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김기범
발이 꽤나 빠른 편인 타자의 기습번트. 각도, 혹은 속도를 계산해봤을 때 처리해야하는 건 3루수.
“1루우!”
오른손으로 1루를 가리키고 소리쳤다. 부디, 성훈이형처럼 멋진 러닝 스로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
어림도 없지.
하얀색 내야 글러브를 스쳐지나가는 야구공이 보였다. 빠르게 백업을 달려온 성훈이형에게 잡힌 공은 그 좌표에 당분간 멈춰있었다.
“죄송해요.”
“아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가능한 위로의 말 중 최고의 말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그럴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공을 받았다.
로진으로 공을 닦는 압력은 평소보다 조금 강했다. 뽀득뽀득, 그런 소리가 들리도록.
1루를 밟고 서있는 이영호를 흘끔 보고 중앙으로 시야를 옮겼다. 키가 매우 작은 타자, 쪼그려 앉아 사인을 보내는 포수가 보인다.
하나씩.
몸쪽 높은 곳에 빠른 직구를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 그러한 이유로 보였다. 1루주자를 흘끔 쳐다보고 스트레치를 잡았다.
하나…둘…….
뻥!
“…하이볼.”
아.
배트가 나오든지, 아니면 존에 들어가서 카운트를 잡았어야 했는데. 또 그걸 노렸는데.
구심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하다 높았다는 판정을 내렸다. 나한테 공을 던지며 규학이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니 심판한테 말을 거는 걸로 보였다.
프로필상 163cm.
규진이형보다도 작은, KBO 최단신의 타자. 당연히 스트라이크존의 높이 또한 그에 맞춰 낮아진다.
이제 어쩌나.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스트레치를 잡았다. 다음으로 던질 공은 몸쪽 낮은 쪽의 직구.
하나…둘…셋…넷…다섯…….
“하잌-!”
위쪽 스트라이크 존의 변화는 클지언정, 아래쪽의 변화는 그것보다는 덜하다. 이쪽은 큰 부담없이, 언제든지 집어넣을 수 있다.
또 몸쪽?
그렇게 묻는 내 눈빛에 규학이는 검지 손가락 하나로 대답했다.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모으고 오른쪽 다리를 살짝만 굽혀주면 셋 포지션 완성. 고개는 던질까, 말까를 시전하기 위해 비규칙적으로 움찔거리면 더더욱 좋다.
…하나!
투닥―
스윙-.
“스톱, 스톱!”
“던지지마!”
바운드가 된 스플리터를 가슴팍으로 막아낸 뒤, 재빨리 일어나 공을 집어든 규학이는 2루를 노려봤다.
여러 타이밍에 나눠 던지는 투수가 있다면 글쎄, 맘 편히 리드를 잡지는 못 하겠지.
착! 하는 효과음이 떠오를 정도로 송구 직전까지 자세를 잡은 포수는 그 자세를 풀고 볼보이 쪽으로 공을 휙 던졌다.
자연스레 나에게 공을 던지는 구심에게 인사. 공을 길들이기 위해 로진을 또 이리저리 만져주었다.
플레이!
촤악!
“쎄잎!”
이번엔 심판의 플레이 콜이 나오자마자 바로 견제구를 던졌다. 리드를 잡기 위한 걸음걸이를 노려보았지만 일단은 실패.
스트라이크 카운트가 볼 카운트보다 하나가 더 많다. 이렇게 되면 주자 발이 빠르다 해도 저쪽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는 많이 줄어든다.
셋 포지션과 동시에 글러브 속으로 들어간 공은 요청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검지와 중지 끝자락에 실밥이 걸치고 나서야 방황이 끝났다.
하나…둘…셋…넷…다섯…!
뻥!
부웅―
“스윙, 아웃-.”
일단 삼진 하나 적립. 초구와 비슷한 곳으로 향한 공은 드디어 배트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지금 규학이가 취하고 있는 자세. 마치 도루 저지를 위해 벌떡 일어난 모양새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게 만들었다.
“…아, 놀래라.”
스타트만 끊어봤던 듯, 뒤로 돌아본 2루엔 성훈이형이 양팔로 x자를 그리고 있었다. 주자를 확인하니 1루에 잘 묶여있고.
공을 받아내고 타석에 들어서는 방은민을 확인했다. 그냥 무난무난한 3번타자감.
초구는 싱커를 요구하고 있었다. 몸쪽 직구처럼 보이다가 가라앉는 싱커.
지금 상황이라면, 이 공이라면, 이 타자라면 3루쪽으로 조금 빠른 타구를 굴리겠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완료되고 다시 한 번 스트레치.
하나…둘…셋…….
“뛴다악!”
계속 타이밍을 맞춰보길래 언젠가 뛸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진짜 뛸 줄이야.
딱!
그런 이영호의 도루를 방해하는 타자의 타격. 하지만 이건 이영호의 주루를 돕는 타격이기도 하다.
“투…아니, 퍼스트!”
