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82화 (82/190)

82화. 말세

원하 챌린저스라는 팀은 가만 보자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이 멤버들로 이것밖에 못 이기지?

이 멤버들로 이렇게까지 이기지?

두 가지 상반되는 질문을 동시에 던질 수가 있는 팀이니까.

전자는 주전 멤버들에 대한 찬사였고, 후자는 백업 멤버들에 대한 혹평이었다.

하지만 혹평이 있다 해도, 찬사가 가득한 라인업은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약 65경기를 달린 2019시즌, 원하는 38승 1무 26패의 승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무려 6할에 가까운 팀 승률.

주간, 혹은 월간이 아니라 시즌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높은 승률을 기록했던 가장 최근이 언제일까?

까마득한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올해의 원하 챌린저스는 되는 해다, 그런 것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띠링―!

[파죽지세!]

- 2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스플리터 +3

한성 위너스의 집 안으로 쳐들어와 승리를 갈취하려고 하는 날, 등판하여 전광판을 살피니 미션이 들어왔다.

스플리터.

생각해 보면 퀘스트 보상으로 스플리터가 떴을 때 성공을 했던 기억이 많이 없는데.

쎄한 느낌을 안고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빵!

“스트라이크으―”

다소 힘이 빠지는 목소리의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냈다.

상대하는 타자는 작년, 중요한 순간 중 한 장면에서 솔로 홈런을 뺏어갔던 정성훈.

다른 건 몰라도 몸쪽 커브만큼은 절대 던지지 말자.

“스트라이크으―”

바깥쪽 직구로 카운트를 잡은 뒤 던진 체인지업을 골라내며 1-1, 이후 초구와 같은 투구로 몰아세우는 카운트를 완성했다.

바깥쪽으로 가자.

흘끔, 한껏 1루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성문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내 고개가 돌아갔던 의도를 파악한 규학이는 익숙하게 싱커 사인을 냈고,

띡―!

“1루우―!”

“여유 많다, 천천히―”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냈다.

내야수들끼리 라운딩하는 동안 로진을 보충해 주고 후! 손에 입바람을 불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내 얼굴로 향하는 공을 받았다.

다시 플레이트를 밟고 아직은 생경한 타자와 눈이 마주쳤다.

곽충환.

등판에 써 있는 이름이 내 쪽에 훤히 보일 정도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타자는 작년을 기점으로 은퇴한 이재명 다음 세대의 안방마님이었다.

나이는 대략 27살 정도. 구른 짬 자체는 꽤 있다 평가할 수 있지만 이재명이 40살을 먹을 때까지 자리를 뺏지 못했다는 점.

“스위잉―”

그리고 8번을 치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를 조합하자면,

“스트라이크, 아우웃―”

타격으로선 기대치가 아주 낮은 선수라는 점.

타자가 가지고 있던 기대치만큼의 결과물이 나왔다.

다음으로 맞이한 이경준 또한, 단 두 번의 투구 동작만으로 내게 되돌아온 타구를 쉽게 처리하며 아웃카운트는 3아웃.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글러브를 벗어다 옆에 앉혀두는 건 평소와 같았지만 후덥지근하게 땀을 흘리면서도 오른쪽 어깨에 재킷을 걸치는 건 평소와 달랐다.

멀티 이닝.

등판 전, 수뇌부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타임 테이블을 요청했다. 7회와 8회, 두 번의 이닝을 막아달라는 요구.

믿을 만한 불펜인 은구 선배와 지호의 최근 등판일지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었다.

“어흐…….”

괜한 소음을 내며 덕아웃을 둘러봤다.

후배 투수들은 선배 투수들에게 달라붙어 온갖 팁을 강요하고 있었다. 선배 타자들은 후배 타자들에게 달라붙어 온갖 팁을 강매하고 있었다.

좋네.

모든 것이 맘에 들었다. 완전히 정상 궤도에 오른 내 컨디션도, 완전히 흐름을 탄 팀의 분위기도, 한 점 차였던 경기를 두 점 차로 늘리고 나서 종료된 8회 초도.

망설임 없이 재킷을 벗어내고 마운드로 향했다.

플레이!

송인호가 좌타석에 들어섰다. 모자를 벗어 흐르는 땀을 소맷단으로 닦아내고 투구할 준비를 마쳤다.

