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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81화 (81/190)

81화. 집중력

뻥!

“하이잌!”

시작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윽박질렀다. 지금의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초석, 혹은 도박수.

꽉 차게도 아니고 정중앙도 아닌 그 어딘가를 지나가는 공이었다.

배트를 내볼 생각이었다면 타격 자체는 충분히 가능할 로케이션이었지만, 딱히 칠 생각은 없었는지 강대현은 멀뚱히 제 앞을 지나가는 직구를 구경했다.

파닥파닥, 빨간 글러브를 열었다 닫으며 빨리 공을 달라 재촉했다. 촥! 소리가 나도록 받고 마운드로 돌아가며 전광판을 확인했다.

143km.

현재의 몸 상태를 생각해 엄청난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구속이 찍혔다.

이제 130km대따리의 느린 직구는 더 이상 없다. 점점, 조금씩 빨라질 것이다.

뻥!

직구 하나 더!

여기서부턴 다시 집중이 필요했다. 멀뚱히 지켜봤다는 것은 내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고, 강대현의 머릿속에서도 많은 계산이 오갔을 테니까.

초구보다는 조금 더 제구에 신경 써서 던진 직구. 정확하게 원하던 곳으로 향했다.

타자에겐 한참 멀어 보일 곳이지만 구심은 직전의 공과 같은 자세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흘끔, 전광판 한구석을 본 순간 다음 투구에 대한 갈피가 잡혔다. 규학이의 사인이 나오기 전에 먼저 네 개의 손가락을 펴서 내 의견을 피력했다.

된다.

지금이라면, 지금의 집중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직구의 그립이 거침없이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쓸데없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어느 순간, 정지했을 때의 모습은 처음의 모습과 같았다.

후우…….

왼 다리를 빼고 양손을 머리 뒤로. 지금의 집중력은 아주 좋다. 오른발 아래에 있는 모래알의 개수가 몇 개인지, 세보라면 세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포수를 향하던 오른발의 앞코가 휙 돌아갔다. 연쇄 작용에 따라 왼무릎이 힘차게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고된 트레이닝으로 인해 힘이 잔뜩 빠졌을 허벅지일 텐데, 강한 힘이 느껴졌다. 거부하지 않고 있는 힘껏 플레이트를 밀어냈다.

뻥!

“스윙, 아웃!”

스트라이크존의 약간 위를 벗어나는 직구에 깔쌈한 헛스윙 삼진. 저절로 내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제 고작 한 타자를 잡았을 뿐인데, 갈 길이 아직 한참 먼데도 전광판에 찍힌 146km를 보고 있자면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던져서 126km가 나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새로이 느껴지는 감회였다. 하얗게 분칠한 손가락으로 코 밑을 슥슥 문지르며 뿌…….

“엣, 퉤퉤, 퉷.”

…듯했다.

다음 타자로는 올 시즌이 끝나고 은퇴가 예약되어 있는 홍석진.

38세라는 다른 레전드급 선수들보다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는데, 그 이유가 참 재밌었다.

팡!

“보올―”

공이 잘 안 보여요.

KBO리그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선구안을 가진 타자.

그 선구안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온 노장 타자.

그는 딱 여기까지가 본인의 한계임을, 아니면 이미 본인이 한계점을 넘은 선수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스윙―”

그렇다면 써먹어 드려야지.

느린 커브가 낮았다는 판정을 받고 던진 직구에 헛스윙.

“스윙!”

한 번 더 던진, 거의 비슷한 직구에 또 한 번 헛스윙. 좋은 카운트를 만들었으니 이제는 결정구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한 번 더 직구를 던지면 좋은 결과를 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애절하게 체인지업을 원하는 포수의 눈망울을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급박하게 달라진 환경에 혼란스러워하는 타자라면 저절로 끌려 나올 거라 생각한 결론, 그 결론에 일단 맞춰주기로 했다.

직구 그립을 살살 돌리다가 슬쩍, 공을 잡을 두 개의 손가락이 교체되었다. 본래의 자리에서 쫓겨난 손가락은 옆에 서서 중지와 약지가 하려는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는 좌타자의 바깥쪽 낮은 지역. 때리는 게 아니라 밀어 던지는 투구로 인한 난이도 상승에도 지금의 집중력은 완벽한 제구를 만들어냈다.

팡!

근데, 앞서 홍석진이 이야기한 은퇴 이유가 웃기다고 했지. 공이 잘 안 보인다는 그 말이 웃기다고.

“볼―”

여전히 이렇게 잘 골라내는데.

