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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95화 (95/190)

95화. 저두요

두근거림과 편안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공존할래야 할 수가 없는 두 단어는 분명 함께 앉아있을 수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헤에! 으헝….”

급하게 집어먹은 고기의 온도가 예상치를 웃돌자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실례인 걸 뻔히 알면서도 크게 웃어제꼈다.

“으으…웃지 말아요.”

“식사 하셨다 하지 않으셨어요?”

“네? 아, 네! 먹었…어요.”

“점심엔 뭐 드셨어요?”

“어…그…피자 먹은 것 같아요오….”

같아요?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후우….”

“괜찮으세요?”

“네에…입 천장 다 까지기는 했는데, 괜찮을 거예요.”

헤헤, 하고 웃는 모습 또한 너무 귀엽다. 다만 아까와 같은 커다란 웃음보다는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박해진 선수 최근에 또 잡으셨잖아요? 올해 두 번 만나서 두 번 다 잡으신 거죠?”

“그렇게 되죠.”

“와…맨날 홈런만 맞으셨는데.”

굳이 안 집어주셔도 괜찮은데.

악의가 존재하지 않는 표정이기에 더욱 찔린 명치가 아팠다.

“한울 씨는 계속해서 성장하시네요.”

“성장…더 해야죠.”

“지금보다 더요?”

“계속 해야죠. 이 정도로는 부족하니까요, 아무래도.”

“음….”

분홍색 입술 사이에 껴있던 젓가락이 빠져나왔다.

“한울 씨는 꿈이 뭐예요?”

“꿈이요?”

“네.”

“뭐…팀 우승하고…박해진 삼진 잡는….”

“아뇨. 야구 말구요.”

“야구가 아니면…인생에 있어서?”

“네.”

“딱히….”

턱의 높이를 해발고도삼아 밑으로 잠긴 시야 속에 과하게 익혀진 삼겹살이 보였다. 저 혼자 살겠다고 삐쭉 튀어나온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간 고기를 옆으로 치워냈다.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평범하게 살고 뭐…잘 살고. 그런 거죠.”

“아….”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찰해 볼 걸 그랬나.

“막상 어렵잖아요. 그런 게. 평범하게 산다는 게. 누구는 너무 잘나서 탈이고, 누구는 너무 못나서 힘들고.”

“평범의 기준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뭐….”

음…….

“적당히 먹고 살만큼 직업 있고. 좋은 사람 만나고. 결혼 잘하고. 그거면 되지 않을까요.”

막연한 걸 싫어하는 내가, 그 어떤 발언보다 막연한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럼 민영 씨는요?”

“네? 저요?”

본인에게 질문이 반송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지 화들짝 놀란다. 흰쌀밥이 절반 넘게 남아있는 공기밥을 뒤적거리다가 민영 씨가 답했다.

“저도…비슷하지 않을까요.”

“평범하게?”

“평범…이랑은 조금 거리가 멀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는, 잘살고 싶어요.”

“잘산다라….”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요.”

잘산다, 금전적인 여유가 많다.

같은 말이 아니었나.

질문지를 얼굴에 써붙이고 지긋하게 쳐다보자 해설지를 보여주었다.

“직관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겠네요.”

“행복하게. 행복하게 잘살고 싶다.”

“네.”

내 앞에 놓인 공기밥 그릇 안엔 흰쌀밥이 반의 반 정도 남아있었다. 거기서 딱히, 유의미하게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식사 다 하셨으면 나갈까요?”

“아, 네.”

어색하게 웃는 민영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옆에 있던 가방을 열더니 지갑을 재빨리 꺼냈다.

아뇨아뇨, 제가 살게요.

에에! 제가 같이 먹자고 한 건데요, 제가 사야요!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사장님,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아뇨, 이걸로 해주세요.

이걸로 안 해주시면 여기 또 안 올 거예요!

결국 하얀색의 카드가 리더기에 꽂혔다. 갈색의 카드는 쓸쓸하게 내 지갑 속으로 돌아갔다.

사장님, 혹시 차 언제까지 세워도 돼요?

어디 가시게?

잠깐 돌아다니면서 소화만 좀 시키고 올게요.

예, 뭐. 이 시간에 차 갖고 오는 사람도 없으니까, 천천히 와도 돼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내일은 뭐하세요?”