“스트라이크으―”

아, 저 콜 좀 어떻게 안 되나.

맥 빠지는 콜을 들으며 공을 던지자니 영, 맛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타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띡―

탁!

연속으로 좌타석에서 만난 송인호와 김영국을 비슷하게 2루수 앞 땅볼로 허무하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장내에 울려 퍼지는…….

3번 타자, 이!! 용!! 호!!

아직도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는 등장. 내야에서 오간 공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홈플레이트를 향하지 않고 전광판을 향했다.

0.323/0.382/0.456 16홈런 47타점.

내가 알던 그 이용호 맞냐. 진짜 세상 말세네.

작년 벤치클리어링 이후, 이런 표현을 쓰는 입장에서도 오글거리지만, 이용호는 무슨 각성이라도 했는지 성적을 갑작스레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

선배가 선배 같아야 선배지.

무심코 내뱉은 말의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러올 줄이야.

홈플레이트를 바라보는 척, 하면서 타자의 시선을 살폈다. 예전과 같은 거만함의 색은 많이 옅어졌다. 비게 된 자리를 대신하는 건 독기.

특히나 날 상대할 땐 독기의 퍼센티지가 훨씬 상승했다.

본인에게 굴욕을 주었던 나를 깔아뭉개보겠다, 뭐 그런 거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우웃…”

어림도 없지.

띠링―!

[파죽지세!]

- 2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스플리터 +3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67

커브 ― 55

슬라 ― 45

스플 ― 44+3=47

체인 ― 51

싱커 ― 51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의 뒤편에서 X발! 하고 소리치는 외침이 들리긴 했지만 딱히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길들이기.

한 번 잘못 길들이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가 대단히 어려운 글러브처럼, 천적 관계라는 것도 비슷했다.

이미지라는 게 박혀버리니까.

아무리 상승했다고 한들, 각성했다고 한들. 이용호가 나온다면 난 언제든지 땡큐다.

* * *

- 에엥… 아쉬워서 어떡해요…….

“어쩌긴요, 거하게 삽질한 제 잘못인데요, 뭐.”

- 그래도, 한울 씨 최근엔 진짜 잘하고 있는데…….

프로 야구계에 있어 7월은 항상 큰 의미가 담겨있다.

정규 시즌의 중간을 담당하기도 하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며 선수들 입장에선 본격적인 체력 싸움이 시작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요소라고 하면 단연 올스타전이 아닐까.

프로 선수라면 누구나가 떠올리고, 또 가고 싶어 하는 무대. 난 작년까지 2년 연속으로 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만약 올스타전이 단순한 인기 투표였다면, 올해의 나 또한 그 땅을 밟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년 연속으로 보여버린 높은 경기력에 매료된 야구 팬들은 올스타전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올스타, 그 세 글자의 의미는 단순히 잘생기고 인기 많은 선수들이라면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게 되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푹 쉬면 되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면 좋긴 하네요.

“체력 안배해야죠. 민영 씨도 아시잖아요. 올해는 진짜로, 정규 시즌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그쵸. 포스트 시즌! 한국 시리즈!

그런 의미에서, 시즌 초반부터 거하게 삽질을 시전한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 근데 감독 추천받으시면 어떡하시게요?

“사양해야죠. 올해는 진짜 쉬려구요.”

- 잘 생각하셨어요!

올스타전 전후로 며칠을 포함한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진정한 의미의 올스타 브레이크를 맛볼 예정이다.

대전의 밤하늘은 어딘가, 서울의 밤하늘보다는 맑아 보였다.

그만큼 전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민영 씨의 목소리 또한 가득 맑게 들렸다.

숙소 앞, 벤치나 의자도 아닌 인도 턱에 털썩 주저앉아 주절주절 떠들었다. 아핫핫, 웃기도 하고 아이고… 하며 탄식을 자아내기도 하고.

“네네. 그럼 올라가서 뵈어요.”

- 네, 한울 씨도 힘내세요!

마음 한편에 모닥불 하나를 피워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냐?”

“전화 좀 했지.”

한여름의 초입치고는 다소 서늘함이 느껴지는 날씨,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규진이 형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왔다.

“러닝 뛰었어?”

“어.”

규진이 형의 루틴 중 하나, 등판 전날 가벼운 러닝으로 땀을 빼는 것.

