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79화 (79/190)

79화. 전력 분석실

김한울은 과연 KBO보다 상위 리그에서 통할까?

2017시즌이 끝나고 2018시즌이 시작될 시기, 야구팬들에게 던져진 새로운 논쟁거리였다.

대성공까지는 어렵다 하더라도 나름 쏠쏠한 활약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쏠쏠하기는 무슨, 가봐야 거기 스캠에서 바로 입구컷 당하지.

두 가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에 대한 해답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직접적으로 해외 리그에 진출을 하는 것. 아니면 그와 비슷한 대회에 출전하는 것.

나이가 나이이기에, 이제 와서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에 전자는 패스.

실질적으로 매우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후자.

마침 시기도 좋았다. 새로 돌입하게 되는 2019시즌 종료 후, 시즌 종료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국제 대회가 있었다.

바로 프리미어12.

당연히 사람들은 조금씩, 시즌 종료 후의 김한울을 기대했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보란 듯이 대활약을 해줄 것을 바라든, 아니면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을 바라든.

관성.

2년 연속 리그 최고의 불펜 투수라는 관성은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히, 2019시즌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악―!

그 당사자조차도.

5.1이닝 동안 평균 자책점 25.3.

이 충격적인 기록은 일단 10점대 초중반이라는 지점까지 많이 갉아먹혔다.

그래도 심하다.

아무리 극초반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13.9라는 평균 자책점의 의미는 ‘나올 때마다 처맞는 투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원하 챌린저스라는 팀을 너끈히 4강을 바라볼 수 있는 팀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수가 꽤나 많아졌다.

그들은 시즌 초보다는 시즌 후반, 혹은 시즌 종료 직후의 무대를 위한 체력 안배라고 자위했다.

미치겠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포스트 시즌 진출이고 자시고, 당장 최소한의 성적을 내야 올라갈 수 있는 무대다. 이겨야 한다.

나는 승리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선수로 전락했다.

팀 내의 위상은 단번의 수직낙하. 유니폼 앞자락에 박혀있는 캡틴 패치가 이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스투―뢐!”

8 대 2로 크게 앞서고 있는 9회 초. 그래, 결국 나는 가비지 이닝이나 허겁지겁 처먹어야 하는 투수다.

선두 타자에겐 시원하게 2루타 하나를 얻어맞고 시작했다.

괜찮아, 오늘은 느낌이 나쁘지 않다.

“스투―뢐, 투!”

조상욱의 몸쪽에 직구를 하나 집어넣으며 초구를 잡고 느릿한 커브로 카운트를 하나 더 잡았다.

3구째를 던지기 전, 2루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명승주와 눈이 마주쳤다.

“볼!”

2루를 향하고 있는 고개를 최대한 유지했다. 던지기 직전, 왼발이 땅에 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홈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조금 더 빨리 돌아봤어야 했나, 시선 처리의 실패는 바깥으로 크게 빠지는 볼로 보상받았다.

맞자. 차라리 맞자.

큰 점수 차, 얼마 남지 않은 이닝에서 질질 끌어봐야 나에게도, 팀에게도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점수 줘도 된다. 빠르게 빠르게 경기를 끝내자.

딱―

“아웃!”

그냥 치라고 몸쪽 높은 곳으로 직구를 던졌다.

나름 잘 맞은 타구긴 하지만 성훈이 형의 글러브 속으로 쏙 들어가며 급한 불 하나를 꺼뜨릴 수 있었다.

“좋아, 나이스볼.”

천천히 다가와 공을 건네는 이의 표정엔 불편한 감정이 다분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시기상으로 보자면 딱 주장이라는 두 글자가 나에게 넘어오자마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전혀 성훈 선배의 탓이 아닌데, 나 또한 그 누군가의 탓을 생각은 전혀 없는데.

내 성적이 박살 난 이후 성훈 선배와는 괜히 어딘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다음으로 만나게 된 대타 박성민. 생소한 이름, 그리고 앳돼 보이는 얼굴은 본인이 이 살벌한 야구판에 발을 담근 지 얼마 안 된 애송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내 아무리 박살이 났다 한들, 이런 녀석한테까지 맞으면 안 되지.

몸쪽이 약한지, 바깥쪽이 약한지.

높은 곳이 약한지, 낮은 곳이 약한지.

직구에 강한지 변화구에 강한지.

이렇다 할 정보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 신인급의 타자.

감.

감을 믿어보기로 하자.