직구의 위력이 상승한 지금이라면 체인지업이라는 구종의 위력 또한 자연스럽게 반사 이익을 보게 된다.

다른 타자라면 어, 어어?! 하며 끌려 나올 배트의 대가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엔 직구라니까.

피지컬이 정상이 아님을 본인부터가 인정하는 타자에게 굳이 에둘러서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있는 힘껏, 넌 절대 이 공 못 친다는 자신감 하나. 그거 하나만 있다면 충분히,

“스윙, 아웃!”

잡아낼 수 있다.

첫 타자를 잡아내며 부활의 신호탄을 준비했고, 두 번째 타자를 잡아내며 장전을 완료했다. 이젠 발사만 하면 되는데,

4번 타자, 박해진.

무감정한 장내 아나운서의 알림은 신호탄의 총구를 쑤셔 막는 물방울과 같았다.

꿀꺽, 하고 침이 절로 넘어갔다. 고작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걸로 박해진을 이겨낼 수 있을까.

퀘스트고 나발이고, 난 하늘 높이 빨간 신호탄을 쏘아낼 수 있을까.

결정구는 직구.

직구를 메인으로 두는 컨셉 자체는 여전하지만, 직구를 가운데로 두는 패턴 자체에선 살짝 비껴 섰다.

메인은 메인이되, 직구는 가능한 아낀다.

박해진의 타격자세는 언제나와 같이 평범했다. 적당히 벌린 다리, 적당한 높이로 올린 손뭉치, 적당히 흔들거리는 배트.

무심하게 투수를 쳐다보는 눈빛도, 함부로 힌트를 내놓지 않겠다는 듯 꾹 다문 입 또한, 언제나와 같았다.

“하이잌―!”

초구는 바깥쪽, 던져놓고도 조마조마하게 느꼈던 커브. 좌우보다는 상하 때문에 긴장했던 마음은 미트의 움직임을 보고 가라앉았다.

“볼―”

“볼!”

이후 슬라이더와 스플리터를 던졌지만 모두 골라냈다.

특히 스플리터 같은 경우는 회심의 일격 같은 느낌으로 존에 걸쳐보려 한 공이어서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2-1.

다른 타자여도 불리한 카운트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박해진을 상대로 이 카운트에서 벗어나야 한다.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다른 변화구를 던져도 어차피 직전과 비슷할 것 같다.

…직구 던지자.

마음을 정했지만 내 쪽에서 사인을 보내지는 않았다. 규학이 쪽에서 직구 사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고개를 젓는 횟수가 다섯 번을 넘기자 숨을 돌리기 위해 플레이트에서 발을 뺐다.

잠시 일시 정지된 상황, 덕분에 심호흡이 가능해졌다. 과하게 집중 받으며 통증을 느끼던 머리가 서늘함을 느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던 중 내 정면에 있던 성훈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끄덕.

저 끄덕임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의미?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의미?

나는 모르겠다는 의미?

가볍게 웃으며 다시 플레이트를 밟자 이번엔 처음부터 직구를 요구하는 사인이 튀어나왔다.

만족해하며 다시 와인드업.

제구는 갖다 버릴 테다. 오로지 힘, 쥐어짜고 쥐어짜서 잡자. 지금의 나는 그걸로도 부족한 쩌리다.

“끄…악!”

손끝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자연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숙여진 시야의 윗부분에서 공은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었다. 예상 도착 지역은 스트라이크존의 윗부분.

따악―!!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멀리 마중을 나와서 때려내는 배트.

관성 때문에 앞으로 흘러내린 오른발을 그대로 놔두었다. 덕분에 몸이 빠르게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었다.

높게, 그리고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의 예상 낙구 지점을 향해 진형이가 열심히 뛰고 있었다.

100m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타다다닥, 열심히 담장을 향해 달리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달리고 달렸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중견수는 담장에 등을 붙였다.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공을 쫓는 두 눈동자엔 총기가 가득했다.

몸을 살짝 돌려 오른쪽 어깨를 담장에 붙이고, 왼팔을 최대한 높이 들어 올렸다.

약하게 살짝, 톡! 뛰어오르자 중력을 거스를 힘을 잃은 공이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쌰아아아악!!”

저절로 양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집중력]

- 집중하는 투구로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슬라이더 +2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67

커브 ― 55

슬라 ― 43+2=45

스플 ― 44

체인 ― 51

싱커 ― 51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퀘스트를 성공했다, 오랜만에 깔끔하게 이닝을 마쳤다, 홀드를 챙겼다.

