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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86화 (86/190)

86화.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구위.

수치화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어떠한 것을 굳이 상대평가를 해야한다면, 과연 어떤 표현을 곁들이는 게 좋을까.

뻥!

“스트라이이!”

치려고 마중나와놓고 어, 아니네? 하면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배트?

부웅―

“스윙-.”

와쒀! 싶어서 나왔지만 제대로 엇갈린 뒤 허공을 그대로 갈라버리는 배트?

뻥-!

아니,

“아이, 나이쓰보올-.”

다소 진부한 표현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에 짓게 되는, 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아닐까.

뭐야. 뭐지? 대체 뭐지?

삼구삼진.

공 세 개로 삼진을 잡아낸 경험이야 적지 않다. 한창 성적이 안 좋을 때라 해도 특유의 제구와 상대방의 방심으로 눈을 가려낸 횟수는 꽤 된다.

내가 짬이 얼만데.

체감.

그러나 그때와는 느낌 자체가 아예 달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직전 게임만 하더라도 삼구삼진의 느낌은 이렇지 않았다.

수싸움.

치밀한 설계와 계산, 상대방의 과도한 경계심으로 눈이 먼 상대로부터 강제로 뺏어낸다는 느낌. 말 그대로 탈(奪)삼진.

힘.

모든 투수들에게 공통되는 로망이 한 가지 있다. 힘으로 찍어누른 타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왔던 길로 되돌려보내는 것.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됐다. 해냈다. 나도 된다.

고동욱과 반대 타석에 들어선 강대현의 표정이 꽤나 비장해보였다. 스쳐지나가는 길에 어떠한 말을 듣고 과한 경계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자신감.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요소는 지금 나에게 가득 차다 못 해 아주 넘치고 있었다.

부웅!

“스윙-.”

한가운데 그대로 때려던지며 힘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런 이미지를 그려보고 싶었으나…여태까지 처맞아왔던 무의식이라는 녀석은 강제로 코너웍을 시켜버렸다.

142km.

이를 악 물고 던져대는 모양새치고는 벨로시티 수치는 그리 높지 않다.

롱토스의 부작용으로 등은 따갑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뱃심엔 살짝 알이 배긴듯 등을 굽히면 앞에서 약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브레이킹볼.

교통경찰을 자처한 검지 손가락이 과몰입을 막기 위해 브레이크를 걸었다.

여태까지의 경험, 그리고 덧씌워져 있는 이미지보다 좋은 직구일 뿐이지 절대적인 수치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약지를 꼬물꼬물 움직여대며 그립을 바꿨다. 유일하게 펴져있는 검지 손가락은 정확하게 던지고 싶어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촥―

“로볼-.”

아, 까비.

규학이가 영혼을 담아 끌어올렸지만 허가 받지 못 했다. 그대로 미트의 위치를 유지하며 무언의 항의를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저 정도는 잡아줘도 되지 않나?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딱히. 크게 아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또 넣으면 되지. 넣을 수 있는데.

홈플레이트 끝자락까지 마중나왔다가 아, 잘못왔네염, 하며 재빨리 되돌아가는 배트를 보며 확신했다.

잡을 수 있어. 괜찮아.

직구 그립을 잡았던 손가락이 포수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다. 검지의 끝과 중지의 끝이 교차되며 생기는 미동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대로 꺾지 말고, 직구처럼.

부웅―

“스윙!”

이번 강대현 타석의 컨셉은 라인 태우기 같다. 바깥쪽 직구, 바깥쪽 커브, 이후 코너웍에서 도망가는 슬라이더.

어떻게든 맞춰보겠답시고 엉덩이까지 뒤로 쭉 빼놓고 휘둘러봤지만, 저렇게 맞춰봐야 땅볼 밖에 더 나오나.

내 입가에 잔뜩 묻어있는 긍정의 기운들이 느껴졌다. 애써 힘들게 숨기지 않고 모두 미소로 치환시켜 내보였다.

한 번 더 바깥쪽 슬라이더, 바깥쪽 직구, 떨어지는 커브.

세 개의 사인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에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고개를 저었다.

