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90화 (90/190)

90화. 타격전

타격전.

KP 스타즈와 경기를 치르게 되면 대부분의 경기는 타격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화끈하게 불을 키우는 그들의 타선 때문에.

또 ‘롸’끈하게 모든 걸 내던지는 투수진과 수비진들 덕분에.

필연적으로 한 명의 타자가 많은 수의 타석을 소화하게 된다. 이는 8번타자에 속한 기범이 또한 마찬가지.

이제 겨우 7회말이 끝났는데 기범이는 지금까지 무려 4번의 타석을 경험했다. 게다가 4번의 타석 모두 득점권 찬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좋지 못 했다. 삼진, 삼진, 병살, 그리고 삼진.

일반적인 타자라면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구나, 라든지. 아니면 오늘따라 이 새끼가 정신줄을 놓고 플레이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거다.

하지만 우리 기범이 같은 경우는…….

“한울이 올라가자.”

“네네.”

그냥 못 치는 거다. 참 안타깝기도 하지.

9 대 8. 아슬아슬하게 한 점만을 앞선 상황에서 등판하게 됐다.

플레이트 옆에 덩그라니 놓인 로진을 집어들었다. 폭폭,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내야수들이 라운딩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훈이형 다음 기범이 차례. 기성이가 기범이쪽으로 공을 빠르게 굴려준다…….

통, 통, 통―

그러면 적당한 바운드를 타고 유격수 부근으로 튀어온다. 바운드에 맞춰 오른발을 콩, 콩, 콩, 뛰다가 잡은 뒤 탄력을 이용해 2루로 토스.

깔끔하네.

“선배님!”

“아…어.”

포수엔 규학이가 빠지고 주호가 들어가있다. 오늘도 마찬가지, 대타의 여파.

일단 헌희 때랑은 다르게 기범이가 들어가 있으니까…내쪽에서 리드한다면 괜찮게 이닝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

띠링-!

[포수를 믿어보자]

- 포수의 사인대로 던져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전구종 +2

아.

“선배!”

“어….”

과연, 주호는 리드를 어떻게 가져갈까.

뻥!

일단 연습투구를 이어가며 잠시 생각해봤다.

많이 성장하기는 했다만, KP의 불타선을 상대로 주호의 리드가 통할까.

플레이!

그건 나도 모르지.

2번타자, 류승훈.

하필 상대할 타선도 2번부터. 왼쪽 타석에 들어선 류승훈을 보자 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호야. 초구는 싱커 가자. 싱커 좋잖아.

중지, 약지, 소지.

본인과 다른 의견에 고개가 제멋대로 꺾이려는 걸 참아내는 건 정말 많이 힘들었다.

“후우….”

지금까지 와인드업이 이렇게 불안했던 적이 있던가.

직구 그립을 잡고,

“끅!”

있는 힘껏 공을 때렸다. 류승훈의 몸쪽으로 향하는 직구. 가만히 놔두면, 오는 그대로 잡기만 하면 스트라이크다.

제발.

뻥!

“…스트라잌!”

아이고.

주호가 잡아도 스트라이크처럼 보여야 한다.

너무 가운데로 몰리지 않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타자가 쳐도 범타가 나올 수 있도록 강하게 던져야 한다.

3중고를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 물고 던진 보람이 있었다.

그래, 초구에 몸쪽 직구 넣었다. 움찔거리는 꼴을 보니까 타이밍이 영 안 맞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니?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

내 눈치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주호는 백도어성의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오른쪽으로 향하려는 목에 힘을 주고 아래로 내렸다.

어쩔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있는 힘껏 던지자.

“깍!”

딱―

배트가 나왔다. 옛날의 슬라이더 각도를 생각했는지, 공보다 조금 아래를 퍼올리게 된 궤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

“마! 마이! 오케, 어케엑!!”

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떠있는 공을 멍청히 쳐다보고 있자니, 뒷편에서 기범이가 괴성을 질러댔다.

소리의 발원지를 기준삼아 몸을 돌렸다. 양팔을 공중에 허우적거리며 낙구지점에 선 기범이의 고개가 있는 힘껏 위로 향해있었다.

탁!

“아웃-.”

거진 아파트 10층 높이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높은 내야 플라이. 일단 기범이가 쉽게 잡아내며 첫 카운트 하나가 올라갔다.

잡았으면 됐지.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먹자.

3번타자, 김기윤.

“아이고야….”

하지만 다음으로 나서는 타자의 이름을 듣곤 곡소리가 나왔다.

또 다른 국대급 타자. 타격 일변도인 KP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수비까지 되는 존재.

김기윤은 류승훈과 반대편 타석에 서서 배트를 휘적휘적거리고 있었다.

내 피지컬로, 주호의 리드로 잡아낼 수 있을까.

내야 플라이 아웃 이후 돌아온 공은 나를 거치자마자 곧장 볼보이가 앉아있는 쪽으로 향했다.

사실 공 멀쩡했는데, 그냥 시간 좀 끌어보고 싶었다.

