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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84화 (84/190)

84화. 중고지만 새것 같은 마음가짐

타고투저.

타자들이 득세함과 동시에 투수들은 몸을 잔뜩 사려야하는 야구계의 풍조.

보는 재미야 있겠지. 빵빵,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 덕분에 누가 이길지, 후반의 후반까지 가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타고투저는 투수나 수비수들을 돌려까는 요소로 작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저딴 투수가 투수왕이라고?

저게 수비 제일 잘하는 유격수라고?

잡아줘도 충분할 공은 잡아주지 않는다. 평범하게 땅볼로 처리되어야 할 공은 안타가 된다. 펜스 앞에서 잡혀야 하라 공은 시야에서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린다.

투고타저.

2년 연속으로 이런 현상이 지속되자 위원회에선 결국 특단의 조치를 때려버렸다.

존은 넓히고, 사용하는 공인구의 반발계수를 낮춰 타구의 속도를 낮춰버리자.

볼로 판정되던 공은 스친 것 같다는 이유로 스트라이크가 되고, 안타나 홈런이 되어야 할 공이 딱히 호수비가 아님에도 잡혀버린다.

근데 김한울은 뭐임?

때문에 올시즌, 초반부터 대차게 말아먹어버린 내 성적은 아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대체, 투고타저여도 이런데 타고투저였다면 어디까지 박살이 났을까?

가슴 아픈 의심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색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투수의 대표 성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평균자책점이 야금야금 갉아먹히며 내 원래의 평균으로 빠르게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예.

좀 모자란데.

하지만 아직 많이 멀었다. 7월 중순에 다다른 지금, 내 성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면 20.2이닝 평균자책점 8.71.

암흑기를 지난 후의 성적만을 보자면 평소의 나로 회귀했음이 분명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아직까지도 쩌리가 맞다.

쩌리라는 단어도 후한데?

그런 투수가 감히 올스타전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낼 자격이 있을까.

글쎄, 나나 야구계 인사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빠르게 읽은 팀에선 아예, 불펜투수 후보로 나를 선정하지도 않았다.

뭐…덕분에…….

“아흐…편해라….”

양 손을 머리 뒤로 둔 채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 이토록 편안할 수가 없다.

무려 일주일이라는 길고 긴 합법적 휴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을 한 잔 했다.

민영 씨와 만나 하루동안 즐겁게 놀았다.

삭은 몸에 기름칠을 해주었다.

그러길 며칠. 할 짓이 없어졌다.

최근 몇 년간, 1년 중 특정기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들을 ‘야구’에 포커싱을 맞추고 살아왔다.

경기, 대기, 웜업, 분석, 훈련.

그런 단어들로 빼곡하게 차있던 노트에 다른 휴식이라는 단어를 끼워넣는 건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다.

“아이고야….”

할짓이 없어진 임시 백수는 집 청소, 차 청소, 그리고 야구 가방 청소까지 진행했다.

그러다 야구 가방에서 꺼낸 글러브. 정말,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태였다.

얼룩지고, 까지고, 심지어는 가장 최근 경기, 수중전의 영향으로 인해 진흙까지 덕지덕지 묻어있는 상태.

안 된다.

모처럼 좋은 글러브를 받았는데, 이대로 썩게 만들 순 없다.

“…아, 네. 부장님. 네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이런 건 내가 건드리면 오히려 개판이 될 상이다. 나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

- 아, 한울 씨. 무슨 일이예요.

“아…다름이 아니라요. 글러브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글러브? 글러브 필요해요?

“아뇨아뇨, 뭐 필요한 건 없어요.”

- 아, 그럼 신발? 우리 꺼 쓸 생각 들었구나. 사이즈 몇이예요?

괜…괜찮…괜찮…아니, 진짜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아요.

- 괜찮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괜찮다니까요. 왜 자꾸 뭘 퍼주실라 그러세요.

“글러브 관리를 좀…잘 못 한 것 같아서요. 관리 좀 하려고 하는데 이게 좀….”

- 관리? 오일링만 해줘도 충분해요.

“근데 제가 그, 진흙 같은 게 잔뜩 묻어서요. 그냥 주신 오일 바르면 되나요?”

시야 한편에 있는 글러브 관리 용품들을 눈에 든 채 전화 내용을 이었다.

- 아, 그건 안 되지. 컨디셔닝 따로 해줘야 될 것 같은데, 음…보자. 아, 내가 연락처 하나 보내줄게요. 한 5분 이따가 전화해봐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

띠링―

“왔다.”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날아왔다. 발신인은 롤링스톤즈 한국지사의 제작부장님. 발신 내용은…….

“…아, 안녕하세요.”

다른 누군가의 전화번호.

이야기를 들은대로, 약 5분 정도를 기다린 후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네, 야구용품 연구소입니다.

