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트레이닝, 어게인
올스타 브레이크의 마지막 날. 겨우 최근 며칠 사이 버릇이 되어버린 늦잠을 쭈욱 자고 일어났다.
“으허엉험르아….”
가만히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아 머릿속에 차있는 댕…한 기운을 빼냈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서 후루룹, 해치운 뒤 컴퓨터를 켰다. 미튜브를 돌아다닌다거나 기사를 본다거나.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앉아있고 싶었다. 누워만 있자니 더 잘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낮밤이 역전되어버릴 것 같고.
“아, 맞다.”
볼만한 동영상도 다 보고, 어그로 확실한 뉴스들도 모두 확인하고 난 뒤 눈에 들어온 풀카운트의 아이콘.
오랜만에 땡겨볼까.
탁탁, 리드미컬한 클릭 이후 빠른 접속. 빠른 매칭으로 만난 상대방 쪽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는 ‘김한울’.
지 자신과의 싸움.
김한울과 김한울이 동시에 양 팀에서 투구를 하는 그림, 야구 게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내가 나한테 안타를 치고, 홈런을 때리는 게 미안해질 때쯤,
“이게 할인을 하네.”
반짝반짝, 나 지금 할인하고 있어요!
게임 속 트레이닝 센터는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할까.”
작년 초, 약소한 어깨의 부상을 입고 강제로 열흘을 쉬게되었을 때. 이틀에 걸쳐 18km를 내달린 뒤 체력이라는 스탯을 하나 올린 기억이 있다.
그때는 운이 좋았지만, 지금 내가 트레이닝을 시킨다고 해서 또 퀘스트가 뜰 거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완벽한 복불복.
“흐음….”
턱을 긁적거리며 트레이닝 센터를 노려봤다. 살살살, 내 캐릭터에 대한 트레이닝에 필요한 가격대를 계산해본다.
트레이닝 한 번에 만원. 그리고, 원하는 스탯을 올릴 수 있는 확률 상승 아이템의 가격이 8천원. 합쳐서 만 8천원. 이 짓을 두 번 해야하니, 곱하면 3만 6천원.
그 와중에 20% 할인 중이라고 하니, 할인율을 적용시켜보자면 2만 8천 8백원.
“…질러!”
에이, 치킨 두 번 참으면 되지.
이뤄지지 않을 다짐을 중얼거리며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게임캐시 3만원을 질러버린 후.
“아…내가 무슨 짓을.”
이미 늦었다.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는 3만캐시. 그리고 현금 3만원이 증발했다는 문자.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뽑는다.
어서오시게, 트레이닝을 시작할 준비는 되었나?
머리 윗부분이 뻥 뚫려있는 박사님이 나를 반겼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누굴 트레이닝할 거냐는 질문엔 당연히 ‘나’를 선택했다.
어떤 스탯을 올리고 싶냐는 질문엔 당연히 구속을 찍었다. 하고 싶다고 100% 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은 많아.
구속을 올리고 싶다 이야기하니 뭐, 해당 트레이닝 용품 업체랑 가격을 맞춰봐야 하네 어쩌네, 쌉소리를 지껄인다.
알았다구요. 돈 더 가져가시라구요.
김한울 선수를 트레이닝하시겠습니까?
1년 전 본 적이 있는 질문. 조금의 고민도 없이 ‘예’ 버튼을 눌렀다.
약 1초 정도의 로딩 이후, 거의 폴대폴에 가까운 거리에서 공을 던지는 캐릭터가 보인다.
“됐…!”
띠링-!
[축하합니다, 김한울 선수의 구위가 1단계 상승하였습니다!]
“…….”
양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얼굴엔 함박미소가 가득한 채. 움직이고 있는 건 껌뻑대는 두 눈깔이 전부였다.
“아아아악!!”
털썩―
힘이 탁, 풀려버린 다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래, 제구나 체력 아닌 게 어디니…괜찮….”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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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발.
* * *
쉬는 날, 그것도 평일 저녁에 100m를 넘겨가며 캐치볼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찾기가 힘들다. 그럴 장소가 있다 한들, 상대를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려울 거고.
