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수중전
비가 우중충하게 떨어지는 저녁.
내가 익숙하게 봐왔고, 또 그렇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비’라는 존재는 분명, 쏴아아― 하고 내려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다다다닥―!!
물방울은 한 대 맞으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은 사운드를 재생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마운드를 유지하고 있는 투수가 있었으니,
“아, 나이스 피칭!”
바로 준혁이.
비가 올 것 같다, 라는 강한 외침이 있긴 했지만 경기 시작하고 당분간은 그냥 하늘의 위협 정도로만 여겼다.
4회 말, 2아웃이 잡히자마자 슬금슬금 모습을 비추던 빗방울은 5회 말을 기점으로 해서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난장판이 된 그라운드 상황을 이겨내고도 준혁이는 무려 6이닝 동안 3실점이라는, 아주아주 칭찬받아 마땅한 성적을 남기고 내려왔다.
“좀, 콜드 좀 때리지.”
“그러게요.”
“아이고, 고생했다.”
7월 한중간의 장마.
더위를 사악, 식혀줄 거라 믿었던 기대에 과하게 부응해 주는 모습이 영 언짢았다.
비가 오면 투수와 타자, 과연 어느 쪽이 조금 더 불리할까?
이에 대해선 여러 논쟁이 있다.
1mm의 어긋남조차 허용할 수 없는 예민함의 궁극, 투수가 당연히 불리하다.
‘비’라는 매개체로 인해 시야를 방해받고, 또 물리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타자가 불리하다.
똑 부러지게 명답을 내놓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 말을 들으면 그런 것 같으면서도 저 말을 들으면 또 그런 것 같으니까.
내가 투수라서 그런가, 나는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밑밥 하나라도 더 깔아둘 수 있으니까.
“한울아, 8회 올라가자.”
“어우, 네.”
솔직히, 좀 싫은데.
마음에선 온갖 불평과 불만이 차곡차곡 예금을 쌓았지만 어차피 드러내지 못할 허수였다.
덕아웃 난간에 부딪혀 튕긴 물방울과 여러 번 접촉한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아, 오일 바르기 귀찮은데.
빗물에 젖어 새빨간색에서 와인 색깔로 변질된 글러브. 그 안엔 빗물에 젖어 새하얀색에서 아이보리색으로 변질된 야구공.
왼발이 안전하게 다가서야 할 착륙 지점은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 있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어 지랄이 난 땅을 메워보려고 바로 옆의 마사토를 퍼담아 봐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촵!
“아이… 진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내 집중은 왼발 엄지에 몰려있었다.
투수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중심 이동, 포수 쪽으로 항상성을 가지고 전진하는 모멘텀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촤악―
“아잇, X팔, 진짜!”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인터벌은 지멋대로 쭉쭉 늘어나고 있었다.
“진짜, 왜 콜드 안 때리지?!”
“그러게요.”
7회 초가 끝난 시점. 점수 차가 석 점 차기는 하지만…….
우두두두두두두!!
펜스를 박살 낼 것 같은 살벌한 수분기를 보고도 뭐 느껴지는 게 없는 건가.
“스트라, 큭, 이익!”
저 봐, 콜 부르다가도 빗물에 입이 막혀서 발음조차 제대로 못 하는 꼬라지를.
일단은 계속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콜드 게임을 바라고는 있지만, 안 나오면 큰일 나니까.
머리통을 때리는 빗물의 충격에도 투구를 이었다.
“한울이, 나가자.”
“네네.”
절벅절벅―
열린 불펜의 문을 넘어 마운드로 향했다. 날카로운 날을 숨긴 스파이크를 신고 수분기가 가득한 잔디를 밟는 느낌 자체는 생각보다 좋다.
우두두두두―
공중 요격을 멈추질 않는 하늘이 거지 같아서 그렇지.
마운드에 도착했다. 물에 잔뜩 젖어 질어진 로진백을 주무르자 농축된 송진 가루액이 손가락을 적셨다.
아, 거지 같은 거.
더러워진 기분에 찰박, 소리가 나도록 땅바닥에 메다꽂은 후 플레이트를 밟았다. 글러브 손가락 끝이 주호를 향하고 있는 게 방해물 가득한 시야에 잡혔다.
퐉!
나보다 더 오랫동안 그라운드를 지키고 있었을 주호의 미트는 그만큼 빗물을 머금고 요상한 소릴 냈다. 반구를 받는 내 글러브에서도 촉! 하는 미친 소리가 났다.
다음으로 연습해 볼 구종은 슬라이더. 글러브를 왼쪽으로 까닥인 뒤 그립을 비껴 잡았다.
와인드업을 잡고 왼무릎이 올라왔다.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천천히 자유족이 착륙할 곳으로 향했다.
촤아악―
왼발이 땅에 닿는 순간 X됐다는 게 느껴졌다. 파먹힐 대로 파먹히고, 축축해질 대로 축축해진 지점에 도착한 왼발은 브레이크 페달을 떼다 팔아먹은 듯 앞으로 주우욱 미끄러졌다.
“억!”