가운데 세 손가락을 펴서 팔꿈치와 글러브, 어깨를 터치하고 쳐다봤다. 담당 편집자는 잠시 숙고한 뒤 엄지 손가락 하나를 펴보이며 컨펌을 냈다.

예예, 사장님. 진짜 좋은 거 드릴게요.

“좋은 거…좋은 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서 열심히 뇌까리고 있었다. 무의식은 고개를 위아래로 약하게 흔들고 있었다.

무아지경.

굽혀졌던 왼다리가 펴지는 찰나, 블러처리가 되어있는 풍경 속 하얀색의 포수미트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왼쪽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스캡을 강하게 감고 있던 고무줄이 빠르게 구역을 넓혔다.

터프토로 난장판을 쳐 둔 오른발 엄지가 질질 끌려오는 소리, 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유니폼들이 부딪혀서 나는 소리,

“마…다악!!”

검지와 중지 끝이 빨간 실밥을 밀고 밀어서 강하게 때려내는 소리까지.

뻥!

부웅―

모든 소리 하나하나가 지금의 내가 이 모든 상황에 강력한 집중력을 갖고 있다는 강력한 어필이었다.

“스윙, 아웃-.”

끝에서 끝까지, 하얀색으로 염색되어있는 오른손에서 유일하게 살색으로 돌아온 검지와 중지의 끝마디.

141km.

누가 들었으면 빵 터졌을 법한 비명소릴 터뜨린 것치곤 부실한 구속이지만 괜찮다. 툭툭툭, 다시 로진을 만져주면 자신감이 충전되거든.

3번타자, 홍석진.

다시 반대편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올시즌이 마지막 시즌으로 예정되어있는 노장선수.

역대급 선구안을 가졌지만 반대로 선구안 하나만을 믿고 달려온 나날의 끝은 썩 좋지 못 했다.

타율 2할 4푼.

투고타저를 향한 급격한 변화를 이겨내지 못 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수의 3번타자, 출루율 3할 3푼을 기록하고 있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하다.

컨택, 파워 모두 평균보다 살짝 아래. 하지만 넓어진 스트라이크 존을 기준으로 두어도 여전히 최고의 선구안을 자랑하는 타자.

내 짝꿍은 이런 타자를 상대로 초구는 한 번 살살 꼬셔보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나 정도 빠지는 싱커에 고개를 저었다. 뺄 거면 세팅의 의도를 갖고 확실히 빼야지, 그렇게 걸쳐봐야 의미없이 버리게 될 뿐이다.

뺄 거라고 하면, 체인지업은요?

오늘 등판하여 앞서 던졌던 7개의 공을 나열해보자. 직구를 연달아 네 개 던진 뒤 커브, 슬라이더, 직구 하나씩.

괜찮네.

웬만하면 빠른 공 쪽으로 관심이 가있지 않을까. 뒷쪽에 형성되어있는 포인트를 강제로 앞으로 땡겨낸다면 헛스윙이 나올 거야.

이따금씩 체인지업을 던지고 싶어하는 투수들이 와서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떨어지냐, 어떻게 하면 휘냐.

“흡!”

그럼 난 정성껏 대답해준다.

부웅―

“스윙-.”

그냥 직구처럼 던지라고. 그럼 알아서, 니가 그렇게 던지기 싫어도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타자가 투수의 구종을 판단하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미묘하게 벗어난 팔의 각도, 공의 회전, 공의 출발 지점 등등.

하지만 구속의 변화는 물리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그건 오직 스피드건만이 가능한 짓거리다.

자, 느린 공도 하나 던져서 주의를 줬으니 다음은 뭘 던져야 할까.

당연히 끌려나오는 질문에 규학이는 대각선이라고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한 대각선.

글러브 안으로 직구의 그립이 쏙 들어갔다. 두 손가락이 괜히 꼼지락거리긴 했지만 중간 단계에서의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그대로 머리 뒤로 넘기고 팟! 하며 왼다리가 높게 올라간다. 툭, 치면 그대로 땅에 떨어질 정도로 약하게 쥐어졌던 야구공은,

“끄압!”