하여 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한 번, 구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차에 타서 한 번, 구장에 도착해서 한 번, 그리고,
“…퀘스트.”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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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커룸에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혹시라도 퀘스트를 받자마자 바로 처리해야 하는지, 시간 제한은 없는 건지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구위.
어찌보면 구속이라는 존재보다 더더욱 끌어올리기 힘든 무형의 가치를 이리 쉽게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하며 글러브를 집었다.
“…저기, 건영아.”
“네, 형님!”
“캐치볼 좀 하자.”
“네!”
“어…좀. 그….”
아씨. 미안해 뒤지겠네.
“좀 멀리서 때리고 싶거든.”
“롱팩이요? 괜찮아요.”
미안. 너는 끽해봐야 원 베이스 생각하겠지.
일단 만만한 상대를 구했으니, 딴 마음 먹기 전에 처리해야겠다. 5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힘을 거의 빼고 툭툭, 가볍게 던져봤다.
팡!
“근데 형이 웬일로 롱팩이예요?”
“어?”
“형 이런 거 잘 안 하잖아요.”
“어…뭐.”
팡!
“그냥. 오랜만에 좀 하고 싶어서.”
한 번 던질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5m에서 시작한 거리는 10m, 20m, 30m를 넘어 투 베이스 거리에까지 당도했다.
가볍게, 정면이 아닌 옆을 보고 왼 다리를 든다. 엉덩이를 쭈욱 밀어내며 앞으로.
팡!
슬슬 작아져보이는 타겟을 두고 나는 계속해서 멀어져갔다.
“형! 저 거기까지 안 가요!”
치명적인 어깨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그만둔 입장에선 50m 언저리도 대단히 먼 거리다.
근데 미안, 나 이제 반이야.
“주호야아아악!!!!”
마침 건영이의 뒤를 지나가는, 또 하나의 만만한 존재. 당사자는 메아리치는 본인의 이름에 당황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름을 외쳤던 사람이 나라는 걸 인지했지만 내가 아닌 훨씬 가까운 건영이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끄덕끄덕. 움찔. 당황. 끄…덕끄덕.
일련의 감정변화 후, 주호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약 10초 후 다시 나타난 주호 손에 들린 건 또 하나의 포수미트.
내가 던지는 공의 도착지점이 건영이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주호를 거치고 올 뿐.
펑!
50m에서 일시정지되었던 롱토스는 60m, 70m, 80m, 90m를 넘어 100m 언저리에 다다랐다.
슬슬 나도 한계다. 웬만하면 오늘 등판도 할텐데, 빨리 끝내자.
한여름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높은 습도와 온도는 내 몸 모든 곳에서 땀을 배출하게 만들고 있었다.
끈적함이 느껴지는 팔뚝이며, 뚝뚝 물기가 흐르는 모자하며.
“윽!”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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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예 점으로 보이는 건영이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가벼운 효과음과 함께 100m 롱토스 1회로 인정한다는 알림 소리가 들리자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그래도 전처럼 삽질은 안 하는구나.
3km를 세 번이나 뛰었음에도, 제대로 뛰라는 경고에 세 번을 더 뛰었던 기억은 거의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악!”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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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영이가 공을 받으면 그 공은 50m 떨어져 있는 주호가 받는다. 이후 주호가 다시 50m 떨어져 있는 나에게 던진다. 그럼 나는 이 공을 받아서,
“끅…!”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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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건영이에게 던진다.
계속 하다보니 롱토스를 좋아하는 이들의 이유도 체감은 됐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피지컬만을 이용해 있는 힘껏 공을 때리고 있자면 괜한 스트레스가 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가볍게 도착 지점을 눈으로 확인한 뒤, 후우, 심호흡을 했다. 살살살 내달린 뒤 오른발, 오른발, 왼발 스텝, 그리고 빵!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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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허리야.
롱토스가 단순히 팔, 혹은 어깨 관련 훈련은 절대 아니다. 애초에 공을 강하고 정확하게 던진다는 자세부터가 전신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스텝을 밟으며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스텝과 함께 만들어진 꼬임각을 다시 푸는 동작에선 강한 코어의 힘이 요구된다.