“내일은 뭐…쉬어야죠. 아무것도 안 하지 않을까요. 늦잠도 자고, 게임도 조금 하고.”

“헤에….”

일요일 밤, 건대역 근처는 여전히 많은 인구수를 자랑했다.

손을 마주 잡고 웃으며 발을 맞추는 커플.

닭꼬치를 열심히 굽는 노점상.

귓가에 이어폰을 끼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

우리는 그 사이에서 방금 먹은 삼겹살을 홍보하며 돌아다녔다.

각자 오른손에 들려있는 차가운 커피.

어긋난 박자를 타고 움직이는 네 개의 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시선.

“민영 씨는 내일 출근하시죠?”

“아…굳이 언급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아아….”

“회사 생활은 어떤데요?”

“욕해도 돼요?”

문득, 곱디 고운 민영 씨가 상욕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네.”

“…….”

대놓고 네, 라는 선택지를 고를 거라곤 예상을 못 했나보다. 낮은 품질의 그래픽 카드로 돌리는 게임처럼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변화했다.

“힘들죠. 아, 힘들어요. 요즘에 프로젝트 하나 들어간 거 있는데, 계속 위에서 쪼거든요. 정말로 현관문 나서자마자 바로 집에 가고 싶어져요.”

“아이고….”

“월요일은 특히나 힘들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월요일이 제일 힘들죠.”

“그런 이유 말구요.”

“그럼요?”

“원하 경기가 없잖아요.”

세상에.

“진짜 야구 좋아하시네요.”

“그럼요.”

흐뭇하게 웃는 민영 씨의 얼굴 한 구석은 조금 비어보였다.

“…가실까요?”

“네.”

오락실에 잠시 들러 총 싸움 게임을 하기도 하고.

작게 마련된 농구 골대 안으로 작게 설정된 농구공을 던져 넣기도 하고.

코인 노래방에 들어와서는 짧게 노래 두 곡 정도씩만 가볍게 뽑아내고.

인형뽑기 기계 앞에 잠시 멈칫해서 만 원을 투자해 조막만한 인형 하나를 뽑아내기도 하고.

일요일 밤 11시 40분.

직장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날까지 20분 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우리는 다시 차를 주차했던 곳에 도착했다.

시동을 켜고 네비를 톡톡 건드려 민영 씨의 집 앞 쪽까지의 길 안내를 부탁했다. 도착 예정 시간은 약 15분 정도.

아마 이리저리 나뒹구는 사람들 틈을 벗어날 시간까지 더하자면 20분 정도 걸리겠지.

“덕분에 저녁 잘 먹었어요.”

“네? 아, 네에….”

흘끔, 오른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는 척하며 민영 씨를 살폈다. 창 밖을 바라보다가 내 목소리에 움찔거리곤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엔 제가 살게요.”

“어…맛있는 거 사주셔야 돼요?”

“그럼요. 드시고 싶으신 거 생각해두세요.”

“한울 씨가 드시고 싶으신 거면 다 좋아요.”

“음….”

어려운 선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기시다니.

최근에 끝난 이야기의 주제가 음식인 탓에, 민영 씨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선 온갖가지의 음식 종류들이 쏟아져나왔다.

먹어 본 메뉴, 먹어보고 싶은 메뉴, 맛있다고 들어 본 메뉴.

“그럼 제가 언제 한 번 도시락을…아, 아니다. 아예 저희 집에 한 번 오세요.”

“오메…제가 감히 민영 씨 집을 가도 되는 건가요?”

“감히라뇨. 한울 씨라면….”

…나라면?

“아, 아니. 아니면 제가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그…한울 씨 집에 갈까요?”

“아.”

안 돼.

“아, 그…저기….”

“안 돼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저기, 시간이 좀 원하, 아니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 몰래 누구 숨겨 놓고 그랬어요?”

“그런 건 절대 아니구요! 설마요…설마 제가 어디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흐음….”

내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전방주시가 이어졌다. 옆을 보지 않아도 민영 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청소 빡시게 해야겠다.

“믿어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아이고야…….

“…언제가 괜찮으세요?”

오가던 말들이 잠시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 씨 쪽에서 클레임을 걸어왔다.