주호가 초구로 요구한 구종은 바깥쪽 슬라이더. 걸치게.

이건 좋은 공이라 생각한다. 슬라이더는 싱커처럼, 언제 던져도 명분을 충분히 가지는 공이니까.

근데…너 제대로 잡을 수는 있냐.

뻥!

선수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퍼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잘잡으면 스트라이크, 못 잡으면 볼.

심판도 사람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되는 위치가 있다.

지금의 위치가 그러했고,

“볼.”

지금의 캐칭이 못잡은 캐칭이고.

그냥 오는대로 잡았다면 편안하게 심판의 오른팔을 들어올렸을텐데, 변화를 보이는 공을 따라가다시피하는 캐칭으로는 절대 콜을 얻어낼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빠졌나요?

반 개만, 반 개 정도만.

이제는 본인도 이유를 알고는 있다는 점.

예전처럼 본인이 그렇게 잡아두고도 왜 안 잡아주는지 모르지는 않는다.

반구를 해두고 주호는 제 가랑이 사이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침울해한다거나 위축된 모습이 아닌, 생각에 골똘히 잠기기 위한 절차로 보였다.

아주 짧은 생각의 정리 후, 퍼뜩 고개를 들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이번엔 몸쪽으로 꽂히는 싱커를 원했다.

괜찮네.

띡, 퍽!

“파울, 파울!”

둔탁한 소리가 두 번 연속으로 났다. 배트의 목부분에 맞은 공이 땅바닥이 아닌 타자의 정강이를 맞춰버린 것이다.

“어으….”

저거, 엄청 아프다. 진짜, 진짜 아프다.

풋가드를 차고 있어도 아프다. 마치 땅을 타격하고 대미지는 지하 깊숙한 곳에 뿌려버리는 대지하 미사일 같은 존재니까.

타석 주변을 움찔거리며 뛰어다니다 이내 배트를 다시 집는 걸 보니 타석은 계속 이을 생각인가보다.

플레이!

다시 플레이 콜을 받고 주호의 가랑이를 주목했다. 1-1라는 카운트, 직전 공에 타자는 앞발에 강한 타격을 입었다.

여기선 몸쪽에 빠른 직구가 제일 좋지 않겠니?

지금 타자는 디딤발을 제대로 사용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이다. 이를 이용하려면, 당연히 몸쪽 직구가 제일 좋은 선택이다.

몸쪽에 슬라이더.

“…….”

역의 역을 노렸다, 뭐 이런 느낌이기를 바란다, 주호야.

첫 타자를 그래도 수월하게 잡아냄으로 얻은 자신감을 이어보기로 했다. 양손을 머리 뒤로 넘기며 빠르게 그립을 바꿨다.

“…읍!”

던져진 공은 타자의 허벅지쪽으로 향했다. 이건 차라리 쳐줬으면 좋겠다. 가만히 지켜본다면, 주호의 캐칭으로는 볼 판정을 받을 게 눈에 선하니까.

딱-!

근데 쳤다. 좀 잘쳤다.

슬라이더가 빠른 계열의 구종이라곤 하지만 직구보다는 그래도 느리다. 당연히 찰나의 틈이 생긴다.

김기윤 정도 되는 타자라면, 기술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틈이다. 이건 안타다, 싶은 마음에 딱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숏!”

“1루우!”

오?

나와는 다르게 내야진의 목소리엔 희망이 느껴졌다. 그에 나도 힘을 얻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1루우, 빨리!!”

마치 그림과도 같은 슬라이딩 스탑.

기범이는 3루쪽으로 빠져나가려는 공을 어떻게든 막아내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빠른 태세변환을 하얀색 손가락에 걸친 채 1루를 가리켰다.

“윽!”

신음성이 나한테도 들릴 정도로, 몸을 휘청거린 기범이가 1루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집어던졌다.

빠르게 날아가는 송구를 따라가면 기성이의 미트에 들어가는 하얀색 야구공, 그리고 베이스를 밟는 김기윤의 발이 순차적으로 보인다.

“아웃!”

잡았다!

“예이! 기범이 싸라있네에!!”

“내가 좀 잘생겼지!”

멋진 호수비는 당연히, 투수의 마음을 사정없이 나대도록 만든다.

양팔을 공중에 휘적거리며 자축하는 모양새는 묘한 중독성이 있어 나까지 따라하게 만들었다.

4번타자, 김성수.

2아웃을 잡았다. 그 중 하나는 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기범이의 도움이 대부분이었지만 잡아냈다. 잡아낸 거다.

그럼 됐어.

야구라는 건 생각보다 단순해서 과정이라는 걸 절대 무시할 수 없지만, 때로는 무시해도 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렇겠지.

김기윤의 자리를 승계한 김성수는 조금 요란한 준비자세로 초구를 마주했다.

뻥!

“스트라잌-!”

초구는 바깥쪽의 커브.

이걸 주호가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잡아냈다. 아까 슬라이더의 기억을 잊지 않았나보다.

