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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93화 (93/190)

93화. 집중

“으음….”

상수에게서 승리를 거둔 다음 날의 오전,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삐그덕, 하고 발악하는 의자의 의사표현을 무시하고 다리까지 슬쩍 꼬며 턱을 괬다.

“…스탯.”

띠링-!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71

커브 - 61

슬라 - 55

스플 - 55

체인 - 57

싱커 - 57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랜덤 특성 획득! 해제 시 특성 1개를 랜덤으로 획득합니다.

가장 최근에 얻었던 특성인 편안. 냉정하게 말해, 편안이라는 특성 자체가 나에게 있어 엄청 대단한 특성은 아니다.

직접적으로 나한테 버프가 되는 부분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닌 동료들의 입장에선 커다랗게 느끼는 모양이다.

부담감에 승모근이 쪼그라든 타자의 근육이 풀어진다.

긴장감에 스트라이드가 과했던 투수가 제구를 잡아간다.

해탈과 불편처럼, 소소하지만 쌓인다면 분명 커다란 반작용으로 돌아온다.

“…아.”

편안 특성을 얻었을 때가 떠올랐다. 저기 스탯창에 점멸하는 텍스트에 손가락을 들이대면 따란- 하고 새로운 특성을 얻게 된다.

마음의 준비.

“후후, 하하, 후하후하.”

숨을 몇 번이나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텍스트를 향해 살색의 검지 손가락이 다가갔다.

- 띠링!

- 랜덤 특성 획득!

- 특성 -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예?”

집중할 수 있는 대상. 내가 집중을 해야 하는 대상. 누가 있지?

일단 타자가 있지. 그리고 또…….

“…있나?”

막연하다. 너무 막연하다.

“집중…집중….”

꽤 자란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쓰러져갔다.

내가 집중력이 약했던가? 아닌데, 강한 편 아니었나.

오른쪽 위를 향하던 정수리가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써봐야 알겠는데.”

* * *

2승 1패 같은 1승 1패.

말 같지도 않은 서술의 시점을 화요일이 아닌 수요일부터로 잡는다면 개연성은 충분했다.

2게임 차를 1게임 차로 줄였다는 것에 일단 만족을 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이 만족이라는 것도 할 줄 알아야지.

단지 불만족스러운 한 가지가 있다면…….

“집중…집중….”

“뭔 소리야.”

두 게임 동안 등판을 못 했다는 것.

준혁이의 완봉과 태웅이의 삽질은 결국 이틀 동안의 휴식을 생산해냈다.

게슈탈트 붕괴.

집중이라는 단어에 꽂혀 계속 반복하고 있자니 정신병 비슷한 게 온 것 같다.

“집중. 집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미친놈인가.”

멍청히 한 개의 단어만 되뇌이고 있자니 옆자리에 규진이형이 와서 앉았다.

“형. 집중이라는 게 뭘까.”

“갑자기 무슨 쌉소리야.”

“나 지금 되게 진지해.”

“집중이 집중이지 뭐야. 저기, 동균이한테 가서 좀 알려줘라.”

“아…그러네.”

5선발 오디션에서 가장 높은 스코어를 쌓아가는 대졸 3년차 투수.

동균이가 오늘의 선발투수였다.

“윽!”

던질 때마다 본인도 주체를 못 하고 튀어나오는 기합소리가 특징인 아이.

“…윽!”

뻥!

그래도 뭐, 시원시원하게 던지네.

불펜 한 구석에 위치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달달달달 떨며,

펑!

“아이, 굿볼!”

잠시 불펜의 소리를 감상했다.

포수미트에서 터지는 포구음 소리.

받은 포수가 시끄럽게 지르는 괴성.

투수가 공을 던지며 오른발이 땅에 끌리는 소리.

모두 내게 있어서 한 장의 클래식 음반과도 같다.

좋네.

“지금 몇 개야?”

“지금…19개입니다.”

“라스트.”

“네, 라스트, 직구!”

“아이, 직구!”

뻐엉!

“고생하셨습니다!”

음반 제작에 도움을 주었던 파트너에게,

착실하게 가이드를 해주었던 프로듀서에게,

그리고 본인의 연주를 들어준 관객들에게 인사.

후련하게 웃던 동균이는 근처의 수건을 집어들었다. 모자를 벗고 나와 살짝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왜 굳이 내 옆에 안 앉고.

“…동균아.”

“예, 선배님.”

그럼 내가 가야지.

“집중이 뭔지 아냐.”

“아…죄송합니다.”

“아니, 왜 죄송한데.”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뭐라 까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냥.”

“집중…말씀이십니까.”

“사전적 의미 말고. 니가 생각하는 집중이 뭐냐.”

“집중….”

게슈탈트 붕괴를 옮기자.

