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76화 (76/190)

76화. 시상식

[단독] 원하 강성현, 4년 총액 95억 계약 완료.

원하 챌린저스가 작년 김한울과의 대형 계약에서 이어 또 한 건의 대형 계약을 거두었다.

…중략…

한편 당장 올해는 강성현과의 계약을 무사히 마쳤지만 원하 챌린저스의 팬들은 걱정을 이어야 할 전망이다.

당장 내년 시즌이 끝나고 FA가 되는 선수 중 주요 선수로는 팀의 2선발인 한규진, 유격수인 이명진 등이 있으며 내후년에도 주요 선수들의 FA는 계속될 전망이다.

* * *

성현이는 무사히 팀에 남았다.

타고투저 기류에 편승하여 FA로이드를 거하게 빨아 재낀 녀석의 올 시즌 성적도 어마무시했다.

리그 MVP에 도전장을 내미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강탈해도 인정할 수준.

하지만, 0.322/0.413/0.568, 홈런 26개에 타점도 80개를 넘기고 도루까지 12개를 추가했던 당사자는…….

“기대도 안 해. 그 정도 양심은 있어.”

상대가 너무 세다.

“박해진, 걔는 진짜 미친놈이야.”

0.363/0.444/0.698 51홈런 143타점.

만약 전업 지명타자였어도 MVP 자리에 앉아도 남을 성적이 아니었을까.

“썰 좀 풀어봐. 어떤데?”

“아… 걔는…….”

질려 하는 표정. 다른 놈도 아니고 성현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어떤 걸까 대체.

“…형 우석이 형이랑 친하잖아.”

“그치.”

“우석이 형한테 들은 얘기 없어?”

- 천잰데, 노력 X나 하는데, 그걸 또 즐겨.

박해진을 향한 우석이의 한 줄 평.

“아, 진짜. 그거. 그거야.”

본인이 박해진에게 느꼈던 느낌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우리는 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쓸데없이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양복이 진짜 오질 나게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재킷을 고쳐 입었다.

“형.”

“왜.”

“우승하고 싶지?”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릴 하나 싶은 맘에 절로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씨불이는 옆모습은 꽤나 진중해 보였다.

“그런 거 안 하고 싶은 사람도 있냐.”

“하려거든 박해진을 잡아야 돼. 진짜.”

“알아.”

“아니, 좀 들어봐.”

난 왜 항상 이 동생놈에게 혼나는 걸까.

“내가 타석에 있으면 형은 무슨 생각해.”

“내가 널 보면? 그냥 뭐… 알아서 하겠지?”

“비슷해. 박해진이 같은 팀에 있잖아. 그럼 진짜, 진짜 든든해. 내가 못 쳐도 쟤가 알아서 다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담이 확 사라져. 맘이 편해지거든.”

“…그렇겠지.”

“일단 쟤를 무너뜨려야 돼.”

박해진을 무너뜨린다라…….

“뭐가 어찌 됐든지 간에 만날 거거든. 정규 시즌에서 1위를 하려거든,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려거든. 결국 박해진을 만날 거야. 그때는 잘 생각해 봐.”

“…그래.”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엔 나와 성현이의 이름이 써 있는 팻말 앞에 당도할 즈음이었다. 원탁에 하얀색 테이블보를 씌운 것이 꽤나 고급져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한울이 오랜만. 성현이도.”

2018 KBO 리그 시상식.

홀드왕을 옛날에 확정 지은 나는 트로피 하나를 받을 예정이고 성현이는 MVP 투표의 들러리로 참석했다.

역대 가장 노잼인 MVP 투표.

그 곁다리 중 하나가 성현이인 것이다.

뜬금없는 아이돌의 축하 공연을 잠시 보고 난 뒤 이제는 익숙해진 권명훈 캐스터가 진행자로 나타났다.

연륜이 돋보이는 진행. 위트까지 지니고 있어 가만히 보고 있자면 실실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런 자리였다.

우선 퓨처스 리그의 선수들에 대한 시상이 거행되었다.

짧게는 당장 내년, 좀 멀리 보자면 10년 후 우리 한국 야구를 짊어질 선수들에 대한 선배들의 응원은 대단했다.

선배님들, 혹은 수상하는 이들의 직접적인 경쟁자들의 뜨거운 환호와 더불어 한국 야구에 대한 하드팬들의 격려까지 받은 그들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1군, 금방 올라간다.

그들의 눈에선 그러한 독기가 보였다. 2군 생활을 딱히 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다만, 내 입장에선 소름이 돋고 장차 두려움까지 느껴지게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후 1군 신인상을 거쳐 투수 부문에 대한 시상식. 가장 먼저 호명된 건 홀드왕에 대한 시상식이었다.