전반적인 예상 자체가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주자가 언젠간 뛸 거라는 것도, 타격이 될 거란 것도, 또 타구의 속도나 방향까지도.
근데,
텅!
“홈! 홈!”
분위기에 압도된 3루수가 1루수의 키를 넘겨버린 건 예상 외다.
“왜 이렇게 급해, 천천히 하지.”
“그…죄송합니다.”
빠르게 백업을 갔던 성문이가 공을 잡고 내야 안으로 공을 가져오는 사이, 헌희에게 다가갔다.
부디, 이 자리의 위축이 타석에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좋을텐데.
“헌희야.”
“네, 선배님.”
“기죽지 말고. 너 하던 대로 해라. 괜찮아아, 뭐 어때.”
“네!”
타임―
“글러브에 꿀칠을 해놔. 그럼 안 미끄러질 거야.”
“예?”
“쌉소리야. 무시해.”
2아웃을 잡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주자가 1루, 그리고 3루 양코너에 위치하게 됐다.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 규학이가 타임을 부르고 올라왔다.
“왜?”
“배덕현 나올텐데, 어떻게 갈까요?”
“어….”
퀘스트에 대한 미련은 헌희를 눈에 담게 만들었다. 글러브로 입가를 막을 순 있었지만 시선처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3루요?”
내 눈 돌아가는 모양새를 봤는지, 규학이가 되묻는다.
“솔직히 좀 불안한데요.”
“괜찮아. 잘 할 거야. 2루에 주자 없으니까, 내가 리드할게.”
“네.”
규학이를 안심시키고 헌희를 쳐다봤다. 홈플레이트까지 뛰어가는 동안 생기는 잠깐의 여유, 그거면 충분하겠지.
“헌희야!”
“네!”
“나 봐라!”
“네!”
아니, 보라고.
“야!”
“예!”
이제 보네.
뻣뻣하게 굳어있는 헌희에게 보이는 내 자세는 다음과 같다. 하얀색의 주먹으로 내 왼쪽 가슴을 퉁퉁 두드리는 것.
“예에에엑!”
미친놈인가.
그에 헌희는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이래야 우리팀 답지.
쓸데없는 걸 봐버린 탓에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생각을 않는다. 야구공과 같은 색깔의 이를 내보인 채, 두 손가락으로 팔꿈치부터 글러브까지 슥 훑어내렸다.
부웅―
“스윙-”
4번타자, 찬스, 초구.
뭐 그런 단어들을 붙일 수 있는 장면에서 배덕현은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비어있는 베이스, 투수가 김한울, 뭐 그런 키워드로 초구부터 체인지업은 생각 못 했겠지.
이번엔 검지 손가락 하나만으로 모자 챙을 쿡 찍었다. 규학이도 새끼손가락으로 땅바닥을 쿡 찍는다.
1루주자를 흘끔, 흘끔흘끔 쳐다보고 왼다리를 빠르게 옮겼다. 손에서 빠진 공은 꽤나 높은 타점을 찍은 뒤,
“하잌-.”
존의 제일 낮은 구석에 안착한다. 구속을 맞춰보자면 106km 정도 나오지 않았을까.
- 107km
까비.
초구 몸쪽 체인지업에 스윙, 2구째에 바깥쪽 커브에 루킹. 결과는 둘 다 스트라이크.
내가 먼저 사인을 내기 전, 이번엔 규학이가 움직였다. 무슨 소릴 하려고 들여다보니, 내가 하려던 말과 같아 동질감에 절로 고개가 끄덕…….
촤악―
“쎄잎!”
…여졌다.
이 상황에서의 견제를, 이 타자는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기성이에게서 공을 받고 다시 사인을 확인했다. 손가락 다섯 개 모두. 직전의 사인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후우…….
슬라이드 스텝의 정도를 많이 줄였다. 왼쪽 무릎이 더 많이 올라왔고, 자연스럽게 투구에 걸리게 되는 시간 또한 꽤나 늘었다.
괜찮아.
“끕!”
던져진 공은 정확하게, 좌타자의 바깥쪽에 걸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규학이의 하얀 미트 뒤로, 갈색의 나무 조각이 보인다.
가진 공 중 가장 느린 두 개의 공을 순차적으로 구경하며 강제로 맞춰진 타이밍은 당연히,
딱―
빠른 직구를 뒤에서 치도록 만들어버린다.
거의 좌타자의 왼쪽 무릎 쪽에서 출발한 공은 자연스럽게 3루수 쪽으로 향하게 됐다. 4번타자가 쳐낸 공 답게 공에 씌워진 파워 자체는 강한 편이지만,
“2루 늦어! 1루!”
“뻐스트, 뻐스트!”
그래도 프로 타이틀 달고 있는 내야수라면 잡아야지.
“헌희야, 천천히. 여유 많다!”
나까지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살짝 불안한 자세로 공을 잡아내고선 하나, 둘, 셋, 네 번의 스텝을 밟고 공을 던졌다.