릴리스되기 직전, 악 하고 다물어져있는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껴 그대로 압축된다.

뻥!

압축했다면 발사를 해야지.

“스윙!”

두 타이밍 정도는 늦은 스윙 따위로는 몸쪽 높은 스트라이크존의 직구를 절대 칠 수 없다.

143km.

스트라이크 두 개를 먼저 뺏어내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생각에 골똘히 잠겨있는 포수의 얼굴도, 긴장이 가득 채워진 타자의 표정도.

“후우….”

플레이트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옆으로 옮겼다. 어느새 땀으로 점철된 모자를 벗어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훑어냈다.

토스트마냥 쫙 펴진 로진백을 들어올리고 주물주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환호하는 관객들. 편-안하게 나를 지켜보는 우리 수비수들. 넥스트 써클에서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는 박해진.

스윽, 하고 전광판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후 야구공에 빨간 실밥으로 그려진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퀘스트를 버리고 지금의 자신감으로 박해진과 상대한다면 어떨까.

“…아니다.”

객기 부리지 말자. 호기롭게 홍석진을 내보내고 박해진한테 홈런 맞으면 그게 무슨 개쪽이야. 동점포 처맞을 일 있나.

무시하고 규학이의 사인을 확인했다.

힘.

스트라이크 존을 한참 벗어나는 하이패스트볼을 요구하고 있었다. 달려진 나의 힘을 원하고 있었다.

보여줄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한 번 와인드업.

이번 투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내 모습을 보이는 프로모션 무대와 비슷했다.

나를 깔보는 이들에겐 역전을, 나를 우러러 보는 이들에겐 경외를,

“읍!”

뻐엉-!

살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박해진에게는 경계를.

띠링-!

[보여줄게, 달라진 나.]

- 1이닝을 모두 삼진으로 마무리하세요 (1/1)

- 보상 - 전 구종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67+2=69

커브 - 55+2=57

슬라 - 47+2=49

스플 - 47+2=49

체인 - 51+2=53

싱커 - 51+2=5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쌰아악!”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언제나 사람 마음을 두근두근거리게 만드는 초행길이 아니었음에도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기물들이 가득했다.

환하게 웃으며 미트를 내미는 규학이, 이젠 내가 마운드에 있으면 심심하다는 성현이, 고생했다며 박수를 짝짝 치는 감독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운이 가득 담긴 발걸음은 나를 덕아웃으로 빨리 돌아가기 대회에서 꼴찌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이들과 오른손, 그리고 왼손을 마주쳤다. 짝짝짝, 벤치를 채우는 2인분의 박수소리는 신경석 선배가 경기를 마무리할 때까지 이어졌다.

“야아아악!!”

“가즈아아앗!!”

“호오오오오!!”

1위.

나가자, 싸우자! 승리의 챌린저스! 원하의 승리를 위하여!

상수를 직접적으로 저격하며 원하 챌린저스는 몇 년 만에, 몇 천 일만에 리그 순위 1위에 올랐다.

관객석에서 원하의 응원가를 힘차게 따라부르며 원하의 깃발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팬들을 보고있자면 뭐랄까…….

“형.”

“어.”

“올해 만약에 우리 우승하면요. 제가 형보다 좋은 주장인 거 인정?”

“미친놈인가.”

진짜로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의문문이 아니었다. 할 수 있어, 라는 수십 장 짜리의 계약서였다.

비록 우리 원하만의 자리가 아닌, 같은 잠실구장에서 불편한 동거 중인 누군가와 계속해서 어깨를 맞부딪히고 있어야하는 불편한 1위라고는 하지만.

“형형형.”

“엉.”

“우승하면 나 1루미트 좀 새로 사줘.”

“미친놈인가.”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저기 저 잘나신 분들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다는 것에 기뻐했다.

불편한 건 쟤네들이지 우리가 아니거든.

다음날, 또 그 다음날 게임에서 연패를 하며 다시 리그 2위로 내려앉았지만 괜찮았다.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맨날 밥 먹듯이 우승만 하는 팀이랑 같은 구장에 출근하는 애들도, 그런 감정을 드디어 느낄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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