덕분에 그대로 땅에 주저앉은 모양새가 됐다. 더러운 기분을 느끼며 땅을 짚고 일어나 진흙이 묻은 손바닥을 유니폼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띠링―!
[수중전]
- 강우를 이겨내고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슬라이더 +2
손에 묻었던 진흙이 옮겨간 오른쪽 허벅지, 딱 새로이 오염된 부분에 생성된 텍스트.
오랜만에 참 거지 같은 퀘스트구나.
“왜?”
이 꼬라지를 어떻게 이겨내나, 고민하며 다시 로진이나 바르고 있자니 주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 나오는 게 보인다.
“형,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햄스트링은요?”
“뭐… 괜찮은 거 같은데.”
비슷한 얼굴을 하고 뛰쳐나온 투수 코치님과 팀 트레이너분까지 등장.
“야,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아. 그냥 좀 미끄러졌을 뿐이니까.”
“사타구니 괜찮아요?”
“네. 일단 투구는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답답함을 가진 채 등장하는 심판까지.
“괜찮아요?”
“네네, 괜찮아요.”
“발목은? 삐지는 않았고?”
“네, 뭐…….”
참, 다칠 수 있는 부위도 여러 군데구나.
“이봐요!”
이 꼬라지를 유지하는 원흉을 향해 투수 코치님이 외쳤다.
“콜드 안 나와요? 비가 지금 이렇게나 내리는데.”
“우리도 콜드 내고는 싶은데, 위원회에서 가능하면 진행해 달라고 해서요. 점수 차가 막 엄청 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아직까지는 원 찬스 게임이니까…….”
“괜찮으니까, 여기 흙이나 좀 메꿔줘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심판은 볼보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을 향해 뛰어갔다.
가서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마사토 좀 가져올 요량인가 보다.
“다리 좀 움직여봐, 괜찮은지.”
“괜찮대도 그러시네.”
말은 그러면서도 하체의 이곳저곳을 돌리고 있었다.
허리, 골반, 발목.
차례차례 이상이 없음을 확인시켜줄 무렵, 수레에 가득 실려 있는 모래들이 도착했다.
삽으로 플레이트 부분과 디딤발이 닿는 부분을 메꾸고, 또 발로 쿵쿵쿵 찍어대며 평탄화 작업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연습 투구 재개.
퐙!
여전히 주호의 미트에선 요상한 소리가 나긴 했지만 경기 진행 자체는 가능할 것 같다.
안심하고 돌아가는 관계자들에게서 신경을 떼고 당장의 내 일에 집중했다.
특수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다 보니 이례적으로 총 10개의 연습 투구를 허용받았다.
새로운 흙으로 점철되기는 했다만 여전히 불편함이 가득한 마운드를 밟고,
플레이!
이닝이 다시 시작됐다.
“어으, 싫다.”
입으로는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투구 동작을 이행했다.
와인드업 때문에 플레이트 뒤를 밟은 왼발, 따로 새 흙을 공급해 주지 않아 올라오는 물렁함에 살짝 몸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투구 자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스트라잌―!”
몸쪽 직구부터 시작하는 오영빈의 타석.
“스트라잌, 투!”
다시 한번 몸쪽에 직구를 꽂아넣으며 간단하게 좋은 카운트를 만들었다. 결정구로 나온 사인은 떨어지는 스플리터.
고개를 저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야구공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꺼지라 명령하면 싫다고 반항할 게 뻔하다.
거르고 걸러서 얻어낸 결정구는 바깥쪽의 체인지업.
앞서 비슷한 로케이션의 싱커 사인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라운드 상황이 이따구인 상태에서 땅볼을 유도하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글러브 안에서 빠르게 그립이 교체되었다.
빠른 중심이동과 빠른 팔스윙, 그리고 빗물이 가득한 이 특수 상황은 생각보다 낙폭을 조금이나마 크게 해주는 뒷배경이었다.
근데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딱―!
아무리 새 흙을 퍼다 날랐어도, 땅 상태는 여전히 거지 같다는 것.
“투투!”
“릴레이! 세컨!”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체인지업을 꿈꿨지만 미묘하게 뒤틀린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러싱은 한가운데에 몰리는 실투를 낳았다.
4번 타자라는 타이틀이 울지 않게, 몰린 카운트에서도 실투를 놓치지 않고 우중간으로 당겨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가 갈렸다.
성현이의 빠른 릴레이로 2루까지는 가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에이 씨.”
괜히 신발코로 땅을 팠다. 엄지발가락부터 퍼져 가는 빨간색 터프토는 진흙덩이 한 움큼을 퍼다 바깥으로 날랐다.
그 와중에 투구에는 지장이 가지 않도록 마운드 옆 부분을 차올렸다는 게 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발이 느린 주자를 1루에 두고 던지는 상황. 타석에는 무난한 5번 타자.
비라는 존재가 이때만큼은 참 밉다.
병살 잡고 싶어서 땅볼을 유도해도,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란 두려움을 앞장서게 하니까.
띄워볼까?
주호가 이런 생각을 할 리는 없었기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인 뒤 아래쪽 세 손가락을 어깨와 모자챙을 터치했다.
