… 하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다.
“아, 연락 왔어요.”
얼른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지금 집에 가고 계세요?]
[네 이제 출발해요.]
[토끼가 짝짝짝 박수를 치는 이모티콘]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어요!]
[민영 씨도 고생하셨어요 :)]
[집에 도착하면 문자 남겨둘게요.]
“되게 무난하네요.”
“그럼 뭘 생각한 거예요.”
“좀 들이대 봐요.”
“뭘 들이대.”
“서연이 한울 씨한테 하는 거 있잖아요. 한울 씨도 그렇게 해야지. 이분한테 마음 있는 건 맞죠?”
“있지.”
“보니까… 보자… 이분도 한울 씨한테 마음 만땅인 거 같은데. 이거 프사, 이분 본인이에요?”
“네.”
“와……!”
민영 씨의 셀카를 보고선 동경의 눈빛으로 바뀐다.
워낙에 키가 작은 편인 데다 얼굴도 엄청 어려 보이는 쪼물딱이는 이런 상의 여인을 동경했던 모양이다.
“와… 진짜 아름다우시다… 한울 씨한텐 너무 넘치는 분인데.”
“알아요.”
“왜 이런 분이 한울 씨를…….”
“말이 너무 심하네.”
“그치만 팩트인걸.”
“나도 알거든.”
다시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잘해 봐요.”
“잘해야지…….”
“결혼도 빨리 해버리고.”
“할 수 있으면 해야지.”
대화는 거기까지. 카메라가 들어 있을 법한 가방을 집어 들고는 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말 상대 해줘서 내가 고맙지. 들어가요, 얼른.”
“넹. 편집 기대하세요.”
“…굳이 그런 말을 하면 더 무서워지는데.”
눈살을 찌푸렸지만 은서 씨는 오히려 니약, 하고 웃었다.
기대하라구, 척!
으악!
엄지를 내보이는 그녀를 내비두고 조수석 쪽 창문을 올렸다. 주소를 찍어두었던 핸드폰을 거치대에 올려두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