커브로 초구를 잡았으니까, 다음은 뭘 던지면 좋을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은 제 왼쪽에 서있는 타자를 위아래로 훑는다. 이내 고개를 처들고 하이패스트볼 하나를 요구한다.

하이패스트볼을 만능처럼 여기는 걸 미련하다 해야할지, 0-2도 아닌데 이런 공을 요구하는 게 참 담대하다고 해야할지.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드업을 마쳤다. 왼다리가 움직이고 파워포지션이 만들어졌을 때, 제자리에서 살짝 일어나있는 주호가 보였다.

“악!”

뻥!

애매하게 몰려버리면 장타 맞기 딱 좋은 하이패스트볼. 정말 있는 힘껏, 아싸리 들어가지 말라는 마음으로 던졌다.

“볼-.”

144km.

당연히 볼.

스윙이 나와줬다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좌우가 아닌 상하를 생각하게 된 주호를 조금 더 칭찬해주고 싶다.

다음 공은? 설마 스플리터나 체인지업은 아니지? 아니, 차라리 스플리터가 나을수도 있겠는데?

나조차도 주호의 볼배합을 종잡을 수가 없는데, 타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주호는 또 고개를 푹 숙여가며 정리한 생각을 내보였다. 결과물은 몸쪽 낮은 쪽의 직구.

“흐음.”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뒤는 생각하지 말고, 당장에 충실하자.

“끕…!”

촥! 하는 소리가 손끝에서 들렸다. 제대로 공을 때렸다는 의미겠지. 평소보다 힘을 받고 날아간 공은 정확하게 몸쪽 낮은 곳으로 향했다.

띡!

제대로 대비를 하지는 못 했는지, 배트의 살짝 안쪽 부분에 맞고 위로 붕 뜨는 타구.

“아…쒯.”

텍사스 히트.

정타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던지는 입장에선 기분이 더욱 더러운 타구였다. 그래, 이건 내 탓도 아니고 주호의 탓도 아니다. 그냥 운이 없었…….

“…엉?”

최고점을 찍고 천천히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타구를 지켜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열심히 낙구 지점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그라운드에 들어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인 모자까지 저 멀리에 내던지고, 기다란 편의 머리터럭까지 휘날리며 외야 방향으로 뛰는 기범이는 정말,

“와, 와아아악!!”

정말 멋있었다.

바스켓 캐치.

외야 방향으로 뛰어가며, 제 앞으로 떨어지는 공을 감각적으로 잡아내는 모습은 전설적인 유격수들보다도 훨씬 대단해보였다.

“예에에엑!!”

“끼보미 뭐야아악!”

“호오오오오!!”

분위기는 단번에 최고조!

띠링-!

[포수를 믿어보자]

- 포수의 사인대로 던져서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전구종 +2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69+2=71

커브 - 57+2=59

슬라 - 51+2=53

스플 - 51+2=53

체인 - 53+2=55

싱커 - 53+2=55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퀘스트 이름 바꿔야 되는 거 아니냐. 포수를 믿는 게 아니라 기범이를 믿자, 뭐 이런 걸로.

“야, 형이 치킨 쏜다.”

“니가 왜 형이세요.”

“치킨 사주면 형 아니냐.”

“아, 형님!”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기범이와 쌉소리를 지껄였다. 먼저 들여보낸 뒤, 그래도 고생한 주호를 향해서도 글러브를 들이밀었다.

눈치껏 본인의 포수미트를 탁- 하고 맞췄다.

자, 이제 8회말에 점수 더 내고, 9회초만 막으면 또 우리는 승리를 거두겠지.

따악―

“…아.”

…라는 생각은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포와 어깨를 나란히하고선 멀어져갔다.

8회말, 삼자범퇴. 9회초, 1실점.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9회말에 돌입하고야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여.”

승주의 2루타 이후 규학이가 2루 땅볼로 주자를 진루시켰지만 끝내기 찬스에서 성훈이형이 그대로 삼진.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8번타자!! 김!! 기!! 범!!

우리 기범이.

속으로 기범이를 대신 할 대타감을 물색했다. 하지만 이미 거친 타격전으로 인한 선수교체로 인해…….

“기범아, 제발 쳐라….”

없다. 그냥 기범이 밖에 없다.

저쪽 배터리가 진짜 똥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기범이를 거를 일은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따악-!

“와!”

“오오오!!”

기범이도 뻔히 아는 사실일테고.

와아아악-!!

김기범!! 김기범!! 김기범!!

끝내기 안타를 때린 타자를 향해 덕아웃의 모든 선수들이 달려나갔다.

누구는 발로 차고, 누구는 옷을 잡아당기고, 또 누구는 음료수를 쏟아붓고.

내일 또 시합이 열릴 그라운드가 잔뜩 젖어들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기범이 싸라있네에엑!!”

“내가 좀 잘생겼지이익!!”

된다.

원하 챌린저스의 선수단 모두는 그런 생각 하나만을 갖고 팬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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