투표가 아닌 이미 누구나가 알 수 있고, 또 누구나가 알고 있는 팩트를 기반으로 한 시상이기에 고리타분한 후보 발표나 시간 끌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 다음 시상은 선발과 마무리 투수 사이에서 항상 고군분투하는 최고의 불펜 투수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바로 홀드왕이죠, 원하 챌린저스의 김한울 투수입니다. 축하합니다!”

권명훈 캐스터의 발표에 회장엔 괜스레 웅장한 음악이 깔렸다.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향하는 사이, 권명훈 캐스터 옆에 있던 누군지 모를 예쁘장한 여인이 올해 내 활약상을 간단히 소개했다.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 선수는 2018시즌 57경기에 등판해 63과 3분의 2이닝 동안 투구를 했는데요, 평균 자책점은 리그에서 유일한 1점대인 1.26을 기록했습니다. 작년 시즌 35개의 홀드로 홀드왕을 차지한 데에 이어, 올해 또한 무려 40개의 홀드를 기록하며 FA 계약 첫해를 멋지게 장식했습니다.”

그 말이 딱 끝날 무렵 단상에 올라 KBO의 높으신 분께 트로피를 받고 악수까지 완료했다.

“그럼 김한울 선수의 수상 소감 들어보겠습니다.”

바로 앞에 마련된 마이크에 입가를 가져다 대고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원하 챌린저스 김한울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큰 상을 받게 됐는데요, 제 덕이 아닌 저희 팀원들의 덕에 받은 상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이크에서 살짝 비켜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

얼떨떨한 맘에 긴장 가득했던 작년과는 다르게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므찐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참석한 팬들이 환호해 주었다.

“홀드왕 수상자, 김한울 선수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고 싶은데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한 가지 비결이 있을까요?”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기선 겸손을 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팀원들 덕에 제가 올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좋았을 때가 많았지만 안 좋았던 때도 분명 있었거든요. 그때 처지지 않고 다시 반등할 수 있었던 건 팀원들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완벽.

“네, 그리고 올 시즌까지 포함해서 무려 11시즌 연속으로 매년 50이닝 이상을 투구하고 계신데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실제로 올 시즌도 초반부터 가볍다고는 하지만 어깨부상도 있으셨는데요.”

이번엔 권명훈 캐스터가 아닌 옆에 있던 여자 분의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항상 생각해 오던 내용이 있었기에 가감 없이, 또 내숭 없이 풀어낼 수 있었다.

“원하 팬분들이 들으시면 화내실 수도 있는 내용이기는 한데요. 저는 그저 제가 많은 경기에 나가고, 많은 공을 던지는 게 참 좋아요. 아직까지도 참 행복해요. 참 감사해요. 팀의 사정이라는 핑계 아래에 계속 팀에 남아 있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례하고 생각해요. 괜찮습니다.”

“와…….”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관객석 한구석에서 작게 울려 퍼진 내 이름은 어느새 모든 관객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마법을 일으켰다. 아 좀 멋졌지? 같은 평소와 같은 거드름은 나오지 않았다.

“원하 챌린저스가 작년엔 리그 4위, 또 올해는 리그 3위라는 호성적을 거두었는데요. 작년 준플레이오프 미디어 데이 때 김한울 선수가 했던 공약은 아직도 유효한가요?”

“아… 그 3년 안에 우승…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다시 권명훈 캐스터의 질문 타임. 어려운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는 잔망스럽게 웃는다.

“네. 내후년 안에, 우승할 겁니다.”

“3년이면 내년 안에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어… 제가 그때 내년부터 3년 안에 뭐 그런 말 하지 않았나요?”

“이 부분은 저희가 나중에 따로 비디오 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잔망스러움이 2인분으로 늘어나자 회장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시 여자 분의 질문.

“마지막으로, 원하 챌린저스 팬분들께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어… 올해 원하가 좀 다사다난했어요. 초반에 삽… 아니, 어… 그… 좀 안 좋았던 부분을 빨리 해결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아쉬움은 누구보다 저희가 더 크게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만년 하위권이던 팀이 위로 올라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희는 더, 지금보다 더 강한 팀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네, 2018시즌 KBO 리그 홀드왕, 김한울 선수였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가 해놓고도 오, 꽤 멋있었는데, 싶은 말이 나왔다.

다시 연호되는 내 이름에 도취되어 트로피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올.”

돌아가니 성현이가 묘하게 웃으며 작게 박수를 친다.

“좀 멋졌냐, 새꺄?”

“올. 난 형이 그렇게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미친놈이.”

이후의 시상식은 쭉쭉 진행되었다.

세이브왕, 다승왕, 탈삼진왕, 다승왕이나 승률왕 등을 거치고 타자 부문.

도루왕을 시상하고 득점왕을 지나 나머지 6개 부문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됐다.

“이어서, 타율, 출루율, 장타율, 타점, 홈런, 최다 안타왕에 대한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상수 타이거즈, 박해진 선수입니다. 축하합니다.”

아따 많다.

