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주장
날짜는 고작 하루가 넘어갔을 뿐인데 덩달아 햇수도 하나가 넘어가 버렸다. 그렇게, 간단하게 31살이 되어버렸다.
되어버렸다… 되어버렸… 아…….
30대의 튜토리얼은 잘 마친 걸로 계산해도 되지 않을까.
나름 대박인 FA 계약도 했고, 첫해는 정말 완벽한 활약을 펼쳤고.
이제 남은 것은 30대 튜토리얼에 진입한 한 살 아래 후배들을 놀려먹는 것.
각오해라, 전성문. 너도 이제 30대구나.
한 살을 더 먹기 몇 시간 전의 나는 무엇을 했는가.
말이 거창했지 사실 별로 한 건 없었다.
우석이랑 규진이 형이랑 명규랑, 넷이서 거나하게 마시고 널브러져 있었지.
나이를 합치면 125살인 네 명의 남정네가 술에 꼴아 빙 둘러서 어깨동무를 하고 우정을 다지던 그 모습…을 지금 다시 떠올리자면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X발.
그 외엔 딱히. 오프 시즌은 매년 비슷했다.
몸 관리를 위해 적당히 러닝 뛰고, 튜빙은 쉬지 않고, 웨이트는 몸 선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쇠질 해주고.
다만 올해는 몸 ‘관리’보다는 몸 ‘상태’에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가볍긴 했지만 어깨 부상도 있었고, 또 그렇게 밀린 만큼 시즌 후반 많은 이닝을 던지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트레이너분이랑 의사 쌤한테 꽤나 많이 혼났다.
- 계약 1년 만에 퍼질라고 그래요?
두 분의 평가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몸 상태는 거의 최악.
근 10년 동안 매년 50이닝 이상을 던져온 불펜 투수의 몸뚱어리가 정상이면 더 이상하다.
무엇보다, 내가 그걸 느끼고 있다는 게 가장 뼈아프다.
수건을 공중에 휙휙 휘둘러도 이전처럼 힘있게 쉭! 하는 소리가 아니라 후응… 하는 힘 빠지는 소리가 난다.
큰일 났네.
“이제 일본 가시는 거죠?”
“네. 캠프 진행하고 또… 아이고, 두야.”
야구 선수로서 1년의 시작은 스프링 캠프다.
책임만 가득한 자유 아래 몸 관리를 얼마나 잘해 왔나, 혹 본인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얼마나 절충을 해왔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
약 한 달 동안 일본 땅에 발을 붙이고 있기 전날, 나는 민영 씨와 마주 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무려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니 아쉬움이 매우 컸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오늘의 데이트는 꽤나 길었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오락실에서 놀다가 커피도 마시면서 못다 한 수다도 떨고.
하루 푹 자고 일어나 내 자동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구장으로 향했다. 한가득 짐을 챙겨온 모습은 나뿐만이 아닌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새로 만나게 된 얼굴과도 안면을 트는 짧은 시간 후 다 같이 구단의 버스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구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시간보다 공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시간이 더 짧았다. 잠시 멍때리고 있자니 도착한 수준.
1년 만에 도착한 공항의 풍경은 영 변하지를 않았다.
햇수로 따지자면 12년째 오는 장소.
익숙함을 넘어 편안함까지 느끼는 공간은 잠시, 이내 다시 다른 버스를 타고 구단의 숙소로 이동했다.
이동 첫날은 항상 그래 왔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반 정도의 길었던 휴식 이후 곧장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우니까.
그렇게 모두가 쉬고 있을 때, 난 첫날부터 감독님께 불려갔다.
“어, 왔냐.”
“예, 감독님.”
딱 1년 전, ‘자네 마무리해 볼 생각 없나?’의 대화가 오갔었던 장소로.
나를 부르시던 그 목소리가 워낙에 진중했기에 일단 겁을 한 사발 집어먹고 들어갔다.
내가 뭐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압박감.
“흐음…….”
작년엔 곧장 본론을 꺼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올해는 무엇이 그리 걸리는지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셨다.
“무슨 일이세요?”
찔리는 놈이 먼저 찔러보기로 하자.
“음…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야.”
“예, 예…….”
“성훈이가 좀. 생각보다 힘들어 보이더라고.”
“네?”
이성훈.
나보다 두 살 위의 선배. 팀에서는 주전 3루수를 맡고 있다.
주로 6번 타순에 고정되어 있으며 매년 2할 8푼 정도의 타율과 10개를 살짝 넘길 만한 파워를 기대할 수 있는 타자.
수비는 원하의 멤버답게 평균 이상.
그리고 결정적으로, 16시즌부터 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성훈 선배의 이야기가 나오자 빠르게 정보가 정리되었다.
“성훈이가 주장된 지 얼마나 됐지?”
“아마… 3년 됐죠? 작년까지요.”
“그치. 16시즌부터였으니까.”
“네. 감독님 설마…….”
빠르게 정리된 정보는 빠르게 결론을 도출했다.