“네?”

“한울 씨 집 가는 거요.”

“아, 정말로 오시게요?”

“빈말인 줄 아셨어요? 흠, 좀 실망인데.”

“아뇨…그런 건 아니구요. 설마요. 그냥 청소 좀 빡시게 해놔야겠다 싶어서, 예…그래서 그러죠….”

“한울 씨 집 한 번 구경해보고 싶기는 해요.”

“딱히 볼 거 없어요. 그냥 남정네 혼자 사는 집이예요.”

“그냥 남정네가 아니죠!”

그냥이 아니라면 어떤 남정네일까.

“그야….”

문득 내가 기대하는 단어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조금만, 조금만 아껴두기로 했다.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짧으면 며칠 안쪽이 될 수도 있고, 길어봐야 올해 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사는 집인데요. 구경 같은 거 한 번 해보고 싶죠. 집에선 어떻게 지내는지, 집에선 어떻게 운동하는지. 집은 어떻게 꾸몄는지.”

잠시 후, 목적지가 있습니다.

거진 도착한 민영 씨의 집 앞. 아파트가 보일 무렵 민영 씨는 나를 연예인에 빗대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에 내가 미소를 지을 무렵은 자동차가 아파트 입구 살짝 옆 쪽에 멈추었을 때와 같았다.

민영 씨는 오른손을 차 문의 손잡이에 걸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아무런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울 씨.”

“네.”

“…….”

딸칵―

손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그대로 당겨진 손잡이 때문에 조수석의 문이 살짝 열려버렸다.

“우리…알게 된 지 얼마나 됐죠?”

“어…2년…정도 된 거 같네요.”

“꽤나 오래 됐네요.”

쿵-!

제 오른쪽에서 숭하게 들어오는 여름의 습기가 거슬렸는지 민영 씨가 문짝을 다시 닫았다.

거기서 생기는 짧은 공백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주제를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민영 씨.”

“네? 네.”

“민영 씨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

올라가있는 미간, 그 아래 조금 벌려진 입에선 무슨 말이 나오고 싶어했을까.

“사람이 눈치라는 게 있는데요. 이렇게까지 와서 모르면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거고.”

“…근데 왜….”

왜.

그 뒷말은 잘 모르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올 수 있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정확하게 고르기가 어렵다.

“그야….”

가장 확률이 높아보이는 것을 골라 뒤를 이었다.

“저도 민영 씨 좋아해요.”

“그…!”

전혀, 조금도 갑작스럽지 않을 고백이지만 민영 씨는 아주 격한 반응을 보였다. 흔들리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근데 무섭…다고 해야되나. 저 같은 게 민영 씨랑 만나도 되나 싶은 그런 게요.”

“왜 무서운데요?”

“민영 씨는…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흔히들 말하는 직업이나 집안도 좋고, 엄청 예쁜데다가 성격도 정말 좋고.”

“그치만 한울 씨도…!”

“아, 그렇다고 제가 못 났다는 소리는 아니예요. 저 자존감 낮은 사람 아니니까, 알아요. 저도 이제 나름 큰 돈 만지는 사람이고, 생긴 거야…못났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성격은….”

성격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근데 제가 얘기하려는 게, 사람이 잘났냐 못났냐, 그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예요.”

“그럼요?”

“저는요.”

후우…….

“민영 씨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재밌어요. 힘들었던 게, 민영 씨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풀려요. 아까 민영 씨가 얘기했잖아요. 행복하게.”

“행복하게….”

“네. 민영 씨랑 같이 있으면 행복해요. 그럼 민영 씨는요?”

“저는…!”

“단순히 저를 좋아한다, 아니다 이전의…아니면 이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랑 있으면 행복하세요?”

“…….”

한 번 아래로 떨어진 눈동자는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직관할 수 있는 건 쪼물딱거리는 여린 손가락 뿐이었다.

“…한울 씨.”

“네.”

어떤 답변이 나와도, 어떤 질문이 나와도. 어떤 말이 나와도 그러려니 하자.

“우리 정식으로 만났으면 해요.”

어렵게 다시 제 고도를 찾은 갈색빛 눈동자엔 짙은 색깔의 확신이 도색되어있었다.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기쁘게 웃으며, 무려 2년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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