그 누군가는 또 다른 글러브 전문가의 번호였다.

“저기, 그…김한울이라고 하는데요.”

- 아, 네네. 이 부장님한테 연락 받았어요.

“네. 해서 좀…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 아무때나 오세요. 괜찮아요.

“그럼 지금 가도 될까요?”

- 네네. 편하게 오세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 서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팬티바람이나 다름없던 하체엔 청바지라는 장갑이 하나 덧대졌고, 목 늘어진 티셔츠는 빳빳함이 살아있는 셔츠로 바뀌었다.

“머리는….”

나 방금 일어났소!

머리카락들은 제 주장을 굽힐 생각이 조금도 없어보였다.

“…모자 쓰자.”

포기.

삑―

W 마크가 박혀있는 모자를 뒤로 넘겨쓰고 차에 올라탔다. 핸드폰으로 주소를 찍어두고 거치대에 올리자 네비가 예상 경로를 완성했다.

설설설, 지도 상 그어져있는 직선을 따라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고 오른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할 때,

탁―

“아씨.”

뒤로 넘겨 쓴 모자가 자꾸 헤드 레스트에 걸린다. 시야는 전방에 둔 채, 모자를 벗어다 조수석으로 휙 던지고 나서야 시야 확보가 원활해졌다.

딸랑―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오….”

적당히 밀리는 차량들을 지나 도착한 서울 외곽의 한 야구용품점.

“야구용품 연구소…맞죠?”

“아, 오셨네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매대를 그득그득하게 채운 형형색색의 글러브들.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하얀색, 노란색.

포지션도 다양하고, 브랜드도 다양하다. 알루미늄 합금으로 구성되어있을 배트들도 수 백, 수 천 개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새 주인을 찾고 있었다.

배팅장갑들 하며, 신발하며, 온갖 야구 관련 의류들 하며. 저게 다 얼마야.

생각보다 거대한 규모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어버렸다. 잔뜩 얼을 타고 슬금슬금, 출입통제구역에 들어가는 발걸음을 따라했다.

이따금씩 와! 김한울이다, 와! 하며 알아보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들렸지만 딱히 다가오지는 않았다.

“글러브 가져오셨어요?”

“네. 여기요.”

사장님께 글러브를 건넸다. 남의 땀과 피가 묻은 글러브, 선뜻 만지거나 껴보기가 쉽지 않을텐데.

“흠. 관리가 좀 소홀하시긴 하셨네요.”

파닥파닥, 손을 넣어 다물어보기도 하고, 가죽 곳곳을 쓸어보기도 하며 빠르게 진단을 내린다.

“클리닝 쪽으로 해드릴게요. 시간은 대충…30분 정도면 될 것 같긴 하거든요.”

“그럼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네. 구경이라도 하고 계세요. 주완 씨! 커피 하나만 내려줘요!”

“네네!”

구경을 허락 받았다.

아마 사장님이 말한 구경이라는 건 이 매장에 대한 구경이겠지만, 나에겐 매장보다 글러브가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할지가 더 궁금했다.

“여기, 커피요.”

“아, 감사합니다.”

어느새 직원 분이 커피를 타주셨다. 조심스럽게 받아 호로록거리며 사장님이 들어갔던 곳으로 따라들어갔다.

“아, 이거 보시게요?”

“네.”

“재미없으실텐데….”

“영업기밀 같은 거라 숨기시려는 건 아니구요?”

“에이, 이거 봐도 안 할 사람은 안 해요.”

어느샌가 사장님 손에 잡혀있는 롱노즈. 긴 코의 끝이 글러브 끈피를 붙잡고 잡아끌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과감하게.

손등, 손바닥, 손가락,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고 글러브의 끈피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제거되어있었다.

“이게…진흙이 묻었던 거잖아요?”

“아, 네.”

“사람들이 그래요, 겉에 진흙이 묻어있으니까. 겉에만 좀 처리하면 되겠지.”

심심하셨는지, 대화를 원하셨다.

“근데 그러면 안 되지. 글러브가 뭘로 만들었어요. 가죽이죠. 진흙이 뭐예요, 물이랑 흙이랑 섞인 거잖아요.”

“네.”

“진흙이라는 게, 가죽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내 글러브의 모든 끈이 풀어졌다.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 게 민망할 글러브의 입장은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글러브의 위아래 가죽을 훅 벌리더니 은밀한 구역까지 탈탈 털어냈다.

투두두둑―

“…오메.”

“까보면. 이렇게 흙이 다 들어가있거든.”

매장 바닥에 떨어진 모래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투수잖아요? 그러면 글러브 무게에도 민감할테고.”

“아무래도…그렇죠?”

“투수라는 게, 이런 거부터 밸런스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거든.”

껄껄껄, 사장님은 웃으시며 뜬금없이 새하얀색의 면티를 꺼내들었다.

