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트레이닝, 어게인, 어게인
쪼물딱이 - 뭔데. 뭔데요.
월요일 점심. 밥 먹다가 뜬금없는 문자가 왔다.
- 뭐가요.
쪼물딱이 - 아니이!
쪼물딱이 - 한울 씨 여친 생김?
- ㅇㅇ
쪼물딱이 - 그때 그 분 맞죠?
- ㅇㅇ 그 분 맞음
쪼물딱이 - 와…대박
쪼물딱이 - ㅊㅊ
- 코치님 덕입니다
쪼물딱이 - 아아랑 치킨 콤보 기대하겠습니다
- 누구세요?
연락을 접고 내 프로필을 확인했다.
김한울♥김민영
+1♥
“…헤.”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민영 씨 - 식사는 하셨어요?
민영 씨 - [점심 사진]
민영 씨 - 오늘 점심이예요!
때마침 민영 씨에게서 연락.
나도 밥 먹고 있다, 대충 뭐 먹고 있다, 그렇게 답장을 하려고 했지만,
민영 씨 - [얼굴 옆에 손가락으로 V를 붙이고 찍은 셀카]
“…….”
파괴력이 강한 사진 한 장에 손이 굳어버렸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한 살 위의 연상인 거지. 이렇게나 귀여운데.
- 저도 밥 먹고 있어요. 민영 씨도 맛있게 드세요
민영 씨 - 네! 한울 씨두요!
민영 씨 - 이따 연락할게요!
민영 씨 - [토끼가 ‘이따봐!’ 패널을 흔드는 이모티콘]
흐뭇.
은서 씨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에게 관련된 연락을 받았다. 어무이랑 아부지를 필두로,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도.
특히나 민영 씨를 소개해주었던 대환이에겐 치킨 기프티콘 5개를 곧장 쏘아보냈지. 친구야, 사랑한다.
배 부르게 식사를 마친 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인터넷에 들어간 후 스포츠 탭을 터치.
8월이 슬슬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원하 챌린저스는 정규시즌 종료까지 정확하게 31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58승 1무 36패. 팀 승률 6할 1푼 7리로 리그 2위로 순항하고 있다. 3위 동성과 무려 네 게임이나 나고 있으니, 웬만하면 아래로 처질 걱정도 없고.
근데 문제는,
“하…1경기가 안 되네, 1경기가.”
위쪽 지방을 향하고 있었다.
1경기.
리그의 절대자, 상수 타이거즈가 도저히 제껴지지가 않는다. 가끔씩 공동 1위까지 따라는 가는데 거기서 제치질 못 한다.
3년 안에 우승하겠다. 정확하게는 3년 뒤에 우승하겠다. 공약을 걸었던 게 약 2년 전의 10월.
올해 아니고 내년 안에만 하면 되는데? 같은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할 수 있을 때 하면 좋잖아.
올해 1위 싸움을 하고 있다해도 내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이런저런 탭들을 확인하다가 리그 일정 카테고리로 넘어가서 원하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와…대진표 누가 짰냐.”
시즌 마지막의 2경기. 다른 팀도 아닌 상수와의 2연전이 예정되어있다. 이 흐름대로 간다면…….
“진짜 피터지겠네.”
정말로 누구 하나 피가 터질 두 경기가 되지 않을까.
핸드폰을 밥그릇 옆에 던져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팀의 리그 우승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 * *
밥 먹고 좀 고민을 해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었다.
정확하게는 시도해볼만한 것. 바로 트레이닝.
첫 번째 트레이닝에서 나는 체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고 두 번째 트레이닝에선 구위가 한 단계 올랐었다.
그리고…….
“한 번 더 해보자.”
나에게는 아직 한 번의 트레이닝 기회가 남아있다.
게임 속에서 ‘나’를 트레이닝한다 한들, 현실의 내게 또 퀘스트가 뜨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어서오시게, 트레이닝을 시작할 준비는 되었나?
두 번인가 만난 적이 있는 박사님과의 조우.
나라나라 머리머리.
게임 속의 ‘나’를 선택, 어떤 스탯을 올리고 싶냐는 질문에는 저번과 같이 구속을 찍었다.
김한울 선수를 트레이닝하시겠습니까?
“후우….”
체력을 트레이닝했을 땐 무작정 뛰어다녔고, 구위를 올렸을 땐 롱토스를 던졌었다.
그럼 구속 트레이닝은 과연 뭘 하게 될까.
구속과 관련된 거니까 웨이트를 하거나 실제로 투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긴장을 숨기지 않고 ‘예’를 클릭했다. 짧은 로딩 후, 마운드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는 캐릭터가 보였다.
