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78화 (78/190)

78화. 봄 야구

은근슬쩍 투수조 조장을 맡았던 것도 모자라 올해는 아예 팀의 주장까지 되어버렸다.

동시에 내가 입을 유니폼 상의를 모두 구단에서 가져가 버렸다.

입을 옷이 없어져선 어쩔 수 없이 구단의 마크가 찍힌 재킷을 입고 활동했다.

바로 다음 날, 뺏겼던 내 옷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 옷이되 내 옷이 아니었다.

왼쪽 배꼽 옆에 붙어 있는 까만색의 대문자 ‘C’.

내가 이 팀에서 주장을 맡고 있소! 하고 홍보하는 꼬라지였다. 고작 패치 한 장 박아넣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배가 아프다.

벨트 안에 찔러넣은 유니폼 자락이 유독 왼쪽만 더 아래로 흘러내린 건 기분 탓이 아닐 거야.

평범한 불펜의 일원으로서, 투수조의 조장으로서 보던 시야와 주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보는 시야는 확실히 달랐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애초에 보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모습들이 보였다.

유독 싸가지가 없는 새끼.

뺀질뺀질 훈련 기피하는 놈.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친구.

팀원들에게서 좀 겉도는 아이.

“야.”

이런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 시킨 주장이 아니다.

나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살짝살짝 문제가 있어 보이는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잘못한 부분은 확실하게 지적하고 잘한 부분은 더없이 칭찬했다.

“1조, 고!”

주장의 조건 중 하나, 모범을 보일 것.

투수 러닝 1조에 포함된 나는 열심히 뛰었다.

나를, 내 몸을 생각해서 열심히 훈련하는 것도 있었지만 내 아래 친구들이 보고 잘 따라와 주길 바랐다.

확실히… 주장이라는 감투는 무거웠다.

* * *

각 포지션들의 특성을 위주로 편성되는 1차 캠프.

이 시점에서 투수가 해야 할 훈련의 명분은 피지컬, 그리고 매카닉에 대부분이 몰려있다.

더 강한 몸을 더 좋은 폼으로 움직인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러닝이라는 게 무식하게 뛰기만 하는 게 아니다.

천천히, 하지만 오랫동안 뛰며 몸의 긴장을 유지시키기도 하고 이를 악물고 짧은 거리를 전력 질주시키며 순발력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인터벌 플랭크는 야구 선수에게 중요한 코어 근육을 성장시키는 데에 있어 아주 좋은 단련이었다.

1분 동안 자세 유지, 30초 쉬고 다시 1분 동안 자세 유지, 또 30초 쉬고 다시 1분.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튜빙은 투수라면 절대 빼먹어선 안 되는 훈련.

어깨의 혈관과 견갑골의 근육을 자극시키고 팽창시키는 건, 밥을 안 먹었으면 안 먹지 이걸 빼먹을 수는 없었다.

반나절 일과 끝.

단순한 체력 활동만으로 하루의 절반이 끝나버린다. 여기 절반인데, 벌써부터 진이 축 빠져버렸다. 그럼 남은 절반은 무엇이냐.

뻥―!

“굿, 굿!”

펑!

“아아아악, 좋아아악!!”

실전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훈련, 피칭.

세션이 한창인 불펜. 투수조에서 가장 마지막 조에 일부러 투신한 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캐치볼을 하며 근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친구는 없는지, 어딘가 나대는 친구는 없는지.

“민수야, 장난치지 말고.”

“예, 예!”

단순하게 내 성적만이 내 연봉으로 직결되는 시대는 끝이 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작년의 나는 투수조의 조장이었다는 것. 반쪽짜리 감투지만 써봤다는 경험이 있고 없고는 아주 큰 차이였다.

“선배님.”

“어어.”

“저기, 체인지업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신인급 투수 하나가 다가와 공을 내밀었다.

“안 되긴.”

강탈하다시피 공을 받아선 일단 내가 잡는 그립을 먼저 보여주었다.

난 이렇게 잡는다, 넌 어떻게 잡니, 왜 그렇게 잡니, 이렇게 해보렴.