칙칙칙, 두 손가락 끝에 말아낸 흰 면티에 스프레이를 몇 번 뿌렸다.

슥슥슥, 이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글러브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오일인가, 그거예요?”

“아뇨. 클리너.”

“오….”

진흙으로 인해 거뭇거뭇해졌던 글러브가 조금씩 제 원래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두 눈을 똥그랗게 만든다는 점에서 마술과도 같았다.

“그리고 보자….”

손가락에 감은 면티의 부위를 살짝 옮겨잡은 뒤 슥슥슥, 이번엔 고체 형식의 글러브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글러브 손가락, 손바닥, 손등, 심지어는 글러브의 끈피와 내부까지.

“그래도 다행인 게, 글러브 자체가 워낙에 좋은 글러브예요. 가죽도 그렇고 끈피도 그렇고. 이 부장님이 되게 신경 많이 써주셨네.”

“아…그런가요?”

“자자, 이거 만져봐요.”

사장님이 내미신 건 옆에 있던 다른 글러브.

“그리고 한울 씨 꺼.”

그리고 내 글러브.

“어때요. 차이가 좀 느껴져요?”

왼손엔 내 글러브, 오른손엔 다른 글러브를 두고 동시에 손바닥면을 만지작거려봤다.

“아니요. 똑같은 가죽 아니예요?”

“흠.”

이래서 민간인들은.

마치 그런 표정으로 실망을 감추지 않으셨다.

“가죽이라고 다 똑같은 가죽이 아닌 건 알죠?”

“아…네. 제작부장님한테 들었어요.”

“요즘에야 무조건 킵이 좋다느니 그런 소리는 없긴 한데, 그래도. 아무리 스티어라고 해도 최소한 어느 가죽이 좋고 안 좋고는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거든요.”

탕!

가벼운 망치질 한 번에 글러브 끈피 끝자락은 구멍이 뚫렸다. 글러브 바늘을 꿰어낸 뒤,

슥, 스으으으윽―

아까의 역순으로 글러브가 재조립되기 시작. 반쯤 남은 커피의 존재도 까먹은 채, 원래의 때깔을 되찾아가는 글러브의 모습을 구경했다.

“이렇게까지 물 먹고 오염되면, 가죽이야 어찌됐건 끈피는 어느 정도 상해야 정상이거든. 보아하니 뻔해보이기는 하는데, 경기 끝나고 그냥 가방에 넣어두고 끝이죠?”

“오…어떻게 아셨대요.”

“보면 알지.”

껄껄껄.

“근데 요건 그런 극한까지 갔다와도 아주, 아주 상태가 멀쩡하거든요. 자, 껴보세요.”

“오, 오오…!”

중고지만 새것같은 마음가짐을 얻은 글러브가 손에 장착됐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도, 오른손으로 만지는 글러브의 전체적인 감촉도, 아주 좋다. 새것 같다.

“와. 대박.”

“이 부장님이 이거 주시면서 뭐 다른 거 안 주셨어요? 관리 용품들 같은 거.”

“주시긴 했는데…사용 방법도 알려주시긴 하셨거든요. 근데 이건 상태가 좀…워낙 안 좋아서요. 어떻게 손을 댈 엄두가 안 나더라구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올 수 있으면 와요, 나도 스폰 해줄게.”

“저 투수라서 딱히…받을만한 게….”

“커피 스폰 무제한으로 해드릴게.”

“아, 맨날 와야겠네.”

빤딱빤딱해진 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개떡 같았던 전반기를 확실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연료를 얻은 것 같다.

“얼마 드리면 돼요?”

“얼마는, 무슨. 이 부장님 소개로 왔는데. 이 정도는 그냥 해드리는 거지. 커피 스폰 말고, 이거 컨디셔닝도 스폰으로 합시다.”

“아잌, 사장님, 멋져!”

“정 그러면 사인이라도 하나 해주고 가요.”

“얼마든지요.”

들이 밀어지는 A4용지 한 장과 매직펜 하나. 기꺼이 받아들고 슥슥슥, 어느새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사인 한 장을 완성시켰다.

카운터의 뒷편, 이미 방문했던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의 사인 옆에 내 사인이 걸렸다. 흐뭇한 광경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또 놀러와요.”

사람 좋게 웃어주시는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다시 차에 도착. 글러브를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모셔…….

“아.”

조수석 의자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는 남색의 모자. 재빠르게 머리통을 톡톡 두들겨보지만 손가락에 닿는 촉감은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전부.

사진 찍은 사람 없겠지. 에이, 설마.

이때는 몰랐지. 다시 출근하자마자 성현이한테, 프로가 그런 꼬라지로 돌아다니는 게 말이냐 되냐면서 혼날 거라곤.

“…설마.”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천천히, 자동차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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