“됐…!”
띠링―
- 축하합니다, 김한울 선수의 변화구들이 모두 +5 되었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머리 위로 노오옾게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털썩―
엉덩이와 부딪힌 의자에서 뭐 그런 소리가 났다.
탁!
허벅지 위로 떨어진 가여운 두 손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착!
얼굴 위에 찰싹 달라 붙은 두 손바닥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어헝…나도 150km 던지고 싶은데에….”
공허해진 마음이 바로 게임을 꺼버렸다. 그대로 마우스가 움직여 컴퓨터의 전원까지 꺼버렸다.
띠링-!
[투수는 변화구! 변화구는 실전!]
- 변화구들로만 1이닝 동안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0/3)
- 보상 – 변화구 + 5
“…….”
아, 제발.
* * *
휘이익-!!
파울 타구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파울 타구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휘이익-!!
가야 퍼펙터스의 홈구장에선 선수들이 경기 전 열심히 타격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필시 발생하는 파울 타구들.
안내 요원들이 저마다 호루라기를 하나씩 물고 있는 힘껏 불고 있었다.
“벌써부터 집이 그리운데.”
“미친놈인가.”
지옥의 원정 시리즈가 시작됐다.
우선 대구에서 가야와 3연전, 부산으로 내려가 KP와 3연전. 그 다음 주는 광주에서 한성과 3연전을 치른 뒤 서울 올라오기 전 대전에서 성운과 또 3연전.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으로 만날 성운을 제외한 세 팀 모두 밑바닥에서 노는 팀들이라는 점.
여기서 꿀 제대로 빨아먹고, 1위 좀 제껴보자.
선수들은 저마다 주말 시리즈가 끝나면 서울로 올라갈지, 아니면 그냥 부산에서 바로 광주로 넘어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난 딱히 서울 쪽에 일은 없었기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긴 하지만…가능하다면 가고 싶다.
- 안 돼요!
- [토끼가 단호하게 양팔로 X자를 그리는 이모티콘]
오늘로써 사귀게 된 지 딱 이틀째. 벌써부터 너무 보고 싶다.
- 한울 씨 컨디션 생각해야죠!
-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잖아요…….
- [토끼가 ‘화이팅’ 패널을 들고 흔드는 이모티콘]
하지만 입구컷을 당해버렸다. 다른 일이 있다면 모를까, 본인을 만나는 게 유일한 목적이라면 오지 말란다.
- 저도 보고 싶어요…….
- [토끼가 울상을 짓는 이모티콘]
고작 본인을 만나기 위해 그 긴 이동 시간에 투자하지 말고, 컨디션 조절에 투자하라고 했다.
단호하게 안 되는 건 안 된다 선을 긋는 모습에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의 짧은 이별은 민영 씨도 나도 이미 각오를 했던 바.
올해로 야구 인생 끝낼 것도 아니기에 조금씩 생활방식을 맞춰가는 것을 연습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
- [카메라 쪽으로 V자를 들이대며 찍은 셀카]
- 힘내요!
- [토끼가 ‘화이팅’ 패널을 들고 흔드는 이모티콘]
“…….”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
“으흐.”
“뭔데, 변태 같이 웃어.”
“형이 형 예비형수 생각하면 나오는 웃음이라고 생각해.”
“아, 인정.”
결혼까지 약 3개월 반이 남은 예비신랑은 지금의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결혼은 생각하고 있고?”
남자.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은 참 많지만, 그 중 생각나는 것들을 먼저 나열해보자면 이런 게 있겠지.
모르는 여자가 짓는 웃음 한 번에 3대손까지 생각해버리는 존재.
“그럼. 아들 하나에 딸 하나 낳고, 손자까지 벌써 생각해뒀지.”
그래, 나도 남자다.
“저기, 형.”
“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제발 날, 그렇게 안쓰럽게 쳐다보지 말아줄래.”
“노력은 해볼게.”
“…고마워.”
너무하네.
“형은 결혼 준비 잘 되고?”
“잘 되지. 식장이랑 뭐 다른 거 다 괜찮게 진행 중이고.”
“와….”
“왜.”
“뭔가 믿겨지지가 않아서.”
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함께 프로라는 자리를 목적으로 두었던 한 살 터울 형제가 벌써 결혼을 논할 나이가 되다니.
결혼.
어떤 의미로 보면 진짜 어른과 나이만 어른인 사람을 가장 쉬이 가를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그러게. 우리 언제 이렇게 늙었다냐….”
“그러니까. 내가 벌써 서른 하나다, 형. 우리 진짜, 많이 늙어버렸어.”