동균이도 집중에 꽂혔는지 계속 집중, 집중, 집중, 중얼거렸다.

“그냥…몰두하는 거 아닙니까.”

“몰두. 몰두 좋지.”

“그냥 자기 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되는.”

“좋은 건가.”

“좋은 거 아닙니까? 자기 하려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넌 집중 제대로 하고 있고?”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아, 제발.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동균이는 잠시 내버려두고,

따악-!

딱-!

불펜을 나섰다. 문의 손잡이를 놓자마자 보이는 건 시원하게 우중간과 좌중간을 비행하는 타구들.

타자는 시원시원한 결과가 마음에 드는 듯 후련하게 웃으며 배팅 케이지에서 벗어나며 나에게 인사한다.

“헤헷, 형님. 복사한 복사근 좀 구경하시겠습니까.”

“…….”

꼬박 10일을 다 채우고서 재등장한 명진이. 첫 만남부터 쌉소리를 지껄인다.

“아냐…괜찮아. 그런 거 안 봐도 돼.”

“아쉽네요.”

컨디션이 꽤나 좋아보여서 마음이 상당히 놓였다.

“그, 그래. 몸 상태는 괜찮고?”

“넹. 배팅이랑 수비랑 주루랑 다 문제 없습니다.”

“고생했다…그래….”

“복사근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쇼. 언제든지 또 복사해드리겠습니다.”

복사근 복사해드립니다!

명진아, 제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미친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경기 전 훈련이 모두 마무리되고, 잡다한 의식을 진행한 후 맞이한 1회초 공격.

딱!

명진이는 오랜만에 등장한 1군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연습 배팅 때부터 타구가 날카롭더니, 우중간 먼 곳까지 타구를 굴려놓고 본인은 3루 베이스를 밟고 환하게 웃었다.

그 뒤의 그림은 원하의 타선이 터질 때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성현이가 2루타를 뺏어내고, 기성이가 볼넷을 골라나간 뒤 진형이가 단타, 그리고 승주의,

따악-!

“갔다! 갔다!”

“갔다아아악!!”

클러치 홈런.

빨간불이 없다고? 그럼 계속 달려야지!

시작하자마자 5점을 뺏어낸 타선은 계속해서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7점.

개시하자마자 화끈하게 터진 타선은 시작부터 커다란 점수를 안겨주었다.

좋은 의미의 부담감을 등에 이고 마운드에 오른 원하의 선발투수 또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딱―

유격수 땅볼.

틱!

유격수 땅볼.

“스츄아아, 아웃!”

삼진, 이닝 종료.

공 8개로 1회말을 마무리한 동균이가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은 듯 열심히 덕아웃으로 뛰어들어왔다.

2회초도 2회말도, 3회초도 3회말도, 그 이후로도. 흐름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우리 타선이 터지면 우리 투수는 잠시 식혀주고.

14점차까지 벌어진 점수차는 결국 비스코의 철벽 불펜의 뜬금없는 등판까지 주문했다.

리그 최강 불펜, 비스코.

어찌보면 필승조 하나하나가 리그 정상급인 비스코의 모순과도 같은 부분.

개털리고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필승조도 나와서 던져야 된다.

이게 생각보다 아주 큰 부분이다. 이렇게 야금야금 갉아먹으면 내일 경기, 또 내일 모레 경기에서 또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야씨, 나도 등판 좀 하자.

결국 오늘도 등판을 해보지 못 하고 17 대 3의 압도적인 스코어로 하루가 끝났다.

다음 날, 혁준이의 선발 등판 날.

혁준이는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뒤 8회에도 등판했다.

일단 몸이라도 풀고 있으라는 지시에 오늘은 캐치볼이라도 하는구나…할 때,

“한울아, 지금 나가자.”

“아, 네.”

급작스러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첫 번째 타자에게 2루타, 다음 타자를 상대하며 폭투를 포함한 볼넷.

3루를 밟고 서있는 김욱을 지나 마운드를 밟았다.

무려 나흘만의 등판이다. 확실히 불펜투수 체질이라 그런가, 중간에 껴있는 3일이 대단히 길게 느껴졌다.

“후!”

덕분에 피로도 또한 제로. 쌩쌩하게 던질 일만 남았다.

띠링-!

[집중하는 모습]

- 승계주자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1

포수의 머리 위에 떠있는 텍스트를 무시하고 그 아래에서 손가락이 어떻게 꼼지락거리는지를 확인했다.

검지 손가락이랑 중지 손가락이랑 약지 손가락.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좌타석에 들어선 배덕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배트를 어깨 위에 걸치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는 모습.

이번엔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려 동점주자를 확인했다.

후덕한 체구의 방은민은 어디가고 날렵한 모습의 대주자 이정은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빵!

“볼-.”

