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복사근을 복사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윽!”
어깨의 뒷편이 팽만해지는 감각은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면과 수직이 된 채 열심히 뒤로 당겨지던 팔은 할당량을 채우고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지면과 수평. 옆으로 팔을 벌리고 꾹꾹 땡겼다. 12번, 한 세트. 다음은 만세를 하고나서 또 한 세트.
주먹을 머리선에 맞추고 한 세트, 옆으로 서서 바깥쪽으로 한 세트, 반대로 또 한 세트, 거기서 아까의 반대로 옆으로 서서 또 한 세트…….
새끼손가락 끝마디만 가지고도 쉽게 당겨낼 수 있는 밴드를 20분 동안 땡겨대자니 이를 꾹 물어내야 겨우 1회가 가능하게 느껴졌다.
팡!
“어흑….”
손아귀에 힘을 풀자마자 고무줄은 원래의 짜리몽땅했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양쪽 어깨가 다 아팠다. 헛둘헛둘, 계속 어깨를 풀어주며 빠른 쾌유를 기원했다.
땡땡했던 어깨는 금방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튜빙이라는 운동 자체가 근력 향상보다는 자극 그 자체에 의의를 두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
모든 튜빙 운동을 마치고 그물에 매듭지어 있던 튜빙 밴드를 풀어냈다. 조심스럽게 접어서 케이스에 넣으면 마무리까지 완벽.
케이스를 개인가방에 넣어두고 그라운드로 나왔다. 탁 트인 하늘이 보여야 하는데 웬 쇳덩이들이 시야를 가린다.
고척구장이 지어진 지는 몇 년이 지났고, 또 야구가 업이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지만 영, 와도와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좋다, 혹은 싫다의 개념이 아닌 그냥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이어서, 국민의례가 있겠….”
경기의 시작은 어느 시간이든, 어느 구장이든 항상 똑같다. 우리가 왼쪽에 있냐, 오른쪽에 있냐 그 차이일뿐.
오늘은 원정 경기이기 때문에 3루쪽 덕아웃에서 시작을 맞이했다. 어디 업체 사장님의 멋진 시구에 순수한 감탄과 박수를 보내고 앉은 덕아웃 벤치.
“오늘은 쉬겠지….”
3연투를 했다. 목금토, 3일 연짱으로 1이닝씩을 던지며 모두 삼자범퇴 이닝.
“요즘 좋더라?”
“내가 좀 좋지.”
“시즌 초엔 뭐가 문제였던 건데?”
“글쎄.”
내 옆자리에 다가온 규진이형의 질문의 답은 아직도 모르겠다. 전력분석실에 방문했던 날 이후, 지속적으로 전력분석원 윤성 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윤성 씨가 내세웠던 몇 가지 가설. 구속대가 평범해졌다, 혹은 패턴이 읽혔다.
“운이 오지게 없었는갑지.”
마지막 가설, 운.
인정하기 싫었던 세 번째 가설을 인정해야 될 것 같다. 진짜로, 이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거든.
“그냥 그렇게 넘기게?”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어떡해.”
“운이라….”
짤막한 다리를 공중에서 붕붕 움직여대는 규진이형의 모습은 꽤나 귀염귀염한 모습이 보였다.
이 형이 담배 산다고 하면 분명 신분증 검사 할 거야.
“형은.”
“나 뭐.”
“잘 되가나 싶어서.”
“뭐가.”
“야구.”
“나야….”
옆을 돌려보지 않아도 옆사람의 고개가 약간 위로 향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잘 되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FA 대박나겠네.”
“그랬으면 좋겠네.”
따악―
볼 쓰리이!!
“어디 가지마.”
“어딜 가.”
“다른 팀.”
“뭐 벌써부터 그런 소리야.”
“그냥.”
헛헛한 웃음이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노력했다.
“전에 영진 씨랑 얘기했던 게 있거든. 그…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좀 됐어.”
“뭔 얘기.”
“FA 좀 사달라고. 애들 나이 먹는 거 안 보이냐고. 아니면 백업 좀 키우게 투자 좀 해주든가.”
“그래서 영진 씨가 뭐라든?”
“노력해보겠다곤 했었는데…그래놓고 내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됐다고 그랬어.”
“미친놈.”
아, 극찬.
“그냥. 우리끼리 하고 싶더라고.”
“뭘. 우승?”
“응.”
“…….”
따악―
와아아악-!!
“올해가 마지막 아니냐.”
“뭐가?”
“너가 얘기했던 거.”