지금의 나에겐 전부 부질없게 느껴지는 단어들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일방적으로 얻어맞아 왔던 세월이 어언 7년.

박해진에게 통산 처음으로, 아웃카운트라는 것을 잡아냈다.

남들이 본다면 흔히 있을 시합 중 한 게임이고, 흔하게 잡아낸 아웃카운트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에겐 지금까지 잡아냈던 수천 개의 아웃카운트 중 가장 값진 아웃이었다.

8회 초 종료. 빠르게 감정을 식히고 우리 덕아웃으로 향해 갔다.

기뻐하던 녀석들과 눈을 맞추다 앞을 바라보니, 타격 후 1루를 살짝 지났던 박해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스볼입니다.”

“…….”

녀석은 나를 스쳐서 3루 쪽 덕아웃으로 향했다.

멍청하게,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녀석이 제 덕아웃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 * *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다, 라는 흔한 관용어구.

문학의 ‘문’ 자도 모르는 내가 등판 중에서 무심코 떠올릴 만큼 흔한 단어다. 아무렴 나도 이러한데, 글로 먹고사는 이들 중 하나인 기자들은 어떠하겠나.

김한울, 부활의 신호탄 쏘아 올리나, 뭐 대충 이런 류. 거기서 단어들만 살짝살짝 바꿔가며 비슷한 이야기를 퍼 날랐다.

기대.

비슷한 단어들의 연속은 당연히 어떠한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 기사를 쓴 기자들은 조회 수를, 그 조회 수를 올려주는 원하의 팬들은 나의 부활을.

“스트뢐, 아웃!”

그날을 포함하여, 일주일 동안 4경기 등판하여 4이닝 무실점이라는 성적.

“아이고야…….”

이닝을 쉽게 끝내고 모자를 벗으며 불펜 안으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니 오늘 선발이었던 혁준이가 다가왔다.

“아이고, 형님.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어흐, 혁준이가 안마를 꽤나 잘하는구나.”

거들먹거리며 금일 선발 투수의 수발을 거부하지 않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을 위해 더더욱 노력하는 황혁준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컨셉질을 하며 놀고 있었다.

“김한울 봐라, 진짜 부조리 그 자체네. 스캠 때 하던 얘기가 진짜였냐.”

“형 뭐라고? 형 승 날리고 싶다고?”

“아니…….”

“형 내일 등판이지? 나 아마 내일도 올라가지 않을까?”

“…….”

잠시 고민하던 규진이 형이 다가와 내 왼쪽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그치그치, 거기. 거기를 주무르므아아각!!”

“김한울 불펜 투수님, 항상 감사합니다.”

“형! 형! 아, 아 형!!”

연약한 어깨가 박살 나기 직전에서야 불 속성 가득한 안마가 끝이 났다.

통증 좀 떼보려다 더한 통증을 받고 나오는 으어어어 소리가 불펜 모든 이들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아하학!

형님, 저도 안마해 드릴까요?

꺼져!

막간을 이용한 막장 꽁트를 관람한 이들은 낄낄거리며 박수 치는 것으로 관람료를 대신했다.

이번 시즌에 들어 좋은 흐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기에 가능한 분위기.

모두 즐겁게 웃고 떠들며 팀 메이트들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대부분 좋은 쪽의 예상이었고, 또 대부분의 배팅이 맞아떨어졌다.

딱―

“갔다아악!!”

“규학이가 웬일이냐!!”

리그 2위.

상수 타이거즈의 이름이 리그 순위에서 가장 윗부분에 있는 게 당연한 이치라면, 우리 팀의 이름이 그 바로 밑에 있는 것은 이변이었다.

4위, 3위, 그리고 한 시즌에 한 계단씩 올라가는 모습은 분명 호재였다.

만년 콩라인이었던 동성 호넷츠를 한 계단 아래로 끄집어내리고 우리가 누르고 있는 이 자리는 웬만하면 뺏길래야 뺏길 수가 없었다.

우리 팀, 원하 챌린저스의 강점이 무엇이고 약점이 무엇이던가.

분명하게 대비되는 두 요소 중 전자는 여전히 강점에 속하면서도 후자에 속하던 몇몇은 자리를 이탈했다.

스캠에서 10승 못 하면 가만 안 둘 거라며 첫 부조리를 겨눴던 태웅이의 성장, 드디어 타격에서 눈을 뜬 듯 1인분의 타격감을 유지하는 규학이.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우리 팀은 평범한 강팀의 한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따악―

“돌아, 돌아아!!”

“돌아라 돌아이야아악!!”

평범한 강팀은 빠르게, 7월을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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