두 손가락을 펴고 모자를 가리킨 뒤 글러브를 가리켰다. 규학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을 깜빡거렸다. 세 번의 점멸 이후 다시 2루의 명승주를 노려보았다.

붕!

“스윙―”

패기가, 혹은 탐욕이 가득한 스윙.

높은 스트라이크존에 형성된 직구에 딸려 나오듯 휘두른 스윙을 보고 이번 대결에서 잡을 컨셉을 정했다.

쪼금만 더 높은 곳에 던져보자.

붕!

“스윙!”

또 어이없이 딸려 나오는 배트. 이후 스플리터를 던질 건데, 규학이가 잘 막아주겠지.

투닥―

“볼.”

아.

잘 떨어진 스플리터였는데. 한 번 움찔하기만 하고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불편함에 반구를 신경질적으로 받아내고 플레이트를 착착 후벼 팠다.

규학이가 자기 왼편을 흘끔 쳐다보더니 다시 손가락을 점멸시켰다. 요구한 사인은 또 한 번의 높은 직구.

나와줄지 의문이 들면서도 이미 두 손은 한곳에 모였다. 이번엔 2루 주자를 의도적으로 신경 쓰지 않고 던졌다.

부웅―!

“스윙, 아웃!”

삼진은 삼진이고, 주자는 주자.

딴에 역의 역의 역을 노려서 주자를 확인하지 않고 던졌기에 투구 직후의 주자 상황을 확인했다.

이는 내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다행히 역의 역의 역을 노린 것이 성공했다. 명승주를 2루에 그대로 둔 채 9번 타자와 상대하게 됐다.

작년 플레이오프에서 나에게 홈런을 쳐냈던 김석호.

그 홈런 이후 나에 대한 자신감이 부쩍 늘었는지, 아니면 요즘 뚜까뚜까 얻어맞는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지.

“볼!”

불편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바깥쪽에 흐르는 체인지업을 골라냈다.

어디, 더 해보라는 듯 배트를 흔들거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아니꼽다.

특성아, 일 안 하냐.

빵!

“스투―뢐!”

이번엔 넣어보자.

바깥쪽 꽉 찬 직구. 이게 들어갔다고? 하는 표정은 특성이 다시 일을 하는 증거로 보였다.

다음은 초구보다는 조금 더 안쪽에 도착하는 체인지업.

2루 주자를 체크하고 공을 던져보니,

띡!

하는 요상한 소릴 내며 1루수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기범이가 편하게 잡아 직접 1루를 밟으며 9회 초 종료, 덤으로 경기도 승리로 종료.

띠링―!

[명예 회복]

-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싱커 +2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62

커브 ― 55

슬라 ― 43

스플 ― 44

체인 ― 51

싱커 ― 49+2=51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무려, 무려 시즌 14번째 등판 만의 무실점 등판을 기록해 냈다.

와, 기쁘다! 와 내가 돌아왔다!

평소처럼 쌰아아아!! 하며 소리도 치고 싶고, 힘차게 하이파이브도 나누고 싶고, 하고 싶은 세리머니가 참 많았지만 머리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1루 측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 오늘 하루의 필수 일과가 끝이 난다.

“야, 한잔하러 갈래?”

“너네끼리 가. 따로 좀 갈 데가 있어서.”

“어딜 가는데. 여자 만나러 가냐?”

“아니. 전력 분석실.”

“아.”

경기가 끝나고 나에게 술을 권했던 승주는 내가 갈 곳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툭툭,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얄밉게 웃었다.

“새끼. 잘 좀 던져봐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다른 녀석이 이딴 모습을 보였다면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나갔겠지만, 승주가 하니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랄하지 말고, 너나 삼진 좀 그만 처먹어.”

“와, 말넘심.”

정겹게 내일을 약속하고 승주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구장 어느 곳에 위치한 전력 분석실에 도착했다.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한 손에 쥐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굵디굵은 목소리로 허락을 받고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온갖 서류, 혹은 종이들.

거기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니터가 네 개 정도 보였다.

네 개의 화면은 모두 내가 투구하는 모습을 재생하고 있었지만 모두 다른 각도에서 촬영된 영상이었다.

“윤성 씨.”

“아, 오셨네요.”

“이거 하나 드시고.”

“어우, 감사합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오는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던 건 후덕하다 못해 거대한 체구를 가진 남성이었다.

흔하게 들을 수 없는 굵직한 목소리는 공짜 커피에 약간 귀여워졌다.

“어때요?”

일단 표면적인 부분에서의 차이는 딱히 없었다. 구속도 큰 차이는 없고 제구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성적에선 아주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문제는 아닐까.