다른 타자라면 진작에 1루를 밟았을 타이밍이지만 발이 오지게 느린 배덕현이라면 충분히,
“아웃-.”
잡아낼 수 있다.
띠링-!
[수비 불안]
- 3루수 땅볼을 2개 이상 잡아내세요 (2/2)
- 보상 - 슬라이더 +2, 스플리터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69
커브 - 57
슬라 - 49+2=51
스플 - 49+2=51
체인 - 53
싱커 - 53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입가에 미소를 달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보다 뒤에서 출발할 헌희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헌희야, 넌 꿀이다!”
“꿀 많이 드시면 당뇨 생깁니다악!”
미친놈인가.
쌉소리에 껄껄껄 웃으며 나를 앞질러간 헌희를 얼른 따라갔다.
* * *
목요일.
비스코 러너즈와의 남은 두 경기 중 하나는 우천으로 취소, 이후 재개된 목요일 경기는 원하가 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화요일과 목요일, 이 두 경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연히 헌희. 타격에선 화끈하게 불을 뿜뿜 뿜어내다가도, 수비에선 ‘롸’끈하게 불을 질렀다.
대타감. 아니면 2군에서 좀 더 묵혔다가 올려라.
고작 두 경기를 가지고 원하의 팬들은 그렇게 평가했다. 확실히 안정성의 측면에서 많이 부족하긴 했지.
그리고 오늘 금요일, 또 다시 홈에서 KP를 맞게 될 주말 3연전의 첫 날. 배팅 라인업과 수비 포지션은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있었다.
전성문, 강성현, 남기성, 박진형, 윤승주, 문규학, 이성훈, 김기범, 유훈.
1번 자리에서 큰 인상을 남기지 못 한 훈이는 다시 9번으로, 9번에서 쏠쏠하게 활약했던 성문이는 1번으로.
조금씩 타격감을 끌어올린 규학이를 무려 6번까지 당기고, 예전 규학이과 비슷한 타격을 가진 기범이는 옛날 규학이 자리에.
“와…선발 얼마만이냐.”
본인의 선발 소식을 들은 기범이는 꽤나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긴장되냐.”
“어. 되지.”
꽤 큰 키. 체격도 다부지고. 발이 빠른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무식하게 빠르지는 않다. 기범이의 가장 큰 장점은 주루 센스.
1억.
기범이의 메인 포지션을 잡아보자면 ‘대주자’. 가진 거라곤 주루 센스 하나 밖에 없는데 엄연한 고소득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오늘 너한테 공 많이 간다.”
“오케에에. 다 잡아주게서어어어.”
예상이 맞다면, 주중 3연전엔 헌희를 계속 선발로 내보냈으니 주말 3연전엔 기범이가 계속 선발로 나설 거다.
테스트.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명진이가 돌아오기 직전의 3연전, 그리고 올해를 끝으로 FA 계약을 맺게 되는 명진이가 혹시라도 팀을 떠나게 됐을 때에 대한.
당연히 기범이는 물론이고 저기서 무섭게 배트를 돌려대는 헌희 또한 알고 있을 거다. 지금이, 언제 다시 다가올지 모를 기회라는 걸.
“펑고!”
딱―
유격수 위치에서 공을 잡은 기범이가 2루 쪽으로 툭, 공을 토스했다. 정확하게 제 오른쪽 어깨에 뜬 공을 잡은 성문이는 휙 돌아 1루에 공을 던진다.
딱―
이번엔 반대로. 성문이가 잡고 제 오른쪽으로 토스. 살짝 빠진 공이지만 기범이는 그걸 어떻게든 잡고는 빙글 돌아 1루로 송구한다.
올…….
마침 오늘 선발도 준혁이. 외야보다는 내야, 내야 중에서도 특히 유격수 쪽으로 많은 공들이 향할 예정이다.
명진이만큼은 아닐지라도, 안정감은 충분히 갖고 있는 녀석이니까. 보고 있자면 편하겠지.
뻥!
“스츄라아악!”
…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범이의 타석을 보면 안 됐다.
작년, 살짝 부침을 겪었던 KP 타선은 올해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투수도 마침 치라고 던져주는 준혁이, 마음껏 배트를 휘둘렀다.
빠른 타구, 느린 타구, 어려운 타구, 모두 기범이는 어떻게든 잡아 카운트를 만들어냈다.
절박함.
절박함이라는 버프를 갖고 있는 백업 내야수는 어떻게든 본인의 120%를 발휘해냈다.
수비에서만.
2회말 공격, 2사에 2루와 3루. 기범이는 상대 선발이 공 세 개를 던질 동안 감히 배트 한 번을 휘둘러보지 못 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와야했다.
아랫입술을 물고 불편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아하니 본인에 대한 자책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아, 괜찮아, 괜찮아! 담에 또 치면 되지!”
당장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빠르게 뛰어가서 기범이의 등을 두드려 주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