운이 좋다면 병살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희망으로 던진 싱커는 콜을 받아내지 못 했다.

살짝 빠진 건지, 낮은 건지.

규학이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니 같은 주제로 심판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다.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금방 털어내고 로진이 묻은 손으로 공을 뿌득뿌득 문질렀다.

공의 미끌거리는 부분이 사라지자 맘 편하게 사인을 확인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아닌, 오른손이 전체적으로 제 오른쪽 사타구니를 건드린다.

견제 사인.

고개를 끄덕이고 셋포지션에 돌입했다. 하나, 둘, 셋에서 빠르게 몸을 틀었다.

촥-!

“세잎!”

딱히 잡을 생각은 없었기에 곧장 기성이에게 글러브를 까딱거렸다.

이후의 사인은 어떤 의미로 보면 꽤 과감한 요구였다. 이런 상황에서 체인지업이라니.

그만큼 자신이 있으시다는 거지.

규학이의 어깨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란 계산 하에 고개를 끄덕였다.

1루의 상황을 확인한 양손이 모여들었다.

슬금, 슬금, 슬금…….

조금 전의 견제 직전까지와 같은 시간대가 지났을 때,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1루주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묘한 감각이 너무나도 어색해 그냥 거기서 발을 빼버렸다.

우우우우-!

빨리 처맞아라! 하는 홈 팬들의 야유를 무시하고 이 감촉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집중?”

특성의 존재를 떠올린 머리가 빠르게 180도 돌아갔다. 머리만 돌아가면 큰 일 나니까, 몸통도 같이.

1루를 밟은 채 주루장갑을 재결속하는 이정은이 보였다.

“아.”

알겠다. 이제 알겠다.

“플레이!”

집중할 대상이 늘어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다. 아니, 잘 알겠다.

한 번 잡은 감은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었다.

“오케, 오케이.”

다시 사인을 확인했다. 바뀌지 않고 체인지업 사인 그대로.

하지만 글러브 속으로 들어가는 그립은 직구의 그립과 같았다. 들어가서 또한 바뀌지 않았다.

뛸 생각이 아주 많으십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견제라도 당하면 아주 큰 일이 나시겠군요.

슬금…슬금…슬금…….

이정은이 조금씩 베이스에서 멀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한 발만 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다가,

“읍!”

견제구를 던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피칭 때처럼 시합소리가 섞일 정도였다.

촤악―

그렇게 세게 던진 보람이 분명 있었다. 태그 후 글러브를 들어보인 기성이를 향해 1루심이 주먹질을 했다.

“아웃!”

우우우우-!!

대주자도 판정에 크게 불만은 없는지 미련없이 일어나 그대로 쭉 뛰어갔다.

글러브와 공으로 박수를 통통통 친 뒤 나에게 돌아온 공을 받았다.

뒤에서 거슬리던 존재 하나를 치워내니 타자가 더욱 작게 보였다.

주자 상황과 아웃 카운트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포수의 사인 또한 바뀐다.

몸쪽 직구.

살살 꼬드겨보자던 방향성은 과감한 방향으로 단 번에 비틀어진다.

3루에 주자가 있음에도 왼발을 뒤로 빼고 와인드업을 시전했다.

괜찮아.

그럼에도 3루주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서 느낄 두려움이 사라지니,

“끄윽!”

맘 편하게 강한 공을 던질 수가 있었다.

몸쪽에 제대로 탄착되는 직구. 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배트가 바로 나온다.

딱-!

그래도 4번타자라고, 어떻게든 정타 비슷하게는 만들어 내는…데…….

…어?

시야에서 배경이 조금씩 페이드 아웃된다. 대신 그 자리를 하얀색의 야구공이 꿰찬다.

라이너.

빡!

“윽, 시발!”

왼손바닥의 고통을 감미할 새도 없이, 곧장 공을 빼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3루를 향해 힘껏 송구했다.

시야의 부재로 인해 부정확해야 할 송구는 특성의 보정을 받아,

탁-!

“아웃!”

멈칫, 거렸던 주자의 오른손을 정확하게 때렸다. 바로 때리면 아프니까, 글러브 한 겹이 패드가 되어주었다.

띠링-!

[집중하는 모습]

- 승계주자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1

제구 - 최상

구위 - 상

체력 - 중

포심 - 71

커브 – 61+1=62

슬라 - 55+1=56

스플 - 55+1=56

체인 - 57+1=58

싱커 - 57+1=58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여어, 한울이 호수비!”

“형 혼자 다해요!”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내야진과 포수가 뭐라뭐라 하기는 했다만, 그제서야 판별되는 왼손바닥의 고통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손 괜찮냐?”

“아…아파요….”

머리를 긁적거리던 코치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기 퇴근을 명령했다. 말이 조기퇴근이지,

“…아.”

그냥 병원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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