나와 성현이가 앉아 있던 테이블보다 살짝 뒤의 테이블에서 박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키, 듬직한 체구가 뚜벅뚜벅 단상으로 걸어갔다.

“상수 타이거즈 박해진 선수는 올해 또한 대단했습니다. 올해는 무려 6개의 부문에서 1위를 거머쥐며 발전이 없는 타자라는 오명을 드디어 벗게 되었습니다. 타율 3할 6푼 3리, 출루율 4할 4푼 4리, 장타율 6할 9푼 8리에 홈런은 51개, 타점 143개, 안타는 192개를 기록했습니다.”

하도 소개 내용이 길다 보니 박해진이 단상에 도착하고 뻘쭘히 서있을 때까지도 소개 멘트가 끝나지 않을 정도였다.

받아야 할 트로피가 워낙 많다 보니 아예 쟁반에다가 트로피를 갖다 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박해진 선수의 수상 소감 들어보겠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박해진입니다.”

체구에 걸맞게 듣기 좋은 중저음이 회장 안에 가득 찼다. 남자가 봐도 멋진 새끼.

“소개해 주실 때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올해 드디어 조금의 발전을 거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더더욱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운 새끼…….

옆에서 성현이가 조용히 지껄였다. 나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이후의 진행은 내가 수상했을 때와 비슷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치냐 물어보니 덤덤하게 노력을 많이 했다 답했고, 특별히 도움을 준 분이 있냐 물어보니 모든 분께 감사하다는 스테레오적인 답변을 내놨다.

문제가 되는 건 세 번째 질문.

“앞서 김한울 선수가 늦어도 내후년 안에 원하 챌린저스가 우승할 것이다! 라고 공약을 내걸었는데요. 이에 박해진 선수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권명훈 캐스터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리그 최고의 타격의 원동력은 저리 빠르게 고개를 돌려도 정확하게 나를 골라내는 저 동체 시력이 아닐까.

“…….”

“…….”

녀석은 나를 보고, 나 또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몇 초 동안, 슬슬 이거 방송사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도 조용했다.

“…힘내십쇼.”

짧고 굵은 한마디였지만 받아들이기로는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겠지.

나는 파하! 하고 웃는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충분히 표현됐으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질문은 고정인지, 상수 팬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하는 말에 더욱 노력할 테니 잘 봐달라는 깜찍한 말을 남겼다.

이후엔 2018 KBO 리그를 몇 분으로 함축한 영상 하나를 시청했다.

괜한 감성을 자극하는 잔잔한 노래에 괜히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울리는 캐스터들의 열띤 샤우팅까지 더해지니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상이 끝난 뒤 거행된 MVP 시상식.

총 100명의 투표인단이 투표한 한 표가 1위부터 5위까지 차등 점수를 매겨 투표하는 방식으로 영상은 MVP 투표 5위 선수부터 하나하나 발표하기 시작했다.

KP 스타즈의 김기윤, 한성 위너스의 조태풍, 3위에는 우석이. 그리고 2위에는 성현이가 역전 만루 홈런을 때려 내고 포효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이쯤 되니 슬슬 재미가 없어졌다.

1위, 749점 상수 타이거즈 박해진.

너무나도 뻔한 결과였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박해진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향했다.

아까 대단한 인터뷰를 한 번 했기 때문에 이번 인터뷰는 그리 길지 않았다. MVP 소감만 한마디.

“아… 감사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제가 이런 상을 또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저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년 연속이더라. 4년 연속이던가. 4년 연속 리그 MVP라니. 가능키나 한 소린가.

창대했던 시작과 비교해 김이 다 빠져버려 어딘가 허무함까지 느껴지는 마지막으로 시상식이 모두 끝났다.

이후 수상자들이 모여 사진 한 컷. 또 분위기 좋게 수상자들끼리 악수를 나누게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어… 너도 축하한다, 야.”

그러다 박해진과 악수할 차례가 다가왔다.

먼저 고개를 숙이며 축하해 오자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간단한 덕담이 오갔다.

됐지, 싶어서 자리에 돌아가려고 할 때,

“선배님. 근데 진심이십니까.”

녀석이 도발을 시전했다.

“엉? 뭐가.”

“아까 내후년 안에 우승하겠다고 하셨던 것. 진심이십니까.”

“…….”

뭐지.

의도를 알 수 없어 맹하게 얼굴을 쳐다봤다.

“저희도 그리 만만히 자리를 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

X발. 도발까지 그렇게 멋있게 하면 되냐.

“허.”

절로 실소가 터졌다.

“목 잘 닦고 기다려라. 조만간 뺏으러 간다.”

“예. 기대하겠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매너 좋은 마왕을 상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용사의 마음이 대충 이러지 않을까.

“뭐래?”

“맞짱 뜨자는데.”

“뭐?”

“그런 게 있어.”

성현이는 잘 타이르고 회장을 나갈 때까지도, 성현이가 맛있게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이 꽤 괜찮은 기분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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