디테일.

내가 눈을 돌린 것은 전문적인 측정 장비에 의해서나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익스텐션의 위치라든가, 타점의 높이라든가, 공의 회전수라든가.

“아… 이게요.”

윤성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자료상으로 나오기로는 크게 차이가 없어요.”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게, 차이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아주 작은 차이가 큰 결과로 이어진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여기선 통용이 안 돼요.”

“왜요?”

“요청하신 수치들이 모두 안 좋아졌다면 일리는 있는 말이에요. 저도 차곡차곡 모인 안 좋은 요소는 언젠가 빵 터질 거라 생각하니까요.”

그게 제 일인데요.

받은 캔커피의 뚜껑을 따고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한 번 꼴깍, 했을 뿐인데. 어느새 캔은 찌그러져 분리수거통에 들어갔다.

“근데 진짜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어요. 오히려 예전보다 아주 조금이나마 좋아진 것도 있으니까요.”

“그럼… 뭐 어딘가 폼이 저도 모르게 좀 막… 이상해졌다? 하는 부분은요?”

“저 한울 씨 비디오만 지금 이틀째 보고 있거든요. 없어요. 진짜.”

그럼 대체 왜.

“저도 생각을 좀 해보긴 해봤는데요, 한울 씨. 몇 가지 가설이 떠오르긴 해요.”

“…말씀해 주세요.”

“일단… 평범해졌다, 라는 부분.”

“평범?”

“이전엔 한울 씨가 공이 느려서 통했던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145, 150보다가 130, 135보면 어지간히 느리잖아요. 한울 씨도 그 부분을 의식한 것도 분명 있을 테고.”

“그렇기야 하죠…….”

“근데 직구 평균이 요즘엔 140 정도예요. 딱, 평균 구속 정도. 직구 구위가 구속에 비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밥 벌어먹고 살 정도인 변화구라도 하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원샷 해버린 커피가 아쉬운지 슬쩍 쓰레기통을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특출난 제구랑 다양한 변화구 외의 특이점이 오히려 사라져버린 투수가 됐다, 라는 게 첫 번째 가설.”

그럴듯하긴 한데…….

“근데 이건 딱히. 이 이야기가 맞다면, 작년 말 한울 씨가 그렇게 날아다녔던 게 설명이 안 되거든요.”

“그럼… 타 팀들이 나한테 당한 분을 풀기 위해서 나를 엄청 분석했을 확률은요?”

“말해 놓고도 어이없으시죠?”

“그냥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죠.”

힝.

“두 번째는 볼 배합. 한울 씨 구종 비율을 보면 대략 절반은 직구, 또 나머지 비율을 변화구들을 모두 같은 비율로 던져요. 이런 투수의 경우는 정말 패턴이 중요한데, 이게 어느 정도 읽혔다.”

“패턴? 내가 무의식적으로 패턴이 고착됐나…….”

“근데 이건 딱히, 가능성은 적다고 봐요. 한울 씨가 던지는 투구 표 보면, 진짜로 패턴이 없어요. 오히려 전 세 번째 가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거든요?”

“뭐죠?”

“운, 운이요.”

“운?”

“그냥 단순히, 운이 없었다. 정말 운이 없게도, 그런 상황이 계속됐다.”

운.

완벽한 볼 배합으로 허를 찔렀음에도, 그 타자 열 번 중에 한 번 생각했던 꼴로 그곳을 대처했다면 그것은 운이다.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계속된다면, 그것도 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운일 수는 있겠는데. 근데 그렇게 넘기기엔 좀…….”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데.

운일 수도 있다. 아니, 아마 정말 지독한 악운의 연속일 뿐일 거다.

기껏해 봐야 올 한 해다. 암흑이 도래하는 시기는 길어봐야 내년까지 미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이걸 이대로 인정해 버리기엔 내 괜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통과도 같은 시간이 허무해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이곳에서 그대로 안주해 버릴 것 같다. 단순 운이 안 좋아서라면 ‘내’ 문제는 아닌 셈이 되어버리니까.

야구 선수로서의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속한 팀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많다. 나는 발전해야 한다.

“일단 고마워요. 일단 매카닉적인 부분에서의 문제는 없다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세이버 측면으로 봤을 때, 지금 한울 씨 피안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요.”

이것도 드실래요?

오, 감사합니다.

계속 아쉬워하길래 내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넘겼다.

“한울 씨는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캔을 따는 모습은 묘하게 안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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