“뭐? 내가 했던 쌉소리가 워낙 많아서.”
“3년 안에 우승 뭐 어쩌고 했던 거.”
“아니이.”
아니시에이팅 발동!
“왜 그런 오해를 하지. 내가 3년 안에라 그랬어? 3년 뒤라 하지 않았나?”
“그거나 그거나.”
“다르지! 그때가 17년이니까, 18, 19, 20. 20시즌에 우승한다고 했었지.”
“17년에 3년 불렀으면 17시즌부터 세야지.”
비디오 판독이 시급하다.
“…그렇다 치고. 내년이잖아.”
“그렇지. 벌써 그게 2년 전이네.”
“될 거 같냐?”
“안 될 거 있나.”
멋진 비상을 위한 이륙을 꿈꾸던 타자가 멋진 스윙을 보였지만 좌익수 훈이가 이륙을 허가하지 않았다.
“우리, 지금만 해도 꽤 세잖아. 상수랑 비비고 있는데.”
“아냐. 아직이야.”
“해봐야 아는 거지.”
“너, 옛날에 박해진이랑 어쩌고, 그런 소리할 때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냐?”
“형은 너무 비관적이야.”
“뭐래.”
덕아웃으로 되돌아오는 팀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만 박수를 짝짝짝 치자니 허전함이 느껴져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선발 선수들의 기운을 빌렸다.
“못 할 건 없지. 우리 선발 네 명에다가 5선발 하나만 괜찮은 투수 생기고. 불펜에서도 괜찮은 투수 하나, 아니면 둘 정도만 더 생기고.”
“타자쪽은?”
따악-!!
돌아! 돌아아! 홈까지 돌아!!!
따악-!
갔다아악!!
“딱히. 애들 아직 젊으니까. 체력만 받쳐주고 부상만 안 당하면 뭐…해볼만 하지 않나.”
흠.
이후 별다른 말 없이, 명진이의 타석을 지켜봤다.
주자를 양 코너에 둔 채 빨간불 두 개를 상대해야 하는 타석. 2 대 2 동점을 이룬 스코어 상황에서 명진이는 어떻게 타석에 임할까.
스톼악!
초구는 살짝 높지 않나, 싶은 직구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볼-.
전반적으로 높은 존에 형성되는 직구를 끌어내려보고자 커브를 던졌지만, 역효과로 인해 커브가 바운드되고 말았다.
장동운이 몸을 날려 막아내긴 했지만 1루에 있던 규학이가 2루를 밟기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도루의 위험성이 없어진 상대투수는 오른쪽 발을 뒤로 빼며 와인드업을 시전했다. 3루에 주자가 있음에도 저런 과감성이라, 멋지네.
이후 무슨 공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으로 빠진 것 같다. 구속대를 보아하는 슬라이더가 아닐까.
2-1에서 맞이한 4구째. 공이 손에서 떠나자마자 위로 붕 뜨는 걸 보고 커브라는 걸 감지했다.
높은데?
그 각도가 필요 이상으로 높은 걸 눈치챈 순간, 속으로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투.
저 높이에서 떨어지는 커브라면 분명, 존의 적당히 높은 쪽에 떨어질 거다. 명진이 정도 되는 타자가 놓칠 리 없겠지!
따악-!!
“어, 가나?!”
실투를 놓치지 않고 받아 때리는 타격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무 시원하게 돌려버린 탓에 왼쪽 폴대 바깥쪽으로 빠져버린 건 기대 밖이었고.
“아…까비.”
“저게 빠지….”
타임-!
“엥.”
아쉬움에 각자 한 마디씩 쏟아내고 있을 때, 갑작스런 타임이 걸려왔다. 왼쪽 폴대에서 눈을 떼고 마운드로 눈이 향했다.
경기 후반, 타자와의 승부 중이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상황이라면 교체할 수도 있지. 그럼 투수는 겁나 싫은 표정을 지을테고.
아닌데?
중심이동으로 인해 마운드 살짝 아래까지 내려온 투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인의 일에 방해를 받았다는 짜증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
투수의 시선엔 동업자를 걱정하는 모습이 가득했다. 이해가 썩 어려운 상황에 빠르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아.”
홈플레이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인플레이 때 있어선 안 되는 사람들이 꽤나 보였다. 그 사람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의 색깔이 남색이라는 게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뭐야?!”
이내 원하의 팀 트레이너가 우리 덕아웃을 향해 X 표시를 보냈다. 덕아웃 내에 수근거리는 소란이 일고, 모두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멀어졌다.
“헌희야, 빨리 몸 풀어라.”