“그래. 올해부터는 네가 주장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세상에.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졌다. 진짜로, 진짜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그에 대한 어떤 압박인 건가.
“제, 제가요? 아이, 감독님 농담을… 하하. 제가 어찌 감히 주장이라는 감투를 쓸 깜냥이나 되나요오, 하, 아하, 아하하하!”
“안 될 거 있냐?”
“예……?”
1년 전, 지금 대화하는 상대는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마무리직을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사양했다.
미친놈 쳐다보는 듯한 시선은 덤.
그리고 오늘, 그 상대는 작년과 달랐다. 제안, 혹은 선택지라는 텍스트는 사라지고 명령과 비슷한 어조만 남았다.
마치 답정너처럼, 넌 알겠습니다, 다섯 글자만 지껄이면 된다는 표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제가 연차라든가 나이라든가… 주장하기엔 좀 어리지 않나요……?”
“너 10년도 넘었잖아. 몇 년 차야.”
“저… 올해로 12년 차죠.”
“나이는.”
“서른하나 됐습니다.”
“뭐가 부족한데.”
아…….
“저 말고 왜 다른 선배들은…….”
“솔직히 걔네는 당장 자기 자리도 애매한 애들인데. 뭘 맡겨. 걔네 2군 내려가면. 주장 자리 바로 공석되는 건데.”
“어… 타자 중에 뭐… 승주라던가요? 걔도 저랑 동갑인 데다가 지타 전업이라 덕아웃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까.”
“아냐. 승주는 자기 나잇대 애들이랑 윗사람하고는 잘 있는데, 자기 밑에 애들이랑은 좀 애매해. 애가 막 대하는 건 아닌데, 글쎄다.”
“그럼… 성현이… 라든가…….”
“걔도 애매해. 아직은 좀 어려.”
“어려도 실력도 좋구요. 프로 파이팅도 좋지 않습니까.”
“과해서 그렇지. 무엇보다 밑에 애들이 되게 무서워해.”
“…그럼 규진이 형은…….”
“규진이도 나쁘진 않은데…….”
저요? 저보다는 한울이가 더 낫지 않을까요? 애가 또라이 같은 기질이 좀 다분해서 그렇지, 그런 면 덕에 주변 사람이 모여요. 은근히 팀에서 중심이에요.
윗사람들한테도 잘 대하고, 아랫사람들한테도 툴툴대면서 다 해주고. 무엇보다 지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라 감독님 입장에서도 편하실 텐데요?
“…라던데.”
나쁜 형. 나한테 짬을 때려?
“저기. 그, 감독님. 근데요. 만약에. 진짜 만약인데요.”
“그냥 시원하게 말해. 뭘 뜸을 들여.”
“제가 2군 가면 어떡하시려구요.”
“너가 2군을 왜 가.”
“저도 사람인데, 삽질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삽질할 거야?”
“아뇨.”
“그럼 됐어.”
“너무 무책임하십니다.”
껄껄껄.
웃음소리는 ‘아, 들켰네?’로 보였다.
“안 내려. 성훈이 2군 가는 거 봤냐?”
“그 왜, 16년 초에…….”
“그땐 부상이라서. 그거 때문에 잠깐 내려갔던 거였고.”
“아…….”
“너가 무슨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정도는 감안하니까. 성적도 성적인데, 주장은 성적만 가지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뭘 보고 시키나요.”
“사람 됨됨이.”
“제가 된 사람이에요?”
“아니야?”
“맞다고 한들 제 입으로 그런 소릴 하겠습니까.”
“하면 되지.”
“…예. 저야 뭐…….”
아씨.
“성적은 차치하고, 팬 서비스 좋아. 선배들 잘 대해. 후배들 잘 챙겨 줘. 코치진한테 거리낌 없이 다 얘기해. 팬들한테 이미지도 좋아. 뭐가 더 필요해.”
“아…….”
“그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다.”
“…으. 을긋습느드.”
혼자서 부들부들거리는 것으로는 2019시즌 원하 챌린저스의 새로운 주장이 선임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 저기, 미튜브 그거 피디님이랑 인터뷰도 좀 하고.”
“…그 쪼물… 거기 피디님은 왜요?”
“주장 새로 됐는데. 팬들한테도 알려야지.”
아, 제발.
터덜터덜 감독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앞을 지나가던 태웅이와 마주쳤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야, 태웅아.”
“예?”
“…이젠 나를 선배님이라 부르지 마라.”
“야구 그만두셨습니까?”
뭔 소리야.
“이젠 주장님이라 불러라.”
“오. 이제 주장이십니까.”
히히, 부조리가 뭔지 보여주겠어.
“너, 올해도 10승 못 하면 나한테 혼난다. 알겠어?”
“…예, 예.”
“히히. 주장이다, 히히.”
정신 나간 것 같애.
나는 분명 첫날의 소중한 휴식을 만끽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나의 휴식은 어디로 갔는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캠프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성훈 선배와 은서 씨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선배. 나한테 꼭 이랬어야만 했어요?”
“뭐?”
“…아닙니다.”