뒤질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이 얘기 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침 옆을 지나가시던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돈은? 얼마나 들디?”
“글쎄…딱히 계산은 안 해 봤는데. 그냥 적당히 들었지.”
“돈도 많아.”
“올해 끝나고 FA인데. 적당히 쳐주겠지.”
“아….”
FA.
원하 챌린저스는 재작년 나를 4년 50억에 잡았고, 작년엔 성현이는 4년 95억에 잡았다. 2년 연속으로 큰 지출.
그리고 올해, 규진이형과 명진이의 FA가 예정되어있으며 내년이 끝나면…….
“있잖아, 형. 우리 이 멤버들로 언제까지 야구할 수 있을까.”
“…….”
주전 멤버들의 평균 연령이 제일 낮은 팀의 또 다른 맹점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시기가 다가 온 것이다.
“누군가는 떠나겠지.”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고.”
“갈 거야?”
“나라고 가고 싶겠냐.”
“나 버리고 갈 거야?”
“…….”
“진짜? 진짜 나 버리고 갈 거야?”
“아, 분리수거하고 싶게 만드네.”
큭큭큭, 두 사람은 그렇게 담소를 나누었다.
“FA고 나발이고. 우승은 해야지, 형.”
“해야지.”
“우승 하려면 이겨야 되고.”
“이겨야지.”
결연하게 규진이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선발투수는 천천히, 워밍업 첫 단계인 런닝을 시작했다.
* * *
두 번째 트레이닝으로 구위를 올렸지만 며칠 뒤의 시합에서야 써먹을 수 있었다.
그 외 특성들도, 바로 써먹어보지는 못 하고 몇 경기가 지나서 나서야 확인이 가능했다.
“한울이, 8회 올라간다.”
“네!”
이번 세 번째 트레이닝의 경우는 곧장 시합에 투입이 되지만, 프로세스 자체는 이전과 같았다.
퀘스트.
변화구로만 세 개의 삼진을 잡으라는 미션을 성공해야만 보상을 얻게 된다는 것.
달라진 변화구들의 모습은 결국 빨라야 바로 다음 경기가 되어서야 확인이 가능할 예정이다.
작년의 성현이처럼, FA로이드를 거하게 빨아제낀 규진이형의 올해 성적은 참 무시무시했다.
12승에 평균자책점은 2.31. 말이 2선발이지, 세부적인 면까지 헤집고 들어가면 1선발 혁준이보다 좋은 모습.
오늘 경기에서도 FA로이드의 약빨이 몸 속에 남아있음을 증명해냈다. 7이닝 1실점, 삼진은 9개.
타선에서도 부지런이 뽑을 점수들을 뽑아내며 현재 두 점을 앞서고 있다.
아따, 원하 일 잘하네.
“건영아!”
“예에에에!”
불펜의 문을 열며 캐치볼 상대를 불렀다. 전달을 받았는지 모든 준비를 끝낸 뒤 홈플레이트 뒤에 서있었다.
“…퀘스트.”
띠링-!!
[투수는 변화구! 변화구는 실전!]
- 변화구들로만 1이닝 동안 탈삼진 3개를 기록하며 무실점하세요 (0/3)
- 보상 – 변화구 + 5
결국 오늘 피칭의 컨셉은 변화구가 될 것이기에, 불펜에서 내가 건영이에게 보내는 사인의 모두가 변화구들이었다.
커브의 궤도가 크기만 한 건 아닌지.
슬라이더가 밋밋하진 않는지.
스플리터가 제대로 손에서 빠지는지.
체인지업이 너무 빠르지는 않는지.
싱커의 회전의 풀리지는 않는지.
“형, 직구는요?”
“됐…어, 직구.”
“아이, 직구!”
안 던지려고 했지만,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투수코치님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직구도 몇 개 던져야만 했다.
뻥!
직구 없이 어떻게 던지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직구를 던지고 나니 아쉬움이 좀 들긴 한다. 이 난관을 어찌 해쳐나가야 하나…….
이전의 트레이닝의 경우는 실패할 수가 없는 퀘스트들이었다. 뛰라면 뛰고, 멀리 던지라면 멀리 던지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번 퀘스트는 아예 다르다. 오히려 실패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
삼진.
아무리 투수가 삼진 잡기 쉬운 세상이라고 해도, 꽁으로 삼진 헌납해 줄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울이, 올라가자.”
“네.”
그래도 그나마, 가야의 8회말 공격은,
3번타자, 최!! 재!! 워언!!
3번타자니까. 생각보다 해볼만 할지도 모른다.