이리저리 손가락 사이에서 둥그런 공을 굴려대며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팁들을 대방출했다.

제발, 무럭무럭 자라거라.

띡!

“쓰리!”

팡!

“아, 한울이 나이쓰!”

띡―

“투투!”

“쎄칸!!”

팡!

“크으… 친구들, 한울이 봤나! 이게 투수 수비다!”

덤으로 PFP까지.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지내다 보면 어느덧 1차 캠프 기간은 끝이 나버린다.

뭐 한 것도 없이 뺑뺑이만 죽어라 돌았는데 캠프의 절반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무서움까지 느껴졌다.

“조심히 가라!”

“네, 잠실에서 뵙겠습니다악!”

지금까지의 상대평가에서 절반 아래에 속한 이들은 결국 다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은 아마… 아주 큰 변수가 없다고 한다면 2군에서 올 시즌을 시작하게 되는 거겠지.

1차 캠프에서 투수들은 피지컬과 매카닉적인 부분을 위주로 갈고 닦았다면 2차 캠프는 아예 실전과 다름없는 환경이 펼쳐진다. 바로 교육 리그가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상대평가에서 항상 최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는 이들의 기량은 늘었으면 늘었지 조금도 퇴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주 좋은 이야기.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팀의 주전 우익수이자 2번 타순에 고정되어 있는 성현이.

큰돈 한번 땡기면 살짝 늘어질 만도 한데, ‘프로’ 두 글자를 가슴 깊숙이 새기며 살아가는 녀석에겐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음, 역시 야수조 조장답군.

야수가 주장을 맡는다고 해서, 투수들을 관리는 하되 투수들에게 간섭은 하면 안 된다.

지들이 뭐라고, 뭘 안다고 투수한테 간섭을 해.

이는 당연하게도, 상황이 역전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뭐라고, 뭘 안다고 타자들한테 간섭을 할까.

때문에 자연스레 야수조의 조장이 필요해졌다.

누가 좋겠냐는 감독님의 질문에 나는 최소한의 필터링도 거치지 않고 곧장 성현이를 추천했다.

히히, 맛 좀 봐라, 하며 찔렀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을 보곤 내가 뭔 짓을 한 건가, 싶기도 했다.

따악―!

안타.

딱―

선상 2루타.

따악―!!

홈런.

2019년의 첫 경기는 우리처럼 일본에 머물러있던 동성 호넷츠와의 연습경기였다.

11 대 2.

3 대 1.

8 대 0.

4 대 3.

5 대 1.

이후 일본의 팀, 비스코, 다른 일본의 팀, 성운까지 총 다섯 번의 경기를 마쳤고 5승 0패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었다.

올해는 다르다!

매년 한 번쯤 지껄여보는 말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미야자키 캠프를 아주 잘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가지고 맞이한 시범 경기들 또한 우리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요소 중 하나였다.

6승 2패.

선발진은 작년의 방황을 기억하며 더욱 단단해졌다.

타선은 더욱 폭발력이 커졌다.

불펜진에는 미미한 친구들이 큰 힘을 보태주었다.

수비는 더욱 쫀쫀해졌다.

지금까지의 호성적들은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이 시기, 나는 연습 경기와 시범 경기 통틀어 6이닝을 던졌다. 평균 자책점은 22.5.

6이닝 동안 22.5점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려면 실제 실점은 15점이 된다.

그래, 나는 6이닝 동안 무려 15점을 실점한 것이다.

그러나 다들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오히려 넌 지금 타이밍에 잘 던지면 안 돼.

정규 시즌에 잘해야지. 아니면 포스트 시즌이나.

따악―!

하지만 정규 시즌에 돌입하고, 또 4월에 돌입해도. 그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

7경기 5.1이닝 25.3. 연습 경기와 시범 경기 때와 똑같은 실점이었지만 적어진 이닝은 평균 자책점을 오히려 상승시켜버리고 말았다.

왜지.

“고생했다.”

“…죄송합니다.”

고생했다며 등을 툭툭 쳐주시는 투수 코치님의 위로는 2016시즌 후반기까지의 나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 * *

“…왜지?”