아오.
팔자에도 없는 주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를 팬 여러분들께 알려드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영상을 찍게 되었다.
“…….”
카메라 세팅이 완료되고 렌즈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상당히 퀭해 보였다.
초점이라고는 어딘가에 나지막하게 쏟아버린 눈빛 하며, 세상모르고 멍청하게 벌어져 있는 입이며.
“자, 박수우우!”
은서 씨의 박수는 슬레이트와 같은 사인이었다. 그에 옆 성훈 선배 또한 후련함을 담아 박수를 짝짝 치기 시작했다. 나는…….
짝… 짝… 짜악…….
“아이, 한울 씨, 좀 힘차게 해봐요. 다시 찍을게요. 자, 박수!”
짝짝짜악…….
이전보다는 그래도 인위적인 감정이 듬뿍 담긴 박수.
합격점을 받았는지 은서 씨의 사인에 성훈 선배가 뭐라뭐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여. 저는 작년 2018시즌을 마지막으로 주장직을 내려두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원하 챌린저스의 주장은 여기, 한울이가 맡게 되었습니다. 평소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애가 좀 또라이 같긴 한데, 그래도 보기보다 사람들 다 잘 챙김. 지 할 말 다하고 사는 성격이라 시원시원한 맛도 있고. 여튼 알아서 잘할 거임.
“…때문에 한울이는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짝짝짝―
2.5인분의 박수가 넓은 식당 안을 채웠다.
“그럼 김한울 선수의 소감도 부탁드려요.”
“…아. 나요.”
“네.”
“…….”
차리자, 정신.
“일단 성훈 선배 3년 동안 주장 고생하셨고… 감히 제가 주장이라는 큰 직책을 맡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추천을 해주셨다니 감사하고… 그… 네. 그렇습니다.”
뭔 소리야?
듣다 못한 성훈이 형이 옆구리를 쿡 찔러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한울 씨. 좀 활기차게 안 돼요?”
“예… 활기차게… 해야죠.”
후우…….
“그… 선배님과 감독님의 추천으로 2019시즌부터 새로 주장을 역임하게 되었는데요. 어… 저를 믿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리고 믿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억텐으로 짜 맞춘 대사들의 연속은 간신히 피디님의 높은 커트라인에 걸쳤다.
어렵게 녹화를 마치자 성훈 선배는 정말로 후련한 표정으로 앞으로 내가 주의해야 할 것들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애들한테 겁주지는 말고. 근데 그래도 니가 얕보이면 안 돼. 웃긴 선배일지언정 우스운 사람은 되지 말라고. 그리고…….”
사실 별 얘기 없었다. 주장! 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뭐 그런 역할들이니까.
마지막으로 주장이라고 하면 주어지는 소정의 활동비, 월 100만 원의 현금이 지급된다고 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거 어차피 내 돈 아닌데.
평소 후배들이나 불펜 포수들한테 사주던 밥값의 출처가 내 지갑이 아닌 구단의 지갑으로 변경되었을 뿐이다.
“요오, 한울 씨. 진짜 출세했는데. 주장이라니.”
“있잖아요. 아니,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넹.”
“…은서 씨는 진짜 내가 주장직을 할 만한 사람으로 보여요?”
“네.”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은 더더욱 나를 열 받게 만들었다.
“아니 왜! 어째서!”
“왜긴. 아까 이성훈 선수가 한 얘기 들었잖아요.”
“선배가 뭐라고 했는데!”
“윗사람 아랫사람 다 잘 챙기고. 자기 할 말 똑바로 잘하고.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나. 앞으로는 나쁜 남자로 살아야 하나.”
풉―
“웃어?!”
“잘해 봐요. 한울 씨는 잘할 거 같으니까.”
쪼물딱이는 마지막까지 나를 열 받게 하고선 유유히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 * *
다음 날, 작년과 같은 강당에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원하 관련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작년에 비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몇몇 보였고 새로 보이는 이들 또한 몇몇 보였다.
절차는 작년과 거의 같았다. 감독님을 위시한 코치님들의 훈시, 올 시즌을 향한 감독님의 출사표.
그 와중 화이트보드에 써 있는 주전 멤버들의 이름이 작년과 어느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내 맘을 아프게 했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저기서 누군가 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기자.
그리고 작년과는 다르게 한 가지 절차가 추가되었다. 바로 주장 변경에 따른 이관식.
나와 성훈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와! 기쁜 날! 와! X나 기뻐!
그 감정을 억지로 얼굴에 표현하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규진이 형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가만두지 않겠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선임에게 부조리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우선 성훈 선배가 뭐라뭐라 했다. 뭐 지금까지 감사했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 진부하지만 괜찮은 단어들.
그리고 다가온 내 차례.
“한울이도. 새로 주장이 됐는데, 한마디 해야지.”
“…….”
멍청히, 나에게 시선들이 모집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심이 담긴 내 한마디는 여기 있는 모두의 마음을 울릴 것이다.
“여기 계신 모든 이들에게, 폭압과 부조리를 약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