중간 경유지엔 글러브, 왼쪽 가슴이 껴있었다. 복잡함을 담아 보낸 사인은 이내 새끼손가락 하나로 환전되어 돌아왔다.
높은 직구. 존에는 걸치게.
퐉!
“하이볼―”
아씨.
계속해서 미끌린다. 신경질을 숨기지 않고 다음 투구를 이어간다. 주자를 한번 슥, 확인하고 슬라이더 그립을 잡았다.
“스트라잌―”
비가 오는 날엔 변화가 심한, 혹은 특별한 손기술이 필요한 공은 최대한 던지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나 스플리터나 포크볼.
샥샥,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야 하는데 물기 때문에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지를 않는다.
커브도 가능하면 지양하려 하고. 땅바닥 상태부터가 개판인 상황에서 최대치의 예민함을 요구하는 구종을 던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럼 남는 건 슬라이더, 싱커, 체인지업, 그리고,
띡!
“마이! 마이!!”
직구.
비가 거지 같긴 하지만, 물기 때문에 손끝에 제대로 달라붙는 직구를 던지는 건 꽤나 기분이 좋거든.
한 번 더 던져낸 직구는 일단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존의 적당히 높은 몸쪽에 형성된 직구는 배트의 목 부분을 맞고는 적당히 높은 궤도를 그렸다.
딱 내가 제일 잡기 좋은 위치로 떴다. 정확하게 마운드로 돌아오는 포물선. 모자챙으로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내며 글러브를 뻗었다.
혹시나 싶어 모자챙 끝자락에 오른손으로 연장선을 그었다.
도탄되어 눈알로 침투하려는 잔여물들을 막는 데엔 눈살을 잔뜩 찌푸리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틱!
도움됐다 했지, 잡는다곤 안 했다.
절묘하게 좁아진 눈꺼풀 사이를 때린 빗방울 때문에 글러브 옆을 맞고 튕겨져 나갔다.
“1루우!!”
그래도 비가 오면 좋은 유일한 장점 하나, 공이 땅과 만나는 순간, 속도와 바운드는 거의 0에 한없이 수렴한다는 점.
발치에 떨어진 뒤 진흙밭에 구른 탓에, 혹은 덕에 공은 금방 손에 닿는 곳에 멈춰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2루로 던지려는 모션을 취하다가도 글러브로 1루를 가리키는 성문이를 보고 바로 1루에 공을 던졌다.
“아웃!”
공을 잡은 기성이는 애매한 플라이 탓에 애매한 리드를 잡고 있던 오영빈에게 달려갔다.
상황을 인지한 주자도 얼른 2루로 내달렸지만 수비수의 위치를 확인하며 사려야 하는 주자와 주자를 찍기만 하면 되는 야수의 속도 차는 어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웃―”
기성이가 오영빈의 등을 태그하며 아주 운 좋게 아웃카운트 두 개를 챙겼다.
이후 곧장 상대 팀 감독님이 뛰쳐나왔다. 고의낙구 아니냐, 뭐 대충 그런 걸 어필하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심판은 아까 내가 비를 막기 위해 모자챙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던 모습을 재현하며 상대 팀 감독님을 설득했다.
저건 그냥 못 잡은 거다, 비가 심해서 놓친 거다, 인필드도 아니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 얘기들을 했겠지.
다음으로 나선 김명준.
거대한 풍채답게 거대한 타구를 곧잘 날리는 타자지만 다른 스탯들보다 민첩을 훨씬 요구하는 이런 상황에선 그냥 평범한 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스트라잌―”
여러 가지 요소들이 상쇄된 지금, 일단 싱커로 카운트를 잡았다.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는 빗줄기는 주호의 오른손을 바라보는 것도 힘들게 만들었다.
발이 한 번 더 미끄러지며 슬라이더가 말 같지도 않은 곳으로 날아가며 볼 하나, 집중해서 한 번 더 던진 슬라이더는 잘 날아가긴 했지만 살짝 빠지며 다시 볼 하나.
딱―
그리고 던진 체인지업은 자기네 팀 덕아웃으로 돌려보내며 팀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정구는 음… 제일 잘 긁히는 걸로 던져보자.
다시 한번 내 쪽에서 사인이 보내졌다. 높은 직구이긴 한데, 존에는 걸치게.
수분기 때문에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야구공이지만, 표면을 잔뜩 덮는 물기 때문에 손끝에 제대로, 끝까지 달라붙는다.
빵!
“스윙, 아웃.”
길고 길었던 8회 초가 끝났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기 위해 덕아웃으로 향하는 동안 모자를 벗자,
후두두…둑…….
비가 그쳤다.
“아…….”
띠링―!
[수중전]
- 강우를 이겨내고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슬라이더 +2
제구 ― 최상
구위 ― 중
체력 ― 중
포심 ― 67
커브 ― 55
슬라 ― 45+2=47
스플 ― 47
체인 ― 51
싱커 ― 51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고개를 하늘로 돌려도 내 얼굴을 때리는, 혹은 닿는 물방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얀색 단어들의 연속이 내 맘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형, 고생했어요.”
“어… 그래.”
하하…….
어딘가 강하게 느껴지는 허무함은 이닝이 끝나고도 쉽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