괜찮아, 맞으려면 지금 맞아야지.

그런 위로 속에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게 정규 시즌에 와서도 계속되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은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자기합리화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4월 말 현재까지, 원하 챌린저스는 14번을 이기는 동안 단 일곱 번만 패배하며 리그 순위 2위를 순항하고 있다.

위의 상수 타이거즈는 15승 7패, 아래 동성 호넷츠는 13승 8패.

내가 등판한 경기는 모두 졌고 내가 등판하지 않은 경기는 모두 이겼다.

팀의 주장이고 나발이고, 한 사람의 야구 선수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는 상황의 연속.

1이닝 무실점하세요.

더블 플레이를 기록하세요.

아웃 카운트를 잡으세요.

어느 선수에게 삼진을 잡으세요.

당연히 지금까지 등장했던 퀘스트는 모조리 실패했다.

때문에 이렇다 할 성장조차 하지 못하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딱 중간에 낑겨버린 꼬라지가 된 것이다.

미치겠네.

“한울아, 7회 나가자.”

“예.”

6회 말 수비가 진행 중인 현재, 전광판에서 윗줄을 차지하고 있는 팀은 3점을 얻었고 아래에 있는 팀은 7점을 얻었다.

추격조.

팀 수준이 아닌 리그 전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불펜 투수는 한순간에 2년 반 전의 모습으로 회귀해 버렸다.

직구의 구속은 140km 언저리를 계속 기록하고 있다. 변화구의 각도 또한 이전과 다를 바가 없으며 핀포인트 커맨트는 아직도 건재하다.

분명 쩌리 시절 때보다 월등히 상향 평준화가 된 피지컬임에도 성적만 본다면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 안 좋아진 꼴이 됐다.

뻥!

“아이, 뽈 조아아!”

현재 상황을 아주 잘 아는 최측근, 건영이는 평소보다 더욱 크게 괴성을 지르며 내 사기를 북돋웠다.

뻥!

여전히 빵빵 터지는 포수의 미트.

딱―!

와아아!!

여전히 빵빵 터지는 내 멘탈.

작년 타율 2할 3푼에 머물렀던 비스코 러너즈의 김영철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내려왔다.

투아웃을 잘 잡아놓고도, 투스트라이크까지 잘 잡아놓고도 몸쪽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공은 어느새 담장 밖에서 뵙고 있었다.

X이발, 하하.

지금 상황에서 내가 뱉을 수 있는 건 자조가 잔뜩 버무려진 욕설뿐이었다.

화가 나는 건 물론이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반농반진으로 주변에서 빨리 투수 코치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내가 생각 없이 툭툭 내뱉은 말들이 그들 입장에선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됐었으니까.

그럼 나는? 나는 누가 도와주지?

“혁준아.”

“예… 형.”

“나 어떡하지.”

“어… 저는 잘…….”

혁준이도,

“지호야. 너가 봤을 때 나 지금 왜 이런 거 같냐.”

“그, 글쎄요?”

지호도,

“나도 1루 쪽 밟고 던져볼까?”

“갑자기요?”

“커뮤니티에서 그러던데.”

“아…….”

준혁이도,

“야. 니가 말 좀 해봐. 내가 어떡하면 되겠냐.”

“선배님은 잘 이겨내실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겨내겠냐고.”

“전 선배님을 믿습니다.”

“아니이!”

“…선배님은 최고십니다.”

현진이도,

“형. 나 어떡하면 좋을까.”

“이참에 투수 코치로 전업하는 게 어때.”

“X발!”

규진이 형도,

“아예 언더로 던져볼까요.”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투수 코치님도,

“어, 한울아.”

“저 잠깐 2군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왜?”

“저 성적이…….”

“아냐. 주장 역할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너 역할 잘하고 있어.”

심지어는 감독님까지도,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대단히 막막했다.

빵!

“…아.”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멍때리고 있다가 뒤 차가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한숨을 쉬며 액셀을 천천히 밟았다.

뽑은 지 1년을 살짝 넘긴 차는 아직도 쌩쌩하게, 새 차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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