땀을 빼는 것 자체보다는, 등판 전날 개운하게 잠들기 위한 절차 중 하나였다.

“세상이 참 말세야, 그치.”

“웬.”

“이용호가 3번을 치잖아.”

“하긴.”

부조리란 부조리는 모두 당해본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한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나보다는 색이 조금 더 짙은 규진이 형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니가 맞추고 나서부터란 말이야.”

“뭐가. 이용호 성적 오른 게?”

“어.”

“그렇긴 해. 괜히 맞췄나.”

작년부터 구르기 시작한 스노우볼에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을 무렵, 규진이 형은 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근데 되게 기분 좋긴 했어.”

“뭐가.”

“그 새끼 아파하는 거.”

쌉소리를 지껄였다.

“형도 제정신은 아니야.”

“너만 하겠냐.”

“아, 극찬.”

“미친 새끼.”

킥킥대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 등판에 대한 계획서를 컨펌해 주기도 하고, 몇 번이고 나눴을 추억의 이야기를 괜히 한 번 더 꺼내보기도 하고.

“근데 누구랑 전화했었냐?”

“왜?”

그러다가 나온 민영 씨의 이야기.

“아, X발, 너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역겹게 들릴 줄은 몰랐어.”

“말이 좀 심하네.”

“눼눼, 구롬 올라가숴 뵈어요오오~”

“악! 악! X발!”

극혐에 맞극혐으로 대응하자 규진이 형은 가운뎃손가락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여자친구냐?”

“…아니. 여자친구는 아니고.”

“썸?”

“썸…일걸.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괜히 불안해서.”

“쓸데없는 걱정하네.”

“쓸데없긴. 형은? 전에 왜, 승주랑 훈이랑 했던 얘기 있었잖아.”

“아, 지은이.”

“이름이 지은이야?”

“어.”

“올… 그래서.”

“사귄 지 꽤 됐는데. 몰랐냐?”

“…….”

나쁜 사람.

“너넨 언제 사귀려고?”

“몰라… 조만간 얘기해야지, 해야지 하고는 있는데. 그게 맘처럼 잘되지는 않네.”

“왜.”

“야구 선수니까.”

“음…….”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옆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단번에 캐치해 냈다.

“미안하냐.”

“미안하지. 나도 내 딴엔 돈 벌어야 하니까,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당연한 건데. 만나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당연하겠냐는 거지.”

“그렇긴 하지. 휴식일이랍시고 있는 월요일마저도, 특별한 일 있으면 사라지니까.”

“그래서 고민이야. 그렇다고, 은퇴하고서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 50살까지 선수한다매.”

“그게 진심이라 더 고민인 거지.”

미친 새끼.

혼자서 헛웃고는 연애 선배가 조언을 던졌다.

“뭐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냐. 그냥 질러.”

“진짜 좋은 사람이니까. 막… 이상한 꼴 보기 싫어서 그러지.”

“진짜 좋은 사람이니까 더 질러야지. 야, 니가 뭐 대단한 놈이라고 간 보고 있냐. 진짜 좋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왜 널 기다려 줘야 돼?”

“그거야…….”

가장 좋아하는 팀의 일원이니까? 가장 좋아하는 선수니까?

“뺏긴다, 그러다.”

“아우, 알았어.”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에, 둘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도 다 식어 더욱 강력하게 서늘함을 느끼는 규진이 형이 아! 소릴 내며 걸음을 이었다.

“그리고 나 올해 말에 결혼한다.”

“오… 축하.”

“청첩장은 지금 알아보고 있고.”

“…잠깐, 결혼한다고?”

“뭘 들은 거야.”

“진짜로? 형 결혼한다고? 형이? 진짜로?”

“뭔데. 난 결혼하면 안 되냐?”

“아니…….”

160cm 중반따리의 키. 통통하게 젖살을 간직하고 있는 귀염상의 얼굴.

10년도 더 옛날, 고등학생 때의 얼굴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규진이 형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 속에서, 언제까지고 옆에 있는 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할 나이 됐지. 올해 끝나고 FA기도 하고. 앞에 성적들도 꽤 괜찮았고, 올해도 성적 좋고. 결혼 정도는 충분히 할 돈은 되겠지.”

“그렇…지.”

묘한 충격에 멈춘 발걸음은 당당히 숙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규진이 형의 뒷모습을 시야에 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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