강하게 던지기 위해 견갑골엔 최대한의 스캡 로딩이 걸린다. 격렬한 동작을 이겨내기 위한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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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모든 동작을 버텨내야 하는 단단한 하체까지.
“아이고야.”
슬슬 허리가 뻐근해지려고 한다. 빨리 끝내자.
“끄흑!”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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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후우…후우…으…다악!”
띠링-!
[투수는 구위! 구위는 롱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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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구 - 최상
구위 - 중+1=상
체력 - 중
포심 - 67
커브 - 55
슬라 - 47
스플 - 47
체인 - 51
싱커 - 51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 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양손과 양무릎으로 땅을 짚은 채 거친 숨을 쉬다가도 털썩, 그대로 누워버렸다.
수, 숨질 것 같아…….
내 몸이 가지고 있는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오돌토돌 움찔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선배, 뭐해요.”
“뭐하긴, 끝났으니까 쉬지.”
“쿨 다운 안 해요?”
“아.”
거지 같은 쿨다운 새기. 누가 만들었냐.
주호의 채근에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영이로부터 멀어졌을 때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다시 가까워졌다. 진짜 끝.
“오늘 등판 안 하세요?”
“몰라. 할 것 같기도 한데….”
“무리하신 거 아니예요?”
“무리….”
무리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빨리빨리 해야지.”
벤치에 돌아와 글러브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등받이에 모든 체중을 넘겼다. 반전된 시야 속으로 등판을 위해 준비하는 혁준이가 보였다.
던진 것은 야구공이 아니라 나의 넋이었던가.
차리지 못 한 정신은 경기가 시작하고 나서도, 3회에 선취점을 내고 나서도, 혁준이가 6이닝을 깔끔하게 막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울이. 8회 나간다.”
“…아.”
정신을 차린 건 7회초 수비가 끝났을 때.
거의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꺾여있던 고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3 대 1.
“아이고, 허리야…건영아아.”
“예!”
주섬주섬, 글러브를 집으며 건영이를 불렀다. 상황 전파를 받았는지 포수장비를 다 차고 홈플레이트 뒤에 서있다.
“으끄으으…윽!”
나 아직 회복 안 됐는데!
반항하는 근육들을 이리 늘리고 저리 접으며 묵살시켰다. 정신차리자. 시작은 가볍게, 캐치볼부터 시작해보자.
뻥!
오?
“나이스볼!”
던져놓고도 놀랐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사용해야 될 것 같다. 평소보다 한 단계 격상된 포구음의 단계가 방전된 몸뚱아리를 긴급하게 충전시켰다.
“아이, 직구우!”
펑!
구속은 평소보다 살짝 떨어진 것 같다. 대략 3km? 5km? 하지만 구속보다도 중요한, 쉽게 가질 수 없는 구위라는 스탯.
퍼엉-!
“아이, 굿뽈, 굿뽀올!”
투수의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 아닌, 정말로 공이 좋아서 흘러나오는 감탄. 지금 건영이가 아낌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올라가자.”
“예이!”
터덜터덜거리며 마운드를 향하는 두 다리의 상태는 어딘가, 얼마 전 은구 선배와 웨이트를 잔뜩 하고 난 뒤의 등판 때와 비슷했다.
후들후들거리려는 감촉을 고양감으로 내리눌렀다. 연습투구의 초구는 당연히 직구였다.
투닥―
아, 생각난다, 생각나.
‘그 날’.
처음으로 퀘스트를 완료한 뒤 포심 +1의 위력을 여실히 느꼈던 날. 마치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미트의 윗 입술을 맞고 떨어뜨린 공을 보며 두 눈이 땡그래지는 모습, 이제는 저 눈 모양이 규학이의 디폴트적인 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띠링-!
[보여줄게, 달라진 나.]
- 1이닝을 모두 탈삼진으로 마무리하세요 (0/1)
- 보상 - 전 구종 +2
이전의 나였다면 어림도 없다며 상욕을 먼저 내뱉었을 퀘스트. 하지만 될 것 같이 느껴졌다.
플레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왼쪽 다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