“아, 네!”
내야 백업 멤버인 헌희가 긴급출동을 요청 받았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거리면서 장갑을 끼고 암가드를 찼다.
멍청하게도 그대로 뛰쳐나가다 타격코치님의 외침에 헬멧을 머리 위에 얹고서 다시 출발.
타석으로 향하는 헌희와 교차되어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감독님을 위시해, 트레이너 분의 부축을 받아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명진이. 꽤나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이명진! 이명진! 이명진!
적진이기는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홈팀 응원석에서도 명진이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했다.
“야, 뭐야?!”
“배, 배가….”
“배?”
“복사근 쪽 문제 같은데.”
배 살짝 옆쪽에 붙어있는 근육 덩어리. 투수도 많이 쓰고, 타자는 더더욱 많이 쓸 수 밖에 없는 근육.
“파열이예요, 설마?”
“모르지. 병원 가봐야지, 빨리.”
그대로, 명진이는 트레이너 분과 함께 구장을 떠났다.
“…이게 무슨 일이야.”
* * *
2-2 카운트를 계승한 헌희는 왕위를 거부했다. 기록상으로는 5구째지만, 헌희 본인에겐 초구로 기록될 공을 가만히 지켜보며 삼진을 먹고 돌아왔다.
흐름은 거기서 완전히 넘어갔나보다. 다음 수비에서 시원하게 투런포 한 방을 얻어맞고 게임이 그대로 끝나버렸으니까.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고 지고,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중요하긴 한데.
정정해서, 게임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명진이의 상태.
트레이너 분과 구장을 빠져나간 명진이는 곧장 주변의 병원으로 향해 정밀검사를 받았다.
복사근 손상.
명진이의 진단명이었다. 파열이 아닌 부분을 그나마, 정말 그나마 다행인 점으로 삼을 수 있겠지.
다음 날인 월요일. 평소라면 기분 좋게 이히히하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야할 휴식일이 썩 기쁘지 않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다냐.”
- 글쎄용.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고 하니까요. 길게 잡고 일주일 정도 아닐까요?
“다행이네, 진짜. 아니, 너는 왜, 뭐하다가 부상을, 어? 왜, 하, 왜 그래가지고.”
- 형님.
“왜.”
- 제 어릴 적 꿈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뭔데.”
쌉소리를 하면 전화기를 던져버릴테다.
그런 각오를 단단히 동여매고 다음 대사를 경청했다.
- 영웅…영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나눠주는, 그런 영웅이요.
“웬 영웅이야, 갑자기.”
- 멋있지 않습니까.
“멋있긴 한데. 뜬금없이 웬 영웅 소리냐는 거지.”
- 커브가 딱, 하고 높이 떠서 오는데요. 순간 어릴 적 생각이 나더라구요. 아, 이건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야!
“영웅스윙하다가 부상당했다는 걸 되게 길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구나, 새끼야.”
- 아힉, 칭찬 감사합니다, 형님.
미친놈인가.
“…그래서. 복귀는 언제로 예상하는데.”
- 단순 부상 복귀로 일주일 정도 잡구요. 며칠 정도 2군에서 감 잡고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냥 시원하게 2군 한 번 내려갔다 오는 거네.”
- 그런 느낌이죠.
“열흘….”
반환점을 찍고나서 더더욱 힘을 내야 할 시기에 찾아온 1번타자 겸 유격수의 공백.
길고 긴 시즌을 기준으로 삼자면 고작 열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쏠쏠하게 키스톤 위를 지나는 타구들, 헛헛하게 키스톤 위를 노니는 글러브. 심심하면 뺏어내는 키스톤.
이걸 열흘 동안 못 보게 된다. 명진이한테 받았던 공수주 세 측의 도움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움이 느껴질 수 밖에 없다.
- 그래도 저 없을 때 헌희가 잘 하지 않겠슴까.
“헌희가 타격은 되는데, 수비가 약하니까 그렇지.”
- 수비는 기범이 형도 있구요.
“기범이는….”
차마 친구에 대한 험담을 꺼낼 순 없었다.
“그래도 니가 참 크니까 그렇지….”
- 에헷, 에헷. 형님이 절 그렇게 사랑하실 줄 몰랐어요.
시발.
- 생각보다 금방 돌아갈 거니까, 너무 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당. 걱정 붙들고 계십쇼.
“그래. 관리 잘하고.
- 넵. 얼른 복사근을 복사해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당.
“어…빨리 복사해와.”
뚝―
아.
끊긴 통화내역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나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